『파우스트』, 이번엔 전영애 역으로 읽었다. 민음사도 함께 병행했다. 몇 년 전에는 열린책들로 읽었었다. 이 책(『파우스트』 전영애 역, 길)은 마주보는 페이지에 독어 원문과 한글 번역이 나란히 있어서 비교하며 볼 수 있다. 아쉽게도 나는 독일어를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 발음규칙은 알고 있고, 눈으로 각운과 리듬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독어를 알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공부해 볼까?”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신곡』 읽을 때는 이탈리아어, 호메로스 읽을 때는 그리스어, 그리고 라틴어, 불어, 일본어……. 이런 식으로 마음속에서는 10개는 족히 되는 언어를 익혔다.^^
이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317행, 전영애 번역, 길)”는 민음사나 문학동네, 열린책들에서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잘못을 범하니까)”로 번역되었었다. 아마도 이 구절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328~329행)”과 함께 파우스트의 욕망, 방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세계를 그 가장 깊은 내면에서 지탱하고 있는지, 모든 작용하는 힘과 그 맹아를 보려는(382~385행)”욕망, 그 비밀을 알려는 노력은 실패할 것임을 예언하는 듯하다.
평생을 실험실에서 연구를 했으나 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파우스트는 좌절감에 휩싸여 있다. 그를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오고, 계약을 맺는다. 메피스토가 상징하는 의미는 여러가지 전통적인 의미로 악마, 혹은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 등, 그에 따라 해석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 지식은 절대적 힘과 관련있음을 암시한다. 메피스토가 그의 영혼을 데려갈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할 순간이 언제가 될까? 1부 그레트헨과의 사랑의 순간도, 2부 헬레나와의 사랑이나 아르카디아 건설의 순간도 아니다.
파우스트가 헬레나를 만나는 장면에서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극치의 순간이 도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숨을 잘 못 쉬겠어요, 떨려요, 말이 막혀요, 이건 꿈입니다. 날과 장소가 사라졌어요.(9413-9414행)”라고 말한다. 아르카디아에서 헬레네와 함께 하는 파우스트는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부르는 목가에서 그의 행복은 아직 미래 시제로 투사된다.
“우리의 행복, 아르카디아답게 자유롭기를!(9573행)”
인간은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 행복이 완전함을 확신하지 못한다. 극치의 행복은 오히려 불안감을 준다. 언제고 이 행복은 사라질 것이라는 예감을 갖고 있기에, 극치는 완전한 행복이 아니다.
에우포리온의 죽음은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에우포리온은 그리스 해방전쟁을 도우러 갔다가 요절한 시인 바이런이 어려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이 막에서 파우스트의 애도시(哀悼詩)는 바이런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의 가장 이상적인 결론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 사회적 제도로 이야기 한다면, 결혼과 자녀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얼마나 불안하고 변하기 쉬운지!
『파우스트 2부』 3막에 해당되는, 괴테 자신이 ‘고전적 낭만적 환영극’이라 했던, ‘헬레나 비극’은 당시 독일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품었던 동경과 그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보여 준다. 괴테의 역사적 통찰이라 함은 “파우스트가 신적 존재 헬레나와 함께 형성한 이상적인 아르카디아는 역사 밖의 공간으로, 헬레나를 통해 구현되는 고대 세계 역시 근대의 역사적 시점에서 다시 재현할 수 없는 허상(『독일문학사』 최민숙 외, 215-238p)”이라는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그가 바이마르 궁에 있으면서 보고 겪었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땅속에 있는 보물(금)을 근거로 지폐를 발행해서 국가의 재정위기를 타결하는 왕과 재상들의 모습과 그들을 기만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논리는 오늘날 금융경제-숫자로만 확인되는 화폐에 대한 맹신으로 돌아가는-를 보여준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하는 것 또한 고금에 통하는 불의다.
플라스크 안에서 만들어진 인간정신으로만 존재하는 호문쿨루스는 육체를 욕망하고, 그리스 세계를 향하고 생명을 시원과 탄생에 대한 신적권위에 도전한다. 비너스의 탄생, 갈라테아의 승리 등을 연상케하는 신화들과 생명의 근원을 연구했던 고대 철학자들이 뒤섞여 등장한다. 그들이 외치는 만세(Heil)는 여전히 침범당하지 않은 생명의 근원을 찬양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의 모두에게 지극한 경하를, 원소들, 너희 사대원소 모두에게!(8486-8487)”
헬레나가 사라지고 슬퍼하던 파우스트는 산위로 이동해가고, 자연을 내려다보며 메피스토펠레스와 논쟁을 벌인다. 그는 자연이 질서 정연하고 완벽하다고 주장하지만, 갑자기 메피스토의 주장대로 자연이 거칠고 혼란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항하여 싸우고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다. 갑자기 찾아온 욕망일까? 곧 땅을 차지하고 국가를 건설하려는 욕망으로 향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 황제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고, 마(魔)적인 세력의 도움으로 승리한다. 그 공으로 아직은 바다인 미래의 간척지를 받는다.
파우스트는 이 해안지대를 간척하여 새로운 미래 국가를 세울 꿈을 꾼다.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오두막과 신전을 불태운다. 끝없는 욕망의 추동과 무리한 개발이 가져오는 근대의 문제를 시사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바다가 메꿔진 후, ‘한밤중’ 그의 저택 앞으로 의인화된 결핍·빚·근심·궁핍이 다가오고, 그들 중 근심만 열쇠구멍으로 숨어 들어간다. ‘한밤중’과 의인화된 ‘근심’의 알레고리는 넘어지는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에 관한 진리를 전해준다. 이것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근심은 말한다.
