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끌어안는 밤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 문화,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인생에 파문과 흔적을 남기고 삶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는 내용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유와 쇼코, 나에게 투이, 엄마에게 응웬 아줌마, 순애언니, 한지, 미진선배, 시청광장에서 만난 미카엘라의 어머니... - 타자들과의 만남이 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그들과 가까워진다. 환대의 힘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타자의 추방한병철)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상처에 닿는 거리로 가까워지면 아픔을 느끼고 울타리를 치고 뒤로 물러선다.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서로의 아픔을 꺼내놓지 못해서,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내 상처만 보여서 마음은 서로 닿을 수가 없다. 그렇게 헤어진 이들은 했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놓아버린 그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뒤늦게 찾아가, 그리워했던 이들에게서 더 아픈 시간들의 흔적들을 발견하지만 그 흘러간 시간의 간격에 무력함을 느낀다. 읽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때 잡았더라면, 그 때 말을 했었더라면, 지금은 달라졌겠지 하고.

뉴스 화면에서만 비치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쳐 놓은 천막은 슬픔의 깊이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장에서 우연히 부딪친 사람의 아픔과 내가 가진 상처가 공명한 순간, 그들 사이로 뛰어들게 된다. 그래 맞다. 타인의 아픔에는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타자의 추방한병철)

 

우연히 잠깐 만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나만큼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간격은 사라지게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나 문화와 같은 환경의 이질성 때문이 아니다. 나의 상처를 감추느라 꽁꽁 싸매고, 울타리를 친 마음이 건너가지 못한 때문이다.

 

먼 타국의 사람들, 나와는 무관했던 타자들이 스쳐가듯 만난 사이에서도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아픔과 후회를 가져온다. 쇼코의 미소에서의 관계는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좀 더 가깝고, 오래 지속되고, 친밀한 관계로 좁혀진다. 서로 사랑했던 친구, 옆집에 살던 친구, 자매들, 통신으로 만나 알게 된 청춘들, 친구들, 막연한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두 사람. 언어가 같다고, 좀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그 아픔의 깊이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헤아리고 공감해도 무기력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여전히 서로를 오해하고 착각하기도 한다.

무해한 사람이라고 착각한 친구와 비교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는 그에게 감정을 말하기 바빴고, 그 친구가 받아주기만 했다. 그 친구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시들어가는 친구를 보며, 그만큼 지치고 식어버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던 주인공이 몸을 떨었던 것은 추위가 아니었다.

 

그 장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애를 보내면 마냥 후련하기만 할 것 같았던 마음이 어떤 두려움으로 바뀌던 순간을, 버스가 떠난 뒤에도 나는 터미널에 가만히 서서 모래가 탄 버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찬바람에 몸을 떨었다.”(183p)

 

그렇게 흘러가버리도록 놓아 둔 마음은 온기를 잃은 파편이 되어 남아있다.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고,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매에게로부터 지나온 고단한 삶을 듣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친구를 도울 수 없는 무력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짐을 지운 무게와 환자를 돌보는 일에 지쳐 괴물로 변해 갔다던 고백,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결국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강을 사이에 두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찾아가 말을 하게 되고 고해소를 나오듯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209p)

 

그렇게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지만 다시 상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제 그 고해는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이야기로 옮겨져 간다. 이야기를 끝낸 후, 다시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 혹은 여성들의 고통의 근원을 찾고, 다른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게 하는 이야기다. 현대를 살고 있는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에는 사회로부터 덧입혀진 의미들이 있고, 그 의미는 그들에게 체념을 강요하는 굴레가 되었다. 가장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여성이라는 타자로서 살아낸 시간은 전쟁과 폭력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은 주인공의 증조모에게 체념을 요구했고, 할머니에게 대물림 된다. 그 삶을 벗어나려는 엄마의 방식은 왜곡되고, 오히려 더 많은 포기와 침묵 속으로 자신을 가둔다.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도 그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4대에 걸친 역사를 듣는 시간들, 발화자나 청취자나 모두 그 설화 속에서 치유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직 변화가 더딘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긴 호흡으로 전작에서 진전된 의미들을 던지고 있다.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 근원은 자신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도, 살아온 역사, 정신적인 유산에도 있다. 내가 왜 이 상처 안에서 꼼짝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 가족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아픔을 주고받는가? 근원을 찾아가는 대화가 필요하다.

