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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숲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천선란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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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로이스 로리의 『The Giver(기억전달자)』를 원서로 읽고 영어로 토론할 때의 일이다. 소설의 내용 중 각 가정에 잘 맞는 아기를 배정해주고, 재능에 따라 직업을 정해주는 것에 대해, 어떤 회원이 convenient라는 단어를 써가며 편리하고 이상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인생에서 선택의 순간마다 확신 없었던 때와 혈육이라 해도 항상 관계가 좋은 것은 아닌 경우를 예로 들며, 차라리 완벽한 시스템이 있다면 가족과 직업 같은 것들을 정해주는 것도 좋겠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웃으면서 지나갔는데, 돌이켜 보면 동의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긴 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정해진 것들이 나에게 완벽하게 잘 맞는다 하더라도 불완전한 인간이 거기에 만족하며 살까? 만족할 수 없기에 나쁜 기억이나 욕망을 잠재우는 약을 복용해야만 할 것이다. 그 소설에서 그려지는 사회는 결코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없음을 우리는 동의한다. 순간순간 스치듯, 희미한 수치심과 부러움을 느끼는 인물들과 강요당한 희생으로부터 도망치는 주인공에게서 잠재울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욕망을 발견한다. 충돌하는 공동체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욕망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욕망은 원래 증식하고” 충돌하기에.

 

『이끼숲』을 읽으며 『기억 전달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며 디스토피아를 생각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이끼숲』은 막내가 올해 읽은 소설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고 추천한 작품이다. 작가 천선란은 딸들이 좋아해서 소장하는데 나는 아직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동안 “엄마, 읽어봤어?”하고 물어보는 딸에게 “아직!” 이라는 대답을 하곤 했었다. 지하철에서 문득 생각이 나서 폰을 열고 구독형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는 기운을 느끼고 종이책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주문했다. 마음이나 정서를 전하는 표현이 탁월하게 아름다웠다. 동시에 아포리즘처럼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들도 있었다. 작가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 안에 이미 있는 어둠이다. 현실을 Si-Fi로 표현했을 뿐, 현실과 소설이 다르지 않다.

 

지상의 식물들이 사라지고 미래의 지구인들은 지하에 도시를 건설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마르코, 은희, 의주, 유오, 소마, 치유키, 톨가 는 청년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학업 성적에 따라 선택의 범위가 정해져 있었다. 경비원, 기계실 정비공, 건설사 직원, 통신국 직원, 의사, 씨앗 저장고 지킴이. 그들의 욕망과 통증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지상의 풍경을 인공으로 조성해놓은 세계에서 지상에서 누릴 수 있던 즐거움이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식은 관계없는 이야기다. 한때 “인간이 지상에 살던 시절” 음식이 인간에게 최고의 사치품이었던 시절을 이야기할 뿐이다. 지하 도시에서 음식은 그들에게 생명 유지를 위한 연료일 뿐이다. ‘VA2X’는 빼먹지 않고 매일 먹어야 하는데, 복용을 중단하게 되면 환각, 정신분열, 우울증 따위의 정신질환과 뼈가 삭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아마도 햇빛을 볼 수 없는 환경과 관련 있는 듯하다. 그런 증상을 앓는 자들은 정신재활원으로 실려 간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마르코는 ‘클론’ 제작실 건물 경비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은희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 때문이었다. 마르코는 우연히 아바타에게 목소리를 파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비싼 값에 목소리를 완전히 넘기고 발성기관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전한다. 지문과 같은 목소리는 한 개인의 유일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매매되는 장기(臟器)와 목소리 중 어떤 것이 더 존재에 타격을 줄까?

