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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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의 친척들은 모두 앞에 자를 붙여 칭한다. 외조모, 외외증조모, ……. 4대를 거슬러 올라간 여자들의 서사를 이야기할 때 이 자는 탈락한다. 좋았다. 유전자가 대물림 되듯 당연하게 생각되던 삶의 태도, 말하지 않고 견디던 여성들의 삶이 만들어놓은 토양은 여전히 우리에게 같은 열매를 요구한다. 매서운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울음을 받아주었던 소매는 서사를 기록하는 페이지가 되고, 대물림에서 벗어나는 치유가 된다.

 

지연은 10살 무렵의 기억이 있는 희령의 천문대 연구원으로 지원해서 직장을 옮긴다. 엄마랑 할머니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로 찾아온 적이 없는 곳이다. 집을 구해 이사한 후,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엄마(미선)와 할머니(영옥), 증조모(삼천)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다. 일제 강점기였고, 증조모는 위안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천주교 순교자 집안의 자녀인 증조부는 사람은 빈부귀천이 없음을 믿었고 실천한다. 처음 본 증조모에 대한 연민과 끌림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모의 반대를 거역하고, 증조모와 결혼을 하고 삼천을 떠난다. 증조모는 병상에 있는 자신의 엄마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34p) 두 사람은 개성에 자리를 잡고, 증조모는 삼천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남편을 가족들과 의절하게 했다는 이유로 이웃들과 성당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는다. 증조부는 가족과의 단절과 친지들의 외면과 비난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의 마음속에 노여움과 억울함이 생겨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울화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체념을 배우고, 남편의 의중을 살피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체념은 고조모가 가르쳐 준 사는 법이다. 그녀들에게 기대는 사치뿐 아니라 위험한 무엇이었다.

 

이것이 대물림된 체념의 역사다. 백정과 여성이라는 신분 중에 어떤 것이 고조모나 증조모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 1887년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었던 박서양을 떠올려 보면 드물기는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이 시기 특히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천민 남성들에게는 기회가 있긴 했었다. 여성인 삼천은 양민인 남편과 결혼했어도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독교적인 신념도 그들의 공동체를 설득하지 못했다. 남편에게로 귀속되는 결혼제도를 받아들여 도피와 안전을 도모했던 그녀는 오히려 침묵 속에 갇힌다. 거부했던 엄마의 삶의 태도를 몸에 새기고 있다.

 

그 체념은 영옥에게 이어진다. 그녀에게는 백정의 핏줄이라는 꼬리표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서,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받는 무심함이 덧붙여진다.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이 결핍되었던 영옥은 그의 결정과 명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혼인 줄 알면서도 남선과 결혼시키고, 아버지는 오히려 남편을 붙잡아놓지 못한 딸의 무능을 비난한다. 영옥과 남선 사이에 낳은 딸 미선은 남선과 전처의 호적에 올려지고, 영옥은 홀로 미선을 키운다.

 

미선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남편의 횡포에도 침묵하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불행을 참는 여성이다. 큰 딸의 죽음에 대해 평생 죄의식을 지닌 엄마다. 유방암이 다시 재발해서 병원에 입원했어도 문병조차 하지 않는 남편의 무심함을 견딘다. 딸에게도 이혼하지 말고 참고 살 것을 종용한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17p)

 

이혼 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지연에게 미선은 딸의 이혼 때문에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18p) 한다. 모든 문제는 마음먹기 마련이라고 약 없이 이겨보라고 한다. 캐럴라인 냅이 인용했듯 자신의 열망과 야망과 좌절감을 억누르고 있는 어머니가 자녀의 기쁨과 실패에 감정이입하며 공감할 수 없다”(134p 욕구들). 어쩌면 그녀들은 자녀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안정적으로 평안하게 살길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이 굴복하고 있는 체념이라는 삶의 태도는 정말 안정과 평안을 주는가? 하고 묻게 된다.

 

