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9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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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하는 지점이 많았던 소설이다. 한편, 도스토옙스키가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연루되어서 겪은 극적 경험, 사형수와 유형수로 겪은 고통은 이 작품에도 역시 짙게 배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1869년 네차예프가 자행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소재를 얻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며 유럽의 인터내셔널, 바쿠닌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모스크바에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인물이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는 모든 사상, 의미, 권위 도덕 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이다. 그들 학생 운동은 폭력을 동반했다. 이들의 폭력적인 성향은 백치에서도 그려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서구로부터 들어온 사상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사상’, ‘주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서구의 사상이 혼란스럽게 러시아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윗세대들(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시기)의 서구사상(자유주의)을 여과없이 들여오고 그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구로부터 들어온 불온한 사상들에 대항해서 러시아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학자이자 시인인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와 같은 사람들이 구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페테르부르크 근처 지방 소도시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개인 연구실(바르바라의 집)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독자에게 수상한 분위기를 전한다. 화자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집 모임은 소문과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문은 그들 모임이 자유사상과 방종, 무신론의 온상이라고 굳어졌다. 그러나 화자는 소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임은 매우 순수하고 온건하며, 순 러시아식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잡담을 나누었을 뿐이다.”(1권 제19. 52p) 학자연하고 사상가인 양 하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 때문에 모인 모임이었다. 소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를 긴장하게 하고 극도의 흥분과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이런 증상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트라우마와 관계있다. 또한 국가, 계급, 개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는 경계와 폐쇄를 나타낸다.

 

소설 전체에서 중반이 지날 때까지 인물 탐색과 소도시의 사람들의 관계에 존재하는 갈등과 원망, 분노, 지배 같은 것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스쩨빤 뜨로피로비치의 모임에 참석하던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키릴로프, 샤토프 등은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의 귀환과 함께 그들이 이 소도시로 모여든 목적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유주의 관리, 건축가, 학생이고 슬라브주의자, 인신사상 신봉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을 소개할 때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상이 범람하던 시기에 사상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풍조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유주의나 계몽주의에 이어 공산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였다.

 

당시는 특별한 시대였다. 무언가 새롭고 이전의 평온과 전혀 다른 아주 이상하지만 스끄보레시니끼에서조차 감지되는 어떤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구체적인 사실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이 사실들 외에 어떤 사상들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사상들이 그에 수반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상들은 뒤죽박죽이어서 어디에 적용시킬 수도 없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1권 제15. 32p)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럄쉰, 똘까첸꼬로 이루어진 5인조는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가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러시아 내 각 지방과 유럽 전역에도 이런 비밀결사들이 존재하고 배후에는 더 큰 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실체를 본적도 다른 조직을 만나본 적도 없다. 이들은 스따브로긴의 외국에서 만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자들에게 스따브로긴은 정신적 지주이고 우상이다. 그 영향력을 뾰뜨르 베르호벤스키가 이용하고 그들을 지배한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Nikolai Vsevolodovich Stavrogin)은 소설의 중심인물이고, 모든 관계의 한 가운데 있지만, 그런 그에게서 지독한 허무를 보게 된다.

 

천재적이지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스따브로긴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쫓는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의지 선과 악의 팽팽한 대립을 느끼지만 그는 범죄와 쾌락을 선택한다. 첫 번째 범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경험한 쾌락은 그에겐 놀라운 것이었고 이후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스따브로긴은 그가 추구하듯 자유로운가를 질문해본다. 두 의지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가 자유롭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습관이나 경향성은 이미 자유롭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구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 그리고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 과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질문한다면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스따브로긴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뾰뜨르 베르호벤스키의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다. 그 끝에는 허무와 공허만 있다.

 

그들은 왜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결말은 왜 허무일까? 모든 사상이 다 그렇지는 않을텐데, 폭동과 살인, 자살, 공허가 두드러진다.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19세기 러시아에서 원인을 찾는다. 계급의 벽이 높은 사회다. 사상이 뿌리내리고 꽃피우기에는 그 경계가 장애가 된다.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작중 인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식인들의 모임 밖으로 나갈 개방된 출구가 없었다. 방화나 폭동이 사상을 그 방법이자 에너지로 여길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한계가 존재했다는 생각이다.

 

에필로그에 푸시킨의 시와 누가복음 832-37절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밝히고 있다. 그는 푸시킨의 시로 성경을 풀어, 파괴적인 사상들이 바로 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폰 렘쁘께는 자레치예의 화재 현장에서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3100p)라고 외친다. 허무주의라고 번역된 러시아어 Нигилизм(Nigilizm)은 라틴어 Nihil(, 아무것도 없음)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급진 세대의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정치·사회 운동. 종교, 도덕, 국가 권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하려 한 유물론적 행동주의다. 허무주의는 폭력성을 띄는 무정부주의를 향한다. 렘쁘께의 외침은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사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이다.

