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을 읽으면 숨을 멈추고 모든 삶의 행위들을 생각하게 된다. 뻗었던 팔을 안으로 거두게 되고, 함부로 걷던 걸음의 보폭을 줄이게 되고, 말의 단어들을 고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주변인들 혹은 타인들에게 폭력적인 삶을 살아왔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호흡을 안으로 들이마시고, 발가락을 오므리고 전신을 움츠리는 자신을 상상한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어 빗물에 손을 적시던 두 부부. 아파트가 답답해서 살 수 없다고 하는 아내의 우울질의 피가 흐르는 깡마른 몸뚱이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내 여자의 열매24p)”, 남편은 두 손에 가득 받고 있던 빗물을 아내의 얼굴에 끼얹으며 짜증을 낸다.

 

오래전 지인에게 들었던 에피소드가 기억났다. 대학생인 딸아이와 가볍게 언쟁을 하던 아빠가 손가락으로 말고 있던 쌀알크기의 휴지조각을 던지고 일어났는데, 그게 우연히 딸의 머리에 맞았고, 화가 난 아이를 달래느라 오래 걸렸다고 했다. 쌀알 만 한 휴지조각이고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고 변명하는 남편에게 돌을 들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했다는 지인의 말에 웃으면서, 딸이 서운했던 것은 그 휴지조각이 아파서가 아니라 그 서슬에 담겨있는 분노와 행위의 폭력성 때문이란 생각을 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말라가고 온 몸에 멍이 들어가던 아내는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어버린다. 남편은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식물을 돌본다. 식물이 시들고 열매를 화분에 심으며,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단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베란다 사건은 인간의 작고 무심한 동작 하나에도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분노를 담을 수 있으며,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 여자의 열매채식주의자로 나아가는 발걸음처럼 보인다. 이 단편이 미완성이라든가 습작처럼 보인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과 거부하는 심리가 채식주의자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강의 작품들은 노벨위원회 강연에서 밝힌 것처럼 몇 개의 질문들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를 쓰는 동안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 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장면은 정육점 앞을 지날 때 침이 고이는 입을 틀어막고 지나가는 영혜의 꿈이다.

 

입 안에 침이 고여. 정육점 앞을 지날 때 나는 입을 막아. 혀뿌리부터 차올라 입술을 적시는 침 때문에. 입술 사이로 새어나와 흘러내리려는 침 때문에.(채식주의자42p)

 

그녀의 반복되는 악몽들은 어린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개에 물리고, 아버지가 그 개를 잔인하게 죽이고, 개고기를 먹었던 누린내의 기억에서 그 꿈은 생겨났다. 불고기를 먹던 남편이 칼 조각을 입에서 뱉어낸 사건은 영혜가 일련의 꿈을 꾸게 된 트리거가 되었다. 아마도 그 칼 조각은 영혜 안에 있는 폭력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살인의 꿈,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꿈은 어린 시절 먹었던 개고기가 명치에 걸려 있는 것 같은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다. 영혜가 육식과 섭식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폭력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간 종이길 거부하고 식물이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죽음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먹는 행위는 에로스(eros, 성적충동)만큼이나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충동)과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특히 육식은 도살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몽고반점에서 영해의 형부인 화자는 성적 충동과 예술가의 양심이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연 몽고반점으로 촉발된 욕망은 예술가의 것일까? 하는 질문이 남는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술가의 것이라면,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 있는 폭력성을 구별하는 경계가 모호한 까닭에 더욱 많은 폭력이 생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병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채식주의자50p)”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를 향해 하는 아버지의 눈물 나는 애원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의해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욱 극적으로 폭로된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가해를 하는가?

 

영혜와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견디고, 그 시간은 두 사람에게 다른 모양의 흉터를 남겼다. 여전히 그녀들에게 고통은 진행형이다. 영혜가 입원해 있는 지방 병원을 찾아간 언니는 죄의식을 느낀다. 유독 아버지의 손찌검의 대상이었던 영혜는 자매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그냥 돌아가지 말자고 했다. 산길을 내려와 경운기를 얻어 타고 집을 향하던 길에 저녁 빛에 불타던 미루나무를 말없이 바라보던 영혜를 떠올린다.(192p) 영혜의 고통을 모른 척 했던 것은 그때도 지금도 자신 역시 고통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영혜를 실은 앰뷸런스 안에서 창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221p)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서 희망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평등을 외면했었던가, 요구 받은 정의를 얼마나 많이 회피했던가를 생각했다.

