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은 정통성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있으므로, 국군도 독립군 또는 광복군에 정통성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군사에서 군사영어학교나 국방 경비대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미약하다. 국군은 미군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까지 국군의 고위 지휘관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처럼 취급되어 악질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은 1945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초급 장교들을 주로 선택했다. 다음 해 4월에 폐지된 이 학교는 통역과 관련해 군사영어교육에 치중했으나, 국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학교 졸업자 110명은 교육 기관 중 임관되어 육군 군번 1(이형근)부터 110번을 부여받아 대개 30대에 별을 달았고, 20대에 별을 단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육군 참모총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군 요직을 독차지했다.

 

미군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육군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통신학교, 공병학교, 보병학교, 포병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교육 과정이 확대되면서 1952년에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1기가 신입생이 되었다. 미국의 육군지휘참모대학을 본뜬 육군대학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국방대학원을 본떠서 만든 국방대학원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미군은 장교 교육을 시켰다.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야전 훈련장에서도 미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백선엽처럼 정보장교들이 정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첫 번째로 정부 수립 직전인 1948811일 이형근, 장창국, 이한림 등 6명이 국군 창설자라는 애칭을 가진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포트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형군은 1949년 준장 진급(28)과 동시에 주미 대사관 초대 무관 발령을 받았다. 전쟁 발발 직후 33세에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19517월 강문봉 소장(27)과 함께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며칠 뒤 유재흥 중장, 양국진·송요찬·이성가·백인엽·함병선·김종갑·박임항·오덕준·백남권 소장과 최경록 준장 등 3명의 준장, 2명의 대령 등 14명이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1951년부터 대규모로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냈다. 19519월에 165명이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김종필, 길전식, 강상욱 대위 등도 있었다. 1952년에는 594, 1953년에는 829명이나 갔다. 박정희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현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황국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자료에는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 4,729, 해군 920, 공군 1,503명 등 7,000여명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관리들의 미국 유학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같은 시기 도미 유학생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군 지휘관중 자래가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노태우 대위는 결혼 며칠 뒤인 19596월 결혼식 사회를 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도미해 육군특수전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유학생에게 군사교육 못지않게 정신교육을 시켰고,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했다. 위대한 미국을 찬탄해 마지않던 유학생들은 반공정신에 투철했고, 미국의 안보와 국가 이해를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희박했고, 민족의식 또한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0대 초반에 대장이 된 백선엽, 이형근과 37세에 대장이 된 정일권 사이에 파벌 갈등을 조장해 군을 장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송요찬과 유재흥 등을 요직에 발탁했다. 그러나 세 명의 대장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승만보다 미국에 마음을 더 두었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1960419일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친미적인 송요찬은 4월혁명 후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5.16 군부 쿠데타 후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부부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은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자 예편원까지 냈는데, 뜻밖에도 19612월 미국의 입김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5.16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와 197912.12 쿠데타, 1980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참고자료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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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북한 김일성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 우방이 참전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다.”로 요약이 된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1950625일만 놓고 본다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은 맞는 이야기라고 본다. 1990년대 들어 박명림 교수나 정병준 교수 등이 찾아낸 소련측 기밀문서는 김일성이 1950625일에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한에서 진행된 이쪽 연구는 1980년대 당시 소위 남침유도설로 대표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1950625일이라는 날짜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아주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성과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커밍스의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진행되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커밍스의 저서는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적 징크스를 벗어던지려 했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뜻있는 대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점을 자각하면서, 해방 후 국가 정통성 면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그런 영향을 주었던 커밍스 교수의 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반박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동구권의 붕괴 속에서 흐름을 같이 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상황은 남한의 경제력은 88 올림픽을 전후로 상승했던 반면 북한의 경제력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및 교류가 끊기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은 단순히 사회주의는 실패 자본주의는 생존이라는 정형화된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셈이다. 1990년대 우고 차베스와 같이 사회주의를 시도하려는 중남미의 움직임과 미국의 패권에 맞서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투쟁 등은 이 정형화된 틀 속에서 외면 받았다.