 

살해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광기를 보이는 비르긴스끼와 럄신이 뒤엉키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비르긴스끼의 절규와 럄신의 발작은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급진주의 사상의 민낯이다. 한편, 맡겨진 일(범죄)을 무심하게 해내는 에르껠의 모습은 극적 대비를 이룬다. 범죄와 인간의 본성을 소름끼치도록 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함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살해에 연루된 인물들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뜨리, 스메르자코프를 떠올리게 한다.

 

파괴와 혁명을 논하던 지식인과 소시민들은 살해 현장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살해, 자살, 도주로 그들의 조직은 와해된다. 그들의 사상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사상이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사상이란 공허한 말들에 불과하고, 그것을 무시한 사상의 실행은 폭력이다. 생명을 해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기만 하다.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 러시아에 들어온 급진적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의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도 모호하게 보일 뿐이다.

 

스쩨빤 뜨로피보비치 베르호벤스키는 죽기 전 유언과 같은 말에서 러시아에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가 필요하며, 그것이 악령과 모든 불결함, 혐오스러운 것들을 몰아낼 것”(3권 제72. 327p)이라고 한다. 그 자신 또한 책임에서 피할 수 없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스쩨빤 베르호벤스키의 고백과 병행하며 대비를 이루는 것이 스따브로긴의 고백서이다. 그는 과거의 범죄와 이후 연속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글을 세상에 발표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참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파괴적인 행위일 뿐이다. 악령은 그의 내면에 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가 사상을 악령으로 보는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정치적인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소설은 경향소설로 끝을 맺는다. 모든 사상, 이념이 다 폭력적이고 한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사상의 물결이 큰 변혁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급변하고 있고, AI 시대를 맞아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정서가 우리를 엄습한다. 이런 세상을 어떤 사유로 바라보아야 하며, 인류가 새롭게 해야 할 사상과 끝까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질문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세대의 이념은 증오와 혐오를 상속하고, 생명을 조롱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현재의 혼란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증상은 아닌지! 도스토옙스키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우리 시대의 악령은 무엇일까?

 

나는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하는 생각, 선택, 행동들은 자유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인간은 전적인 자유의지 상태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는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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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5-25 1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도스도옙스키는 어려워요 ㅠ 그간 겁나서 못읽고 있다가 ‘죄와 벌‘ 부터 서서히 시동을 걸려고 하고 있거든요. 악령은 목록에서 뺄까 했는데 기승전결의 연속성을 갖는대서 고민하고 있었지 뭡니까요. 그나저나, 이걸 어찌 해내셨습니까 ㅠ 도스도옙스키 읽으셨거나 읽으시는 분들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만 그런건 아닐거에요. 리뷰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6-05-25 16:0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분들이 계셔서 한권씩 해치우고? 있네요 ㅎㅎ
제 다음 책은 <미성년>이 될듯합니다

차트랑 2026-05-25 16:50   좋아요 1 | URL
오... 도스도옙스키를 싹 쓸고 가실 기세로군요!!!
그 깊은 산맥을 죄다 !!!!

도스도옙스키와 마주하니
참여하고 계신 독서팀이 부럽게 생각되기는 처음입니다.
전 아직 독서팀을 부러워해본 적은 없답니다!!

미성년도 대박 두껍던데,
미성년 리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악령의 리뷰는 저를 까마득하게하여 기운이 빠졌는데
미성년을 읽으신다니 그 기세가 다시 저의 전투력 게이지를 상승시키는군요!!!)



에로이카 2026-05-25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안녕하세요? 시간이 나시면 르 귄의 <빼앗긴 자들>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엄두를 못 내고 있는데요. <악령>의 영어판 제목이 Possessed이고,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르 귄이 쓴 책이 Dispossessed, 곧 <빼앗긴 자들>(로 제목이 잘못 번역된 책)이라고 해요. 그레이스님께서 두 책을 읽으시면 한층 더 풍부한 말씀을 하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

그레이스 2026-05-25 16:04   좋아요 2 | URL
아!
감사합니다.
본 책인듯 하네요,,, 생각이 안나네요
악령을 생각하면서 보면 깊이가 다를듯요^^
감사합니다
 
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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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길에 버려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고 장사지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고대의 비극이나 서사시에서는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고개를 숙인다. 성경에는 먼 거리를 밤새도록 달려가 사울의 시신을 찾아왔다는 기브아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시신을 구했을까? 인간의 육체와 죽음 그리고 사후(死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를 썩고 분해되어 기본적인 물질로 환원되는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후세계나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신앙이 없더라도, 생전에 함께 하고 사랑했던 존재의 틀(혹은 그릇)을 안타깝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끼던 물건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쉽게 함부로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지 않은가.