 

“세상에 하나뿐인 아바타한테는 세상에 하나뿐인 목소리가 필요하니까, 목소리는 전부 다 다르잖아. 그러니까 원하는 목소리를 돈을 주고 빼는 거지.(32p)”

 

가상세계에서도 “현실의 본인처럼, 목소리도, 외모도 세상에 하나뿐이기를 원하는(33p)” 사람들이 그 수요자다. 그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과 목소리를 팔아야 할 만큼 위기에 몰린 사람들이 있다. 이 세계 역시 자본이 가르는 계급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경비원 일을 하면서 여가시간에 B45에 있는 재즈바에서 노래하는 은희의 삶은 녹녹치 않다. 그 재즈바에서 마르코에게 은희가 시켜준 음료의 이름은 ‘바다눈’이다. 바다에 눈이 내리는 것은 생물의 사체에서 나오는 미생물이 눈처럼 내리는 것을 말한다. 음료에 이런 이름을 붙이는 지하도시 사람들은 유미주의와 허무주의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 내일이 없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다음에 올 시간을 기다리며 설레게 하는 것은 사랑뿐이다. 결말이 어떻든지 그 순간이 아름다운 것은 시대불문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 주거 지역, 직업, 출입할 수 있는 장소 등의 규칙과 질서는 자본과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인구 정책 때문에 존재가 없는 의조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의조는 의주와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의주가 선택되면서 유기되어 환기구 안쪽에서만 살아간다.

 

마르코, 의주, 치유키, 유오, 소마, 치유키, 톨가.

엇갈림과 상실의 어둠 속에서 이들의 사랑은 가슴 뻐근하게 아프고 벅차오르게 아름답다.

 

“나는 그걸 먼발치에서 바라봤는데도 마치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것처럼, 너와 나란히 서서 꽃이 쓰러지지 않길 빠랐던 것처럼 떠올라. 그럼 나는 기억을 주무르게 돼. 늦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끌어안아.(138p)”

 

유오는 나무에 대한 특별한 관심 때문에 지상탐사대에 들어가길 원하지만 좌절되자 땅속으로 뻗은 뿌리라도 만나기 위해 위험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택한다. 지하에서 하는 작업이므로 폭발의 위험과 상해와 죽음의 위험이 있다. 혹시 사고로 잃어버릴지도 모를 신체부위를 대체하기 위해 클론을 생산한다. 아이러니 하다. 지상으로 오르려는 욕망을 대신해서 땅을 파내려가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신체 훼손, 절단, 괴사 등의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의 클론을 준비하는 것이. 클론은 예방할 수 없는 사고의 사후대책에 불과하다. 다른 몸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8월 17일 13시 11분 23초경 T7-033구역 지반 붕괴로 노동자 한 명 사망. 그 줄에는 그 애의 이름도, 그 애의 삶도, 그 애가 알고 있던 식물에 관한 지식도, 그 애의 그날 저녁 약속도 담기지 않는다. 그런 것의 집합이 그 애이지만 죽음은 간략하고 명료하다. 멀리서 보면, 별것 아닌 한 줄이 된다. 그 애를 사랑했던 사람만이 그 한 줄을 뜯어 먹고 살 것이다. 글자와 글자 사이, 선과 선 사이에 촘촘히 박힌 삶을 그리워하면서.(230p)”

 

폭파사고로 인한 유오의 죽음, 몸의 상실은 소마에게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가져왔다. 유오의 클론이 폐기될 것이란 소식을 듣고 제작실에서 ‘그것’을 꺼내 업고 지상으로 도망간다. 소마(σῶμα, soma)는 ‘몸(육체)’을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몸(소마)’이 ‘몸(유오의 클론)’을 업고 있는 이미지에서 작가는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을까? ‘몸은 어떻게 존재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의 삶은 예전 문명으로부터 떨어진 꽃처럼 느껴진다.(147p)”고 했던 소마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소마는 지하세계의 입구가 있는 유리돔(온실)까지 무사히 도착한다. 의외로 그 마지막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냥 손잡이만 돌려서 열고 나오면 된다. 소마에게는 문을 열고 나가면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와 소마가 마주한 지상 세계는 이끼로 덮여 있었다. 이끼는 맑고 깨끗한 공기가 존재하는 것을 알리는 지표식물 아니었던가! 그 이끼가 끝나는 곳에 숲이 이어지고! 어쩌면 인간이 없는 지상의 세계에서는 식물 생태계의 천이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몸(클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끼가 묻은 그 몸에 대해 짧은 장면으로 결말을 보여주지만 내게는 열린 결말로 다가왔다.