또한 4대의 여자들이 각자의 아픔을 나눌 친구들로 인해 매서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사람!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 그들이 서로의 눈물을 받아주고 싸매어 줄 때 우리의 밤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댓글(32) 먼댓글(0) 좋아요(5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9-02 21: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등.🖐 ^@^

그레이스 2021-09-02 21:33   좋아요 4 | URL
하이파이브 🖐

scott 2021-09-03 00:08   좋아요 1 | URL
아! 이렇게 세권 나란히 붙여 놓으니
최은영 작가 표 작품의 분위기가 확 느껴집니다!

mini74 2021-09-02 21: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쇼코의 미소, 문장이 참 좋았던 *^^* 이렇게 세 권의 책이 연결되는군요. 밝은 밤은 오는 중이고 ~ 내게 무해한 사람도 읽어보고 싶어요 ~그레이스님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레이스 2021-09-02 21:35   좋아요 4 | URL
최은영작가 다음 작품이 기대되면서도
무지 부담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아서...!

라로 2021-09-02 21: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젊은 한국 작가의 책 거의 안 읽은 사람인데 최은영 작가의 책은 두 권이나 읽었어요. 밝은 밤도 궁금하네요!

그레이스 2021-09-02 22:02   좋아요 3 | URL
강추합니다

새파랑 2021-09-02 22: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은영 작가님 작품의 종합 페이퍼네요. 저 저 세권 다 가지고 있어요 ^^ 저도 최은영 작가님 마니아? 😆 전 최근 작품으료 올수록 좀 더 좋아지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레이스 2021-09-02 22:03   좋아요 3 | URL
저도 😄 그래요~~♡

미미 2021-09-02 23: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최은영 작가님의 책은 전혀 읽어보지 않았는데 <쇼코의 미소>도 이분의 책이로군요! 표지가 예뻐서 리뷰 올라올때 마다 눈에 띄었어요~♡ 그레이스님 리뷰보니 순서대로 읽고 싶네요! 굿밤되세요😉

그레이스 2021-09-02 23:19   좋아요 3 | URL
쇼코의 미소는 저희 아이가 대학 원서 낼때 독서 리스트로 냈던 작품이예요
그 중에 <신짜오 신짜오>
그래서 제게 더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베트남 참전에 대해 조금더 알게 된 계기가 됐구요

2021-09-03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3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막시무스 2021-09-03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쇼코의 미소만 읽었습니다.ㅎ 단편들에서 인물간 소통이 어렵고, 다가갈듯 물러설듯 머뭇거림이 많이 느껴졌던게,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요인도 많이 작용했다는 점을 알았네요!ㅎ

그리고, 인용해 주신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는 정말 어디에서 한번 써먹어 보고 싶은 훌륭한 문장인것 같습니다. ˝환대˝라는 단어에 이렇게 좋은 의미기 함의되어 있었다니 감동인데요!ㅎ 즐거운 불금되십시요!

그레이스 2021-09-03 11:13   좋아요 3 | URL
막시무스님 말씀해주신 ‘다가갈듯 물러설듯 머뭇거림‘에 대한 느낌도 표현이 좋아요.
저도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scott 2021-10-08 15: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 추카~~
오늘 하루 행복 ^^

그레이스 2021-10-08 17:3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미미 2021-10-08 16: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관왕 당선 축하드려욤~^^*♥

그레이스 2021-10-08 17:39   좋아요 2 | URL
감사드려요~♡

mini74 2021-10-08 16: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0-08 17:39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0-08 16: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은영 작가님 저 책 세권 다 있고 좋아해요.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0-08 17:4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다 갖고 있는 사람,! 그 뿌듯함을 알지요^^

scott 2021-10-08 18:09   좋아요 1 | URL
ㅋㅋ^ㅇ^

서니데이 2021-10-08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1-10-08 19: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bookholic 2021-10-08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1-10-09 01: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희선 2021-10-09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축하합니다 저는 앞에 두권은 보고 세번째는 아직이에요 그 책도 보겠지요


희선

그레이스 2021-10-09 01: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최은영의 장편!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1-10-09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2관왕, 축하드려요**

그레이스 2021-10-09 01:4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은 그의 작품집 여름의 빌라에 수록되어 있는 단편소설이다.