 

평생을 기억상실인 채로 살았던 딩즈타오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연매장은 안돼!”라고 외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연매장되기 싫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연매장이란 시신을 관에 담거나 시신을 감싸는 어떤 것도 없이 매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학살, 혹은 예를 갖출만한 여력이 없는 극단적 상황을 내포한다. 학살은 시체들을 묻고, 시간은 그들을 발굴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지주(地主) 계급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는 대규모 토지 재분배 정책인 토지개혁을 한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지주가 학살되거나 숙청되었다. 딩즈타오는 이때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서 강에서 구조된 여성이다. 그녀의 아들 칭린은 아버지의 일기, 기억을 잃은 어머니의 분절된 말들, 직장상사인 류샤오찬의 아버지 류진위안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인연과 그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을 알게 되고, 어머니가 상실한 기억의 진실과 고통의 근원 가까이에 다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처럼 그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덮어두려 한다.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 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432p)”

 

그 진실을 추적해 쓰는 것은 칭린의 친구 룽중륭이 한다. 칭린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룽중륭은 싼즈탕 지역과 그 장원과 사건을 추적해서 쓴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와 고통의 진실이 매장된 채로 모든 것이 풍화되기를 바랐지만, 룽중륭은 역사는 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444p)”라고 말한다. 칭린은 냉소하며 생각한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다고.

 

작가가 이 시대 토지개혁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듣고 연매장이라는 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 단어는 시대적 비참을 품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많은 연매장이 있고, 진실이 묻혀 있는 평토장 무덤들이 있다. 이 땅에는 여전히 감자를 먹지 못하는 많은 순이 삼촌들이 있고, 멸치도 못 먹는 유가족들이 있다. 자신의 손으로 묻은 가족들과 죄의식을 기억의 심연에 매장한 딩쯔타오처럼 침묵으로 아픔을 묻고 침묵하도록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칭린이 진실을 밝히길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알려하지 않는 것이 강함의 표현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나? 칭린과 룽중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칭린의 태도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알지 않으려 하는 게 강함의 표현이라고? 자라면서 알고 있던 부모의 정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흔드는 것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느끼지만 그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문화혁명과 같은 부조리한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태도를 본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그런 방식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유물론적이고 실용적이 그들 나름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칭린에게서는 진실을 완벽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패배의식도 엿보인다. 그러나 진실에 연루되어 있는 칭린보다는 자유로운 룽중륭은 연구자와 작가로서 탐사를 계속한다. 작가는 칭린을 이해하는 듯 쓰고 있지만, 사실 그의 태도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룽중륭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중이 적은 제3자로서의 룽중륭은 작가 자신이라고 짐작된다. 룽중륭의 등장은 기록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작가 자신에게 확인시키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다보면 사람들의 주검에 대한 예()는 시대, 지역, 문화마다 조금씩 상이하나, 그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사회에서 화장은 선호하는 장례방식은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시대의 변화와 문화에 따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훼손되고 함부로 매장된 육체는 경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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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6-04-2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어쩌면 어느 시대에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겠네요.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 외면은 자기기만일 수도 있지만 들추면 닥칠 혼란, 공포와 두려움에 대한 자기방어일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국도 이념에 의해 많은 이들이 강요당하여 학살당한 이들이 있고 묻혀 있는 진실들이 많죠. 많은 생각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뷰 감사합니다.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6-04-23 10:26   좋아요 0 | URL
4.3과 5.18이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가족의 유해를 찾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도 그렇구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6.25나 일제강점기 양민학살 사건 등,,, 우리에게도 있는 같은 사건들이 계속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거리의 화가님은 역사를 많이 아시니까 깊은 독서가 되시리라 생각되네요.
 

이오니아 반란의 주동자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이 일으킨 전쟁을 이오니아에 있는 도시들과 사모스나 키프로스 같은 섬들과 스파르타나 아테네에 까지 확산시킨다. 아리스타고라스의 배후에는 페르시아로 끌려간 밀레토스의 참주 히스티아이오스가 있었다. 히스티아이오스는 밀레토스를 공격해온 다레이오스에게 일찌감치 항복하고 그의 수하에 들어가 페르시아에 봉사하고 있었다. 그는 밀레토스를 다시 차지하고자 자신을 대리하고 있는 사위 아리스타고라스에게 페르시아에 항거하라고 비밀리에 메시지를 전한다. 이 메시지를 받기 전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에 공적을 세우고자 군대를 동원해 낙소스를 공격했다. 낙소스 원정은 실패하고 막대한 경제적 손실만을 입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다레이오스에게 받을 문책이 두려워 오히려 페르시아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그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원병을 요청하고,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오니아 지역 도시들을 선동했다. 각 도시국가들은 셈법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이것이 Ionian revolt,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이오니아 반란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며 이오니아와 아프리카 흑해주변 도시 등의 역사와 문화, 인종 등을 조사하고 직접 다니며 탐사했다. 그러면서 마라톤 전쟁 직전에 일어난 이오니아 지역 헬라스 도시들의 페르시아에 대한 전쟁에 주목한다.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서술해간다. 이 이오니아 전쟁을 통해 많은 도시들의 시민들이 희생됐다. 나름의 전쟁을 일으킬만한 이유들과 열망들이 있기도 했다. 노예 상태로 이주한 민족들과 혈육이 몰살당한 사람들의 분노와 복수심 등.

