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이다."
- P43

문이 열리면서 기다랗고 썰렁하고 음침한 교실이 나타나는데 허술한 의자랑 책상이 줄줄이 늘어서서 분위기를 훨씬 황량하게 만들었어. 바로 그런책상에서, 미지근한 난롯불 옆에서, 외톨박이 아이가 책을 읽는 거야.
스크루지는 의자에 앉았어.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낸 자신의 불쌍한 어린 시절을 바라보며 구슬피 울었어.
- P47

"그런 게 아니오 유령님. 그런 게 아니오 영감님한텐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힘도 있고 불행하게 만들 힘도 있소 우리가 하는 일을 편하거나힘들게 즐겁거나 고통스럽게 만들 힘 말이오 입에서 나오는 말과 표정하나하나에서 너무 사소하고 하찮아서 덧붙일 수도 없고 셀 수도 없는행위 하나하나에서 그런 힘이 솟구쳐 나온다면 유령님은 뭐라고 하시겠소? 영감님이 베푸는 행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진 것이오"
- P57

질병과 슬픔도 전염이 잘 되지만 재미있는 말과 웃음처럼 전염이잘 되는 것 역시 없다는 사실을 보면 세상 이치가 정말 공평하고 숭고하고 정의롭다는 생각이 들어.
- P88

그런데 자신이 늘 머물던 모서리에 낯선 사람이 있는거야. 게다가 시계는 자신이 평소에 거래소를 찾던 시각을 가리키는데 출입구로 밀려드는 군중 가운데에는 자신을 닮은 사람이 하나도 안보였어. 그렇다고 해서 많이 놀란 건 아니야. 다르게 살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터라, 그런 결심을 행동에 옮겼다는 생각도 들고 정말 그러면 좋겠다는 희망도 떠올랐거든.
- P105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없는데 스크루지는 침대를 바라보다가 이런 소리를 들었어. 그러자 이런 생각이 절로 드는 거야. 이사람이 다시 일어난다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까? 탐욕, 경쟁,집착? 그러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은 거잖아!
- P112

맞아. 아무리 감추려 해도 마음이 가벼워 아이들도 옹기종기 모여서 뭔지 모를 말을 숨죽여 듣다가 표정이 밝게 변했어. 노인네가 죽어서온 집안이 행복하다니! 노인네가 죽었는데 유령이 보여줄 수 있는 감정이라곤 기쁨밖에 없다니! 그래서 스크루지가 사정했어.
"노인이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을 보여주세요 안그러면 방금 나온컴컴한 방이 계속 생각날 거예요, 유령님."
- P115

그래! 침대 기둥이 자기 것이야. 침대도 자기 것, 침실도 자기 것.
무엇보다 즐겁고 행복한 건 자신한테 시간이 있다는, 그래서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이야. 그래서 스크루지는 침대에서 기어 나오며 유령한테 한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어.
- P123

세상 사람 일부는 스크루지가 변한 모습을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본인은 남이 비웃건 말건 개의치 않았어. 앞에 나선 사람이 처음에 조롱하는 분위기를 못 견디면 세상에 좋은 일은 영원히 안 일어난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런 비웃음을 못본 척하면 그만이지만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차라리 비웃기라도 해서 눈가에 주름을 잡으면 훨씬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거든. 그래서 마음이 편해. 스크루지는 그걸로 충분했지.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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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는 죽었다는 말부터 시작해야겠어.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사실이야.
- P9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영적으로 넓고 깊게 교류해야 하네. 살아생전에 못 그런 영혼은 죽은 다음에 이러는벌을 받아. 아, 비통하고도 비통하구나! 살아생전이라면 서로 많은 걸나누면서 행복을 누릴 터인데 지금은 아무것도 나눌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보면서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구나!"
- P31

"그런데 자네가 몸에 걸친 사슬은 얼마나 무겁고 기다랗고 억센지 아는가? 칠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만 해도 자네 사슬은 무게랑 길이가 나와 비슷했어. 그런데 이후에도 자네는 정말 열심히 사슬을 만들더군. 그래서 지금은 정말 대단해보여!"
스크루지는 백 미터쯤 되는 쇠사슬이 자신을 휘감았을 거로 생각하며 바닥을 이리저리 훑어보았어.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 
- P32

"죽은 게 칠 년인데, 내내 떠돌다니!"
"멈춘 적이 없어. 휴식도 없고 평안도 없어. 후회는 끊임없이 달려들며 괴롭히고 "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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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베는 코웃음을 친다. 사람은 이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하고 우사는 떨면서 생각했다. 부서진 얼굴을 이어붙인 틈새가 다 보이는데도 억지로 짓는 웃음.
- P282