 

따라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 등의 연구 또한 이런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절대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나 전쟁의 기원을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 맞추어 북한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에서, 기존의 한국사회가 주장하던 김일성 침략자, 북한에게 아주 큰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보다 많은 근거를 통해 세련되게 다진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논리는 오히려 한국전쟁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 접근과 다방면적 시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사건들 중에는 그러한 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생각해보자. 미국은 1950629일부터 1953727일까지 이른바 북폭을 단행했다. 미국은 대략 65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고, 남한 또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북한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도 남북한 전역에 투하됐다. 이런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 기간 자행됐고, 미군 폭격은 한국전쟁 민간인 사망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을 과연 김일성의 침략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을까? 이는 당연히 억지논리를 양산해내기 쉽다. 그 외에도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나 북한 지역에서 반파시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활동하던 국제여맹의 활동,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사회주의 반미 국제연대 등은 앞에서 언급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를 당연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필자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공화국 전면적인 침공에 대해서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기간을 1950년이 아닌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분단이 획책된 시점부터 따진다면, 그런 북한의 주장에는 다소 부정하기 힘든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평화적으로 협력해야할 대상이 아닌 무력으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통일관은 정복주의적 통일관이었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8선을 중심으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히 있었고, 이러한 교전들 중에선 남한에게 전쟁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호림부대의 정탐행위가 그렇다.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한 이 특수부대는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도리어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원도 양양군에 침투했으며, 실제로 조선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106명이 인민군에게 사살됐고, 44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게 됨에 따라, 미군은 북한관련 자료들을 노획했는데, 미국이 노획한 북한측 비디오 중에는 호림부대 재판 관련한 자료도 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로 진행되어 사형이 선고됐으며, 침투되었던 이들 중 탈출하여 남하한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호국군에 편입됐다.

 

호림부대 사건은 현재 북한이 주장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의 침략행위라는 점에 있어서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토대로 보았을 때, 한국전쟁 발발을 1950625일에 맞춰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만 전가시키는 행위는 너무나도 정형화된 사고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있던 이른바 작은전쟁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기 진행된 작은전쟁에서 최소 1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이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홀거 하이데라는 학자는 그 수를 2배로 측정하여 1945년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2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며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대로 전쟁의 책임을 북조선에게 떠넘기는 데 기여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만 맞춰 보기에는 오류가 많은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사회는 한국전쟁의 그 모든 책임을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떠넘기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세련된 반공주의적 관점을 뛰어넘어야 할 시점이며, 그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많이 넓혀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자꾸 1950625일 북한의 침략이라는 일부 사실 관계에만 맞추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사안인 것이다. 이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야 한다. 앞으로는 보다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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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7-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박명림 정병준 둘 다 읽어본 입장에서 그 둘의 책의 의의와 시사점을 너무 좁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건 아닌지

NamGiKim 2022-07-27 16:22   좋아요 0 | URL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서 읽어봤지만, 사회주의의 실패를 지엽적으로 강조하죠. 그 분들의 연구 성과가 없다는 것이 아닌 한계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패권인가 생존인가 - 미국은 지금 어디로 가는가
노암 촘스키 지음, 황의방 외 옮김 / 까치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폭력과 왜곡 그리고 프로파간다로 점철된 미국의 패권주의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유엔연설을 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소개한 책 한권이 있다. 차베스는 유엔연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패권정책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책 한권을 소개했다. 바로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가 쓴 <패권인가 생존인가(Hegemony or Survival)>이다.

베네수엘라의 진보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21세기에 사회주의를 꿈꾸던 인물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전쟁기계는 자신들의 점령지역인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가 성공하지 못하도록 온갖 제재와 악행을 일삼았다.

혁명가 차베스는 제국주의의 실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신제국주의 국가가 얼마나 이분법적이고, 여론조작의 달인이며, 파괴본성을 버리지 못했는지 너무 잘 알았다. 그런 차베스가 많이 공감한 책이 바로 촘스키의 저서 <패권인가 생존인가>였다.

책은 2003년 미국이 시작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한다. 그러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추구했던 패권정책의 추악한 이면을 들춰내며, 이들의 전략이 얼마나 많은 국가들을 빈곤과 파괴 죽음으로 내몰았는지를 얘기한다.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발발한 1991년 걸프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다국적군을 편성하여 중동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이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연합군 300명이 죽을 때, 이라크군 수만 명이 죽는 수준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걸프전쟁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을 해제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엔을 동원하여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다. 그 결과 이라크의 아이들 50만 명을 포함하여 125만 명이 아사했다. 의도적으로 죽음을 만들어 놓은 미국은 이것을 가치있는 희생이라고 미화했다. 네오콘인 매를린 울부라이트는 방송에 나와서 ˝이라크 사태는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이런 제재를 통한 살인은 엄밀히 따지면 범죄다. 그러나 미국은 제대로 규탄받은 적이 없다.