 

지하세계를 지배하는 권력과 시스템은 두려움과 자본이다. 그 세계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가면 죽음뿐이라는 두려움은 그들을 권력의 지시에 순응하게 한다.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정신개조를 받거나 지워진 존재가 된다. 그것이 그들이 아는 최후다.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미래에는 오늘날 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스템과 권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려지는 미래 세계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그리는 소설 속 세상은 현재의 세상에 존재하는 어두운 현실이 있다. 그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부조리와 비극을 미래의 판타지로 그렸을 뿐이다. 인공해변, 인조식물, 인공하늘인 ‘스페이스 스카이’가 있는, 실재의 모형에 불과한 것들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지상을 상상하지만 그곳으로 갈 꿈은 꾸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죽음뿐이기에.

 

국가 시스템은 인식론적(epistemological)이다. 지식의 제도화, 정보의 독점과 검증, 과학ㆍ기술 정책, 담론의 규제를 통해 국가는 지식을 구성하고 검증하고 통용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를 지배한다. 교육과 정보를 통해 개인은 그 지식을 수용하고 지배 시스템에 적응한다. 세계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지배의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는 두려움이다. 다른 시스템, 다른 세계로의 탈주를 상상하지 못한다. 혹시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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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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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서 작가는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낀다면서, ‘잘 쓰고 있나’ ‘인물이 윤리적인가’ ‘고증이 확실한가’와 같은 자기 검열을 자주 한다고 고백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인물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는 건 기만이고, 시대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이런 질문들을 오래 논했다는 작가의 말이 맴돌았다.(시사In) 인물들과 이야기에서 작가의 고민에 공감되는 지점들이 있다. 나 역시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리뷰를 할 방향을 찾지 못했었다.

 

모 배우의 한 줄 평이 카피라이팅 슬로건(copywriting slogan)이 되었다. 그의 영향력 때문에 과장된 경향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둘째가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고 소설 넘 신박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다 읽은 책을 소장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이의 취향이겠거니 하고 읽어야 할 책 순서에서 뒤로 미뤄 놨었다. 막내 아이도 읽고 좋았다고 하고, 지인들도 좋은 평가를 하고, 그제서야 책을 옆에 가져다 두었다. 그리고 독서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는 의견이 나오고서야 읽기 시작했다. 확 빨려들어가고 신박한 느낌은 들었다. 계속해서 긴장시키는 부분도 있었다. 독서모임 회원들은 만난 순간부터 정말 좋았다고 감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나는 마음이 불편하지? 방어벽을 쌓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인물들이 주는 불편함이 너무 컸다. 선과 악, 윤리적이고 비윤리적인 문제는 아니다. 인물들이 경계에서 줄을 타고 있어서, 사유라는 게 없어서, 작가가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해서 무서웠다. 작가는 중립적인 자리에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문제를 던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짧은 문장 안에서도 작가의 철학은 묻어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독서모임에서 회원들과 토론하면서 나는 철학 없이 재미로 읽는다면 차라리 영화를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미디어와 텍스트는 어떻게 다를까? 나의 경우 독자의 사유에는 텍스트가 더 선명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는 기이한 상상인데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주제는 무겁다. 내 경우, 망막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는 사라지거나 그 세계 안에 머물거나 인상적인 몇 장면을 남기거나 하는 정도로 생각을 만든다. 반면, 텍스트 한 단어 한 문장이 그대로 들어와 각인되고 비평과 수용을 통해 사유가 된다. 그래서 더 선명하다.

 

읽은 후 몇 달 동안 작가의 펜이 향하는 방향이 어디일까 고민 했다. “권력에 복무하기보다는 항거하며 시대를 바꾸어나갈 수 있는 작은 지점을 찾아가는 게 문학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기억’이고, 그것을 오답 삼아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나”라고 한 작가의 말에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여전히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에는 마음이 쿵 내려앉는 불안을 겪는다.

 

등장인물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들의 경향성은 우리 시대정신이지 않을까? 특히 「혼모노」에서 무당이 섬기는 할멈 신이 그 정신의 극단적 상징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들의 내용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혼모노」는 최근 내란과 그 배후 사건들과 관련하여 더욱 시의적이다.