 

주목할 만한 것은 지도자들의 욕망과 무책임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빼앗긴 권력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 시민들의 복수심과 불안감을 이용한다. 페르시아가 시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노예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거짓을 전파하며 선동한다. 아리스타고라스는 이오니아의 많은 도시들이 다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여 다른 도시들의 참전하게 한다. 그리고 패색이 짙어지자 도주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볼 수 있다.(5~6) 헤로도토스는 이 역사를 기록하며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들에 집중한다. 지도자들의 욕망에 의해 전쟁에 끌려 나온 시민들과 노예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전쟁의 승패가 기울면 지도자들은 항복과 결사 항전을 고민하고, 협정을 맺기도 하지만, 합의에 이르는 마지막까지 이익을 앞에 놓고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싸운다. 그 와중 협상과 지체와 결렬과 재개 사이를 오가며 사람들의 희생을 키우는 것을 보게 된다. 이들 고대 국가들은 전쟁 중 서로가 적이 되기도, 연합군을 이루기도, 중재자로서 개입하기도 한다. 구원(舊怨)을 따라 혹은 이익을 따라 합종연횡을 일삼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대에 일어난 전쟁의 발단과 전개, 그리고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현대 전쟁과 다르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 에서는 휴전시간 15분을 앞두고 지휘관의 자존심 때문에 신병들을 적의 참호로 보내 육탄전을 벌이는 비인도적 장면이 있다. 종전 협정 내용이 독일에 수치스러운 것이었기에 지도자는 프랑스군을 그대로 보낼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한다. 적의 참호에서 끔찍한 육탄전을 벌이던 파울 보이머는 칼에 찔리고,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 휴전 나팔이 울리고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진다. 그 소리를 들으며 파울은 죽는다. 전쟁의 허망함을 전하려는 극적 연출 장면이다. 그리고 지도층의 몇 사람의 공로 의식이나 욕심에 의해 많은 생명이 부질없이 죽어가는 전쟁에 대한 분노를 느끼게 한다.

 

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2023년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에서 많은 부분 수상을 했다. 영화는 아름다운 풍경과 전장의 잔인함을 대비시킨다. 인물들의 대화는 때로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공포와 불안으로 가득하다. 굶주린 병사들의 열악한 식사와 후방에 있는 고관들의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식사 장면을 대비시킨다. 조국을 위해 참전하는 십대 청년들의 낭만과 첫 전투의 공포와 참혹함이 급격하게 대립한다. 그들의 패기와 열정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절망으로 변해버린다. 나 역시 저들이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고, 돌아간다 한들 희망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아름다운 풍경과 참담한 풍경이 반복되면서 나도 모르게 남아 있는 러닝 타임을 확인했다.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빗발치는 총탄과 화염 방사기 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을 달리는 그들의 둔한 몸짓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이 비참한 시간을 버티고 있는 그들의 심정이 화면 건너편으로 전해졌다.

 

학교 교사, 탄광의 광부, 은행원, 양계장 주인, 시골 지주, 도시 중간계급, 노동자, 농민 등 그들이 격렬한 전화(戰火)의 한복판에서 계속 참호를 지키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인지대 언저리 저 냉혹한 죽음이 다스리는 그 자투리 땅에서 그들을 버티게 한 것은 무엇일까? 병사들이 참호 밖으로 나와 공격에 나서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들을 버티게 했을까?”(봄의 제전289p)

 

원작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작가의 체험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상상된다. 그가 16살 때 전쟁이 났고, 2년 뒤 191611월에 사범학교를 다니던 중 징집되었고, 1917년 플랑드르에서 처음으로 최전선의 전투를 경험했다고 한다.(봄의 제전467p)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는 영화의 대비적 이미지 보다는 화자인 파울의 마음에 집중한다. 그의 심상에 떠오르는 문장들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잔인하고 허무하다. 17살인 파울과 그의 동기들 7명은 전선으로 보내져 흩어져 배치되고 죽음을 경험한다. 파울은 자신들이 기대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파울은 우리는 길을 잃은 것 같다고 고백한다. 학생이 아닌 전우들은 구두 수선공, 농부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똑같이 총탄, 장갑차, 화염방사기, 화학전 독가스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1918년 종전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파울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조바심 낸다. 그 초조함과 실망이 나의 마음을 울린다.

 

“1918년 여름 불타 버린 전쟁터 위로 부는 희망의 바람, 초조함과 실망의 미칠 것 같은 열병, 두렵기 짝이 없는 죽음의 공포, 이해할 수 없는 물음. ? 왜 전쟁이 끝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끝난다는 소문이 솔솔 나도는가?”(11)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더욱 전쟁에 나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여전히 어쩌면 더 많은 죽음들을 경험한다. 희망과 실망을 반복하는 파울 보이머에게서 우울과 당혹감을 엿보게 된다. 반면 그의 눈에 비친 나무들, 빨간 마가목 열매는 아름답기만 해서 처절하고 더욱 허무하다.