미국은 타국 지도자에 대한 악마화에도 뛰어나다. 이집트의 초대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제3세계 진영에 들어가자, 미국은 나세르를 히틀러에 비유했다.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제3세계 진영에 있으며 반미노선을 걷자, 마찬가지로 그를 히틀러와 같은 존재로 악마화했다. 미국의 이런 악마화는 카다피, 김정일, 차베스, 모랄레스 등의 지도자들에게도 전가됐다. 이 지도자들이 미국과 다르게 타국을 침공하지 않았지만, 미국에게 이들은 그저 악의 축으로 규정되어야할 대상이었다.

언론 보도들 또한 조작과 편향이 넘친다. 미국은 제국주의적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우방으로써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대상으로 온갖 폭력과 범죄행위를 저질렀고,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지금도 인종청소가 자행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때마다 미국은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을 테러리즘에 자주 비유했다. 물론 팔레스타인 급진주의 운동이 테러를 안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이 한 것은 미국에 의해 여론조작되어 과장보도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폭격하고 탱크로 밀어 거기 있던 장애인이 죽자, 미국은 이를 절대적으로 침묵했으며 보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러한 조작과 프로파간다는 1857년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인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할 때 사용하던 논리와 일치한다.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영국의 언론들은 ˝야만적이고 잔혹한 인도인들이 무고한 영국인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학살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정작 영국 지배자들은 이 항쟁을 진압한뒤, 저항에 참가한 인도인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온갖 잔혹행위들을 저질렀다. 무수히 많은 인도인이 영국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영국 지배층은 이를 폭동진압으로 미화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하던 여론조작은 현재 미국이 패권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미국은 무수히 많은 타국 민간인을 죽였다. 한국전쟁 당시 공중 폭격으로 북한은 초토화 되었고 대략 100만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비슷한 인명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2003년 일으킨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패권주의는 파괴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2004년 노엄 촘스키가 집필한 이 책은 무수히 많은 한국인들이 외면하는 미국의 추악한 패권정책의 민낯을 밝힌 책이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부자연 스러운 번역투와 철자오류들이 다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런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읽어볼만한 명저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2022년 미국은 다시한번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대규모 군사 개입을 할까? 앞으로 더 지나봐야 알겠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은 그런 위험한 도박을 자신들의 자본축적과 이윤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제국주의가 종식되야 하는 것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보이는 위선을 이해하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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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러우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서구 인터넷에서 한 유튜브 동영상이 논란이 되었다. 그 동영상은 붉은 별이 달린 모자를 쓴 미국인 남성이 러시아군의 기갑 행렬 앞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영상에서 이 미국인은 우크라이나의 해방자들과 함께 전선에 있다고 말하며, 우크라이나의 좋은 사람들을 돕고 나쁜 사람들을 박살낼 것이라고 말한다. 유튜브의 친러시아 동영상 검열에 따라 곧바로 삭제되었지만, 트위터 등을 통해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로, 2014년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을때, 여러 나라에서 돈바스 주민들의 항쟁을 도와 마이단 정권에 맞서 싸우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서유럽 국가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돈바스로 간 자원자가 있었는데, 그가 오늘 소개할 미국인 사회주의자 러셀 벤틀리이다.


러셀 벤틀리는 텍사스 출신으로, 1960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수적인 동네인 텍사스에서 자란 부잣집 아들이지만 그는 성장하면서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는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저작들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들이 외국 침략자들에 맞서 싸운 것이고, 피델과 체의 혁명은 쿠바를 도박장이자 매음굴로 만든 외국인들을 몰아낸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벤틀리는 중학교를 중퇴한 뒤 검정고시를 보고, 미군에 입대해 독일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후 텍사스 해안으로 돌아가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고 록 밴드 활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 쿠바로 여행을 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롤링스톤지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벤틀리는 쿠바에서 쿠바군 장교를 만났는데, 그 장교는 벤틀리에게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벤틀리는 "나는 겁쟁이로 사는 것을 그만두고 사회주의자가 될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가 된 벤틀리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1996년 미네소타에서 대마초 합법화 운동을 하다 대마초 밀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99년 탈옥하기도 했으며, 이후 워싱턴 주에서 살며 시애틀에서 열린 반세계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밖에 걸프전 반전 운동,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의 인권 신장 운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다 2007년 재수감되어 2012년에 석방되었다.