“내가 한번 내 것으로 소유한 사람
그에겐 온 세상을 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영원한 침울이 내려앉아
태양이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고
바깥으로는 모든 감각이 완전해도
안에는 암흑이 깃들어 있어.
온갖 보물이 있어도
제 것으로 만들 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이 망상이 되고,
넘침 가운데서도 굶주린다.
희열이든, 괴로움이든
그걸 다른 날로 밀쳐두고,
오직 미래만 기대하며
그래서 결코 완수하지 못한다.(11453-11466행)”
근심이 내쉰 숨으로 파우스트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실제로 실명한 것이지만, 상징적 의미가 강하게 다가온다. 근심으로 눈이 멀다! 반면, 육체의 실명 후 마음에 빛이 비춰졌다는 파우스트의 고백은 결론을 달리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그는 삽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건설할 미래 세계를 꿈꾼다. 낙원 같은 땅 자유로운 터에 자유로운 백성을 꿈꾸며 드디어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 일반적으로, 파우스트의 마지막 욕망이 모두의 낙원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구원받았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메피스토는 그를 차지하지 못했다.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는 5막 역시 이런 해석을 내리게 한다. 하지만, 그의 낙원 건설의 꿈이 모두의 것이 아닌, 즉 그 시혜를 받는 자들의 꿈이 아닌, 파우스트 개인의 것이고, 이를 위해 집이 불태워지고 죽임을 당한 개인(필레몬과 바우키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과연 그것이 구원받을 이상이었는가에 의문을 갖게 한다. 근대 국가주의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다. 이 이상국가의 꿈이 한 인간에게 악용된 역사를 보면 부정적인 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괴테와 니체 바그너의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같은 그림자를 찾는 이유일 듯하다.
인간의 욕망은 돈 섹스, 명예 세 가지로 귀결된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 보이는 2부의 5막들에 그려진 파우스트의 욕망이다. “나는 다만 이 세상을 달려왔다(11433행).”라고 고백하는 파우스트의 길은 인간 모두가 방황하는 길이다. 누가 이 방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그 방황에서 때로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의식”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욕망으로 인해 멸망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괴테의 초기 문학 사조는 ‘Sturm und Drang’이다. 질풍노도(疾風怒濤)라는 말은 일본인들의 번역이다. 독어의 원래 의미는 ‘폭풍우와 돌진’이다. 그것도 ‘폭풍우 속으로 돌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스스로 폭풍우가 되어 마구 내닫는다’는 의미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씀으로 이 사조의 대표작가가 된다. 그리고 그는 낭만주의 작품을 쓸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으나 그는 고전주의를 이끌었다.
“독일문학사에서 ‘고전주의’(古典主義, Klassik)라 함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1786~88)이 시작되는 1786년부터, 쉴러가 사망하는 1805년까지의 약 20년간을 지칭한다. 이때가 독일문학의 최전성기로 ‘전성기 고전주의’(Hochklassik)라 부르기도 하며, 주로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학운동이기 때문에 ‘바이마르 고전주의’(Weimarer Klassik)라 부르기도 한다.”(『새 독일문학사』 안삼환 218p)
이성을 중요시하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감정위주의 ‘Sturm und Drang’이 다시 이성 위주의 고전주의로 옮겨간다. ‘바이마르 고전주의’는 1775년 괴테가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을 받아 바이마르로 가는 데에서 그 기틀이 세워졌다. 명징성, 고대문화 숭배, 문학을 통한 국민 교육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에 대한 반작용과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시작되었다.꿈·동경·마적(魔的)인 것, 무한성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독일 이상주의’(deutscher Idealismus) 문학운동의 마지막 단계이다.
괴테의 『파우스트』의 사조는 분류하자면 '바이마르 고전주의'이다. 하지만 파우스트 1부와 2부 사이에 60년이란 세월이 존재하고, 작품 안에는 ‘Sturm und Drang’, 자연주의, 낭만주의가 분위기도 보게 된다. 그의 작품을 어느 한 사조로 묶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나폴레옹이 예나Jena와 바이마르 시를 통과했던 1806년 바로 그 해에 헤겔은 『정신현상론』을, 괴테는 『파우스트』 제 1부를 완성시켰다.…… 쉴러는 칸트를 통해, 낭만주의자Romantiker들은 피히테와 셸링을 통해 각인되어진 반면, 괴테의 자연관, 인생관은 고전철학자의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그의 창작활동은 어떠한 철학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자체 안에서 풍부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자연과학의 연구는 그의 창작과 동일한 상상력에 의해 인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헤겔에서 니체에로』 카를 뢰비트 21p)”
10월의 마지막날 여주 전영애 교수의 ‘여백서원’과 ‘괴테마을’에 다녀왔다. 전시물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교수님의 영상과 주제별 책 선정에 담은 정성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한때는 미술가를 꿈꿨던 괴테의 회화작품들과 멋진 필체의 영인본, 고서적들…… 다시 한번 독일어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과 여행도 꿈꿔본다. 그곳에서 방황해볼테다.^^
기념으로 『서동시집』을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