 

하지만 1918년 여름에 출정은 계속되고 죽음도 그치지 않는다. 비록 초라한 모습이긴 하지만 이곳 생활이 지금처럼 우리에게 간절히 여겨진 적은 없었다. 우리의 숙소 주변 초원에 피어난 붉은 양귀비꽃, 풀줄기에 달라붙은 매끈매끈한 닥정벌레, 어스름하고 서늘한 방 안에 스며드는 따스한 저녁노을, 해 질 녘의 신비스러운 검은 나무들, 하늘에 떠 있는 별들과 흐르는 물, 꿈들과 오랜 수면-, 이런 생활, 생활, 생활!”(서부 전선 이상 없다11)

 

그리고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로 마치며,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는 파울의 몸을 조명한다.

 

종전 소식을 기다리는 전쟁 지역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대피 사이렌과 폭탄 터지는 소리로 시끄러웠던 도시의 밤이 당분간 조용하려나? 죽음의 공포를 겪고 있는 사람들과 달리 국가의 권력자들은 수많은 셈법과 경우의 수를 따져 이익이 되는 조항들을 매일 갱신하고 있다. 이 전쟁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도 나름의 예측과 전망을 통해 종전의 때를 점치고 있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하고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불안한 가운데 어디선가 적막을 깨는 폭격 소리에 실망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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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1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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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멜랑콜리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구소영 옮김 / 알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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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후 독립한 헝가리는 혁명과 반혁명의 혼란을 겪어왔다. 독일 점령 시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역사에서 비극적 사건들로 이루어져있다.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유혈사태를 가져왔고,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독재와 혁명과 다시 반혁명으로의 부침이 많았던 역사의 경험 속에서 1980년대 말, 동구 공산권의 붕괴 위기는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켰을까? 체제 붕괴의 분위기와 국경 개방이라는 물리적 조치 등은 멀리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희망적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체제의 몰락과 함께 무질서와 혼란이 점점 확산되고, 사람들은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작가 역시 불안하지 않았을까? 무질서와 혼란과 폭동이 잠잠해지고 차갑고 잔인한 질서로 회귀했던 역사의 망령이 그를 사로잡고 공포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연착되는 기차, 쓰레기로 쌓여가는 거리, 지독한 추위, 물자 부족, 무질서는 도시(국가)의 기능 상실과 피로감을 시사하고 있다. ‘붕괴의 증상들은 알아차릴 수 있더라도 그 원인은 도저히 불가해한 일로 남았기에(12P)’ 사람들은 일상을 살면서 무질서에 가담하고, 아직 실제적 위협이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생존을 위해 득달같고 악착같은 몸부림을 친다. 들려오는 참사들과 사고들, 비행(卑行)의 소문들은 플라우프 부인이 기차에서 모르는 남자로부터 당한 위협과 더불어 다가올 대재앙, 어떤 거대한 파국, 혹은 종말이 다가온다는 불길한 예감을 갖게 한다. 이것은 곧 붕괴하게 될 구체제의 종말을 앞둔 동유럽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 작가는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 어느 도시인지를 밝히지 않고 모호하게 쓰고 있다. 불온한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 플라우프 부인은 집을 정돈하고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한 대비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하게 되는 대응이다.


각각의 인물들은 상황을 인식하고 방법을 찾는 데 있어 차이를 보인다. 에스테르의 경우가 철학자 혹은 예술가의 것이라면, 에스테르 부인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상황에 대응한다. 반면 벌루시카의 경우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자신이 추종하는 에스테르와 천체에 관심을 둘 뿐이다. 그는 우체부로서 그가 다녀할 길을 걷고 달리며 하루일과가 끝나면 태양과 달과 지구의 운동을 퍼포먼스로 사색한다. 과학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플라우프 부인, 에스테르, 에스테르 부인, 벌루시커 등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의 영역을 지키려하고 자신이 가치라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결말은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개인은 그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두문불출하며 음악의 순정율을 연구하던 에스테르는 밖에서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면서 우리는 끝장이 났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행동, 상상력에 실패했어. 심지어 우리가 왜 실패했는지 이해하려는 안쓰러운 시도조차 실패했어.(173p)’라고 하며. 그가 순정률에 천착하고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원래 주어진 질서가 망해가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스테르는 평균율을 비판하며 자연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진리를 가리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정율을 따라 조율하고 우리의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화성을 연주한다. 그러나 폭동의 기운이 가득한 바깥으로 외출 후, 그의 생각은 변한다. 산책 수 돌아와 창문을 판자로 가리고 바리케이트를 치는 모습은 플라우프 부인과 비슷하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소음이 들려오고 도시가 폭동에 휩싸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자신의 생각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벌루시커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생각하며, 그를 찾기 위해 나갔던 그는 돌아와 판자를 뜯어내고 창문을 열고, 스타인웨이 앞에 앉는다. 연주 전 베르크마이스터 화성계로 다시 재조율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편안한를 느낀다. 그가 평균율에 맞춰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것과 자신의 시계를 종탑에 맞추는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는 실패한 것인가?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거나 지금까지 생각해낸 것들을 물린다는 게 아니라 돌림노래 같은 자기-지식적인 사변의 탐닉에서 자유로워졌다.(320p)”라고 생각한다. 이성이 세계의 균열의 메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맹신했던 지성과 합리성은 세계의 고통스러운 빈틈이라기보다 부분으로 속한, 세상의 그림자라고 이해했다.(320p)” 결국 지성이란 것도 세상에 대한 반영, “들쑤시는 대화 속에 우리의 존재를 조종하는 반사작용들과 동조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가 평균율이라는 음악의 착각을 빠져 나오듯, 그는 지성이라는 것 자신의 연구가 그저 맴을 도는 탐닉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판자를 뜯어내고 창을 통해 보이는 종탑 시계를 보며 시계를 맞추는 행위는 그 의미의 상징이다.