만남과 사귐, 관계의 균열과 결별에 작용하는 마음에 대해 예민한 감각으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사실, 특별한 내용은 아니라는 게 첫인상이었다. 우리가 삶에서 흔히 경험하게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문제의 반복은 솔루션을 갖고 있지 못하거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겪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런 상황이 오게 되는 원인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런 질문은 결국 나는 어떤 사람이고 타인에게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로 나가게 된다. 우리는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의미를 생성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온 화자는 어학원에서 대기업 주재원으로 온 언니와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들은 저녁마다 함께 걷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공통점-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 사강의 소설과 녹색광선을 좋아한다는 것과 같은-을 발견한다. 어느 날 언니는 외로울 때면 이미 결혼한 헤어진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고 혼자 운다는 이야기를 한다. 화자는 놀라지만, 그 순간 언니가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들은 영화 녹색광선의 배경이 된 비아리츠 바닷가를 여행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화자는 서로의 내밀한 마음을 보여주는 사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던 중 화자는 프랑스인 브리스와 사랑에 빠지고 한국에 돌아갈 것을 포기하고 그와 결혼한다. 이 계획에 없던 결혼을 결심한데는 언니의 조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결혼생활에 위기가 찾아오고, 화자는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힘들어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언니와 함께 세 사람은 바닷가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서 화자는 언니에게 두 사람이 멀어지게 되는 말을 한다. 여전히 옛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다는 언니에게 화자는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한 것이다. 이 일로 두 사람은 멀어진 사이를 회복하지 못한다.

 

이미 결혼한 전 남자친구에게 가끔 전화를 건다는 언니의 고백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 모습이 언니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였는데, 나중에는 왜 비수와 같은 말로 언니에게 상처를 주는 이유가 되었을까? 단지, 전자의 상황은 화자가 미혼이었던 때였고, 후자의 상황은 가정이 있던 때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개인적인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의 공감은 객관적인 사실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화자가 결혼의 위기감을 느끼는 불안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조금 근접한 대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만족스럽지 못하다. 두 사람이 그 내밀한 비밀을 공유하고 지지했었던 유대감은 미혼이라는 동질성이나 안정된 삶에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자신을 안주를 지향하지만 탈주를 동경하고 고독을 좋아하지만 타인과의 결합을 원하는”(18p)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모순된 욕망을 갖고 있기는 하다. 상황에 따라 그 대립되는 욕망의 어느 한 편이 강해지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의 모순된 욕망과 감정을 언니가 다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자신이 갖고 싶은 모습을 언니에게서 본다. 언니는 주저함이 없고 용감하고 언제나 반짝이는 사람처럼 보였다”(18p)고 한다. 상대방이 나를 다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사람이 내가 그리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 관계에 금이 가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언니가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야”(34p)라고 한 대답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화자는 언니라면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언니가 이해해주지 못할 리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언니 눈에는 나한테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35p)고 한다. “넌 이제 완벽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한 언니의 말은 화자로 하여금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34p)을 하게 했다.

 

자신을 항상 이해해줄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은 신뢰라기보다 대타적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게서 찾는 것이다. 상대방의 상황은 항상 자신보다 나아보이고-그래서 그들에게 끌릴 것이다- 그들 앞에서 열등한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인식은 부정적 감정을 쌓게 되고, 언젠가 감정을 폭로하게 되어있다.

 

마지막 여행에서, 슬픈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는 언니는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 고통이 더욱 언니를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화자의 서술은,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화자의 동경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음 안에 질투심의 작은 불씨를 만들고, 이 감정은 화자의 마음에 시작된 균열이 파열음을 내며 폭로된다. 그 바닷가의 밤 장면을 회상하며 자신이 왜 언니에게 그런 말이 하고 싶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말했다고 한다.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타자에게서 자신의 행복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이 하게 되는 실수다. 타자의 행복을 덜어낸다고 내가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은 순간 대타적 존재이다.

 

화자에게는 아이가 태어나고,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4년쯤이 된 시점, 그때의 억울하기만 했던 감정들이 희미해졌다고 한다. 언니와 연락하기 위해 노력하면 SNS를 통해 찾아볼 수는 있으나, 화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비가오고 잠이 오지 않는 날은 비아리츠에서의 추억을 떠올리며 울고 싶어진다.”(39p)

 

화자는 왜 언니를 찾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깨진 관계를 다시 잇는 불편한 과정을 피한다. 사과하고 화해하기 위해 깊이 넣어 두었던 앙금들을 굳이 헤집어 떠오르게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화자는 언니를 찾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과를 하러 연락하지 않는 것이 언니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38p)고 한 이유일 것이다. 화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언니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로 인해 충만했던 시간, 비아리츠 해변의 자유, 아직도 꿈 꿀 수 있었던 시간들이 아닐까? 화자는 편안해진 듯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생각에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 그리움은 그저 과거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어디쯤에 살고 있다는 말이 다가온다. 화자는 미래보다는 과거에 살고 있다.

