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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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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새벽에 간호사가 혼곤히 잠든 한영진을 깨워 수유실로 들여보낸 뒤 가슴에 아기를 안길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한영진은 그 아기가 낯설었다. ……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 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 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스스로를 모성이라는 게 결여된 잘못된 인간이라고 여겼고 ……

73p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를 유심히 보고, 가엾게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인내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죽음과 같은 출산과 그 출산이라는 것에 딸려오는 여성에게 씌워지는 의미와 구속들. 보편적이고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다가오는 구속들. 그러나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부정하고 저항하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식의 폭력 앞에서 들키지 않으려 하면서 얼굴을 굳힐 뿐이지. 강요된 모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 인격으로서의 여성에게 폭력적이다. 그 폭력은 은근하게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올 때가 많다.

아이와 간격이 벌어진 후에야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공감한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 분신, 피붙이…… 이런 말들이 이기적이고 본질에 덧입혀진 모성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 생명, 내가 보호하고 사랑해 주어야 할 생명 속에 나를 닮은 모습이 발견될 때 경이로움, 신비를 경험한다. 이러한 과정 없이 강요되고 맹목적인 모성에는 아이에 대한 존중은 결여될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순일.

한국전쟁 때 비극을 맞이한 가문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마당 눈더미 속에 던져진 자신을 안아 올리던 어머니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 다섯 살 때 동생을 업고 어른들을 따라 도망치다 논두렁에 남겨졌던 외로움과 막막함, 동생 은일을 화상으로 죽게 했다는 죄책감, 외가에서 받은 부당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끌려와 당한 수모, 탈출을 위한 결혼 등이 뒤섞여 있다. 이순일은 자신의 아이들인 한영진, 한세진, 한만수가 그 일들을 이야기로도 겪게 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이런 어려움 없이 살아가길 바란다.

아이들이 잘살기를 바랬고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는 잘 몰라서 그런 꿈을 꾸었다고 되뇌인다. 이순일은 아이를 낳고 맞벌이를 하고 있는 큰 딸 한영진이 사는 건물로 이사를 한다. 두 집 살림을 돌보면서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순일은 딸들에게 자신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바람처럼 딸들은 잘 살고 있는가? 여전히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는 이순일이 살았던 여자로서의 고단함이 되물림 되고 있다. 보여 지는 게 달라졌을 뿐.

이순일의 불행은 전쟁이나 이념갈등, 가난보다는 그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것이다. 삶의 형편이 나아진 현재, 딸들이 겪는 갈등은 모습은 다르지만 문제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영진이 감당해야 할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요구되어지는 삶의 태도가 그렇다. 모성과 유부녀로 규정 지어진 삶. 생각은 하지만 그저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습관이 된 방식들이 그녀를 가두는 것 같다.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


한영진이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70p


한세진은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삶 곳곳에 엄마 이순일이 겪었던 폭력과 수모는 여전하다. 그녀의 친구 하미영의 삶이 그랬고 미국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한 이모할머니의 삶이 그랬다. 미군과 결혼해 이주해 살았던 이모할머니의 삶에 그 그림자가 악착같이 달라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포들 사회에서 규정지어지고 평가된 여자로서의 그녀는 불행했다.

뉴질랜드에서 가끔 들르는 동생 한만수는 말한다. 그곳은 여자들에게 살기 좋은 곳이라고…….

과연 그럴까?

연년세세! 우리가 사는 집단 안에 흐르는 정신이 도도하다. 그 안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한영진처럼 말이나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것으로 버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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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5-14 21: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영화 <미나리>에서 부인이나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다면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봤습니다. ^^

그레이스 2021-05-14 21:43   좋아요 3 | URL
그러네요!

mini74 2021-05-14 2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성을 꼬박꼬박 붙여 이름으로 서술되는게 인상깊었어요. 가장 가까운 듯 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참 모르는 게 가족이고 그런 거리감이 느껴지는 장치같았거든요 *^^*

그레이스 2021-05-14 22:17   좋아요 3 | URL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겠군요.
그러네요.

scott 2021-05-14 23:47   좋아요 2 | URL

저도 이름이 아닌 성까지 언급되어서 독자들이 읽을때 가족 구성원 끼리도 서로 다른 개인 이라고 느꼈네요
드라마, 미니 시리즈로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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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지는 자전적 소설이다. 읽어가면서 계속 드는 의문은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미 『엄마의 말뚝』이나 『나목』에서 다뤘던 소재였다. 그런데 왜 다시 이 소설을 써야 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못 다한 말이 있었을까? 소설을 쓰고도 청산되지 않은 감정이 있었을까?