우사에 대한 비아냥과 자신에 대한 자조로 와타베의 목소리는이중삼중 불쾌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것이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애처롭다.
- P283

우사는 와타베의 눈에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었다. 섣불리 피하려고 하다간 오히려 삼켜지고 만다. 맞서야 한다. 와타베 님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 P285

그러던 중 가가 님이 말씀하셨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할 때 당장 익힐 수 없는 것을 일일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 이제 막 시작했을 때는 누구나 아무것도 모르는법이야. 머리를 숙이지 말고 머리를 쓰도록 해라."
- P300

다시 달려가기 전에 잠시 숨을 멈추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고, 건드리자마자 무너져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것 같을 정도로 별이 가득하다. 이미 여름 하늘이 아니다.
뱃사람들은 별을 올려다보고 진로를 정한다. 신관은 별을 읽어 길흉을 점친다. 여자와 아이들은 별에 소원을 빈다. 지상에서 깨끗하게 죽은 사람은 하늘 위로 올라가 별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무수하게 넘쳐난다 해도 별로 하늘을 메울 수 없다. 별과 별 사이에는 어떤 빛도 비치지 않는 어둠이 있다.
- P312

마음이 이렇게 멈추는 것이라면 왜 그날 밤에 나는 와타베 님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왜 와타베 님의 마음을 멈추고 생각을 바꾸게 하지 못했을까.
- P323

 우사는 새삼 분함과 슬픔을 곱씹어야만 했다.
- P369

아직도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우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것을, 눈을 부릅뜨고 참으면서.
- P371

옥지기는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고 나서 맥 빠진 듯 감탄의 목소리를 냈다.
"너는 참으로."
이시노도 놀라고 있을 테지, 하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 P378

알고 있다. 호는 가가 님을 지킬 수 없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않은 채 헤어지기가 싫은 것이다.
호는 마음을 더듬다가 말을 찾아냈다.
쓸쓸한 것이다. 이대로 가가 님과 헤어지기는 괴롭다. 도망쳐 버리면 두 번 다시 뵐 수 없게 된다.
- P379

일꾼의 낮은 목소리에는 동정인지 경멸인지 모를 감정이 섞여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지요….……."
- P401

이 사람들을 맞이하자 우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키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은 나중이다.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
마지막까지 지기 싫어하고, 착각을 잘하긴 했어도 히키테의 오기를 가슴에 품고 있던 하나키치도, 그것이라면 허락해 줄 것이다.
나 같은 건 상관하지 마. 너도 한때 히키테의 붉은 한텐을 입었던 여자라면 해야 할 일을 해 봐. 우사는 뺨을 호되게 얻어맞은 것처럼 단숨에 기운을 차렸다.
- P405

그들은 떨면서 서로 수군거린다. 신수와 악귀가서로 싸우는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하고 불길하고, 그러나- 아름다웠다고도.
누가 꾸미고, 누가 말을 꺼내고, 누가 퍼뜨리고, 누가 뒷받침을 하는지도 모른 채, 파문처럼 퍼져 가는 소문.
- P419

끝까지 올라가자 하늘을 밀어올리고 갑자기 바다가 가득 펼쳐진다.
성님의 바다다.
- P431

행복하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좀 난해할 수도 있고 가슴 아플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독자 여러분께 행복한 독서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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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 글 복붙😊


📚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민음사 2001-11-10, 242쪽, 일본소설

10/26 수상한 책방 한스 @hans_books , 목요 독서모임


🫢 책방에서 열린 격주 목요 독서모임에 참여하며 읽게 된 책이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책은 제목이 문제였다. 절대 나로서는 손에 잡을 제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천자의 안목을 믿었고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제목 제외하고 다 좋았다. 그런데 읽고나면 제목도 수긍이 간다.

마을 사람들에 대해선 모임분들의 평가가 엇갈렸으나, 나는 그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란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필사했던 강지혜 시인의 ‘초식동물‘이나, 채사장의 지대넓얕 제로에서 나온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파잔‘이 연상된 까닭이었다.

마지막 준페이의 결정 역시 엇갈린 평가가 나왔다. 나로서는 이해되면서도 수긍이 될 수 없었다. 나라면... 나왔을거다. 하긴 나라면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지도 않았겠지만. 일상과 일탈에 대해도 생각해본다. 일탈이 된 곤충채집은 모래 속 일상이 된다. 준페이는 식수 만드는 걸 발견하지 않았어도 남아 있었을까?

