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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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독서와 책을 무림과 무공으로 바꾸면 무협지가 되지 않을까? 독서가들이 유명한 북클럽에서 조우하고, 서로가 고수임을 알아본다. 그들은 이미 독서계에서 소문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독서를 통해 삶의 결계(結界)를 깨고 성장한다. 주변 사람들도 독서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이 독서회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변화는 마치 도량에만 들어가면 날로 성장하는 무술인이 생각난다.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결계(結界). 정확한 의미를 찾아봤다. 불교용어로,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장애를 없애기 위하여 비구의 의식주(衣食住)를 제한하는 일이다. 무협지나 게임에서 사용되는 '결계'는 공격에 대한 일종의 방어막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협지와 게임에 문외한인 내가 이 단어를 보고 그것을 연상했으니, 그 분야에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기질, 환경, 경험에 따라 '결계'들이 있다. 이 '결계'를 풀지 못하면 독서도 일도 때론 사랑도 잘 해내지 못하는 영역이 될 수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결계'의 의미다.

 

샤오쌍은 비둘기 북클럽에 참석하고 회원들에게 환대를 받는다. 독서계에서 샤오쌍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던 회원들은 그녀의 말에 깊은 감화를 받는다. 샤오쌍을 특별한 소설의 세계로 이끌어준 아저씨가 없었다면 지금의 독서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히 만난 동창 헤이스는 그녀를 유명한 북클럽에 초대한다. 헤이스는 페이, 리하이와 함께 그 북클럽을 만든 창단 멤버이다.

 

북클럽이 열리는 장소를 찾아 걷는 고서점거리는 해리 포터의 마법 상점 골목을 연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유유자적 이 골목 저 골목을 빙빙 돌 때 날이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졌다.…… 고서가 꽂힌 서가들 사이에 좁은 통로가 있고, 두 사람이 그 통로를 지나자마자 널찍한 다실이 보였다. …… 북클럽 장소로 가는 길에 샤오쌍은 원래의 길을 찾지 못하고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딪혔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예의 그 모습이 나타났다. 탁자 위쪽에 작은 전등이 매달려 있고 탁자 위에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34p, 42~43p)”

 

읽고 있던 XXXX의 골목들이 나타나고, 샤오쌍은 모이는 장소가 바뀌는 북클럽을 찾아 좁은 골목 모퉁이들을 돌고 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찾는다. 그런 그녀에게 자주 걸으면 익숙해질 거야라고 헤이스가 한 말의 내막은 그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삶을 사유하게 한다. 사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닿고, 주변 사람들의 삶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책읽기란 이런 것 아닐까? 책의 내용과 일상이 교차하는 것! 그녀가 마주하는 것은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사건들이며 그 사건들이 개인적 삶에 계속해서 끼어드는 것이다.

 

……앉아서 XXXX를 다시 펼쳤다. 책을 읽는데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번쩍, 천둥이 우르릉 쾅쾅 하늘을 갈랐다. ……이런 독서 분위기는 샤오쌍이 열광하는 것으로, 마음속에서 영감이 번뜩였다. ……빗소리 속에서 사유가 끊임없이 파닥거렸다. 도시를 보았고 통로를 보았으며 군중 속 거대한 동굴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옥상 테라스로 올라갔다. 위쪽 창공을 보면서 속으로 쉼 없이 외쳤다. ‘진짜 높아. , 진짜 높다!’(40~41p)”

 

다의적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동시에 그 은유는 직설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환상적이고 초현실적 분위기가 일렁인다. XXXX는 뒷부분에서 지나가듯 한 번 언급되는 파우스트가 아닐까 추측한다.

 

주인공들이 읽고 토론하는 열정과 고양된 감정들은 마치 성적 흥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성적묘사들이 격정적 독서와 교차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샤오쌍, 헤이스, 한마, 페이, 이 아저씨, 샤오마, 차오쯔와 리하이 모두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게 하는 '결계'를 갖고 있다. 이들은 독서를 통해 그것을 뛰어넘는다. 특별히 샤오쌍과 페이는 한마 안에 있는 작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격려해준다. 그녀는 자신의 결계를 뚫고 그 에너지로 글을 쓴다. 아마도 한마는 작가 자신이 아닐까 한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가족들이 책을 읽고, 읽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삶이 달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판타지다.

 

작가 찬쉐에 대한 격찬을 여러 번 읽었고, 언젠가는 읽어보리라 하고 있던 터였다. 새 책 출간 소식에 주문하고 보니, 680페이지에 달하는 작가의 제일 두꺼운 소설이었다. 첫 페이지부터 독서가들의 정서가 나를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책 두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바삐 읽어야하는 다른 책들 사이에서 틈틈이 읽었다.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까지 수위를 높여서 쓰는지 의아한 부분들을 겨우 넘기고 완주했다. 이 작가에게 붙는 "중국의 카프카,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수식어에 아직 공감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첫 작품을 잘못 선택했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책상 가까이에 오향거리를 두었다.

 

이 소설에서 북클럽 회원들의 책을 읽는 분위기는 나를 묘하게 흥분시킨다. 이런 쾌락에 가까운 나의 독서 경험들을 떠올리게 한다. 몸이 전율하고 진동하는 경험이다. 내가 '책 읽다가 지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렁이고 몸이 흔들리는 체험을 해본 적 있냐'고 하면, 지루한 얼굴로 앉아있던 중학생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황당하기도, 궁금하기도 해서인 듯하다. 샤오쌍이 말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어떤 경지로 들어가는 독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순간 어떤 진실을 맞닥뜨리거나 영감에 휩싸이는 순간이다.