 

나라면? 언니를 찾을까? 나는 찾을 것이다. 우리가 틀어졌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화해를 시도할 것이다. 많은 어긋남과 깨진 관계들을 그냥 둠으로, 들여다 볼 수 없었던 내 문제들을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화자에게도 찾아 볼 것을 권한다. 정말 당신이 그리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당신이 기억하는 언니는 정말 그렇게 모든 것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당신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마음은 어떻게 기울고 있는지, 그 기울기를 만들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나는 계속 이 제목과 소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시간의 궤적시간 속에 남겨진 삶의 궤적의 생략과 단축의 문학적 허용으로 봐야 할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 살고 있는 주인공 화자에게 궤적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뒤에 남겨진 걸음의 흔적을 궤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지향과 경향성이고, 존재적 를 설명한다. 그 궤적은 멀리 나갔다가도 다시 중심에 가까워진다. 그 중심에는 나란 정체성이 있을 것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1-07-27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8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7-27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좋아하는데 그레이스님 글로 보니까 이 작품이 떠오르네요. 타국에서 보낸 이야기는 뭔가 아련함이 남는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1-07-27 21:54   좋아요 3 | URL
단편 <여름의 빌라>보다 조금 더 생각을 해야하는 작품이어서 그런지 더 오래 남네요^^
다른 소설들은 금방 그 의미들을 찾아냈는데 이 작품은 몇단계 거쳐서 생각하게 돼요.

붕붕툐툐 2021-07-27 2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애정하는 백수린~ 이 작품도 너무 좋았어요~ 저도 외국 배경의 글은 왜 더 애잔하고 공감이 잘 되는지 모르겠어요~ 더 외로운 배경이라 그런걸까요?

그레이스 2021-07-27 22:27   좋아요 3 | URL
맞아요, 이국이란 말은 외로움의 정서를 전달하죠.

희선 2021-07-28 0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을 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을지... 없다 해도 누군가는 그래주면 좋겠다고 바랄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사람한테 바라는 건 더 이루기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할지... 결혼하고 프랑스에 산다 해도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데 조금 시샘하기도 했을까요 그런 게 아주 없는 건 아닌 것도 같습니다 자신은 하지 못한 걸 언니는 여전히 해서... 좋았던 사이가 늘 좋으면 좋을 텐데...


희선

그레이스 2021-07-28 05:22   좋아요 2 | URL
^^
희선님의 글은 항상 따뜻하네요
감사합니다 ~
사람 마음은 왜 그렇게 기울까요?

mini74 2021-07-2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하지 못하는 일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거 같아요 얽힌 실타래가 안타깝고 아깝지만 그저 잘라버리거나 그만 둬 버리는 것처럼요. ~ 타자의 행복을 덜어낸다고 내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글 참 좋아요. 위로보다 축하에 익숙치 못하다고 할까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1-07-28 17:35   좋아요 1 | URL
돌아보면 안타까운 일이 많죠!

독서괭 2022-08-24 1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존재를 타자에게서 찾는 태도라는 분석이 와닿네요. 희미하게 얻은 인상을 분명하게 표현해주시니 넘 좋은 리뷰입니다^^

그레이스 2022-08-24 12:30   좋아요 2 | URL
아!
독서괭님 1년전 리뷰에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다시 읽어봤습니다.
 
꼰대책방
오승현 지음 / 구픽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노그룹의 미메시스연구소에서 상품화한 미미는 단기간에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생체이식술이다. 대뇌피질에 흐르는 반복적인 전기·화학적 신호 패턴을 읽어 내는 기술을 개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뇌 지도를 모방하여 그 패턴을 일반인들에게 심어주는 기술이다.


이것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밈이라는 용어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문화를 전달받아서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단위를 그리스어 어근 미멤mimeme’에서 가져와 meme’이라고 명명했다


과학자 부부에 의해 밈이라는 것이 뇌 안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경험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의 뇌를 스스로 재설계할 수 있는 신경가소성에 착안하여 미미를 개발하게 된다. 즉 전문가의 뇌 안에 있는 밈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이다. 돈을 내고 전문가의 축적해온 지식을 자신의 뇌에 주입하는 것이다. 실제로 돈을 내고 미미를 사서 변호사가 되고 기업의 후계를 잇는 사람들이 있다.

