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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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3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을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 인근에 내려 놓았다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병사 30명은 이후 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김 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미케(My Khe) 지역으로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이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274채가 불에 탔으며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었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 글쓴이는 작년 겨울과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사건이었다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자행하는 짓들이 바로 이러한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났다미라이 학살을 통해미국인들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실체와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다이와 같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완벽히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나기 18년 전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그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자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1950년 7월 2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상륙했고, 7월 5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했다즉각적인 지상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19일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화 작은 연못의 포스터, Kill Them All이라는 영화의 문구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결국 미군은 그해 8월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후퇴하기 바빴다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이런 사고를 가졌던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이 과정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No Gun Ri massacre)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나온 피난민들의 모습, 피난민들은 3일간 쌍굴다리 밑에서 이렇게 학살당했다.)

 

1950년 7월 23일 후퇴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주곡리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분산 명령)을 내렸다이에 따라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고, 2일 뒤인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수백 명(최소 600)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다음 날인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갔다그러자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이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최소 수십 명은 죽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기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공기 공격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달아났다이것이 이날 오후 2~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당시 노근리 지역에 있던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쌍굴 앞뒤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도망친 민간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그러고 나서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쌍굴다리를 포위한 미군들은 굴다리를 나오려는 민간인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배고품을 못견딘 아이들이 울면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근리 학살을 표현한 그림)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29일 새벽까지 무려 60시간 동안 진행됐다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와 노인여성을 가리지 않았다겁먹은 피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미군에게 학살당했다몇 명이 야음을 틈타 쌍굴을 탈출했고쌍굴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20명도 안된 것으로 확인된다. 3일간의 학살로 노근리에서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학살을 마친 미군은 노근리를 떠나 남으로 후퇴했다이것이 바로 후퇴하던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의 시작을 알린 미군의 항공폭격과 기총사격)

 

노근리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다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을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노근리 사람들은 침묵해야 했다한미동맹과 반공을 외치는 사회는 이들의 아품을 감추려했고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았고정보공개법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이후 노근리 학살 이야기는 2010년 국내에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und)’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근리 이야기, 2011년에 출판된 노근리 학살 관련 만화책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다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라이 학살 만큼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그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강화되는 시점에 치러진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반전여론이 너무나도 미미했다그리고 전쟁 자체가 원점에서 끝나며 미국인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이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 한국전쟁의 미라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많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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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을 뒤에서 쳐다보는 미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주도했던 뉴라이트 세력들은 기존 역사교과서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의 이승만의 정치투쟁은 건국투쟁이고소련 치하의 공산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켰으며이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만들어졌다.”가 된다즉 한국 근현대사는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북한은 시작부터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이들은 소위 신의주 사건과 같은 예시를 들며소련군이 폭압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한다왜냐하면 그들이 찬양하는 미군정은 매우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으며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미국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상한 공식에 빠져 있다그러나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경제를 독점하는 과정을 보면허구일 뿐이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 또한 그러했다미군정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시점부터 환영하러 마중나온 시민에게 총격을 가해 몇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그리고 포고령을 발포하여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서울에 입성한 미군)

 

미군정의 통치는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이것은 미군정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즉 미군정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일반 노동자 농민은 쌀을 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으며땅과 자본을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만 증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그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봉기 및 저항으로 이어졌으며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에 대해 추수봉기(Harvest Uprising)’이라고 표현했다.

 

추수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 8,000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시작됐다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며칠 사이에 파업은 인쇄공전기기사전신 및 체신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산업에 파급되어 총파업으로 이르게 되었고많은 학생들이 이 파업에 가담했다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가담했다한반도 이남 지역을 통틀어총 25만 1,000명의 이 파업에 동참했다한마디로 미군정에 맞선 생존권 투쟁 및 자주권 투쟁이었던 것이다.

(대구 10.1 항쟁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에게 살해된 민간인의 시신)

 

파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개혁적인 것들이었다. “쌀 배급의 증가보다 높은 봉급실업자 및 귀국자들을 위한 주거와 식량공장에서의 작업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또한 민주적인 노동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그리고 반동적 테러의 중지 등의 요구도 나왔었다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장이던 허성택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에게 보낸 서신에도 앞에서 언급한 요구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1 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시위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학살한 제주도 양민 시신의 숫자를 보여주는 지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바로 강경진압과 폭력동원이었다대구 10.1 항쟁과 같은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명 이상이 경찰에게 체포됐다북한 개성 지역에서만 3,000명이 체포되고서울은 용산 철도 차고에서만 불과 하루사이에 2,000명이 체포당했다또한 전라남도에서만 4천 명이 체포됐다진압 당시 미군정은 주로 국립경찰에 의존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했지만필요의 정도에 따라선 서울측 경찰이나 미군 전술부대를 파견했다그리고 대구 10.1 항쟁에서는 미군 탱크가 출동했다.

 

1946년 10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미군과 우익경찰이 군중 6,000명에게 실탄을 사격했다이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죽고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이 체포됐다같은 날 경남 창원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 경남 진해 근처의 웅천에서는 미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었다부산의 경우 10월 9일에만 양측의 충돌로 경찰과 군중 24명이 피살되었고미군정은 전술부대를 투입하여 군중을 진압했다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총파업 및 반미군정 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당연히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생긴 사망자들이었다.