 

우리 안에는 원래부터 폭력이 내재 되어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많은 폭력 아래 놓여 있고, 폭력을 습득하고, 행사하는가를 생각한다. 폭력적인 행동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문을 쾅 닫고, 서류를 사납게 낚아채고, 볼펜을 탁탁 거린다. 내뱉는 단어, 휘젓는 손짓은 누군가를 멍들게 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화자의 아내는 식물이 되기 전 온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지가 나오고 점점 나무로 변해간다. 그녀를 멍들게 하는 것은 도시의 주거 형태의 폭력성과 그녀가 추구하는 삶에 무심한 반려라는 이름의 타자, 그리고 짜증 섞인 말과 행동들이다


범죄와 테러 행위, 사회 폭동, 국제 분쟁 같은 직접적이며 주관적폭력은 가장 가시적인 일부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인 폭력과 사회체제가 작동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객관적 폭력이 존재한다고 지젝은 말한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런 폭력을 행사하게 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라고 한 한강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 답으로서 인간 종이길 거부했던 영혜에게는 죽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재되어 있었든 학습된 것이든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해결하는 길은 두 사람이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나무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는 생각이다. 나무 불꽃은 유년시절의 영혜가 바라보던 풍경이고, 이제 영혜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하는 언니가 바라보는 풍경이다. 세계와 인간의 내면에 가득 찬 폭력을 밀어내고 관심과 배려와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표지는 에곤 실레의 <네 그루의 나무>가 담겨 있다. 그는 날카로운 선들로 야위고 핍진(乏盡)한 자화상과 피멍 투성이의 육체를 그렸던 화가다. 노을진 하늘과 땅, 나무들조차 병든 육체의 멍을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점과 선들이 섞여 있다. 사랑이 육체에 남긴 폭력적 질병과 죽음의 트라우마를 지닌 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희망을 찾은 화가의 삶과 작가의 질문들이 겹쳐진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5-02-08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여자의 열매가 그런 의미였군요 ㅋ 한강작가님의 폭력성에 대한 묘사는 너무 강렬한거 같아요 그래서 더 공감이 된다는~!!

그레이스 2025-02-08 18:52   좋아요 2 | URL

단편을 읽으면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데, 폭력, 빛 등의 주제들인듯요.
맞아요 공감!

stella.K 2025-02-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좀 당혹스러운 작품이란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해 주시니 일견 그렇구나 싶은데 아마 저는 채식주의자 이후 다른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회의스럽더군요.ㅠ

그레이스 2025-02-13 12:14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 노벨위원회 강연과 관련해서 읽으니 더욱 선명해져요.
작가가 자신의 몸을 도구로 해서 글을 쓰고, 혼이라는 존재를 통해 풀어가서 불편한게 아닌가 했어요.
사실 채식주의자는 이번이 세번째인데,,, 처음엔 저도 불편했어요.^^

2rjfnr 2025-02-09 0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블로그 글에서 한강 작가의 .책들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너무 가라앉고 착잡했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ᆢ ᆢ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드너요 ~~!!

그레이스 2025-02-09 10:1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흰> 정도 가면 조금 밝아지긴 해요
조금요^^
뭔가 희망적 메시지가 보이는...!

페크pek0501 2025-02-13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채식주의자를 읽고서 한동안 고기가 싫더군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인지 모르고 행사할 때가 있어요.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육식도 죽여서 먹고 생선도 죽여서 먹는데 식물처럼 남을 해치지 않고 그저 햇볕과 비, 만으로도 살 수 있으니 식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동생을 끝까지 돌보는 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습니다.^^

stella.K 2025-02-13 12:08   좋아요 2 | URL
그게 그뜻일 수도 있겠군요. 전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괜히 광합성이나 생각하고. 내내 멍하기만 하더군요. 😂