그레나다 침공, 유고내전 개입,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 등을 겪으며 조국 미국에 대한 벤틀리의 실망과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 2011년 미국의 개입으로 카다피 정권이 붕괴했을때, 그는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마이단 쿠데타가 일어났다. 벤틀리는 이 쿠데타를 미 국무부와 CIA가 배후에 있는 색깔 혁명으로 바라봤고, 오데사 학살 사건으로 반 마이단 시위대들이 마이단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며 친러 분리주의를 동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이단 정권이 들어선 후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는 우크라이나 군대의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되었다. 벤틀리는 루간스크 시가 우크라이나군의 미사일 공습으로 파괴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롤링스톤 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공습으로 다리가 잘린 채 죽어가는 여성을 언급하며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가 나에게 질문하는 것 같았다. '이걸 보고 어떻게 할 것인가? 손을 잡고 평화를 외치며 미국을 횡단할 건가? 아니면 쿰바야(아프리카 영가)를 부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아니, 난 이런 짓을 한 놈들을 죽이러 갈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벤틀리는 그의 다짐을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러시아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는 도네츠크로 간 후 이탈리아 출신의 자원병을 만났고 그를 통해 도네츠크 민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4세 였고 러시아어도 할 줄 몰랐지만, 선량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군과 싸우기 위해 민병대에 입대했다고 한다. '텍사스'라는 호출부호로 불리며 도네츠크 공항 등 격전지에서도 싸웠고 "자유 돈바스 라디오"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유튜브에도 동영상을 업로드 했다. 벤틀리는 자신은 자원병이며, 아무에게도 돈을 받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그는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 시민권을 받았고, 2020년에는 러시아 시민권도 얻었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벤틀리는 전쟁에 대해 "빌어먹을 미국 정부가 8년 전에 시작한 전쟁을 러시아가 끝내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라고 평하며, 푸틴에 대한 지지와 젤렌스키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비쳤다. 그는 젤렌스키를 "그는 광대, 꼭두각시고 약쟁이다. 말그대로 마약중독자다. 그는 포로셴코처럼 훈련받은 원숭이다. 워싱턴의 주인들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가. 젤렌스키는 포로셴코보다 더 한심한 아첨꾼이다."라고 평했다.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서구 언론의 러시아군이 고전하고 있다거나 우크라이나군이 이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보도(당시는 4월 1일)들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진격이 느린 것은 우크라이나 군과 그들의 나치 부대가 민간인들을 방패로 삼으며 러시아군이 집집마다 확인하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인간 방패는 우크라이나군의 전략 중 하나이고 그들은 믿을 수 없고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의 나치 대대들은 진짜 나치들이다. 스와스티카 문신을 하고 '하일 히틀러'나 '반데라 만세'를 외치고 다닌다. 반데라는 나치 협력자이자 끔찍한 전범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돈바스 주민들에 대해 "지구의 소금이자, 인간성의 정수"라고 극찬하면서 교양적이고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벤틀리는 8년째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사실상 미국을 적으로 두고 싸우고 있지만 가족들과는 계속 연락하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에는 여전히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미국의 이념을 사랑한다. 나는 미국인과 미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을 사랑한다." "나는 어디에서나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파시스트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의사는 없음을 밝혔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애는 여기서 하는 것처럼 미국을 해방하는 러시아 전차에 타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맨몸으로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남은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라며, "난 미국에 돌아갈 필요가 없다. 난 DPR 여권을 갖고 있고,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의 시민이고, 러시아 시민이기도 하다. 난 작은 집과 큰 마당, 아름답고 똑똑하고 강한 훌륭한 아내가 있다. 그녀는 3개 국어를 하고 90%의 미국인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다." "여기 말고 살고 싶은 곳은 없다."라고 도네츠크에서 남은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이 러셀 벤틀리의 일생으로, 롤링스톤과 뉴스위크, 스푸트니크의 인터뷰를 참조했다. 본래 롤링스톤의 기사 전문을 번역하려 했지만 서구 주류 언론인 롤링스톤답게 벤틀리를 미치광이 음모론자로 묘사하고, 기사 중간중간에 우크라이나에는 나치가 없다는 주장을 끼워넣고, 도발, 조롱이 목적인 질문도 서슴치 않는 내용이라 번역하기엔 불쾌감이 느껴져 벤틀리의 일생 부분만 참조하고 거기에 뉴스위크와(여기도 부정적인 논조지만 롤링스톤보단 온건함) 스푸트니크의 기사를 참고해서 작성했다.