다 읽고 난 후, 다시 『엄마의 말뚝』과 『나목』을 비교해 보니 확실히 달랐다. 두 소설들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많은 부분 사실이지만 허구적인 부분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이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허구가 없었다. 특히,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엄마의 말뚝』에서는 오빠의 죽음이 극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오빠의 부상과 죽음은 너무나 초라하고 극적이지도 않다. 오랜 시간 비루해지고 파리해지면서 죽어갔다.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작가는 그런 오빠를 보는 마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적어놓는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 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34p

20대 박완서에겐 허물어지고 절뚝거리는 오빠의 육체보다도 인격이 바뀌어버린 오빠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불안함 속에 피난을 떠나던 오빠의 염치를 잃은 모습은 읽고 있는 나 역시 아연하게 만든다. 오빠의 죽음과 장례도 그렇게 누추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도 지나치게 애통하지 않아서 슬프다.


공산치하와 서울 수복 시절, 이중생활, 생존과 돈을 벌기위해 했던 일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오갔던 속물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생각들.

어떻게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와 생각을 적나라하게 쓸 수 있었을까? 어떤 작정으로…?
쉽게 쓰여 진 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은밀한 부분을 세상에 내놓고 오히려 괴롭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주저했을 텐데.


작가의 아주 은밀한 감정들을 발가벗기듯 드러내고 있어서 내내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왜 불편했을까?

작가라면, 작가가 될 소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깨졌기 때문일까? 속물적이고 소시민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가 그 감정들을 모두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자주 표현하는 말을 사용하자면,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써내려간 내밀한 사건과 감정들 때문에 나 역시 고통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발가벗듯이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은밀한 생각들이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밀하게 숨겨놓은 혐오스런 생각들을 보게 했다. 그렇게 내내 불편했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세상의 요구를 그녀는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치부와 같은 그 시절을 픽션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의도였을까? 아니 의도 같은 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숭고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았던 삶을 미화시킨 것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에게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읽는 사유가 없이 20대를 맞이한 박완서가 해방과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혼돈 속에서 생존이 하루의 시작과 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고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죄의식에 대한 참회와 치유의 글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내가 오독과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것이 실재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러니 함부로 그 시절을 겪어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요구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쟁은 남과 북을 가르고, 피난 간 사람들과 피난가지 못한 사람을 가르고,…… 많은 분열을 만들어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벌어진 채 아물지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까 생각했다.


항상 생각하게 되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상에 대한 인식, 역사관, 세계관…등 모두. 해방 전후를 살았던 세대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작가의 글은 마치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이 양키한테 붙어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추비하고 남루해진다고 고백한다. 개울가에서 구토를 일으키는 20대 박완서의 모습은 애처롭고 쓸쓸하다. 등을 쓸어주고 싶다. 청년의 때가 이래도 되는가.


그렇게 긴 고백은 엄마와 박완서 각자의 울음으로 정리한다. 그 험한 세월동안 가슴밑바닥에 눌러 놓았던 통곡이 터져 나온 것이다. 작가의 출가 후.
그녀들에게는 그렇게 각자 우는 것이 서로 마주 붙들고 우는 울음보다 더 정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위해 꼭 필요한 통과 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 한 일이었다.”
-280p

이 부분이 이해가 간 나에게 놀랐다. 도대체 어떤 정서가 자리 잡고 있기에….


얼마 전, 엄마와 이야기 하다가, 나를 결혼시킬 때 엄마가 공중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주체 못할 정도로. 엄마는 담담하게 수다 떨듯이 말하고만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고 해야 하나? 그 울음으로 그동안 감춰왔던 미안함을 고백했던 것 같다.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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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3-26 1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오늘 왤케 눈물나게 하는 글들이..😭

그레이스 2021-03-26 13:34   좋아요 4 | URL
^^;;
마지막글 얹으면서 또 울었습니다^^
어떤 책은 읽고도 글쓰기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어요.
오래 걸려 쓴 만큼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미미님 감사해요~

scott 2021-03-26 1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 어무이,,,,,
ʕ>⌓<。ʔ

mini74 2021-03-26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리 먹먹하지요. ㅠㅠ 저도 그레이스님 마음이 왜 이리 이해되고 와닿는지 ㅠㅠ
 