그레이스 2025-02-13 12:13   좋아요 2 | URL
ㅎㅎ
식물이 폭력적이지 않으니까요.
경작문화보다 육식, 수렵문화가 더욱 남성위주이고 폭력적이라고 하죠?!
<내여자의 열매>에서는 여자의 몸에 든 멍에서 가지가 나오고 잎이 나는 걸 보며, 그 상징성 때문에 감탄했어요.
다프네를 떠올리기도 했구요.^^

2025-02-14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2-14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언 매큐언의 인터뷰 기사에서 본 내용이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써야 하는 아들에게 "어느 정도의 개별 지도를 했고, 꼭 고려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고 했다. 아들은 에세이를 제출했고 점수는 C+이었다. 이언 매큐언은 아들의 선생님이 아들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고 했다. 아버지가 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아들이 불쌍했다고 한 작가의 말을 읽으며 혼자 웃었다. 흐흐

 

아들의 선생님이 동의하지 못한 것은 사실 작가의 관점이다. 독자가 읽어내는 메시지는 작가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시하는 에피소드이다. 그것이 문학의 재미고 탁월성이지 않을까? 이언 매큐언은 한 작품 안에 사랑, 젠더, 죽음, 정치, 언론, 예술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추리를 요구하는 플롯 안에 씨와 날로 엮어 놓는다. 그 중 한 두 가지 틀로 읽어도 생각할 많은 논제들이 생성된다.

 

그의 작품 암스테르담안에서 역시 많은 사회적 담론을 건져 올린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이언 매큐언의 작품에는 그만의 반전이 있다.

 

몰리 레인은 팜므 파탈이었던 듯하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남자들은 거의 몰리와 관계가 있었다. 그중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 저널리스트 버넌 핼리데이, 외무장관 줄리언 가머니는 그녀와 동거했거나 특별한 관계가 지속되었던 남자들이다. 이 장례의 조문을 받고 있는 출판업자 조지 레인은 그녀가 죽기 전 결혼한 남편이다.

 

클라이브는 조문객들을 바라보며 자신과 몰리 세대의 노래 가사를 떠올리며 그 가사 “Talking about my generation”을 인용하며 그의 세대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행운의 세대,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랐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 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였다. 신설 대학, 화사한 페이퍼백들, 로큰롤의 전성기, 적당한 이상 추구.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가 부서지고 정부가 느닷없이 젖을 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구색을 갖추느라 취미와 가치관,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세대는 ‘68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히피 세대임을 추측하게 한다. 몰리와 그들이 젊은 시절 함께 했던 자유로운 삶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클라이브, 버넌, 줄리언, 조지 네 사람은 몰리를 중심으로 서로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기도 하고, 비판하고 증오하는 관계이다. 친구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의 죽음으로 인해 심리적 동요를 겪는다. 교향곡을 작곡중인 클라이브는 마지막 악장을 완성하기 위해 열중하지만 악상은 떠오르지 않고 초조해한다. 그는 긴장감 속에 왼손 통증을 느끼고 몰리와 같이 치매로 죽게 될 미래에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이 자살을 실행할 수 없을 정도로 병 들었을 경우 조력사망을 할 수 있도록 버넌에게 부탁한다. 버넌 역시 클라이브에게 같은 부탁을 한다. 버넌은 장례식에서 돌아와 부재감을 느낀다. 자신이 죽어 사라졌을 때의 세계를 미리 경험하는 것이다.

편집국장인 버넌의 조지 가머니와 몰리의 사진을 공개하려는 시도는 언론이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산행 중 막 떠오른 악상을 붙잡아 작업에 열중하던 중, 성폭행의 위험에 처한 여자를 모른 척하고 악보를 그리고 있는 클라이브에게서 예술가의 이기심을 본다. 이와 관련해 클라이브와 버넌은 설전을 벌이고 서로의 행위를 비난한다. 두 사람은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서로를 향한 감정의 실체를 드러낸다.