여자에 대해서는... 뭔가 할 말이 많아지다가도 막상 할 말이 없다. 다만 나를 포함해 현대인들은 여자의 모습을 많이 닮지 않았나 싶다.

모임 분위기는 너무 좋았으나.. 병원가는 날과 일정이 계속 겹쳐 올 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년에 일정 조정이 된다면 다시 도전해보기로 ㅠㅠ 11월에 일정이 변경되어 가능할수도..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9

🍂
도망이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임을 알리는 성명서를 일부러 남거두고 온 것이나 다름없다. 현장에 있는 것을 이미 목격당했으면서도 꼼꼼하게 지문을 지워 오히려 범죄의 증거를남기는 어리석은 범인의 수법과 똑같지 않은가.
99

🍂
탈출구라고 생각하고 몸을 던진 철책의 틈새가 실은 우리의 입구였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은 짐승……. 몇 번이나 콧잔등을 부딪히면서야 비로소 어항의 유리가 통과할 수 없는 벽이라는 것을 안 금붕어………. 다시금, 알몸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지금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은 그들이다.
120

🍂
가령 의무란것이 인간의 여권이라 해도, 어째서 그런 놈들에게까지 비자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인생이란 그런 종잇조각이 아니지 않은가…... 반듯하게 덮인 한 권의 일기장이다...... 첫 페이지는 한 권에 한 페이지면 족하다. 앞 페이지에 이어지지 않는 페이지에까지 일일이 의리를 지킬 필요 따위 없다......설사 상대방이 굶어 죽어간다 해도, 일일이 상대하고 있을 여유는 없는 것이다…... 제길! 물! ……그러나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죽은 사람 모두의 장례식에 돌아다녀야 한다면, 몸이 열이라도 남아나지 않는다!
124

🍂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153

🍂
눈여겨봐 두었던 낡은 가위를 손보자, 거의 예정한 시각이 되었다. 집을 나서며 힐끗 뒤돌아볼 때는 어쩐 일인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161

🍂
 그녀가 숙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매춘부도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확실하게 보장한다. 만약 보증서가 필요하다면 도장이야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언제든 찍어줄 수있다. 그저 그녀는 나와 마찬가지로 왕복표에 매달리는 것 외에는 달리 재주가 없는 어리석은 여자였을 뿐이다. 
165

🍂
바다 쪽에 접해 있는 집들이 가림막 구실을 하는 덕분에 벼랑은 한결 낮고 사방용 섶나무 울타리가 그곳에서는 큰 도움이 되는모양이다. 바깥쪽 벼랑을 통하면 아마 마음대로 출입도 할수 있을 것이다. 자세를 약간 높이자 방안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부채꼴로 넓게 벌어져 있는 모래의 사면에 기와 지붕과 양철 지붕, 판자 지붕이 검게 모여 있고………… 빈약하나마 소나무 숲도 있고, 연못 같은 것도 보였다. 이까짓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 바다에 접해 있는 열 몇 채의 집이 노예의 생활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168

🍂
노예들의 구멍은 지금 길 오른쪽에 줄지어있다.……. 군데군데 삼태기를 끌고 가는 고랑의 곁가지가 있고, 그 끝에 묻혀 있는 닳아빠진 가마니가 구멍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가마니에는 새끼줄 사다리가 걸려 있지 않은 곳도 있지만, 걸려 있는 가마니가 더 많은 듯했다. 이미 탈출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뜻일까?
168

🍂
<라디오와 거울…… 라디오와 거울......>
마치 인간의 생활이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성립될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집념이다. 과연 라디오도 거울도, 타인과의 관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의 근원에 관계되는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178

🍂
그제야 등뒤가 웅성거린다. 부삽이 도착한 모양이다. 신발 밑에 판자를 댄 남자 셋이, 엉거주춤 다가와 멀찍이서 그의 주변을 파기 시작했다. 모래가 푹푹 층을 이루며 퍼올려졌다. 꿈도 절망도 수치도 소문도, 그 모래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남자들의 손이 어깨를 잡았을 때도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면, 바지를 내리고 보는 앞에서 똥이라도 싸질렀을 것이다. 하늘이 밝아졌다.
머지않아 달이 뜰 모양이다. 여자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이할까? ····……어떤 표정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얻어맞아도 괜찮을 것같다.
194

🍂
「하지만, 순조롭게 성공한 사람, 없어요……지금까지단 한 명도……」여자는 눈물 어린, 그러나 마치 남자의 실패를 변호하듯 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 얼마나 비참한 친절함인가. 이 친절함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다니, 너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198