아래부터는 2018년 좌파 유튜버 'TheFinnishBolshevik'가 인터뷰한 내용 중 돈바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문답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질문 5: 당신은 이전의 많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왔다. 당신과 당신의 조직인 'Essence of Time'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며, 이것이 노보러시아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사유 재산과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기본적 구조들이 여전히 돈바스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답: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서방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을 비웃는다. 그들 대부분은 위선자, 겁쟁이, 얼치기들로, 그들의 공산주의는 아마존에서 체 게바라 티셔츠를 사는 것, 그리고 아마 끝없이 인용할 수 있는 한두권의 책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서방에 앉아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완벽한 예다. 그들은 실제 파시스트와 싸우는 것 보다 동지를 비판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서구의 아무 "공산주의자" 그룹에게 실제로 나치를 죽였는지 물어봐라. 난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천 배를 더 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는 사람들은 경멸할 가치도 없다. 내가 1995년 쿠바에 갔을 때, 쿠바 육군 대위와 아주 계몽적인 토론을 했다. 나는 내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자, 그녀는 자신은 공산주의자라고 말했다. 내가 둘이 무슨 차이가 있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사회주의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이다." 기꺼이 싸우겠다는 것은 기꺼이 죽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서방에는 공산주의자가 별로 없다. 하지만 나와 'Essence of Time'의 내 동지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자격을 얻었다. 서구, 특히 미국에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그렇게 할 때가 되었다.


DPR에서 의료와 교육은 무료다. 식품, 에너지, 주택, 교통과 통신비는 서방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질은 더 좋다. 이것은 좋은 시작이다. 이것이 우리가 싸워서 이긴 사회주의이다. 이것과 동일하거나 더 뛰어난 일을 한 사람들은 우리를 비판하거나 조언을 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이나 하러 가라.


질문 6: 위키피디아같은 일반적인 인터넷 자료를 통해 돈바스 전쟁을 조사해 보면, 노보러시아 군대에서 싸우는 부대 목록에 민족볼셰비키, 러시아 국민 연합, 세르비아 체트니크 같은 대부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격렬히 반대할 극우 부대들이 있다. 이것은 서방의 많은 좌파들에게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에 관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서구 맑스주의자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 나치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노보러시아쪽에도 나치와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우익 부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운영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이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볼 것이다.


답: 전쟁 초기 노보러시아 군대에 "민족주의자"들이 일부 있었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나와 함께 전선에서 싸운 사람들은 나치 문신이나 나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싸우지 않을 것이다. 노보러시아 군에는 카자크나 심지어 왕정주의자까지도 있지만 그들은 파시스트나 국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 옆에 서서 나치와 싸우는 전우들이다.


돈바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는 나치나 국수주의자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둘 다이다. 그건 "공산주의는 나치만큼 나쁘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멍청한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공산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혁명적 운동 중 하나를 지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한다. 비겁함과 위선의 반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파시즘과 싸워 이긴 사람들에게 부적절하고 자격 없는 비난을 한다.


질문 7: 돈바스 지역은 사회주의 이념과 반파시스트 정신의 풍부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스타하노프 운동이 탄생한 곳이며, 2차 대전 동안 돈바스는 나치 독일에 영웅적인 저항을 했고, 최근까지 오데사는 수백개의 다양한 민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매우 다문화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당신은 노보러시아 사람들이 소련 시절의 향수나 민족적 자부심을 제외하고 사회주의에 어느 정도 열광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답: 도네츠크도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이고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1869년 존 휴즈가 이곳에 제철소와 탄광을 지었을 때, 그는 전세계에 이곳에서 좋은 일자리와 정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했다. 100개 이상의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도네츠크로 이주했고, 그 후 "유조브카"(도네츠크 시의 옛 이름)라고 불렸다. 돈바스 지역은 역사적으로 소련에서 가장 굳건한 공산주의적 지역 중 하나였다. 이 곳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한 이론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 그들의 투쟁, 희생, 승리의 역사, 사회주의의 보상과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폐해에 대한 현실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싸워야 할 때 기꺼이 싸울 것이다. 나는 돈바스 공화국이 그 결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의 선두이자 가장 좋은 예시라고 말하고 싶다.