그 주위의 모든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들의 원래 의미를 되찾았다. 창문은 다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 되었고, 난롯불은 다시 온기를 전달하는 난롯불이 되었고, 거실은 모든 흥밋거리를 앗긴 대대적인 손상에서 피난처 구실을 하기를 그만 두었고 바깥세상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문의 현장이 아니었다.(3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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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도시에 들어와 있는 서커스단은 수상하고 불온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다. 고래를 전시하는 서커스단 주위로 군중들은 몰려들고 이 군중을 위험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서커스단의 대공이라 불리는 인물은 그 소문의 중심이 된다. 단장은 대공에게 상업적 차원에서 그 칭호를 부여했으나, 기형적으로 작은 키에 평범하지 않는 목소리를 내는 그의 모호한 실체는 대공(The Prince)’이라는 이름과 함께 더욱 비밀스럽고 공포감을 조성한다. 서커스단이 거쳐온 도시마다 그의 선동에 동조해서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났다. 모여든 군중 안에는 이들도 섞여 있다. 전체주의나 파시즘이 태동할 때, 군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폭력성을 끄집어내는 '광기의 목소리'를 상징한다. 왜인지 히틀러가 떠오른다.

 

에스테르 부인은 도시의 이 혼돈과 폭동을 이용해서 짧은 시간에 권력을 쟁취하는 인물이다. ‘청결운동 위원회를 조직하고 외부로부터 도시로 군대를 끌어들여 혼란을 수습한다. 이 과정에서 중령과의 관계는 그녀의 성적 욕망이 권력에 대한 욕망과 다르지 않은 것을 엿보게 된다. ‘청결운동은 더럽고 불온한 것들을 깨끗하고 질서있게 순정한 것으로 바꾸자는 운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하나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것들은 제거해버리는 파시즘의 방법이다. 위원회는 폭도를 처형하고, 또한 에스테르 부인은 자신이 잡은 권력에 위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할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대공은 폭력으로서 권력을 상징하며, 에스테르 부인은 혼란 뒤에 되풀이 되었던 전체주의 독재의 역사를 상기시킨다.

 

벌루시커는 마음속에서 여러 번의 저항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위원회와 주방장, 너더반과 그의 친구들과 달리 벌루시커는 서커스단 주위에 모여 있는 군중들을 그이 위험하게 보지 않는다. 의심하는 자들은 강박을 전염병처럼 공유하고 있고, 그것은 그들 내부에 불안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미스터리는 고래 이상은 없다.(258p)” 그들은 단지 고래라는 생물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화를 몰래 엿들은 그는 대공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가 그 대화를 듣고서야 알게 된 것은 저항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방어했고 직감을 억눌러 서커스와 함께 도착한 그 군중과 지역민의 불길한 예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연결(265p)”을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군중들은 원래부터 폭도였을까? 그들이 폭도가 되도록 한 힘과 계기는 응집된 분노와 불안감에 선동이라는 불을 지핀 것일까? 벌루시커의 저항은 에스테르의 우울감과 다른 것일까?

 

중요한 시기에 실패한 듯 보이고 뒷걸음치는 듯 보이는 역사가 반복될 때, 또 격변의 시기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우울함과 무기력증을 보인다. 저항의 한 모습이다. 에스테르가 창을 닫고 자신의 연구에 집중하는 것, 플라우프 부인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벌루시커가 심적인 저항감을 느끼는 것 모두가 그런 모습이라 생각된다. 상충하는 감정인 듯 보이지만 내 속을 들여다보면 분노나 이런 저항감이 우울감과 함께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세계의 부조리와 파멸을 보며 멜랑콜리는 지식인이 갖게 되는 정서이자 저항의 모습이기 쉽다. 과연 그것만이 유일한 저항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플라우프 부인의 공포로 시작하여 그녀의 장례식과 시신의 부패로 끝을 맺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를 생각한다. 격변과 혼란과 불온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그녀의 시도는 무화 되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 없다. 격변의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추운 날씨에 시신은 동면의 시간을 거쳐 이내 부패를 시작하고, 그 몸에는 폭동과 같은 혼란이 시작된다. 많은 단계를 거쳐 부패가 끝나면 죽음이후 진짜 죽음과 같은 고요가 찾아온다. 그러나 그 혼돈처럼 보이는 부패에도 질서가 존재한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소멸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은 헤아릴 수 없는 명령으로 이루어진다. 이 마지막 부분이 우리에게 희망적 메시지를 주는 것인지 멜랑콜리 그 자체만 전하고 마는 것인지 각자에게 맡겨진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그래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얻는다. 우울의 감정은 역사의 부조리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그것이 언젠가는 다른 형태의 감정인 분노가 되고 역사를 다시 앞으로 가게 할 동력이 되게 할 것이다.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번역의 문제일까 생각했다. 물론 단어 선택에 있어 아쉬운 점은 있다. 그러나 원래 문장 구조를 잘 살려야만 하는 작품이기에 훼손하지 않는 것이 번역의 첫 번째 원칙이 되어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연체이고 호흡이 긴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고, 콤마(,)로 이어진 여러 개의 절은 주어가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중첩된다. 긴 문장에 삽입구는 마치 지문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 혹은 확대시킨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다층적 의미를 생산한다. 영화로 본다면 몽타주 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식 속에 흐르는 생각과 함께 사건이나 확대 이미지가 병행된다.