 

부유했던 클라이브는 버넌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도움을 준 친구, 도움을 받은 친구 사이에 우정과 고마움만 있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졸렬하다. 둘 사이에 있었던 몰리라는 존재 역시 관계를 복잡하게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애증은 미움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감정 때문에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려는 도구로서 언론이 얼마나 자주 유용하게 사용되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도덕성을 잃은 매체는 살인도구이다. 저널리즘을 신뢰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진실이 무엇인지 가려내기 힘든 혼란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기에 많은 경우 그 글의 진위나 의도를 의심하면서 보게 된다. 반면, 스캔들은 왜 그렇게도 빨리 믿고 퍼지는지!

 

멀리서 목격한 범죄현장을 외면하고 서둘러 돌아오는 클라이브에게서 도시의 익명성과 유폐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삶을 보게 된다. 타인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그들은 곤경에 빠진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 이 부작위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죄되지 않기에 잠시 죄책감에 혼란스러웠던 양심은 곧바로 회복된다. 그는 곧바로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안락사는 우리에게 닥친 시급하지만 오래 숙고하게 되는 문제다. 자신이 죽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뇌사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맞은 몰리처럼 되기 싫어서 클라이브와 버넌은 서로에게 조력사망을 부탁했지만, 조력사망은 청부살인이 되어버린다. 환각 상태에서 두 사람은 자신에게 죽음이 닥친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한다. 몰리의 죽음과 차이가 없다. 아이러니다.

결국 모든 것을 눈치 챈 버넌의 이 마지막 말이 나의 뇌리에 남았다.

 

저것들이 산통 다 깨는군.”

 

질문들이 연속해서 떠오른다. 자연사보다 안락사가 더 친절할까? 스스로를 향한 살의와 타인의 살의 중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죽는다면 그 죽음을 환영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에게 죽음은 자연스럽지 않다. 언제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이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세상은 돌아가고 있다. 버넌이 자신의 부재감을 경험했던 것처럼. 이 사실이 제일 공포스럽지 않을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5-01-27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댓글쓰다가 중간에 바로 업로드가 되어버렸네요ㅎㅎ 이언 매큐언의 소설로 들어가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친밀함 속에 숨겨져 있던 본심과 실체가 드러나는 내용이 담겨져있는 것 같기도하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여러가지 사회적 담론들이 들어가있는 소설인 것 같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부작위는 법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것, 정말 와 닿아요. 해야되는 것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것을 규정지으려 하면서,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선 별다른 책임감이나 기준을 적용하진 않죠. 부작위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들도 많이 보게 되는데 역시 그레이스님께서 잘 짚어주셔서 나중에 이언 매큐언 소설 읽을 때 꼭 참고할게요! 멋진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ㅎㅎ

그레이스 2025-01-27 18:1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부족한 리뷰 잘 읽어주시고 이렇게 긴 댓글도 정성스럽게 달아주셨네요.
이언 매큐언은 항상 생각할 많은 지점을 갖고 있는듯요^^
반면 내용은 술술 읽히구요.
전야제님 명절 잘 보내세요~~

전야제 2025-01-27 18:20   좋아요 1 | URL
부족하다니요! 넘치게 훌륭해요. 짚어주신 포인트들 항상 많이 생각하고 배우고 있는걸요ㅎㅎ
그레이스님도 설 연휴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래요^^
 


발터 벤야민은 발자크는 정확한 지형적 등고선을 그려 세계의 신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그리고 파리는 그의 신화가 자라난 곳이라고 말한다. 이런 문장들 때문에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읽고 싶은 것이다. 파리는 발자크의 인간극에 등장하는 은행가, 의사, 고리대금업자, 매춘부, 변호사, 군인, 언론인, 작가, 예술가 등 잡다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발자크는 이들을 등장시켜 파리의 평면을 구석구석 그리고, 그들의 풍속을 전시한다. 발자크의 작품은 19세기 파리라는 도시를 조망하고, 그 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내실을 들여다보는 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도시 공간을 점유하고, 이주하고, 계층을 형성해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전달한다. 그의 작품 덕에 흩어져있는 여러 자료들이 통합되고 재구성된 도시의 이미지가 전달된다. 그렇게 완성된 이미지, 19세기 파리 증강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파리는 발자크의 작품 거의 모든 곳에서 등장한다. 때로는 시골 지형에 그늘을 던지는 그림자다. 한 도시의 역사적 지형의 온갖 양상을 노출한다.”