질문 8: 우리는 돈바스의 몇몇 공장들이 국유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유화가 얼마나 퍼져있는지, 이것이 경제의 다른 분야로도 확산되고 있는지 알고 있나?


답: 몇몇 공장과 기업체들이 올리가르히로부터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DPR의 경제는 일반적으로 부유층을 부유하게 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이득이 되도록 조정된다. 그것은 진행중인 과정이다. 나는 이곳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미국이나 심지어 유럽연합 대부분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인민의 뜻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9: 돈바스가 국교(동방 정교회)를 믿는 것과 공산주의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냉전기 소련과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에서 종교는 권장되지 않았다. 당신은 이것이 실수였다고 생각하나? 해방신학에 대한 견해는 어떤가?


답: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신전에서 채찍으로 환전상들을 쫓아내고,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는 이곳에 정교회 사제인 친한 친구 3명이 있다. 그들 모두 DPR군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참호에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반파시스트들 중 일부는 성직자다. 디트리히 본회퍼, 오스카 로메로, 베리건 형제, 그리고 하산 나스랄라.


'Essence of Time'은 소련의 반종교적 측면이 가장 큰 실수 중 하나였다고 여긴다. 나는 공산주의와 종교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비록 나는 조직된 종교를 의심스럽게 보긴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기독교의 주요 종파 중 가장 부패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교회는 "국교"가 아니다. 이곳에 국교는 없다. 도네츠크에는 유대인, 개신교도, 무슬림들이 있으며 예배 장소도 있다.


질문 10: 당신은 돈바스에 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동영상에서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만약 돈바스에서 실업자가 된다면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길거리로 쫓겨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가? 돈바스에선 직업이 의무적인가? 아니면 직업을 가질때까지 국가가 돌봐주는가? 돈바스에는 노숙자가 어느정도 존재하나?


답: 돈바스 인민공화국에는 노숙자가 없다. 말그대로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가 살 곳을 준다. 전기세를 내지 못해도 전기가 꺼지진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거리를 청소하거나 공공 정원을 가꾼다. 꼭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임금은 적지만 먹고 살기엔 충분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서방의 어느 곳보다 좋고,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다. 포위된 상황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다.


질문 13: 돈바스 지역의 반군의 통제가 러시아 제국주의의 증거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그리고 러시아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러시아는 1990년 초부터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신은 그들을 제국주의자로 보는가?


답: 다시 말하지만, 바보와 거짓말쟁이들만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말한다. 돈바스 사람들은 외국에 의해 세워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 러시아는 우리를 돕는다. 러시아는 많은 결점들이 있지만 제국주의는 그 중 하나가 아니다. 소련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곳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줬지만 그 장소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익이나 자원을 착취하지 않았다. 오늘날 돈바스도 마찬가지로, 러시아 연방은 돈바스를 지원하는 대가로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 러시아의 시리아 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전반적인 삶의 질은 서방보다 낫고, 러시아에서는 삶의 질이 계속해서 향상되고 있지만 서방에서는 계속 낮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참고자료


https://www.rollingstone.com/politics/politics-features/russell-texas-bentley-putin-propaganda-ukraine-interview-1315433/ 롤링스톤 기사


https://www.newsweek.com/russell-texas-bentley-interview-pro-russia-donbas-ukraine-1684450 뉴스위크 기사


https://sputniknews.com/20220401/nazism-is-disease-texan-came-to-donbass-to-protect-people--tell-the-truth-about-8-year-long-war-1094369347.html 스푸트니크 기사


https://mltheory.wordpress.com/2018/08/31/interview-with-russell-bentley-american-communist-in-donbass/ 인터뷰 전문