예를 들자면

그런 뒤 이번 주, 두 번째 주를 맞아-그녀는 등 뒤에서 우드득 손가랄 관절을 꺾었다- 깔끔한 정원, 말끔한 가정 운동은 들끓는 열의로 조직, 착수되었고, 그래서 끔찍한 폭동이 일어난 지 닷새가 못되어, 가게들은 문을 열고 그 안의 선반들은 상업적 활동의 징후를 내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487P)”

와 같은 문장이다. 청결운동을 주도해가는 에스테르 부인의 권력과 욕망을 손가락을 우두둑 꺾는 소리와 이미지로 더 강하게 설득한다. 서로 대립되는 의식과 장면들이 한 문장 안에 배치함으로 공포, 긴장감, 기괴함의 효과를 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우울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우울하지만 계속 관심을 갖게 되는 것과 그것이 희망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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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6-02-28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쪽 수를 찾아보니 536쪽의 두툼한 책이네요. 그 두께감을 느낄 수 없게 찍은 사진이라 무효~~ㅠ 책의 두께로 꿈뻑 죽게해주세요~

그레이스 2026-02-28 22:02   좋아요 0 | URL
ㅋㅋ
그런데 사탄탱고 나 헤르쉬트랑 비교해보아도 그리 둑껍게 느껴지지 않아오
어쨌든 주문이 있으니 올려보겠습니다.

차트랑 2026-02-28 20:08   좋아요 1 | URL
저의 무리한 청을 들어주신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그레이스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전에 읽으시고 올려주신 책들의 두께에 기가 눌려
꿈뻑 죽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닙지요~.

그렇게 엄메 기죽어~ 하고나면 상쾌한 기분이 든답니다.

(컴마를 남발하여 길게 쓰면, 전체 문장의 주술어를 교란시키는 효과가 있음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한 저녁 되십시요~

오류는 수정했습니다~

그레이스 2026-02-28 20:2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yamoo 2026-03-01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포슽잇! 정말 가열차게 릵으셨나봅니다. 저두 2권 갖고 있는데...아마도 읽지 못할듯해요. 수소문해 보니 가독성이 떨어진다, 재미없다는 평이 지배적이라..^^;;

그레이스 2026-03-01 10:46   좋아요 0 | URL
조금 힘들게 읽긴 했지만 읽고 나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상받을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레삭매냐 2026-03-03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러스너호르커이 작가의 책들은
사두기만 하고 아예 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네요 ㅠㅠ

그래도 오늘 <죔레는 거기에> 새로
나왔다고 해서 그거 사러 갈려구요...
그랬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2026-03-03 10:41   좋아요 1 | URL
죔레... 고민중이예요
아직 헤르쉬트.. 를 못읽어서...;;
 


시대가 다르고 플롯이 다른 책들을 읽고 비슷한 감상과 결론을 내릴 때 나는 혹시 매너리즘에 빠졌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선택하는 책들이 다 비슷한 주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무슨 책을 읽어도 같은 주제로만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일한 주제에 갇혀있는 것은 실천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아님 그 주제는 인간의 오래된 질문일까? 오래 전이든 현대이든 많은 작품에서 나는 같은 질문 앞에 멈추고 만다. 독자인 나는 모든 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같은 질문 앞에서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타임루프 안에 갇힌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와 카프카의 의 주인공들은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백치의 미시킨 공작은 불우하게 태어났다. 좋은 후원자를 만나 간질 발작과 심리 치료를 위해 스위스에 머물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기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는 자신을 백치라고 소개한다. 스스로를 백치라 말하는 미시킨 공작의 이 정체성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것이 경험을 통해 외부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귀족들은 미시킨을 향해 정중한 태도를 보이나 그 예의를 갖춘 말에는 조롱을 가득 담고 있다. 미시킨이 자신의 간질 발작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내용은 독자에게는 연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소설 속 청자들은 오히려 비웃음으로 대한다. 아마도 이런 반응은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이 질병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독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미시낀은 무언가를 지나치게 민첩하고 섬세하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기막히게 잘 전달할 줄 아(백치18. 141p)”는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한다. 사람들의 갈등과 욕망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선의를 발견하고 정직하게 접근한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곤란을 해결해주려고 한다. 그의 순수함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당혹감을 일으키고 반감마저 갖게 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욕망과 세속적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치정극 같은 내용을 담은 이 소설은 러시아의 귀족계급의 몰락과 철도와 같은 문명의 발달, 자본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한 사회에 들어온 인물 미시킨이 환대받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배제되고 추방당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욕망이 목격되고 위선이 드러난다. 미시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탐욕이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백치를 스위스와 이탈리아에서 집필했다. 그 집필 기간 동안 첫딸이 태어났고 4개월 만에 죽었다. 돈에 쫓기던 시기여서 잠시 중단했던 작업도 다시 재개해야만 했다. 그는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품을 완성한다. 아이를 잃은 도시는 그에게 얼마나 잔인할까? 더구나 경제적 이유 때문에 글을 계속 써야만 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처럼 종일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글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그는 그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적대감을 느꼈으리라.