그는 도시에서 신화를 제거하고 그 도시에 충만해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제거함으로써 그 도시의 현 상황에 대해서뿐 아니라 그것의 장래 모습까지를 조망하는 새로운 시야를 열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진술이 기대고 있는 심리적 버팀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노출시키며 도시의 문서고에 소장된 생명 없는 자료들이 길을 잃곤 하는 욕망이 혼탁한 연극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근대적 자아가 구축되는 방식과 도시가 이루는 변증법이 밝혀진다.(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데이비드 하비, 45-50p)“

 

13인당 이야기에 실려 있는 3편의 소설 페라귀스, 랑제 공작 부인, 황금 눈의 여인을 읽다보면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들은 혁명 이후 결성된 비밀결사의 멤버이거나 연루된 사람들이다. ‘페라귀스는 혁명 후 결성된 여러 결사체 중 하나인 데보랑의 수장을 일컫는 말이다. ‘데보랑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예루살렘 성전의 석공들에게까지 이른다. 이런 기원은 이 집단에 비밀스러움과 신화성을 부여한다. 13인당은 흩어져버린 데보랑13인의 조직원들이다. 3편의 소설들은 이들이나 사건들보다는 파리의 지형과 힘의 이동, 내밀한 공간의 풍경들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작가 스스로 이런 내용에 더 힘을 쏟고 있다는 생각이다.

 

발자크는 페라귀스에서 파리는 살아있는 괴물”, “가장 매력적인 괴물이라고 말한다.

여기는 아름다운 여인인가 하면, 저기는 늙고 가난한 남자다. 여기는 마치 새로운 왕조의 화폐처럼 아주 새것인가 하면, 이쪽 구석은 유행을 따르는 여인처럼 우아하다. 완벽한 괴물이지 않는가! 학문과 천재성으로 가득한 다락방이 머리에 해당된다면, 낮은 층들은 포만감으로 행복한 위장에 해당되며, 상점들은 진정 발에 해당될 것이다. 분주히 걸어다니는 사람들, 바쁜 사람들이 그곳에서 나온다. 이 괴물은 항상 얼마나 활기찬 삶을 살고 있는가! 무도회의 마지막 마차가 파리라는 괴물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멈추는 새벽 시간이 되기 무섭게 괴물의 팔에 해당되는, 외곽에 퍼져 있는 구역들은 벌써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하품하듯 살짝 틈이 보이던 문들은 이제 활짝 열린다. 그 문들은 마치 수만 명의 남자 혹은 여자에게 보이지 않게 조종당하는 거대한 바닷가재의 점막과도 같다.(25p)”

 

그러나 오, 파리여! 너의 음침한 풍경, 어둠 사이로 살짝 비치는 빛, 깊고도 고요한 너의 막다른 골목들을 찬미해보지 않은 자, 밤 열두시와 새벽 두시 사이에 너의 웅성거림을 들어보지 않은 자, 그들은 너의 진정한 시()에 대해, 너의 기이할 정도로 몹시 상반된 두 얼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극소수의 몇몇 애호가들은 파리를 음미하면서 절대로 아무 생각 없이 걷지 않으며, 파리의 생김새를 너무나 잘 알기에 무사마귀 하나도 부스럼 하나도 붉은 반점 하나도 다 가려낸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 파리는 늘 괴물 같으면서도 경이로운 그 무엇이요, 활동과 기계와 사유의 놀라운 집합체다. 또한 수십만 개의 소설이 탄생하는 도시오, 지성이 모여드는 세계의 머리다. 그러나 파리 애호가들에게 파리는 슬프거나 쾌활하고, 추하거나 아름다우며, 생명이 넘치거나 죽은 것과도 같다. 그들에게 파리는 하나의 창조물이다.(27p)”

 