 

혼모노(ほんもの)는 일본어로 ‘진짜’, ‘진품’을 뜻한다. 일본 문화에서 이 단어는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저 사람은 진짜 혼모노다”라고 말하면, 그 분야에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한편 집착적인 오타쿠를 뜻하는 은어로 쓰인다. 그렇게 '혼모노'는 진품에서 비정상으로, 찬사에서 조롱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우리가 오타쿠처럼 집착하며 욕망하는 실체는 무엇일까? ‘길티 플레져’, 죄의식을 동반하는 즐거움일까? 죄의식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팬클럽 회원들 각자에게 숨겨진 의도에 대한,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것일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것, 진실이 무엇이든 무조건 믿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때문일까? 그들은 배타적 언어와 규칙들과 가식적인 대화와 가장된 호의로 의구심들을 덮는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 때문에 모인 가짜들이다. 그들은 마치 이빨과 발톱이 빠진 호랑이를 만지는 것과 같이, 진실이 아닌 허위의 대상을 추앙하는 아니 자신의 욕망을 추앙하는 사람들이다.

 

'구의 집'이라는 이름에는 누군가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감금과 고문을 위해 지어진 이 건물을 설계한 주인공은 구보승이지만, 이것을 정부로부터 의뢰받은 자는 그의 스승 여재화이다. 대학원생이던 구보승에게 설계를 맡기고, 그 설계대로 세워진 건물에 이름을 ‘구의 집’이라고 명명한 것은 자신의 죄와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이다.


이 작품에서 구보승은 이 건축물 설계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그것이 인간을 위한 건축이라는 의의를 부여한다. 재능도 의욕도 없어 보이던 대학원생 구보승이 뜻밖에 열정과 비상한 재능을 보이며 설계에 구현한 공간은 감금과 고문, 의도된 자백을 받아내기에 최적화된 건물이다. 구보승에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 중 누가 혼모노이고 니세모노(가짜)일까?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남영동 대공 분실’의 빈틈없이 용도에 최적화된 정교한 설계가 담겨진 도면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은 한국의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었고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왜 작가는 한 건축가의 설계가 아닌 그야말로 무기력한 무사유의 인간이 그를 대리하게 했을까? 그 유명한 건축가를 변명하는 듯 보여 오랫동안 고민했다. 두 사람 다 설계를 의뢰받는 순간부터 건물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은 정의나 인륜 같은 것에 무심한 채 순간의 욕망과 성취감에 충실했고, 다른 한 사람은 사회적 명성, 사회적 지위때문에 거절할 수 없는 범죄에 다른 사람을 가담시키고 그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결론은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한 명 두 명 백 명으로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타인의 안위나 사회적 정의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위험하다. 그 극단적인 정신의 형태가 「혼모노」의 할멈 신이다. 박수무당이 30년 간 섬기던 신은 다른 신애기에게로 옮겨간다. 그 귀신 조차 자신의 이익을 따라 옮겨다니는 것이다. 그런 신에게 자신의 안위를 의탁하고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국가와 많은 사람들을 위해야 할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신당을 찾는 욕망이 낳을 결과가 얼마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할지는 자명하다.

 

이것이 시대정신의 경향성이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개인의 욕망만을 추구한다. 타자들 혹은 공동체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아니 그런 것들을 생각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직관적인 죄의식만을 희미하게 갖고 있는 것 같다. 습관이 된 이런 경향은 죽음의 위험을 당한 혈육 앞에서도 자신의 자존심과 욕심을 우선순위에 놓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은 자연스럽다. 시류에 합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욕망만을 추구하고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고 경향이 된 존재가 개별자로서 혹은 집단을 이루어 괴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무섭고 두렵다. 그게 내가 되지 않으란 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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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전 -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 개정판
왕스징 지음, 신영복.유세종 옮김 / 다섯수레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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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득 이 말이 떠오른다.
그 의미가 실감나는 어제 오늘이다.


‘물에 빠진 개는 두들겨 패라‘
「페어 플레이는 뒤로 미루어야 한다」라는 글에서 루쉰은 물에 빠진개, 특히 자신이 직접 때려서 물에 빠진 개에 대해서는 몽둥이로 물 속에서 호되게 때려야 하며, 모든 악한 세력과는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반드시 지구적인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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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5-04 13: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요.
루쉰 책을 보니 제가 읽은 루쉰 단편집이 생각나는데 꽤 두꺼운 책을 5분의 4쯤 읽은 것 같아요. 내용이 혁명적일 것만 같은데 소소한 이야기도 있고 재밌어요. 얼른 완독해서 독서 노트에 써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그레이스 2025-05-04 14:06   좋아요 1 | URL
저도 루쉰단편 읽고 있어요 ~~
 

작가의 색채 이미지들은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노랑무늬 영원」이나 「내 여자의 열매」에서도 『희랍어 시간』에서도 빛과 색채 표현의 예민함은 마음을 시리게 한다. 그녀의 회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엿보인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화가가 흰 종이 위에 먹과 색이 번지고 스며들게 하는 등의 작업 묘사는 더욱 그렇다.