원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kpd&no=131032&s_type=search_subject_memo&s_keyword=%EB%8F%88%EB%B0%94%EC%8A%A4&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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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국에 조금 어렵지만, 베트남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PBS 베트남 전쟁을 다시 보게 됐다. 4년 전에 이미 봤지만, 한 번 더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 1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보유한 작품이라 사실상 책 한 권의 분량이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로 보는 재미가 제법 있는 작품이다. 1화는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1961년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점에서 끝났다면, 2화는 존 F. 케네디 집권 2년 동안의 베트남 전쟁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격적으로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 전쟁을 다큐멘터리가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iding the Tiger 오프닝, 맥나마라와 케네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미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전쟁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독일과 일본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개입한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논리를 적용했다는 데 있다. 즉 미국은 오류가 없는 ‘선’이고, 미국의 적국은 오류가 많은 ‘악’인 것이다. 이러한 선악구도식 논리는 특히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세력과 냉전시기 경쟁하면서 많이 악용됐고, 베트남 전쟁도 그런 구도에서 미국이 침략한 전쟁이었다.


1967년 DMZ 근처에 있는 콘티엔에 배치된 미 해병대 참전용사인 존 머스그레이브는 자신이 젊은 시절 아버지나 삼촌 세대들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로 참전했었고, 이웃 아저씨나 집 근처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었다. 즉 그러한 사회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존 머스그레이브의 젊은 시절 사례는 적잖은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영화 <7월 4일생>을 보면, 주인공인 론 코빅 또한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 또한 어린시절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잖게 회고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서 깨진 것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 F. 케네디와 최고의 인재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와 베트남 정책을 추진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 잘생겼고, 똑똑하며 많은 이들에게 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참전용사는 “당시 나에게 존 F. 케네디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어요.”라는 찬양어린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던 1960년대 초반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점차 당기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본인은 고문단 지원을 통한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원했지만, 그가 고문단을 파병할수록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다.

(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오딘지엠, 친미반공주의자인 그는 남베트남 민중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른바 전략촌이라는 반민중적인 계획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다. 이들이 죽인 베트콩들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사실 베트콩과 민간인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다. 베트콩에게는 제대로된 군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민중적 정책은 오히려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을 베트콩 편으로 만들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야심차게 건설한 전략촌 대다수는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민중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무기나 물자 훈련면에서 당연히 남베트남 정규군보다 항상 열악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콩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충성심 경쟁에만 몰두했지, 베트콩과 싸우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치민과 레주언, 1959년 북베트남은 아이젠하워와 응오딘지엠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자, 남부통일을 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남부에서 혁명투쟁을 했던 레주언은 호치민보다 더 무력통일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존 F. 케네디는 반공국가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를 정부에 결집시켰다. 월트 로스토, 맥스웰 테일러,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등 미국 정치계나 경제계 그리고 군사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소위 존 F. 케네디는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ist)’을 결집시킨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이 점을 간과했다. 케네디 본인은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킨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케네디의 적이었던 호치민은 케네디가 그러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만의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켰다. 거기다 그들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또 독립을 쟁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케네디의 정책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응우옌응옥(Nguyen Ngoc)과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는 다큐멘터리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응우옌 응옥,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카오슈안다이,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호치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일부러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수염을 길렀어요. 모두에게 자신을 호 삼촌이라고 부르라 했어요. 일부러 아주 겸손한 이미지를 만들었고요. 항상 간단한 말을 썼어요. 사람들과 소통할 땐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습니다.”


“호치민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호치민은 우리에게 말했어요. 전쟁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겁먹지 않을 겁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프랑스 침략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참전용사 바오닌, 국내에도 번역된 <전쟁의 슬픔> 저자이기도 하다.)


(존 F. 케네디와 니키다 흐루쇼프)


(미군의 네이팜 폭격)


(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수송기)


(남베트남군을 훈련시키는 미군고문단)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을 믿었다. 반면 존 F.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은 사실상 대다수 농민을 적으로 규정한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케네디가 보낸 미군사고문단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를 지원하여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응오딘지엠 정부가 반공정책으로 죄다 적으로 만든 이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구금하고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그리고 전략촌 건설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1954년에 체결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인권’이라는 부분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행위였다. 

(전략촌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


(닐 시핸 기자, 196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심층보도를 했다.)