페라귀스는 오귀스트 드 몰랭쿠르가 생 제르맹 사교계의 여왕 쥘 부인(클레망스)이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거리, 솔리 가에서 목격하고 미심쩍어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발자크는 파리의 길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수치스러운 인간이 존재하듯, 파리에는 불명예스러운 길이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고상한 길도 있고, 정직한 길도 있으며, 아직 그 길이 도덕적으로 어떤지에 대한 평판이 형성하지 않은 새로운 길도 있다. 또한 암살자의 길도, 상속받은 늙은 과부보다 더 늙어 보이는 길도, 존경받을 만한 길도 있으며, 늘 깨끗한 길이 있는가 하면 늘 더러운 길도 있다. 노동자의 길도, 근로자의 길도, 장사꾼의 길도 있다. 다시 말해 파리의 길은 인간의 속성을 지닌다. 또한 길이 생긴 모양에 따라 우리는 그 길에 대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고정된 생각을 품게 된다(23-25p)”

파리의 길은 인간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 뒷골목은 도시의 상징과 기호, 역사를 담고 있다. 더 나아가 현대의 도시에서도 내가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혹은 어느 거리에 살고 있는가가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클레망스의 시신을 찾아 화장해서 재를 간직하려는 쥘 공작, 그를 위해 친구 자케가 행정 처리를 한다. 그가 수행하는 서류작성과 절차의 지난한 과정은 파리에서의 죽음은 그 어떤 수도에서의 죽음과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검은 시트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의 수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는 도시, 법적으로 일곱 등급의 장례식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도시, 돈의 액수에 따라 망자를 덮는 흙을 파는 도시, 고통을 이중으로 이용하는 도시, 교회의 사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서도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도시, <진노의 날>을 부를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성가대원이 참여할 경우 교회 재산 관리자가 개입해 돈을 더 요구하는 도시, 그런 도시에서는 그 무엇도, 설사 그게 고통과 관련된 것일지라도 관료적 인습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185p)”

 

관 속에서도 관료주의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반면 그물이 쳐진 다리의 하류 쪽 강에 몸을 던지는 이다의 죽음은 클레망스의 죽음과 대조된다.

 

 

랑제 공작 부인은 귀족계급의 특징을 완벽히 지니고 얼마 동안 그 계급의 전형으로 간주되던여인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몽리보 후작은 혁명을 지지하는 비밀결사의 일원이며 유능한 군인이다. 몽리보를 유혹하기 위한 그녀의 아양과 교태는 사교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태도다. 몽리보는 그녀에게 빠졌었으나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무시한다. 그녀의 이 태도는 구태에 빠진,여전히 과거를 답습하고 있는 왕정복고시대 복귀한 망명 귀족들을 비판하기 위한 상징이다.

 

이들은 생 제르맹 사교계에서 만났다. “사십여 년 전부터, 파리에서는 그들의 태도나 말투 등 한마디로 생 제르맹의 관습이 일찍이 궁정이 하던 역할을 하게 되었다.(240p)” 파리의 상류계급에게는 그들의 중심지가 있었고, 그 장소는 이동해 왔다. “14세기에는 생 폴 저택이, 15세기에는 루브르궁이, 16세기에는 궁정과 랑부예 부인의 저택과 루아얄 광장이, 그리고 17세기와 18세기에는 베르사유 궁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었다.” 루아얄 광장 주변에 거주하던 귀족들은 주변에 상점들이 들어서고 구역의 평판이 나빠지자 강 건너 생 제르맹 구역으로 이동했다. 언제나 도시의 상류 계급은 여유 있는 공간을 점유하고 배타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런 욕구들의 흐름이 파리를 모습을 형성하고 바꿔간다. 도시 전체라는 공간적 관점과 긴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살아있는 생물(괴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왕정복고 이후 귀족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몰락의 원인을 서술한다. 왕정복고 이후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그 의무는 저버리고 벼락출세자들처럼 자신의 탐욕만을 쫓았다. 벼락출세자들이라면 부르주아이고, 탐욕의 대상은 돈이다. 돈은 힘을 나타내는 하나의 기호일 뿐인데, 사실 그들이 갖고 있는 내재적 가치를 버리고 똑같이 돈을 쫓고, 버려야할 전통과 구습을 쫓았기에 힘을 잃었다고 발자크는 말한다. 그들의 폐쇄성 또한 영국의 상원과 비교하면서 비판받는다. 랑제공작부인의 죽음은 생 제르맹의 귀족들의 몰락을 상징한다.