 

미미는 기술자의 굳은 살이라는 은유가 인상적이었다.


이제 미미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책을 읽고 공부해서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장 큰 서점이 있었던 제노그룹 빌딩에는 이제 책이 사라지고, 미메시스, 미미라는 완벽한 대체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밈을 제공하는 기버(giver, 수여자)들은 중뇌에 손상을 입어 파킨슨병을 앓는다. 그러나 제노의 대표 장도섭은 이 부작용을 무시하고 미미를 판매한다.  이식받은 자들 역시 정신증을 일으키는데 정부의 묵인 하에 조용히 미미를 수증자(受贈者)에게서 제거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한다. 기버들은 대부분 수입이 끊어진 노인들이다. 이들은 식물인간이 되어 비블리오티카(bibliotheca, 장서 문고 또는 서점)라는 시설의 연명장치 안에 보관된다.

 

미미로 인해 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가 되면서 아버지의 헌책방을 운영하던 심지언은 제노그룹에 입사한다. 밈을 발견했던 교수의 아들 성도진도 제노의 직원이다. 이들은 미미의 부작용과 음모를 알게 된다. 성도진 역시 실종되었던 어머니를 만나며 미미 개발과정에서 대표 장도섭의 범죄를 알게 된다. 이들은 미미와 관련된 범죄와 국가와의 공모, 수용시설의 비밀들을 밝혀나간다.

 

<꼰대책방>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책과 관련된 이야기 보다는 뇌 과학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왜 미미를 사려고 할까? 왜 다른 사람들의 굳은살을 떼어 자신에게 이식하려고 할까? 지식을 전수받는 시간을 줄이고 많은 양의 지식을 단시간에 가지려는 것, 결국 성공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그 보석을 전수받아 여물어 가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윗세대로부터 그것을 전수받고, 거기에 청년의 시각을 더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그것이 새로운 이 되고, 이런 방식은 중노년과 청년의 이상적인 관계 맺기이다. 어른은 청년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 준다. 청년은 배움의 자세로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세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밈의 이동을 불만스러워 하는 집단이 있다. 바로 기업들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거대 괴물, 오로지 시장만이 그것을 기다릴 수 없다. 밈의 이동은 곧 돈의 흐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34p

 

성공, 부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미미에 대한 폭주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개인에게 부작용을 가져온다. ‘미미를 살 수 없는 청년의 박탈감, 노년 지식인들의 밈의 판매는 사회전체가 겪는 분열과 정신증과 마비(파킨슨병)를 보여주는 것이다. ‘미미2037년의 사회현상이고 어쩌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방향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도섭은 그가 만든 수용시설 비블리오티카에서 이렇게 항변한다.


어때 마음에 드러? 여기 니드리 조아하는 채책방이자나. 인간에겐 누구나 완벽하게 타인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잠재돼 있어. 그게 바로 모방, 미메시스의 기본정신이지. 사람들은 타인이 되고 싶어서 책을 읽어. 그런데 백권 천권 읽는다고 타인이 되나. 타인을 부러워하는 질투심만 책장에 가득히 채워 놓을 뿐이야. 그럼 여긴 어딜까. 여기가 바로 책방이야. 아주 빠르고 효율적인 이 시대의 책방! 책은 느리지. 책 한 권의 내용 만들려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리는데, 그 책 하나 읽는다고 인생이 한 번에 달라지냐? 그런 책을 백 권 천권 읽어도 안 바뀌는 놈들이 수두룩해. 그럼 뭐가 진짜 지식의 보고야. 뭐가 진짜 지혜의 전당이냐고? 미미는 한 방이 되잖아. 하나로 된다고! 그러니 여기가 진짜 책방이 아니고 뭐겠어?”

 

최 팀장의 대답이다.


너 어릴 때 책 안 읽었지? 딱 티나 이 XX……

필요한 지식을 무작정 머릿속에 무작정 때려 넣는다고 그게 지혜가 되냐? ……지식은 경험이라는 틀 안에 존재해야만 지혜가 되는 거거든. ……

-205p

 

두 사람의 주먹다짐과 함께 오가는 말 속에 가슴을 치는 부분이 있었다. 나의 책 읽기와 삶의 변화에 대한 반성과 함께.