 

작가의 ‘흰’색은 특정한 상징과 정서를 갖고 있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정희의 꿈에 등장하는 흰 새, 빽빽하게 내리던 미시령의 폭설, 먹이 번져가던 흰 종이 등 모두 죽음을 연상시킨다. 『소년이 온다』에서 시체들을 덮는 무명천, 머리에 감겨져 있는 하얗게 빛나던 붕대 등은 보다 구체적이고 직설적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 흰 새들로 착시를 일으키는 폭설, 주검 위에 쌓여 녹지 않는 눈, 흰 뼈들, 하얀 앵무새 등으로 밀도 있게 다가오는 흰 색의 이미지에 숨이 막힌다.

 

흰색은 죽음을 상징한다. 차갑고 투명하고 무겁고 두렵다. 이 흰색의 이미지들로 작가는 초혼(招魂) 혹은 진혼(鎭魂)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위기나 정서 때문에 낯설고 불편한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죽음들의 상황과 증언을 은폐했기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은 어두운 현실과 역사를 반증하는 것이다.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 생각한 작가 앞에 막아선 것은 아직 따스하고 투명해 질 수 없는 빽빽한 흰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망월동 묘지에 내리던 눈, 꿈속에서 벌판을 채우던 성근 눈. 그것들은 작가를 추적하고 써야할 숙명처럼 다가온다. 꿈은 파도에 휩쓸려 쓸려가기 전에 아직 뼈들이 무사할 때 쓰라고 한다. “거대하고 육중한 칼이 허공에서 나를 겨눈 것 같은 전율 속에서(『작별하지 않는다』 26p)” 작가는 생각한다. 시간이 없다고, 써야한다고.

 

카프카의 경우처럼 꿈은 작가에게 고통이기도 하다. 쓰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과 같은 무의식의 문을 여는 고통의 행위이다. 그 책을 마치면 그 꿈으로부터 해방되리라는 기대는 오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다른 꿈들로 이어지고, 다시 다른 문을 열어야 하는 숙명 앞에 서게 된다. 그렇게 『소년이 온다』 『흰』 『작별하지 않는다』 진혼곡들이 탄생한다.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직접적인 폭력이 담긴 꿈들이었다.(『작별하지 않는다』17p)”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작별하지 않는다』 23p)“

 

처음 두 책을 읽는 동안 중단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두 번째 독서에서 나는 작가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쓰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과정을 보는 듯 했다. 사람을 향한 사랑이 없고서야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흰』에서 작가는 ”무엇으로도 결코 파괴될 수 없는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을 들여다보고 싶었다.(「빛과 실」)“고 한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와 형식은 다르지만 주제로는 연결되는 작품이다.

 

출간 순서와는 다르게 『흰』을 나중에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흰』이 두 소설과 차별되는 지점이 있고, 이 지점은 두 소설을 아우르는 어떤 메시지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두 소설에서 해결되지 않는 고통과는 다른 어떤 밝음이나 따뜻함을 느꼈다. 『흰』에서 흰은 나의 흰과 그녀의 흰으로 나뉘어진다. 그녀는 세상에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떠난 언니다. 화자(작가)는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 나의 ‘흰’-강보, 배내옷, 소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은 그녀의 ‘흰’-성에, 서리, 날개, 주먹,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흰 새들, 손수건 등-과 댓구와 평행을 이룬다. 이들은 모든 ‘흰’에서 통합된다. 각각의 흰 것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대응하면서 한 편의 긴 시를 만들어간다.

