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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의 백합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발자크의 소설을 읽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을 것을 권하겠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항상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있다. 통속과 순문학 사이에서 모호함을 띄며 여러 번 책을 덮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에서 많이 마주친 식상한 사건들 속에서 순간순간 빛나는 문장들과 번뜩이는 시선은 들었던 책갈피를 내려놓게 한다.
발자크는 부인했다고 하지만(초판 서문에서),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전기(傳記)적 사실과 감정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펠릭스가 지닌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은 발자크의 그것과 닮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이 소설 『골짜기의 백합』 속 주인공 펠릭스의 사랑하는 여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모델이 드 베르니 부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녀는 발자크에게 어머니 같은 보호자, 부드러운 안내자, 헌신적인 협조자였고, 그 만남은 이후에도 같은 사랑의 유형을 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편지형식을 띄고 있다. 화자인 펠릭스의 연인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요구에 대해 지나간 사랑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던 유소년기 에피소드는 어린 나이에 느꼈을 고독과 고통을 가슴 아프도록 공감하게 한다. 청년이 된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교육을 받던 도중 파리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투르로 가서 홀로 지내게 된다. 그곳 축제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외로움을 타던 그가 그녀에게 끌림은 모성이 엿보이는 순간의 태도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보인 행동은 성에 눈뜬 청년의 충동이었을까? 어쨌든 그 행위로 인해 그는 사랑에 빠진다.
“소녀처럼 솜털이 난 목 위로 매끈하게 내려오는 윤기 나는 머릿결, 상상력이 뛰어다니는 산뜻한 오솔길처럼 빗이 그 위에 새긴 흰 선들, 이 모든 것이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이 등 위로 달려들어 머리를 부비며 어깨 전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30p)”
모르소프 백작은 18세기 대혁명 이후 10년의 망명생활과 10년의 농촌생활로 인해 늙었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은 숙모로부터 금욕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출발부터 한쪽의 헌신과 인내가 일방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백작의 광증과 두 아이들의 병약함으로 인해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펠릭스의 등장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자녀나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낌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학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이 앙리에트를 가리키는 펠릭스만의 은유이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모성에 대한 결핍을 지닌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앙리에트 역시 자신의 고단함에 공감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결핍을 투사하고, 상대방의 상처에 전이되는 사랑의 유형을 본다. 한편, 사랑은 많은 경우 이런 전이와 투사로 시작되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앙리에트는 펠릭스의 고백을 거절하고 친구 또는 어머니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펠릭스는 그녀를 성녀와 순교자로 숭배한다. 앙리에트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중세의 기사도를 연상시키는 사랑(252p)”-을 마음에 담고 돌아간 파리 사교계에서 펠릭스는 영국 귀부인 레이디 더들리와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앙리에트는 찾아와 변명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펠릭스에게 다정하지만 가혹한 태도로 대한다.
상심으로 인해 죽게 된 앙리에트, 죽음이 임박한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사랑스런 앙리에트도, 고귀하고 거룩한 모르소프 부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말했던 이름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허무와 싸우고 있었으며 갈망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삶으로 하여금 죽음을 상대로 이기적인 맞대결을 하도록 시키고 있었다. (344p)”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내한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녀, “미친 듯한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아연실색하는 펠릭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는 그녀 앞에서 당황하는 그는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시몬느 보바르의 『제2의 성』을 떠올린다. 남성의 여성을 향한 숭배적 사랑은 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타자로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앙리에트(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향한 펠릭스의 숭배는 그 언어가 자칫 통속으로 읽힐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달빛의 조명을 밝은 두 줄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나와, 볼을 타고 얼굴 끝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남몰래 흘린 눈물, 지쳐 버린 감성, 한결같은 정성, 끊임없는 불안으로 보낸 10년의 세월과 여성의 가장 고귀한 용기가 묻어 있는 그녀의 말들은 내 안에 경건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이것이 사랑의 첫 영성체입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혈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감하듯이 부인의 영혼과 결합했습니다. 가망 없는 사랑도 행복입니다.” (103p)”
이런 내용들이다.
이런 과잉된 감정과 언어들 때문에 그가 전하려는 고통과 괴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자크에게 실망할 뻔 했다.
반전은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나탈리의 답장이다. 통속적으로 읽혔던 장황한 문장들과 생각이 발자크가 아닌 펠릭스의 것이 되면서, 발자크의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당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 당신은 모르소프 부인의 미덕들을 자랑함으로써 레이디 더들리를 상당히 성가시게 하셨고, 영국식 사랑의 기교들을 과시함으로써 백작부인을 많이 아프게 하신 것 같군요. 게다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장점밖에 없는, 저라는 가엾은 여인을 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앙리에트처럼, 또는 아라벨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신 셈이죠.(382~387p)”
나탈리는 펠릭스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글쎄……과연 발자크가 펠릭스와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아니, 부정적이다. 작가는 삶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글 안에서 넘는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생의 이면』 이승우 24p)”
발자크는 펠릭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숭배와 같은 사랑의 고백들을 장황하게 펼쳐놓고 독자를 질리게 한 후, 마지막 나탈리의 답장으로 그런 낭만주의 사랑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실천할 수 없고,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 연민을 자아내는 모순덩어리 인간 발자크는 연인의 비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기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있다. 이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답장은 발자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에필로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