가끔읽어야 할 책은 너무 많은데 시간이 부족함을 느낄 때, ‘스캐너처럼 사진 찍듯이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면’, ‘다른 사람들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고펜으로 줄을 긋고옆에 메모를 하고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숨 쉬듯 생각을 하는 즐거움을 기억한다갈피해 놓은 책들기록해 놓은 감상들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이 있기에 읽는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다거기에는 지식의 습득성공돈으로 환원되는 세상의 욕망 따윈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1-05-29 16: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밈이 이런 이야기로도 풀리는군요. 그레이스님의 글처럼 돈으로 환원되는 욕망보단 순수한 즐거움으로의 책읽기에 저도 한 표 던집니다. *^^*

그레이스 2021-05-29 17:38   좋아요 5 | URL
우리 서로 동시에 댓글을 달고 있었네요
공감으로^^

scott 2021-05-29 17: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는 즐거움!이
독서인들의 최고의 기쁨 ( ´●◡●`*)

그레이스 2021-05-29 17:37   좋아요 4 | URL
예 맞아요~!
 
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 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 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고 ……

73p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를 유심히 보고, 가엾게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음과 같은 출산과 그 출산이라는 것에 딸려오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의미와 구속들.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다가오는 구속들. 그러나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식의 폭력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얼굴을 굳힐 뿐이지. 강요된 모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폭력은 은근하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올 때가 많다.

아이와 간격이 벌어진 후에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공감한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 분신, 피붙이…… 이런 말들이 이기적이고 본질에 덧입혀진 모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생명, 내가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생명 속에 나를 닮은 모습이 발견될 때 경이로움,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강요되고 맹목적인 모성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은 결여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일.

한국전쟁 때 비극을 맞이한 가문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마당 눈더미 속에 던져진 자신을 안아 올리던 어머니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 다섯 살 때 동생을 업고 어른들을 따라 도망치다 논두렁에 남겨졌던 외로움과 막막함, 동생 은일을 화상으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 외가에서 받은 부당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끌려와 당한 수모, 탈출을 위한 결혼 등이 뒤섞여 있다. 이순일은 자신의 아이들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가 그 일들을 이야기로도 겪게 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잘살기를 바랬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되뇌인다. 이순일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이 사는 건물로 이사를 한다. 두 집 살림을 돌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순일은 딸들에게 자신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바람처럼 딸들은 잘 살고 있는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는 이순일이 살았던 여자로서의 고단함이 되물림 되고 있다. 보여 지는 게 달라졌을 뿐.

이순일의 불행은 전쟁이나 이념갈등, 가난보다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진 현재, 딸들이 겪는 갈등은 모습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영진이 감당해야 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요구되어지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모성과 유부녀로 규정 지어진 삶. 생각은 하지만 그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습관이 된 방식들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p


한세진은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 곳곳에 엄마 이순일이 겪었던 폭력과 수모는 여전하다. 그녀의 친구 하미영의 삶이 그랬고 미국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한 이모할머니의 삶이 그랬다. 미군과 결혼해 이주해 살았던 이모할머니의 삶에 그 그림자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포들 사회에서 규정지어지고 평가된 여자로서의 그녀는 불행했다.

뉴질랜드에서 가끔 들르는 동생 한만수는 말한다. 그곳은 여자들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고…….

과연 그럴까?

연년세세! 우리가 사는 집단 안에 흐르는 정신이 도도하다. 그 안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영진처럼 말이나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것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란공 2021-05-14 21: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화 <미나리>에서 부인이나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

그레이스 2021-05-14 21:43   좋아요 3 | URL
그러네요!

mini74 2021-05-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을 꼬박꼬박 붙여 이름으로 서술되는게 인상깊었어요. 가장 가까운 듯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참 모르는 게 가족이고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치같았거든요 *^^*

그레이스 2021-05-14 22:17   좋아요 3 | URL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겠군요.
그러네요.

scott 2021-05-14 23:47   좋아요 2 | URL

저도 이름이 아닌 성까지 언급되어서 독자들이 읽을때 가족 구성원 끼리도 서로 다른 개인 이라고 느꼈네요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지는 자전적 소설이다. 읽어가면서 계속 드는 의문은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미 『엄마의 말뚝』이나 『나목』에서 다뤘던 소재였다. 그런데 왜 다시 이 소설을 써야 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못 다한 말이 있었을까? 소설을 쓰고도 청산되지 않은 감정이 있었을까?