 

비둘기 북클럽의 역동성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함께 하고 있는 동아리를 떠올린다. 7년이란 세월동안 함께 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떠난 사람들, 그리고 새롭게 만나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역동적이진 않지만, 나 역시 이 모임을 통해 삶의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도 있다. 모여서 생각을 나누다보면 그 만남만으로도 생성된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문뜩 이유가 없으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돌아와 또 다음 책을 펼치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 소설의 북클럽 회원들만큼 역동적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 이 소설은 판타지다. 책 몇 권을 읽고 그렇게 쉽게 변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올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과 일상이 교차하고 한 권의 사건들이 삶에 계속해서 끼어들어 반영하고 변화하는 것이 진정한 독서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 과정을 지속한다면, 더디지만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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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03-13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시죠? 다른 분 서재에서 타고 넘어와서 간만에 인사드려요. 우연히 왔지만 잘 왔다는 생각이 드는 후기이자 책 소개입니다. 저도 얼른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이번 달엔 책을 더 주문하지 않을 것 같지만 세금납부가 끝나는 4/15이후 잔고에 따라 주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4-03-13 08:16   좋아요 1 | URL
^^
예~ 안녕하세요?
세금납부...잔고... 넘 재밌어요.
제 딸 세무사 달력 보면서, 여기는 1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했는데 ㅋㅋ

읽고 좋으셨으면 합니다.
감사해요

페넬로페 2024-03-13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림의 고수인 듯한 독서가들의 활약이 궁금한데요. 결계의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집중력의 부족으로 벌써 하산하는 제가 보이네요 ㅠㅠ

그레이스 2024-03-13 09:46   좋아요 1 | URL
ㅎㅎ
책 읽다 졸고 있었습니다.
아직 안되요!ㅠㅠ

잠자냥 2024-03-13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신간이라 일단 5별주긴 했지만.... 4점 조금 넘는 별점이라고나 할까..... 판타지라는 말에도 공감해요.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을 이렇게까지 수위를 높여서 쓰는지 의아한 부분들을 겨우 넘기고 완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구절도 공감입니다. ㅋㅋㅋㅋㅋ 이렇게까지 길게 쓸 일인가 싶었습니다. 다 사랑에 빠지고 섹...하고 난리도 아님. 휴.

그레이스 2024-03-13 09:48   좋아요 1 | URL
ㅎㅎ
난감했어요
저도 잠자냥님처럼 그 부분이 상징하는게 무엇일까를 생각했어요.ㅋㅋ

그레이스 2024-03-13 09:59   좋아요 0 | URL
댓글 보다가 제가 비표준어를 썼다는 깨달음! 수정했습니다. 감사!
의식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용어를 쓰게되네요.

stella.K 2024-03-13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찬쉐를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면 이책부터 읽어보라는데요? 600페이지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언제고 한번 도전해 보겠슴다. ㅋ

그레이스 2024-03-13 10:38   좋아요 1 | URL
작가의 이름 ‘잔설‘이 넘 맘에 들어서 관심을 두고 있었죠! 어제 중국 여성분과 대화 중 이 작가를 잘 모르기에 소개해줬더니, 넘 좋아하더라구요. ‘찬쉐‘의 원어민 발음도 들어봤습니다. 노벨문학상 기대 작가란 말에 기분 좋아하더라구요.
시작은 조금 더 얇은 책도 좋을것 같아요.

자성지 2024-03-13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만나는 중국 작가인데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하여 읽든지 한 권을 사서 읽든지 해야겠네요. 결계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새기며 독서에 대한 의지를 다집니다.

그레이스 2024-03-13 15:59   좋아요 0 | URL
예~
독서의 의지는 활활 타오르게 될겁니다.
ㅎㅎ

독서괭 2024-03-1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이 글 읽으면서 오 재밌겠는데?? 했다가 나중에 힘들게 완독하셨다는 거 보고 음.. 했네요 ㅎㅎ 그래도 매력적일 것 같긴 합니다. 책으로 사람이 바뀐다는 판타지, 실현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레이스 2024-03-13 16:02   좋아요 1 | URL
판타지라도 품고 있으면 더뎌도 변화는 오겠죠^^
전체 분위기가 뭔지 모르겠지만 약간 들떠 있어요
그래서 격정세계인듯요,,
굳이 성묘사 없어도 될듯!

새파랑 2024-03-14 15: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그레이스님은 독서의 격정세계에 살고 계신거 아닌가요? ㅋ

북클럽을 7년동안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전 낯을 가려서 북클럽은 못할거 같습니다...

찬쉐 한권 정도는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03-14 15:30   좋아요 1 | URL
동아리 회원들을 너무 잘 만나서...저는 그 모임 끝나고 오면 약간 각성되요.
동아리는 책하고 친하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던데요?!

구름모모 2024-03-15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03-16 08:52   좋아요 0 | URL
예~
즐독하시길

Falstaff 2024-04-19 0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왜 이 리뷰를 읽지 못했을까요? 저도 이 책 읽고 독후감 썼는데, 다른 분들 생각은 어땠을까 싶어서 봤더니 그레이스 님의 리뷰가 있잖아요, ㅋㅋㅋ 제 잡글은 5월 두번째 주에...

그레이스 2024-04-19 08:23   좋아요 1 | URL
ㅎㅎ
올리시면 읽어볼께요
바빠서 저도 북플에 매일 들어오진 못해서 놓치는게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