 

오래 전 세를 얻어 이사했던 집의 철문에 날카로운 무엇으로 함부로 새겨놓은 녹슨 ‘301’호라는 글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 문을 하얀 페인트를 칠하는 행위로부터 나는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기 전 그 사람의 밖에 보이는 상처를 떠올렸다. 돌보지 않고 함부로 대했던 자기 자신의 외부로 나타나는 상처의 흔적, 성격이나 습관으로 나타나는, 때로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면 낫게 될, 아니 나은 것처럼 보이는 상처다.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완전히 재가 되었었던 ‘흰 도시’라 불리는 바르샤바에서, 그녀는 자신 안에 그리고 도시의 타인들 안에 있는 상처들과 고통의 기억들을 ‘흰 것들’의 이미지를 통해 찾는다. 그것은 기억에 남은 언어의 파편일 수 있고, 사물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통해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사람들의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 배추의 속살 같은 연한 부분을 들여다본다.

 

언니에게 자신의 삶을 내어준다는 의미는 타인 어쩌면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그녀가 되어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녀는 바르샤바의 많은 이들이 총살되었던 벽 앞에 모인 넋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앞에 밝혀진 초는 넋들을 위함이 아니라 초를 켜놓은 자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살육당한 역사는 수치가 아님을 믿는 그들은 그렇게 오래 애도를 연장한다. 고국에서 일어난 일들과 죽은 자들이 받지 못한 애도를 기억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건을 생각한다. 개인이라는 작은 범주에 사용할 단어를 국가라는 큰 범주에 사용할 ‘재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부정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자신의 재건에 빠진 것이 있었다. 고국에도! 그녀 자신 안에 있는 상처들이 여전히 총알의 파편처럼 박혀 있음을 연고를 바르고 붕대로 감싸서 아문 듯 보이지만 나은 게 아님을 가리킨다.

 

총살의 벽 앞에서 고국의 애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할 일들을 다짐처럼 생각한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흰』109)”

 

바르샤바에서 흰쌀밥을 지어, 그 앞에 기도하듯 앉아있는 그녀, 그 밥은 자신을 위한 것일까, 아님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거기서 나는 생에 대한 의지, 위안을 느꼈다. 따뜻한 밥에서 흰 김이 오르는 장면에서 사랑을 생각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뒤 작가는 이 “『흰』과 형식적으로 연결되는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빛과 실」) 이 『흰』에서 잠깐 보여줬던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한 글을 기다려본다. 세상이 그런 글을 쓸 만큼 조금 더 밝고 조금 더 따뜻해지길!

 

신형철 교수는 강의에서

“병든 아이의 침상 곁에서 며칠을 지새운 아버지는 아이가 죽자 촛불로 둘러싸인 시신을 잠시 놓아두고 옆방에서 잠이 든다. 그런데 꿈에 죽은 아이가 나타나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빠, 내가 불에 타는 것이 안 보여요?” 깨어나 옆방으로 달려가 보니 촛불이 넘어져 아이의 수의(壽衣)가 타고 있더라는.(『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프로이트의 꿈 이야기를 하며 고통스런 꿈을 꾸는 또 다른 사람들을 떠올렸다고 한다. 아직도 “아빠, 내가 물에 잠기는 것이 안 보이세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오늘도 꿈에서 만나고 있을 분들을.

 

작별하지 않는, 작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제발 우리의 오늘이 미래를 살릴 수 있기를!

반복되는 초혼과 진혼이 아닌 애도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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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4-29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한강 작가님 칸이 따로 있어요. 볼 때마다 뿌듯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그레이스 2025-04-29 15:30   좋아요 2 | URL
많은 분들이 그러시리라 생각됩니다.
5월이 오네요!

페크pek0501 2025-04-30 1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소설로는 세번째로 여수의 사랑, 을 읽고 있어요.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보다 더 문장력이 빼어나다고느꼈어요. 역시 노벨상을 탄 작가는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그레이스 2025-04-30 12:27   좋아요 2 | URL
잘 쓰는 작가들은 단편이 더 좋더라구요. 밀도있고 !