다 읽고 난 후, 다시 『엄마의 말뚝』과 『나목』을 비교해 보니 확실히 달랐다. 두 소설들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많은 부분 사실이지만 허구적인 부분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이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허구가 없었다. 특히,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엄마의 말뚝』에서는 오빠의 죽음이 극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오빠의 부상과 죽음은 너무나 초라하고 극적이지도 않다. 오랜 시간 비루해지고 파리해지면서 죽어갔다.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작가는 그런 오빠를 보는 마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적어놓는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 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34p

20대 박완서에겐 허물어지고 절뚝거리는 오빠의 육체보다도 인격이 바뀌어버린 오빠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불안함 속에 피난을 떠나던 오빠의 염치를 잃은 모습은 읽고 있는 나 역시 아연하게 만든다. 오빠의 죽음과 장례도 그렇게 누추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도 지나치게 애통하지 않아서 슬프다.


공산치하와 서울 수복 시절, 이중생활, 생존과 돈을 벌기위해 했던 일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오갔던 속물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생각들.

어떻게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와 생각을 적나라하게 쓸 수 있었을까? 어떤 작정으로…?
쉽게 쓰여 진 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은밀한 부분을 세상에 내놓고 오히려 괴롭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주저했을 텐데.


작가의 아주 은밀한 감정들을 발가벗기듯 드러내고 있어서 내내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왜 불편했을까?

작가라면, 작가가 될 소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깨졌기 때문일까? 속물적이고 소시민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가 그 감정들을 모두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자주 표현하는 말을 사용하자면,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써내려간 내밀한 사건과 감정들 때문에 나 역시 고통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발가벗듯이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은밀한 생각들이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밀하게 숨겨놓은 혐오스런 생각들을 보게 했다. 그렇게 내내 불편했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세상의 요구를 그녀는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치부와 같은 그 시절을 픽션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의도였을까? 아니 의도 같은 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숭고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았던 삶을 미화시킨 것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에게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읽는 사유가 없이 20대를 맞이한 박완서가 해방과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혼돈 속에서 생존이 하루의 시작과 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고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죄의식에 대한 참회와 치유의 글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내가 오독과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것이 실재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러니 함부로 그 시절을 겪어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요구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쟁은 남과 북을 가르고, 피난 간 사람들과 피난가지 못한 사람을 가르고,…… 많은 분열을 만들어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벌어진 채 아물지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까 생각했다.


항상 생각하게 되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상에 대한 인식, 역사관, 세계관…등 모두. 해방 전후를 살았던 세대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작가의 글은 마치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이 양키한테 붙어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추비하고 남루해진다고 고백한다. 개울가에서 구토를 일으키는 20대 박완서의 모습은 애처롭고 쓸쓸하다. 등을 쓸어주고 싶다. 청년의 때가 이래도 되는가.


그렇게 긴 고백은 엄마와 박완서 각자의 울음으로 정리한다. 그 험한 세월동안 가슴밑바닥에 눌러 놓았던 통곡이 터져 나온 것이다. 작가의 출가 후.
그녀들에게는 그렇게 각자 우는 것이 서로 마주 붙들고 우는 울음보다 더 정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위해 꼭 필요한 통과 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 한 일이었다.”
-280p

이 부분이 이해가 간 나에게 놀랐다. 도대체 어떤 정서가 자리 잡고 있기에….


얼마 전, 엄마와 이야기 하다가, 나를 결혼시킬 때 엄마가 공중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주체 못할 정도로. 엄마는 담담하게 수다 떨듯이 말하고만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고 해야 하나? 그 울음으로 그동안 감춰왔던 미안함을 고백했던 것 같다. 늦기 전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 2021-03-26 1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오늘 왤케 눈물나게 하는 글들이..😭

그레이스 2021-03-26 13:34   좋아요 4 | URL
^^;;
마지막글 얹으면서 또 울었습니다^^
어떤 책은 읽고도 글쓰기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어요.
오래 걸려 쓴 만큼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미미님 감사해요~

scott 2021-03-26 1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 어무이,,,,,
ʕ>⌓<。ʔ

mini74 2021-03-26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리 먹먹하지요. ㅠㅠ 저도 그레이스님 마음이 왜 이리 이해되고 와닿는지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