 

황금 눈의 여인파리의 인상학에서 발자크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에서 지옥의 기운을 읽는다. 그리고 신곡의 지옥 이미지를 불러온다.(436p) 그리고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네 계급노동자(프롤레타리아), 하류 중산층, 상류 중산계층, 예술가으로 나눈다.

노동자들에게 휴식처럼 보이는 쾌락은 몸을 지치게 만드는 방탕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다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터, 아마 그들도 멋진 남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릴 적부터 힘과 망치와 절단기와 방적공장의 지배하에 들어가, 일찍이 유황을 뒤집어 쓴 흉한 처지가 된다. 못생기고 힘센 그 집단을 상징하리라. 기계에 대한 이해력은 숭고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도 안다.(440p)”

이 계급에 대한 묘사들은 마르크스가 주목하고 인용했다는 이미지들이다. 이 계급을 나누는 데 작동하는 시스템은 당연히 자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별로 차이가 없다. 발자크의 통찰과 예지가 빛나는 지점이다.

이렇듯 파리에서 하층민들은 살기 위해 과도하게 움직이고, 두 부류의 부르주아지들은 몸을 망가뜨려가면서 취한 이득을 타락을 위해 낭비하고, 예술가들의 사유는 너무도 냉혹하며, 상류층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도한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니 파리 사람들 얼굴이 어찌 흉측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러나 파리에서는 하층민이건 중산층이건 상류층이건 모두가 필요라고 하는 냉혹한 여신의 채찍을 맞으면서 계속해서 달리고, 뛰어다닌다. 펄쩍펄쩍 뛰고, 깡충깡충 뛴다.(458p)”

가히 신곡지옥에서 채찍을 피해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무리의 이미지다.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곳에서 목격된 쥘 부인의 불행은 파리의 공간이 갖고 있는 계급을 보여준다. 몽리보가 랑제 공작 부인의 내실에 들어가는 것은 한 사람의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몽리보가 랑제 공작 부인을 자신의 방으로 납치하는 것과 앙리가 파키타의 비밀 저택으로 가는 것은 파리의 공간에 존재하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힘을 가지려는 시도다. 묘지는 그 힘에서 벗어난 장소임에도 역시 권력이 그들의 사후에도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13인당 이야기인물들의 삶은 파리의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공간의 권력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 또한 마찬가지다. 수많은 도시계획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파악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은 욕망을 읽는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자가 거대 도시를 읽는 방법에 있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진단과 해법에는 반대한다.

 

파리를 살아있는 괴물이라 말했던 발자크의 통찰, 그리고 그 도시를 괴물로 만들어가는 인간의 욕망, 그 욕망이 만들어낸 채찍에 쫓겨 이리저리 달리는 지옥의 이미지!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4-12-2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꼭 발자크의 소설들을 도전해보겠습니다! 한 권은 구매했는데 아직 시도도 못했어요. 소개해주신 데이비드 하비의 책이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4-12-27 13:24   좋아요 1 | URL
^^
데이비드 하비 책 좋아요. 추천합니다.
독서 응원합니다.
 
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사는 세상엔 설마 하던 일이 언제든지 일어난다.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감시 당하고, 생존 위협을 받고, 통행을 금지 당하고, 내전(內戰) 의 한복판에서 두 아들을 잃고, 필사의 탈출을 한다. 주인공 아일리시 스택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녀가 설마 하던 일이다. 설마 했기에 그 땅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이라면 난 내가 새처럼 자유롭다고 말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이런 기괴한 일에 휘말렸는데 어떻게 자유의지가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한 가지 일이 다른 일로 이어지고, 결국 그 빌어먹을 사태가 스스로의 동력을 찾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352p)”

 

아일랜드를 탈출하기 위해 바닷가 공장 건물에 머물 때 만난 모나가 한 말이다. 그녀 역시 아일리시와 다를 바 없는 고통을 겪고 떠나는 중이다. 일찌감치 떠나라고 권하는 말들을 무시한 것은 이렇게 생존의 탈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속히 떠나라는 예언자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복 경찰관이 집을 다녀갔을 때 아일리시는 무언가가 집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든다.” 여기서 나는 숨을 멈추고 읽어 내려갔다. 무언가는 두 남자와 함께 서 있다가 현관으로 들어왔고, 살금살금 집안을 걸어 다닌다. 집 밖 어둠의 일부가 들어왔다. 두려움 혹은 불행일까? 아일리시가 겪는 현실과 마음은 서로 대비를 이루며 묘사된다. 사실적인 서술과 환상적 표현으로. 시를 읽는 것 같다.