 

카프카의 주인공 K는 측량사로서 고용되어 성()을 찾아간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고 간 일자리는 없고 성주나 성의 일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그는 그 성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의 관청은 규칙과 절차로 운영되지만, 그 체계는 모호하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K는 관청의 관리인(클람 등)과 접촉하려 하지만, 방식은 간접적이고 불확실하다. 그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관리들은 그와 관청과의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한다. 그를 소외시키고 있는 이 관료사회의 부조리는 깊고 소외를 더욱 강화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성의 주민들도 그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K는 그 사회에 환대받지 못하고,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난다.

 

카프카에게 은 통과할 수 없도록 굳게 닫혀진, 절망적인 장애를 의미한다. 그 앞에서 존재는 기다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이다. 에 나타난 이 소외의 부조리는 견고한 관료주의라는 문턱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작가 자신이 마주해야 했던, 이 세계의 닫힌 문이다.

 

K가 이 성에서 욕망하고 시도한 것은 측량사로서 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일은 학교에서 청소와 보조로서의 역할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는 것이 실존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됨을 깨닫게 된다. 사회적 요구와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지점 중 하나다. 미완성인 이 소설에서 K의 기다림이 끝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부정적 전망을 지울 수가 없다.

 

인간의 실존을 부정하는 공동체의 부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이 세계(국가, 사회)로부터 어떤 소외의 경험을 하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타자들이 기다림과 같은 상황에 놓인 대상은 무엇이고, 무시된 욕망은 무엇일까?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는 이런 소외를 경험하는 우리 사회 타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계급과 배제된 존재의 독백이다. 독백을 듣는 독자로서 내가 깊이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은 나 역시 같은 계급이고 마음속으로 같은 독백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인물들의 대화와 생각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욕망과 그 욕망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만드는 계급과 권력(홈파티」 「숲속 작은 집), 부동산 현상과 계급 간 격차의 심화(좋은 이웃, 빗방울처럼), 그로인한 실존의 문제와 존재의 고독(이물감, 레몬케이크, 안녕이라 그랬어)에 관해 들여다보게 한다.

 

, 아파트, 부동산으로 이제 우리는 여러 계급의 그들을 만들어 냈다. 욕망하고 기다리고 배제됨은 그들 때문이라는 원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의 소통할 수 없는 언어를 갖고 있다. 자본 정신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지고 특정한 계급끼리만 유통되는 언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폐지상자에 넣은 남편과 이 책을 집어올려 들춰보던 화자의 마음이 공명하며 나에게 전해져 온다. 그 감정의 실체는 치솟는 아파트 값에 의한 추방에 대한 것이 아닌 그 동안 붙들고 있던 신념을 잃어버린 상실감이다.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라고 생각했던 신념!

 

나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아님 내가 이상한가?

나는 자발적 타자인가, 소외당한 타자인가?

 

조금 우울했지만, 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 신념을 버리지 않기로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같은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 찾는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기도한다. 세상이 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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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6-02-10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이라면 역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야죠. 몇년 전에 카형제들 읽고 한참 되었는데, 책소개 동영상에서 백치에 대한 소개가 있더라구요. 그래, 다음은 백치야! 했는데 그레이스님 서재에서 <백치>를 만나네요. 저의 다음 픽은 백치입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그레이스 2026-02-10 14:00   좋아요 1 | URL
우리에게 알려진 소설들 아닌 작품들 보면 훨씬 심리적이고 현대적느낌이 있어요.
더 좋은듯 해요~!
감사합니다 ~

차트랑 2026-02-2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봐도, 읽으시는 책의 두께로다가 늘 저를 압도하시네요. 올려주신 책의 두께를 보고는 껌뻑 죽습니다 ㅠ 더불어 고무적인지라 두께 좋은 책사진 환영합니다~!

그레이스 2026-02-23 09:5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압도정도는 아니예요^^
함께 읽다보면 도움이 되요.

레삭매냐 2026-03-03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 주에 도끼샘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랑 데뷔작이라는 <가난한 사람들> 조금씩 읽기
시작했답니다.

역시 도끼샘이라는.

그레이스 2026-03-03 10:4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역시 ! 라는!

2026-03-31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31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31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6-03-31 16:00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2026-03-3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