새파랑 2025-05-01 08: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한강작가님 책탑~!!
한강작가님의 작품을 읽다보면 좀 괴로운 부분이 있는거 같아요 ㅋ 정상적인 생활이 안됩니다~ 문장이 너무 아픕니다~ 다음번에는 <흰>을 읽어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5-05-01 09:04   좋아요 3 | URL
맞아요.
한동안 헤어나오기 힘들어요.
그래도 <흰>에는 결심 같은 것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어요.
더구나 작가의 시선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바르샤바의 역사적 비극을 향한다는데서, 매몰되지않는 느낌, 긍정적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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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외교 참사’라 불린 두 정상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언어의 불평등, 소통의 부재, 그리고 의도된 비난, 비아냥, 모욕 등 언어의 모든 폭력성을 본 듯하다. 구사한 언어의 내용도 그렇지만 분위기, 태도 때문에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럴 땐 언어가 없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 사이엔 날이 시퍼런 ‘칼’이 놓여있다. 그 칼은 자본, 권력의 언어일 것이다.

 

보르헤스의 묘비명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남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87세의 보르헤스가 젊은 부인에게 이 묘비명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밤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을 놓았다는「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로부터 보르헤스가 가져온 말이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8p)”라고 생각하는 남자 역시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시각 장애인이다.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가서 살았던 그는 십대에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17살에 청각 장애를 갖고 있는 R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성립될 수 없는 오류가 되어 버렸다. 그의 얼굴에 있는 흉터는 실명이 휘두른 칼날에 의한 상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R을 위해 수어를 배워 수어로 대화하던 남자는, 완전한 실명이 오기 전, 그녀에게 목소리로 말해달라는 요청을 한다. 남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화가 난 R은 남자의 얼굴에 상처를 남긴다. 20년이 지났어도 남자는 그 순간을 후회한다.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강의한다. 그의 강의를 듣는 여자는 손목에 흉터를 갖고 있다. 여자와 남자의 흉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상흔이다. 여자는 강단에 선 남자의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 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처음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古지도 같다(12p)”고 생각했다.

 

여자가 고어古語이자 사어死語인 희랍어를 배우는 이유는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첫 번째 실어증에 걸렸던 때,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비블리오떼끄’라는 낯선 단어가 그녀의 입술을 움직이게 했었다. 여자는 입술이 달싹이던 그 순간을 오히려 공포스럽게 기억한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17p)“

 

이혼과 양육권 포기로 인해, 20년 만에 다시 침묵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녀는 의지적으로 낯선 언어를 배우고 있다. 첫 번째 실어증은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리는 문장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 때문에 오는 수치심과 구토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절망감(혹은 공포)때문이었다. 스스로가 하는 말의 거짓에 대한 정죄, 불완전함에 대한 부끄러움, 추함에 대한 역겨움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민할 수 있을까? 발화의 순간보다는 뒤돌아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때가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언어 없이 생각하고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16p)“

 

첫 번째 침묵이 농밀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웠다면, 20년 후에 다시 온 침묵은 차고 희박하고 어둡다.

여자를 상담했던 심리치료사의 ‘그녀가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 지 의심하는 내적질문에 응답해가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진단은 불편하다. 본성을 억누르고 살았기 때문에 실어증이 왔을 거라는 것이다. 전편 『바람이 분다, 가라』의 표현대로 한다면 내담자의 삶을 “함부로 요약”하는 것이다. 여자가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이해한다는 상담사의 말에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55p)“라고 대답한다. 남자의 실명보다 여자의 상실보다 세상과 그들 사이에 놓인 칼은 말이 아닐까?

 

여자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 어마어마한 밀도와 중력으로 단단히 뭉쳐진 단 한 단어. …… 누군가 입을 열어 그것을 발음하는 순간, 태초의 물질처럼 폭발하며 팽창할 언어. ……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그 언어의 결정結晶이 그녀의 더운 심장에, 꿈틀거리는 심실들 가운데 차디찬 폭약처럼 장전되는 꿈(55p)”을 꾸었다. 생명, 사랑과 같은 단어들을 생각하게 되지만, 그녀가 상상하는 단어는 형태도 소리도 갖추지 않은 직관적 언어다. 어쩌면 의식만으로 이어진 이미지나 감각으로 전달되는 에너지 같은 형태의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전달함에 있어 오류도 거짓도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 그런 언어를 갖고 있는가? 스스로 질문해본다. 말의 부정확성, 추함, 거짓이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칼이다.

