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보는 바보』를 아이들과 함께 읽었다. 정조 시대와 북학파, 조선의 외교관계, 정조의 정책 등 설명할 내용이 너무 많았다. 이덕무, 홍대용, 유득공, 박지원, 박제가, 이서구, 백동수, 나이와 신분과 성품과 빈부가 다름에도 함께 어울려 꽃을 피우는 지식인들의 향연! 감동을 공유하기에는 아이들과 나의 격차가 컸다. 애초에 같은 감동 포인트를 찾는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공감하는 지점이 다를 텐데 말이다.
아이들의 감상문에는 주로 그들의 신분 때문에 생긴 불공평함에 대한 생각이 담겼다. 사실 나는 그들이 차례로 북경에 다녀오면서 문물을 접하고 외국의 문인들과 교류하고 돌아와 책을 쓰게 된 지점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다. 그들은 그 여행을 하고 돌아와 각자의 연행록과 <열하일기>, <북학의>, <발해고>, <의산문답> 등의 역작을 남긴다. 아직 그렇게 보기에는 채워져야 할 배경지식이 부족했을 테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관계를 돌아보고 이들의 관계가 진정한 벗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나중에 커서 누군가에게 이런 벗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이들의 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자! 이제 이 책을 읽었으니 이 사람들이 쓴 책을 하나씩 읽어볼까?”하고 넌지시 운을 뗀다. “지난번에 읽은 「양반전」과 「허생전」은 박지원의 글이니까, 이번에는 발해고 읽어보자.” 끄덕끄덕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사실 내 안에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어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발해고』가 우리 역사연구에서 갖는 의의를 설명하고 헤어졌다. 다음 모임, 아이들은 읽긴 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읽어 온 게 어딘가! 대견하다.
이 책은 유득공과 『발해고』에 대한 저자의 상세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있다. 발해고 본문에서도 「군고(君考)」를 「발해의 역대 임금」으로 「신고(臣考)」를 「발해의 신하들」로 「지리고(地理考)」를 「발해의 지리」와 같이 쉬운 말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친절하게 계보나 복식 등의 도표와 사진 그리고 지도들이 들어가 있어 이해를 돕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이사이 용어와 배경 설명을 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다.
유득공은 『발해고』 이전부터 역사와 지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동국지리지』를 읽고 그 감상을 쓴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에 나타난다. 말년에 ‘한사군’의 역사에 관한 『사군지』를 집필했다. 북학 사상은 북벌론(北伐論)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 되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의 압록강을 넘어선 지역의 역사 인식에서 알 수 있다. 유득공의 사회 개혁과 관련해서 ‘용차론(用車論)’과 ‘축성론(築城論)’을 소개하며, 박제가의 그것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소개한다. 박제가는 급진적이라고 한다면 유득공은 현실을 고려한 제안을 하고 있다. 이런 자세는 그의 고증을 통한 역사 연구에도 나타나 신뢰를 높인다. 『발해고』는 『신당서』를 주요 사료로 사용했고, 그 외의 사료들을 참고했다.
『발해고』는 “발해와 고구려의 연계성을 인식하여, 발해와 신라가 양립된 남북국 시대를 한국사 체계에 도입했으며, 역사서술의 유용성을 믿었고, 문헌이 인멸되는 위험을 막고, 연구가 안 된 공백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보궐(補闕)’의 역사서술 방식에 의해 본격적이고도 체계 있게 발해사를 최초로 정리했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사료의 불충분 때문에 잘못된 부분도 있었다고 지적한다.
사실 박제가 서문과 유득공의 서문을 이해하면 이 책을 읽는 의미는 다 얻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박제가의 글은 발해고의 원문에는 없고 그의 『정유집』에 실려 있던 것을 붙인 것이다. 박제가는 연경을 향할 때 지났던 길들을 떠올리며 그때의 감상을 적는다. 요동은 천하의 한 모퉁이지만 영웅과 제왕이 일어날 만한 곳이며, 중국의 형세를 엿볼 수 있는 지역이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압록강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신라의 ‘구주오소경’ 안에 갇혀서 한·당·송·명의 흥망을 모르는 선비들을 한탄한다. 그러기에 박학하고 필력이 뛰어난 유득공의 『발해고』가 반갑다.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한다. 발해가 망한 후에 그 유민들이 고려로 들어왔으므로 그들을 통해 발해를 알 수도 있었는데 소홀한 것에 대해 통탄한다. 문헌이 흩어지고 사료가 부족하여 ‘9개의 고(考)’-군고, 신고, 지리고, 직관고, 의장고, 물산고, 국서고, 국어고, 속국고-로 구성했다. “세가(世家)와 전(傳)그리고 지(志)라고 안하고 고라고 한 것은 사서로서 체계를 못 이루었고, 또 감히 사(史)라고 자처하지 못하기 때문”(39p)이라고 하며 서문을 마친다. 이 부분에서 아이들에게 사체(史體)에 대해 설명하고 싶으나 참았다.
아이들에게 ‘인용문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전달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 사료의 신뢰도는 그 저서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발해고』는 당나라의 정사 『신당서』를 주요 사료로 했다.
발해의 왕들에 대한 기록 「군고(君考)」로 시작한다. 본기(本紀)에 해당한다. 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다. 이름은 걸걸중상이고 속말말갈인이고 고구려 유민이다. 중국의 요령성 조양으로 옮겨가 살다가, 측천무후 통치 2년에 반란을 일으키고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요수를 건너 성을 쌓는다. 측천무후에게 진국공이라는 봉작을 받는다. 걸사비우는 죽고 진국공의 아들 대조영이 고왕이 된다. 이때 국호를 발해라고 한다. 그리고 무왕, 문왕, 폐왕,…, 마지막 왕 인선까지. 당나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신라나 고려와 달리 연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있다.
당나라와 발해의 관계와 관련해서 ‘안사의 난’과 발해가 준 도움을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현종과 양귀비, 안녹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고구려 유민인 당나라 장군 고선지의 활약까지! 발해군왕이다가 대이진때 발해국왕으로 칭호를 바꾸게 된다. 계속 당에는 조공을 보낸다. 발해의 신하들 중 눈에 띄는 인물은 대문예, 무왕의 아우다. 나중에 당나라로 달아나 현종의 장군이 되었다. 발해의 지도를 펴놓고 오경(상경, 동경, 중경, 서경, 남경)의 위치를 짚어본다. 국서고(발해의 외교문서)에서는 일본에 보낸 친서들을 볼 수 있는데, 중국과는 달리 오히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발해가 망하고 그들은 정안국으로 명맥을 이었다.
모임을 마치며, 아이들은 혼자 읽을 때와 달리 함께 모여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이해가 되었다고 말한다. 세세한 내용은 언제까지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역사연구에 있어서 『발해고』의 의의와 유득공의 업적, 그 가치(특별히 오늘날 중국 동북공정에 대한 반론으로서)는 잊지 않길 바란다.
“자 이제 『열하일기』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