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터닝 포인트)

 

Netflix에 있는 다큐멘터리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1화를 오늘 봤다. 시작은 2001년 전 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 9.11 테러에 대한 묘사를 하다가, 미국의 중동전쟁의 기원을 얘기하기 위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말한다. 그리고 무자헤딘과 냉전 이후 탈레반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든 것 답게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강조하는 소련 침공은 아프가니스탄 좌파들을 지원하는 형식이었고, 미국은 이러한 진보를 막기 위해 탈레반의 사실상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무자헤딘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무자헤딘 간부 중 한 사람이 부르카를 안 쓰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는 것과 1996년 탈레반 집권 시기 여성 인권이 바닥을 달렸다는 것은 얘기하지만, 소련군이 들어 왔던 시점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가장 많은 여성 인권이 보장되었으며, 그걸 반동적인 탈레반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던 것이 미국이었다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전반적으로 볼만한 다큐멘터리이자, 제법 미국의 실책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제법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중심의 미국 지배층들과 아프가니스탄 친미주의자들의 인터뷰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조는 이 다큐멘터리가 미국 중심주의적 편향을 못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다양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던 넷플릭스의 전 시리즈 중 하나인 PBS 베트남 전쟁과 크게 차이가 나며, PBS 베트남 전쟁이 미국 중심적 사고관에도 불구하고 왜 훌륭한 명작인지 다시 한번 직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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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류(B) 영화들

 

1933년에 나찌가 시작한 기근대학살이라는 흑색선전은, 반세기 뒤인 1983년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 절망의 추수(Harvest of Despair), 그리고 1986년에 지식계급을 대상으로 로버트 콘퀘스트가 쓴 비탄의 추수(Harvest of Sorrow)라는 책으로 그 정점에 달했다.

 

우끄라이나 집단 학살에 대한 영화 절망의 추수와 캄보디아인의 대량 학살에 관한 영화 킬링 필드(Killing Fields), 공산주의는 대학살과 동의어라는 것을 인민들의 사고에 주입시키고자, 레이건 패거리들이 만든 가장 중요한 두 작품들이었다.

 

절망의 추수1985년 뉴욕에서 열린 28회 국제 영화 및 TV 페스티벌에서 금메달과 최우수 트로피(Grand Trophy Award Bowl)를 수상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집단학살에 대한 가장 중요한 목격자로서의 증언을 독일 나찌와 그들의 이전 협력자들이 하였다.

 

스떼판 스끄리프닉(Stepan Skrypnyk)는 독일 점령 기간에 나찌 잡지 볼린(Volyn)지의 수석 편집장이었다. 3주 후에, 그는 히틀러주의 당국의 은총으로 우끄라이나 정교회의 평신도에서 주교로 승진했으며, ‘기독교의 윤리라는 이름으로 히틀러주의인 새 질서(Die Neue Ordnung)를 위한 사악한 선전 활동을 실행했다. 이후, 그는 적군에 쫓겨 달아나다,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또 다른 목격자인, 독일인 한스 본 헤르와스(Hans von Herwath), 쏘련에서 블라소프(Vlasov) 대장의 러시아 나찌를 위한 용병으로 쓰기 위해, 쏘비에뜨 죄수 중에서 신병을 모집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그의 동료 안도르 핸케(Andor Henke)는 나찌의 외교관이었다.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대학살에 대해 예증하기 위해서, 작가들은 1917년 이전 뉴스 화면이나, 영화 Czar Hunger(1921-1922), 병기고(Arsenal(1929)의 일부 장면들이나, 세계 제2차 대전의 영화인 레닌그라드 포위공격(Siege of Leningrad)의 장면을 사용하였다.

 

1986년에, 영화 제작자들이 토틀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공격당할 때, 영화 막후에서 대부분의 연구를 수행한 마르코 카린닉(Marco Carinnik)이 공식적인 발표를 했는데, Toronto Star에서 몇 문장 인용해 본다.

 

카린닉은, (영화에 나오는 역자) 기록 장면 중 어떤 것도 우끄라이나 기근과 관련이 없으며 ‘1932-1933에 찍은 극히 적은 수의 사진만이 믿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화의 광고 장면으로도 쓰였던, 여윈 소녀가 나오는 마지막 극적인 장면은, 1932에서 1933년 기근의 모습을 찍은 것이 아니다라고 카리닉은 말했다.”

 

