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은 정통성을 어디에 두고 있을까?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정통성을 두고 있으므로, 국군도 독립군 또는 광복군에 정통성을 두고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군사에서 군사영어학교나 국방 경비대를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있어도 광복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미약하다. 국군은 미군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군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까지 국군의 고위 지휘관은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군은 반민족행위처벌법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처럼 취급되어 악질 친일 경찰의 도피처가 되었다.

 

주한미군은 1945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했다. 광복군 출신은 거의 없었고, 일본군 출신 중에서도 초급 장교들을 주로 선택했다. 다음 해 4월에 폐지된 이 학교는 통역과 관련해 군사영어교육에 치중했으나, 국군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이 학교 졸업자 110명은 교육 기관 중 임관되어 육군 군번 1(이형근)부터 110번을 부여받아 대개 30대에 별을 달았고, 20대에 별을 단 사람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까지 육군 참모총장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군 요직을 독차지했다.

 

미군이 창설한 국방경비대는 정부 수립 후 육군으로 재편되었다. 미군은 전쟁 발발 이전부터 통신학교, 공병학교, 보병학교, 포병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교육 과정이 확대되면서 1952년에 4년제 육군사관학교가 문을 열어 11기가 신입생이 되었다. 미국의 육군지휘참모대학을 본뜬 육군대학은 1951년에 설립되었다. 미국의 국방대학원을 본떠서 만든 국방대학원은 1956년에 문을 열었다. 미군은 장교 교육을 시켰다. 각급 군사학교에서는 물론이고 야전 훈련장에서도 미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백선엽처럼 정보장교들이 정보 교육을 받기도 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첫 번째로 정부 수립 직전인 1948811일 이형근, 장창국, 이한림 등 6명이 국군 창설자라는 애칭을 가진 하우스만 대위의 노력으로 포트베닝 미 육군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형군은 1949년 준장 진급(28)과 동시에 주미 대사관 초대 무관 발령을 받았다. 전쟁 발발 직후 33세에 3군 총사령관 겸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19517월 강문봉 소장(27)과 함께 미 육군참모대학에 유학을 갔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며칠 뒤 유재흥 중장, 양국진·송요찬·이성가·백인엽·함병선·김종갑·박임항·오덕준·백남권 소장과 최경록 준장 등 3명의 준장, 2명의 대령 등 14명이 미 육군참모대학에 입학했다. 미군은 장교들을 1951년부터 대규모로 미국에 위탁교육을 보냈다. 19519월에 165명이 미 육군보병학교 초등군사반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항을 떠났다. 이들 중에는 김종필, 길전식, 강상욱 대위 등도 있었다. 1952년에는 594, 1953년에는 829명이나 갔다. 박정희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현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는 일본군의 황국군인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자료에는 1950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 4,729, 해군 920, 공군 1,503명 등 7,000여명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정부 각 부처 관리들의 미국 유학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고, 같은 시기 도미 유학생보다도 월등히 많았다. 군 지휘관중 자래가 보장되는 미국 유학을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노태우 대위는 결혼 며칠 뒤인 19596월 결혼식 사회를 본 전두환 대위와 함께 도미해 육군특수전학교에 입학했다.

 

미국은 유학생에게 군사교육 못지않게 정신교육을 시켰고, 미국 문화에 젖어들게 했다. 위대한 미국을 찬탄해 마지않던 유학생들은 반공정신에 투철했고, 미국의 안보와 국가 이해를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은 희박했고, 민족의식 또한 투철하지 못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30대 초반에 대장이 된 백선엽, 이형근과 37세에 대장이 된 정일권 사이에 파벌 갈등을 조장해 군을 장악하고자 했다.

 

1950년대 말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송요찬과 유재흥 등을 요직에 발탁했다. 그러나 세 명의 대장 중 적어도 한 명은 이승만보다 미국에 마음을 더 두었고,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1960419일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친미적인 송요찬은 4월혁명 후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5.16 군부 쿠데타 후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부부가 영어에 능통한 장도영은 이기붕 양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4월혁명 직후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자 예편원까지 냈는데, 뜻밖에도 19612월 미국의 입김으로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5.16 군부 쿠데타의 성공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걸친 것이 주요 요인이었다. 미국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 교육을 받은 군인들은 19615.16 쿠데타와 197912.12 쿠데타, 19805.17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동안 군부 통치 시대를 열었다.

 

참고자료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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