 

διεφθάρθαι, 강의 시간에 여자는 받아 적으면서, διεφθάρθαι(He kill himself)를 “차갑고 단단하다”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마침내 입술을 뗄 수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διεφθάρθαι의 발음, 주어와 목적어가 하나로 동일하게 만드는 중간태(영어의 재귀대명사를 포함하는 의미)는 다른 뜻이 파생될 수 없는 완전하고 정확한 의미를 전달한다고 한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게 되는 이유이다.


희랍어를 잘 모르기에 이 느낌을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에게 보르헤스의 칼은 소통과 언어의 부정확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는 발화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폭력을 행사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다. 그러기에 여자는 모든 의미, 언어가 하나로 압축된 단어, 언어의 결정結晶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몸짓은?

건물 안으로 들어온 새를 도우려는 남자를 공격하는 새, 차에 깔린 개를 안아주던 여자를 물었던 개의 장면에서 인간의 몸짓조차 전달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두려움은 선의의 몸짓을 오해하게 만든다. 이 폭력적 반응은 R이 남자의 얼굴을 후려친 억센 주먹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녀가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 있다.(168p)“

 

남자와 여자는 밤을 함께 보내고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춘다. 사랑의 행위는 시(詩)로 이어진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9p)”이라고 했던 강의실 장면은 이 시(詩)에서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191p)”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행이 반복된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183p)”

우리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

 

‘심해의 숲’은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인간의 가장 연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그 부인할 수 없는 온기를 어루만지는 것- 그것으로 우리는 마침내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이 덧없고 폭력적인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한 작가의 질문에 희망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두 사람조차 서로를 알지 못하고, 언어는 부정확하고 소통은 단절된다. 여전히 스스로를 가둔다. 그들 사이에 칼은 여전히 놓여 있고, 세계와의 사이에도 칼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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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25-03-04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남일보 2024.9.26. 전남대 김명술
https://www.jnilbo.com/74956793542

이런 글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다고 여겼으나
우크라이나가 어떻게 곪은 얼거리인지 하나하나 뒤늦게 알아보면서
우리가 그 나라 속낯을 잘못 바라보고 휩쓸리기도 하겠다고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그래서 엊그제 일은 참사가 아닌
우크라이나 민낯을 들여다보는 어떤 발판일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1: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짧게 말하려니,, 그냥 ‘외교참사‘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젤렌스키는 태도를 이미 정해놓고 시작했더군요. 상대방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도 없이 자기 주장만 일관되게 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본 제 감상입니다.
전쟁이 끝날것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레이스 2025-03-04 14:46   좋아요 0 | URL
김영술 인데 김명술이라 하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북플에서는 주소 카피가 안되서 외워서 검색하고 읽었습니다.
그런데 숲노래님 서재에 들어가니 글이랑 링크가 있네요.ㅎㅎ
동의하고 공감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03-04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희랍어 시간> 재독했어요.
처음 읽었을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는데, 여전히 좋더라고요^^

그레이스 2025-03-04 15:29   좋아요 2 | URL
네^^
노벨상 효과인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다르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강 책은 한번 읽어서는 압축된 의미를 놓치기 쉬운듯요.

페크pek0501 2025-03-06 1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그리고 시집, 만 읽었는데 앞으로 희랍어 시간, 을 읽어야겠네요.
페넬로페 님은 재독까지 하셨다니... 장바구니에 얼른 담아야겠어요.^^

그레이스 2025-03-06 12:02   좋아요 1 | URL
저는 장편 중 한 작품만 남았는데, 리뷰는 계속 쓸 계획입니다.
다시 읽을수록 작가의 글에 감탄하게 되요 ^^~♡

전야제 2025-03-17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굉장히 회의적인 사람이라, 특히 사랑에 있어서도 그랬거든요.
사랑하는 순간에도 서로를 모른다는 문장, 그게 제가 줄곧 의문을 가져온 부분이었는데
이 글 읽고 속시원해졌어요. 어쩜 이렇게 글을 잘 쓰셨나요?ㅎㅎ
저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칼이 제거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뚝거리는 언어와 몸짓으로 자신을 내보이며 온기를 나누는 게 인간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가끔은 그 칼에 베일지라도!˝ 라고 쓰신 부분 읽고,
그레이스님 정말 따뜻한 분이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랜만이에요!
좋은 글 써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5-03-17 22:58   좋아요 1 | URL
너무 감사합니다.
전야제님 댓글은 항상 감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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