오래 전에는 「해방 전후사」에 관심을 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개인사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 눈길이 갔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의 삶과 의식에 더 무게를 두며 읽었다. 분단선, 개성, 서울의 현저동, 사직동, 서대문형무소 등 역사가 훑고 지나간 아픔의 공간들을 찾아보며,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의식에 더 집중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장면에 눈이 머물고, 다른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오래 전 이 책을 읽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나를 훑고 지나가며 흔적을 만들고, 그 흔적들은 마음의 무늬가 되었다. 타인의 마음에 공명하는 무늬!
독서(어슐러 르귄의 표현을 빌자면, 귀 기울이기)와 시간에 의해 짜여진…….

다시 지도를 펴놓고 내가 찾아본 것은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 걸었던 길, 서울역에 도착해서 지게꾼에게 짐을 지게하고 현저동까지 걸었던 길, 현저동에서 매동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넘어가야할 산, 숙명고보 가는 길, 그녀가 놀았다던 서대문형무소 앞마당, 피난을 가려면 어디로 해서 한강을 건너야 했을지……. 지도를 찾아봤다기보다 상상을 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더 마음이 갔다.

유년기의 기다림과 서러움, 환희와 비애를 보며 원시적 감정들을 경험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보며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감정들이 올라왔다. 어느날 유난히 새빨간 노을에 비친 마을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고,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다섯 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노을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보며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감정의 체험들이 그녀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사건들이다.

그녀가 느꼈다는 환희야 말로 나를 전율하게 했다. 그녀가 자란 넓은 들판이 있는 자연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32p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소나기를 기억했다.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표현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경험한 소나기의 장막을 떠올리게 했다.

서울로 온 그녀는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서울의 산에서 싱아를 찾으며 박적골 뒷동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러한 혼동은 아카시아의 비린 맛이 일으킨 헛구역질 때문이 아니라, 몸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방학 때마다의 귀향은 싱그러운 들판의 생명을 마음껏 호흡하는 시간이다.
그를 제일 반겨주고 아껴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사랑마루에 서까래로부터 늘어져있는 삼 줄을 남몰래 어루만지며 심장의 균열이 가는 아픔은 내게도 전달되었다. 그 줄을 붙들고 떨리는 다리로 댓돌을 디디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

한편 더 배웠다고 자부하고, 양반이라는 것을 내세우던 할아버지가 오빠의 총독부 취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것, 큰 아버지를 면서기 시키기 위해 역사책에도 기록될 만한 친일 족적을 남긴 먼 친척에게 청탁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당시 집안의 근지라는 것이 역사의식을 상실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어머님에게서도 부조리함을 경험한다. 탁월한 감수성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대학 첫해를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혼란 속에서 맞이한다. 6.25가 터지고 좌익 활동을 전력이 있던 오빠는 의용군이 되어 북으로 간다. 서울이 수복되고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를 맞이하며 피난을 떠나야 하는 그때 오빠가 돌아오고, 부상을 입은 오빠와 함께 가족은 서울에 남게 된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골목에서 갑작스런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311p

그래서 그녀의 책은 전쟁과 분단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리라. 막다른 골목에서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전복,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 후,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인식의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일제강점시대 말과 전쟁, 분단의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새롭게 인식 했을 것이고, 그 인식의 창을 통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증언했을 것이다.

박완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가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몇 권 읽은 후 전작 읽기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장에 꽂힌 작품들을 뒤적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 모임에서 책을 정하고 보니 ‘박완서 타계 10주기’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나 특별판 홍보가 인터넷 서점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백기완 선생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그 세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박완서 작가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증언할 책무가 있다’고 깨달은 것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시대에 고해야만 했던 증언자들이 있다. 그들이 한 사람씩 일을 마치고 있다.
2021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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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6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ㅠ 엄중했던 한 시대를 견뎌냈던 증언자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증언의 촛불을 꺼가니 마음이 무거워지네요!ㅠ 따듯한 저녁시간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1-02-16 1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지난 2009년에도 시대의 큰 어른들이 많이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요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듯 합니다. 2009년과는 다른 변화이길 바라봅니다 ^^:)

바람돌이 2021-02-17 0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백기완선생님이 타계하신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제게는 백기완 선생님이 제 청춘의 상징같은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때문에 그리고 이 도시에는 분향소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을 추모하면서 젊은 시절 보았던 그분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네요.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좀 더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이 이 페이퍼를 보면서 또 들기도 하네요.