한편 4대에 걸친 여자들의 감옥같은 삶에 한 줄기 빛은 바로 사람이었다. 개성에서 모두가 외면할 때 새비는 삼천을 위해주었고, 죽음과 같은 출산을 겪을 때 손을 잡아주었다. 이름이 아닌 떠나온 고향의 이름으로 불리던 두 여자는 일제강점기와 히로시마 원폭, 6.26 전쟁을 겪으며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한다. 헤어짐의 고통을 겪고 때로는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밤이 새도록 서로의 슬픔과 원통함을 끌어 안아주었다. 삼천에게 새비는 자신을 귀애해주고, 애지중지한”(116p) 유일한 사람이었다. 영옥과 희자는 3년 터울로 태어나 어머니들의 우정을 이어받지만 성장 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소원해진다. 영옥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는 희자에 대해 느꼈던 질투를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지 못했던 후회를 갖고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새비 아저씨, 명숙 할머니, 희자에 대한 회환은 김소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보여졌던 헤어진 사람들에 대한 감정- 헤아리지 못했던 타인의 슬픔, 오해, 착각, 꺼내지 못했던 말들, 질투와 같은 못난 감정들에 대한 후회-을 소환한다. 전작에서와 달리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의 해후는 서로의 아픔을 공감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다름 때문일 것이다. 미선은 명희가 숨통이 되고, 지영에게는 지우라는 친구가 가끔씩 찾아온다. 자신의 아픔을 알고 있고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지연은 할머니의 설화(說話)에서 치유를 경험한다. 어머니에게 대물림된 체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에게 지워진 억압의 근원을 찾아낸다. 그녀가 희령을 떠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혼녀임을 당당히 밝힌 것이 상처로 돌아오는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지만 떠날 수 있는 자유함과 새로운 곳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는 역사는 4대까지이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역사-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거부할 때 공동체는 그녀를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학대해 온 역사-를 알고 있다. 맘모스가 출몰하는 시대, 세상의 모든 딸들의 주인공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할 때,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홀로 아이를 낳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 굴레는 원시적이고 강력하다. 아이를 낳는 몸에 새겨진 왜곡된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이제는 한사람이 한사람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넘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서사를 말하고 있다. 그 것은 텍스트가 되고 역사가 된다. 아프리카인들의 노예 해방사를 기록함으로 인종갈등에 대한 옳은 시각을 만들어 가듯이, 지속적으로 말하고 귀 기울임으로 만들어진 여성의 역사는 강요된 침묵과 견딤의 시간들을 증언하고, 덧입혀진 의미를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이 아닌 자신 안에 갇힌 상처받은 여자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3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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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4 17: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등.🖐 ^@^

그레이스 2021-09-04 17:58   좋아요 5 | URL
😍🖐👍

scott 2021-09-04 20:38   좋아요 3 | URL
[, 지속적으로 말하고 귀 기울임]
이 문장 공감! 합니다
끊임없이 공론화 시켜야 합니다
참고만 사는게 미덕인 세상이 아뉨 ^ㅅ^

그레이스 2021-09-04 20:43   좋아요 3 | URL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페크pek0501 2021-09-04 18: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뿌듯한 독서하셨네요. ^^

그레이스 2021-09-04 18:21   좋아요 6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9-04 20: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등~!! 역시 답은 사람인것 같아요. 사람 때문에 받은 아픔은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치유한다~!! 이 책 완전 👍

그레이스 2021-09-04 20:34   좋아요 4 | URL
맞아요~♡

붕붕툐툐 2021-09-04 2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얘기합니다. 그레이스님~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리뷰 많이 봤는데, 그레이스님 리뷰에는 몰랐던 내용도 실려 있네요~ 더 기대가 됩니다~😉

그레이스 2021-09-04 22:41   좋아요 4 | URL
감사한 말씀이네요!
툐툐님 말씀에 진심 감사합니다☺

han22598 2021-09-05 1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최은영 작가님 완전 팬이라서...이 책 리뷰를 제가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보지 않으려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 많은 분들이 읽고 쓰는 걸 보니, 역시나 좋은 글을 내놓으셨구나 하는 확인정도만 하고 지나치고 있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9-05 15:10   좋아요 2 | URL
예 리뷰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mini74 2021-09-05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매 ㅠㅠ 서로의 울음, 아이의 울음 다 받아주던 엄마 할매의 소매가 생각나게 하는 글이네요. ㅠㅠ 요즘 아이들은 친 외 라는 말대신 동네이름을 붙여 할머니를 부르더라고요. 땡땡동할머니 이런 식. 저 어릴때 할머니가 내가 진짜 친이고 외할머니는 가짜라고 그래서 울었거든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1-09-05 21:19   좋아요 2 | URL
외자 붙이는거
조금 억울해요.
그쵸?!
그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
땡땡동 할머니...♡

서니데이 2021-09-0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보이네요.
최은영 작가의 책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06 22:44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굿밤요!

희선 2021-09-07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습니다 백정딸은 여전히 백정딸로 보고 백정아들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군요 70~80년대도 생각납니다 누나나 여동생은 돈 벌고 오빠나 남동생은 공부하던 거... 이제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차별은 있군요 갈수록 나아지면 좋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07 06:3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희선님.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지나갈 수 없는 것도 있어요. 그쵸.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바라만 볼수 없는...
반드시 말하고 고쳐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