 

교원 노조원인 남편 래리 스택이 망설이고 있을 때 그녀는 그에게 해야 돼, 이제 당신이나 내 문제가 아니야, …… 교사가 규탄하지 않으면 우리의 헌법적 권리를 위해서 들고 일어날 사람이 달리 어디 있겠어?(41p)”라고 말할 때에도 그가 그 아침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는 래리에게 가서 해치워.”라고 말했던 그 시간에서 그녀는 떠나오지 못한다.

 

문 앞에서 주저하던 래리, 녹색 부츠에 발을 집어넣은 다음 비옷을 입으려 애쓰던 래리를 생각한다.(53p)”

 

아일리시는 네 아이를 돌보며, GNSB에 체포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녀는 보안 위험인물로 간주되고, 직장을 잃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며,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정부군과 혁명군의 내전이 발발하고, 그녀의 삶은 급변한다.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작가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그러나 그것은 상상으로 보여준 실재이다. 그가 보여준 시적 표현들에 공감되어서 더욱 슬프다. 나의 공감은 이 세상엔 이런 비극이 실재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작가는 아일랜드에 독재 정부가 집권하고, 감시와 통제와 폭력으로 통치하는 전제국가에서 저항, 체포, 죽음, 탈출의 연속적 사건을 겪어내는 아일리시의 삶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상의 허구지만, 시리아 내전이나, 우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실재성을 전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을 때와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나의 느낌은 다르다. 


불면의 밤을 지나고,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 ‘설마만일사이에서 몸서리를 친다. 비상계엄이 해제되지 않고 지속되었다면, 국지전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면, 내란이 성공했다면…… 하는 가정들이 일으킨 각성들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잠을 설친다. 지금은 시위대에 참여하기 위해 시간을 내지만, 만일 아일리시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불의와 압제에 저항할 용기도 내 남편과 아이들을 독려할 수 있는 순수함도 나에겐 없음을 발견하고 수치심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아일리시가 그렇듯 헌신과 사랑의 세상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공포의 세상에 살도록 저주받는 것(354p)”을 본다. 차라리 내 아이들 나이 때 가졌던 무모함이라도 되갖는 게 마음 편할까?

 

실제일까 하는 의심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몇 분의 오차로, 몇 사람의 소극적 행동으로, 다수의 적극적 저항으로, 다행히 피해간 사악함들, 그것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예언들이 소리치고 있다. 꿈인가 싶은 시간들은 지나갔다. 추스르고 직시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생각이 일어 이 글을 쓴다.

 

세상은 꿈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달아날 방법이 없는 꿈일 뿐이고 그러한 삶의 대가는 고통이다, ……예언자가 노래하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과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의 종말이다(355p)”

 

더 이상 이 글을 이어갈 말이 없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야제 2024-12-13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볼게요. 담담하게 억누르는 감정이 저에게도 전해집니다ㅠㅠ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12-14 08:37   좋아요 1 | URL
ㅠㅠ
감사합니다
이제 좀 감정이 정리되고 행동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드러나는 진실에 놀라고 있습니다.
전야제님 혼란한 시기에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coolcat329 2025-01-20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마 그런 일이...이런 생각은 안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12/3 이후에도 계속 드러나는 믿지 못할 진실들에 세상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일리시도 설마설마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큰 고통을 겪잖아요. ㅠㅠ
글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 2025-01-20 15:22   좋아요 1 | URL
이러다 내전상황까지 갈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ㅠㅠ
 
청명상하도 - 송나라의 하루
톈위빈 지음, 김주희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돋보기로 들여다 보듯 세밀한 부분을 확대해서 해설한다. 그는 그 컷들에서 북송의 기술, 경제, 문화, 생활상 등과 함께 그날의 분위기,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읽어내고 있다. 청명절 하루의 풍경은 이 긴 화폭에 담을 수밖에 없는 많은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