JK 2021-02-17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 신청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책에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는데 쓰신 글을 보니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읽으신 것 같네요. 후속작에 해당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언젠가는 읽겠다 생각만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그레이스님의 글을 계기로 삼아 올해 안에는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2-17 16:34   좋아요 2 | URL
후기 기대할께요
함께 읽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기분 좋은 곳이예요~

고양이라디오 2021-02-22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추천하고 갑니다^^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어서 읽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1-02-22 17:38   좋아요 2 | URL
글로 후기 나누죠~^^
감사합니다~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 추카!
그레이스님의 다음편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 기대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05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시선으로부터, (10만 부 기념 새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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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시선은 방송토론이나 인터뷰에서 시평과 신념을 펼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급진적인 말들을 했다. 그는 딸들과의 대화에서 그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올 때 할 말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일관성 없을 때가 많았고, 기분에 따라 하게 될 때가 많아서 앞뒤가 안 맞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과연, 그는 그 때 한 말들을 후회하는 것일까? 만일 그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는 다시 하게 될 것이다. 후회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것은 말하고, 상처가 되더라도 생각하는 것은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한 말들이 나에게 족쇄가 되는 것을 느낄 때.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자리에서 가끔 움찔할 때가 있다. ‘과연 나는 이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고. 누군가 “당신 그때는 이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나?”고 묻는 때가 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멈칫하게 한다. 가끔은 그렇게 쏟아놓은 말들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확인할 때도 있다. 그 방식이 나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손해를 보게 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차라리 내뱉지만 않았더라도 조금은 돌아갈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시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같은 말을 했을 것이고,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10년 20년이 지나도 몸서리치며 후회 할 치기어린 말들이 있을지라도…….


시선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말들보다는 글로 고착시키는 걸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은 노출되는 자리를 신중히 삼갈 줄 아니 누군가는 내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325p

말을 많이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이 많이 보고 듣는 방송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어찌 다른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아끼고 싶지 않았을까? 당시 여자들이 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말해야 했기에 기왕에 말을 시작한 자신이 그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거칠고 격한 말들은 고요하고 잠잠해지고 침묵사이로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보다는 글이 더 많아지고……. 인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제 남은 말들은 정말로 의미 있는 사람들하고만 쓰겠다’고 하며 대중과 작별인사를 한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고. 그 역사를 아프게 온 몸으로 겪어냈음에도, 자유롭게 사랑하고, 작가로서 당당하게 할 말을 했던 심시선, 그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 시선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들은 심시선을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르다. 3대가 산 시간이 다른 것처럼. 네 자녀는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여성이지만 여성으로 살지 않고 엄마이지만 엄마로 살지 않았던 그녀의 자유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거침없이 생각을 말하는 심시선의 삶 속에 강요된 것이라곤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음에도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자유롭고 너그럽다.


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여유가 없고 불안한 마음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향해 너그럽지 못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아이들 키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쫓기듯 책을 읽고, 책 한권을 못 읽고 일어나 밥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에 가끔은 짜증이 난다. 빨래를 개며, 설거지 하며, 흘러가는 생각을 잡아두지 못해 안타깝다.


소설이지만 아이 넷을 키우며 화가로서 작가로서 심시선처럼 사는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다른 곳에서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노출된 삶이 그랬고, 그에게 꽂히는 대중의 시선이 그랬고, 자녀들에게 있었던 빈자리가 그랬을 것이다.

그렇듯 시선에게도 후회는 있다.

‘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 철쭉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가 송이 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밤 산책에서 또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꼭 전하겠습니다.

―XXX라디오 짧은 코너 <작가가 보내온 엽서>(2004)에서‘
280~281p


어떤 모양으로 살던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이런 글을 남기게 될까?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는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그러나 조금 여유를 갖고 그 때 알게 될 작은 파편의 반짝임이라도 발견하게 될 수 있길 바래본다. 그 반짝임을 일견하게 하는 바람 한 줄기가 불 때 나는 그곳에서 볼 수 있기를…….

입안에 말이 고이는 것을 보니 봄이 온 듯하다. 나의 작고 방치된 정원에는 수반이 하나 있고 새들이 와서 몸을 씻고 간다. 그 모습이 내 아이들 어릴 적을 닮았다. 찬물에 머리를 대충 감고 히히웃는 것과 어찌나 비슷한지 모른다. 꾀바르고 곰살맞은 막내가 벌써 중학생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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