🍂
불현듯, 새벽빛 슬픔이 북받친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198

🍂
그 바늘의 춤에는 지구의 중심을 느끼게 할 만큼 무게가있었다. 반복은 현재를 채색하고, 그 감촉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202

🍂
정말 생각해 보니, 언제 어떤 식으로 탈출의 기회가 찾아올지 전혀 앞을 내다볼 수가 없었다. 아무런 기약 없이 그저 기다림에 길들어, 드디어 겨울잠의 계절이 끝났는데도 눈이 부셔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구걸도 사흘을 계속하면 그만두기 어렵다고 한다…...
204

🍂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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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가 님의 표정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은 무표정한 것이 아니다. 멈추어 있는 것도 아니다. 호는 열심히 가가 남을 바라보며 ‘잔잔하다‘라는 말에 생각이 미쳤다. 파도도 없고 물결도 조용하고 온통 파랗게 펼쳐져 있는 조용한 아침 바다를 가리키며 언젠가 성님이 하던 말이다.
- P177

그러나 지금 이 몸을 둘러싸고 있는 마루미의 꼴은 어떠한가. 지식도 이치도, 의원의 신념도 확신도, 찢어진 그물처럼 영락했다.
게다가 그것은 다름 아닌 게이치로 자신의 손으로 부른 결과다.
가가 님을 맡기로 결정되었을 때부터 게이치로-사지 가를 포함한 마루미의 위정자들은 성 아래 사는 사람들이 지금의 이 한심한 꼴처럼 가가 님을 두려워하고 꺼리기를 바랐다.
- P187

교묘한 선동이다.
그것밖에 길이 없었다는 변명이 얼마나 허무하게 울리는지.
나무상자를 열고 대망의 책을 훑어볼 만한 기력이 솟아나지 않는 것은 피로 탓이 아니다. 나는 부끄러운 것이다. 게이치로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게는 이제 이 청신한 의학 지식을 접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자격이 없다.
- P188

모든 이치를 잊고 모든 것을 삼켜 달라고 한번 떴던 눈을 감아달라고,
그러지 않으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간 고토에의 죽음을 덮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토에가 죽기 전의 게이치로는 자주 우사에게 말하곤 했다. 하타케야마 공이든 누구든, 그렇지, 쇼군이라 해도 사물의 이치를 바꿀 수는 없다고. 진리는 하나다. 우사, 알겠느냐. 이제 모든 민초들도 그것을 알게 될 시대가올 것이다. 그때 틀림없이 세상은 변할 것이다, 하고.
그 말을 한 혀로,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나는 우사에게 부탁했던가.
- P189

"화가 난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화가 났어.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이냐? 너 자신이냐?"
- P194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관련되는 눈과 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더욱더 비밀은 새어나가기 쉬워진다.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없어도 비밀이 생겨나는 자리에 우연히 있게 되는 사람도 있다.
스님처럼, 우사처럼,
그렇게 새어나간 비밀의 대부분은, 이번에는 알고도 모른 척하는 사람들 속에서 감추어져 간다.
- P239

이자키는 다른 무언가, 더 중요한 무언가를 안고 있다. 그것을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고, 아니,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 망설이고 있다. 그런 분위기이다.
- P242

"이자키 씨, 혹시 생각나신 겁니까?"
필요할 때는 돌아오지 않고 잊었을 때쯤 찾아오는 귀찮은 기억.
- P243

와타베의 몸에 체념이 배어들었다. 기왕 독을 마시려면 접시까지 핥아라. 이 얼마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속담이란 말인가.
- P246

작은 번의 복잡한 가계와 혈통. 복잡하게 서로 얽혀 있는 생각과 이해.
- P249

"고데라 님도 이시노와 똑같이 강제 할복을 하게 되는 걸까?"
- P255

"가가 님, 저는 제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안다."
단호하고 엄격한 목소리다.
"너는 매일 열심히 일하고, 습자를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 가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서냐? 그것은 아니다. 너는 너를 위해 그리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제 어디로 가게 됩니까? 어디에 이르게 될까요?"
" ‘사람‘이 있어야 하는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수수께끼 같다. 사람? 제대로 된 어른을 말하는 것일까.
"고토에 님이나, 성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글자를 잘 익히도록 해라."
- P258

나중에 생각해 보면 반쯤은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때문에 소식을 들었을 때 와타베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고, 피의 흐름도 멈추었다.
마른 폭포 저택에서 항구로 통하는 수로에 떠 있는 이자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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