‘“나는 이런 종류의 부정확함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회견에서 말했다. “나는 무시당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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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던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격퇴했던 나라가 동남아시아에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당시 베트남은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쩐 왕조가 수립됐고그 왕조는 대략 200년간 장기 집권했다이 정권이 베트남에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영웅인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왕의 존재 때문은 아닐까오늘은 베트남의 명장이자 쩐 왕조의 왕이었던 쩐흥다오가 어떻게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막아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쩐흥다오 동상,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혹은 강감찬 장군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칸 사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팽창했던 몽골 제국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데 주력했었다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칸은 현재 중국의 운남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국경을 현재 베트남과 맞대게 되었다당시 쿠빌라이칸은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쩐 왕조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오히려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쩐흥다오에게 맡겨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몽고군은 남하했을 시기베트남의 일부분을 점령했었다그 이유는 베트남의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당시 몽고군을 지휘했던 인물은 우량하타이였다우량하타이의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몽고군은 홍강과 로강을 따라 두 길로 나뉘어 남하했는데수도인 탕롱(현재 하노이서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1258년 1월 몽고군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베트남 주력군은 홍강과 로강다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1차 침공 당시 몽고군의 진격도, 몽고군의 진격은 매서웠고 초기 베트남군 또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초기 몽고군은 주저 없이 강을 건너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퇴각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진격했다베트남군은 급히 병력을 수습해 탕록 북쪽 푸로(phù lỗ)에서 2차 방어선을 편성했다물론 이 방어선도 몽고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으며베트남군은 탕롱을 버리고 후퇴했다탕롱에 입성한 몽고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몽고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태종의 동생 등 일부 인사들은 송나라로 피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쩐흥다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시기 베트남군이 사용했던 전투 코끼리,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 베트남 또한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베트남 이웃나라인 라오스는 한때 코끼리 왕국으로 불렸었다.)

 

당시 쩐흥다오가 이끄는 몽고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이는 1812년 조국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사용했던 전술이나, 1941년 독소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쩐흥다오의 병력이 후퇴한 이후 몽고군들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낯선 풍토병으로 고전하기 시작했다결국 베트남을 침공한 몽고군의 사령관 우량하타이는 베트남에게 화의를 제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1258년 뀌화 전투 당시 게릴라전으로 기습 공격을 했던 베트남군과 우왕좌왕하는 몽고군, 1차 침공 당시 쩐흥다오가 사용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레러이의 대명항쟁과 응우옌 후에의 대청항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의 게릴라 전술과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까지 이어진다.)

 

전열을 가다듬은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넘어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Đông Bộ Đầu)의 몽고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이는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거둔 승리였다이후 베트남군은 강을 건너 아군 진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강둑을 내달리는 베트남군 기병들을 탕롱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몽골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다결국 우량하타이는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철수했다철수하는 길드 순탄치 않았다몽고군은 탕롱에서 국경 사이 중간쯤 되는 옌바이 성 뀌화(Quy Hóa)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258년 뀌화 전투 재현 모형, 위에 있는 사진과 같다. 게릴라전을 통해 몽고군을 몰아냈던 베트남을 보면, 베트남이 20세기 당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침략을 무찌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각하는 몽고군은 허겁지겁 이동하느라 주변을 약탈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 베트남 북부에서는 몽고군이 진짜 불적(부처 같은 적)이었다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결국 몽고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은 뒤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베트남측이 벌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차 대몽항쟁의 승리는 베트남 측의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게 여러 가지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다. 1차 대몽항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몽고군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최선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몽고군의 가장 큰 무기인 공포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웠고그들이 청야전술과 유격전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전술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외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뭉쳐 막아내겠다는 강력한 투쟁 의지를 갖는 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유인선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오정환천년전쟁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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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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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3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을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 인근에 내려 놓았다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병사 30명은 이후 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김 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미케(My Khe) 지역으로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이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274채가 불에 탔으며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 글쓴이는 작년 겨울과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사건이었다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자행하는 짓들이 바로 이러한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났다미라이 학살을 통해미국인들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실체와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다이와 같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완벽히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나기 18년 전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그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자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1950년 7월 2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상륙했고, 7월 5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했다즉각적인 지상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19일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화 작은 연못의 포스터, Kill Them All이라는 영화의 문구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결국 미군은 그해 8월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후퇴하기 바빴다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이런 사고를 가졌던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이 과정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No Gun Ri massacre)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나온 피난민들의 모습, 피난민들은 3일간 쌍굴다리 밑에서 이렇게 학살당했다.)

 

1950년 7월 23일 후퇴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주곡리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분산 명령)을 내렸다이에 따라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고, 2일 뒤인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수백 명(최소 600)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다음 날인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갔다그러자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이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최소 수십 명은 죽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기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공기 공격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달아났다이것이 이날 오후 2~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노근리 지역에 있던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쌍굴 앞뒤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도망친 민간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그러고 나서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쌍굴다리를 포위한 미군들은 굴다리를 나오려는 민간인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배고품을 못견딘 아이들이 울면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근리 학살을 표현한 그림)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29일 새벽까지 무려 60시간 동안 진행됐다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와 노인여성을 가리지 않았다겁먹은 피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미군에게 학살당했다몇 명이 야음을 틈타 쌍굴을 탈출했고쌍굴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20명도 안된 것으로 확인된다. 3일간의 학살로 노근리에서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을 마친 미군은 노근리를 떠나 남으로 후퇴했다이것이 바로 후퇴하던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의 시작을 알린 미군의 항공폭격과 기총사격)

 

노근리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다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을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노근리 사람들은 침묵해야 했다한미동맹과 반공을 외치는 사회는 이들의 아품을 감추려했고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았고정보공개법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이후 노근리 학살 이야기는 2010년 국내에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und)’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근리 이야기, 2011년에 출판된 노근리 학살 관련 만화책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다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라이 학살 만큼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그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강화되는 시점에 치러진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반전여론이 너무나도 미미했다그리고 전쟁 자체가 원점에서 끝나며 미국인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이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 한국전쟁의 미라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많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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