(존폴밴,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남베트남의 현실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닐 시핸기자가 쓴 <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으로 출판됐으며,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던 이들은 남베트남을 지지했지만, 남베트남군의 문제를 깨닫게 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고문단 및 주월미군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던 존폴밴(John Paul Vann)이다. 존폴밴은 전형적인 미국 군인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와 대중성 결여의 문제점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존폴밴은 주로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고문단 기지에서 초기에 근무했는데, 대다수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지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존폴밴이 보기에 남베트남군은 너무나도 부정부패한 집단이었지만, 그의 적이던 베트콩은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며 대중과 소통하는 세력이었다. 밴은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폴 하킨스에게 이러한 사정을 여러번 보고했지만, 하킨스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은폐했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의 작전도)


(압박 전투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 1951년 12살의 나이때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으며, 이후 미국에 맞선 전쟁에도 참전하여 베트콩으로 활약했다.)


(베트콩에 의해 격추된 헬리콥터)


(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의 스탬프)


결국 문제는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서 터졌다.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의 지원을 받은 15대의 헬기와 10대의 장갑차 그리고 최소 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베트콩 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투의 패배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됐다. 심지어 베트콩들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총기와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5대의 헬기 중 14대에게 손실을 가했다. 이 중 5대는 완전히 파괴됐으며, 장갑차 또한 막았으며 파괴했다. 당시 베트콩의 병력은 300명도 채 안됐다. 거의 1/6이나 적은 병력으로 화력과 병력이 뛰어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영광스럽게 승리했다.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압박 전투를 통해 응오딘지엠 정부의 지방 통제능력이 사실상 바닥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킨스는 압박 전투가 남베트남군의 승리였다고 오보를 했다. 압박 전투에 대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존폴밴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기자인 닐 시핸과 말컴 브라운 그리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이를 알렸지만, 결국 본국으로 잠시 송환되어 베트남을 떠나게 됐다. 압박 전투의 처참한 패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 정부는 자국 내 불교도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애초에 민중과 전혀 소통할 생각이 없던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그리고 제수인 쩐레쑤언은 가족 독재정치를 하며 자신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소신공양을 하는 틱광둑 스님)


(1963년 11월 쿠데타군에게 총살당한 응오딘지엠)


이들이 자행한 반민주주의적 탄압은 특히나 불교도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응오딘지엠 일가친척이 가톨릭 주교가 된 것은 축하해줬지만,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자 이들을 총기와 경찰력으로 진압했다. 불교도들을 탄압하며 이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베트콩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불교도 탄압에 맞서 1963년 6월 13일 수도 사이공에서 한 승려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교도인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자, 뒤를 이어 적잖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소신공양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이들 중에는 남베트남 의회정치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마져도 지엠 정권에겐 공산주의 동조자였다.


이들에 대한 지엠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도 기가막혔다. 그의 제수인 쩐레쑤언은 방송에 나와 “중놈이 한 일은 바비큐가 된 것 뿐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이는 미국의 정치인마져 경악하게 만들었다. 학생들과 불교도들의 시위는 계속됐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결국 존 F. 케네디는 일부 남베트남군 장성과 쿠데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과거 미국은 이란의 모사데그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그 외에도 여러번 레짐 체인지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미국의 레짐 체인지 사례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도자 제거라는 성격을 많이 가졌지만, 응오딘지엠의 사례는 “이 지도자가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이 공산화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쿠데타는 게시됐고,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총살된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자신의 베트남 전쟁 관련 자서전에서도 밝힌 일이지만, 케네디는 지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지엠 사후 몇일 만에 이러한 살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유지할 방안에 대해 계속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암살범에게 총에 맞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존 F. 케네디가 죽자 베트남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에게 이어졌고, 남베트남에는 16,000명 이상의 미군고문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의 상황은 점차 암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닐 시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다큐멘터리를 끝낸다. 

(추락한 헬기에서 뛰어 나오는 미군 병사)


(헬기 부대, 남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헬기를 투입했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미국인들이 역사에서 예외라고 생각했어요. 역사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우리에게 못 이기는 전쟁은 없으며, 나쁜 대의명분을 나타낼 수도 없다고 말이죠. 우린 미국인이었어요.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닌 게 증명됐죠.”


1부에 비해 2부는 미국 케네디 정부의 베트남 개입을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부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소개서에 가까웠다면, 2부는 이 다큐멘터리의 메인 주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베트남 전쟁의 초기 케네디 정부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1시간 30분 동안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베트남 정책이 민중을 무시하는 정책이었음을 다큐멘터리가 잘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케네디 사후 베트남 전쟁은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계승했다. 그러나 이는 암흑 터널로의 행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대베트남 정책은 실패했으며, 결국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다음에 3부 리뷰를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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