(존 리드 하지와 이승만)

 

이처럼 미군정의 통치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이런 폭력은 1948년 제주도에서 정점을 찍었다이들은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자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하고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미군정이 동원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독소전쟁 시기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시키는 학살극을 벌였다학살은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말까지 주로 발생했다총 30,000명에서 60,000명의 제주도민이 그렇게 학살당했다제주도민 10명 중 1명 혹은 6명 중 1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며미군정 자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려는 뉴라이트들을 보면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미군정은 일부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권이었지파업을 전개하던 대다수 시민을 위한 정권이 절대로 아니었다미군정이 내세운 이승만도 그러하며이들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따라서 미군정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전파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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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존재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국가 베트남 공화국(Republice of Vietnam, Việt Nam Cộng Hòa)이다한국에서는 보통 남베트남으로 자주 불리며영어로는 South Vietnam이라고 불린다남베트남은 1955년에 탄생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됐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호치민(Ho Chi Minh)을 지도자로 하며 1945년에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이 유지가 됐고남베트남에는 1949년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 Quốc gia Việt Nam)이 유지가 됐다.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응오딘지엠)

 

그러나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었다이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소위 국민 투표를 통해 탄생했으며형식적으로 대통령제가 유지됐다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분적으로 베트남의 상류 계층이었다식민지 시절 그는 식민지 관료였으며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바꿔 프랑스에 대항하는 약식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창설되자베트민으로부터 협력을 제의받았으나 단번에 거절했다그 이유는 본인의 형 응오딘코이(Ngo Dinh Khoi)가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물론 그의 형은 프랑스 식민지 협력자였고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다 그러했다결국 응오딘지엠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서 살았으며그 시기부터 반공사상을 전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엠이 귀국한 것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전후였고바오다이는 그를 베트남국의 총리로 임명했다이에 따라 미국의 노선은 바오다이를 지지하는 것에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하며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1956년 이내로 약속됐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실행했다그가 총선을 거부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그 이유는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그걸 알았기에 지엠도 아이젠하워도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미국의 계획대로 지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혹은 지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즉 그렇게 해서 실시된 것이 1955년의 국민투표였고지엠은 국민투표에서 98.2%의 득표율을 얻었다쉽게 말해 부정선거였다당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많았다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으며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휴버트 험프리존 F.케네디 등이 응오딘지엠의 지지파였다이들은 미국의 강경 보수 성향으로 극단적 반공주의자 지엠과 성향이 잘 맞았다.

(응오딘지엠과 미국 대사인 헨리 케벗 로지, 지엠은 마치 미국 대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남베트남에 남아있던 베트민 세력들을 탄압하고 소탕하는 것이었다당시 베트민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세력이었다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침략을 무찔렀고남베트남 지역에서도 프랑스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에게 정통성이 밀렸던 것이다그 이유는 본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민들이 설치한 선거함을 철거했고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하고 감옥에 투옥했다. 1960년대 초반 기준으로 이미 남베트남에는 수십만의 정치범이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시기 식민당국에 협력한 이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북베트남에서 8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월남한 것도 따지고 보면이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이중 60만 명은 가톨릭 세력이었는데이들 또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식민당국의 대대적인 협력자들이었다즉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켰고남베트남의 군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규모가 늘어났다그리고 이 남베트남군의 장교와 사령관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당국에 협력한 인사들이었다쉽게 말해 이들은 바오다이 베트남국에서 응오딘지엠의 베트남 공화국의 장교와 사령관이 된 것이다즉 미국은 이런 매국노들을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교활하게 포장시켰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에게는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는 2017년 켄 번즈(Ken Burns)의 PBS The Vietnam War(2017)에 대한 비판 글을 개제하며응오딘지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선거조항을 담고 있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운명은 와드의 역사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저자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조국에서 몰아내었던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유일한 설명은 남베트남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1955년에 선거를 거부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제안된 선거만을 언급하는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가 마치 그들이 프랑스 식민통치권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남베트남 정부의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것처럼, 6쪽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미국 그 자체가 선거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1955년 중반 디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1955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통일 베트남을 위한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는데냉전국가인 분단된 독일과 한국의 정책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자유선거를 유지했던 것이었다.”(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Gareth Porter, 2018.03.01.)

 

쉽게 말해 미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남베트남의 정부가 정통성이 없었다는 것을 책에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매클리어는 베트남 30년 전쟁의 제1막에 해당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마감은 임무 교대를 위한 무대 장치의 전환이었으며, 10년에 해당하는 제2막은 미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9) 응오딘지엠 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매클리어는 미국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인용하며미국의 남베트남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와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만난 응오딘지엠)

 

미국은 제네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입장은 베트남 국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이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은 6월의 <펜타곤 페이퍼>에 잘 나타나 있다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윤충로 교수는 박사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서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으며친프랑스 세력에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그의 논문에는 남베트남 군벌 및 친불파 집합체이던 까오다이교나 호아하오교 그리고 베트남 국민당이나 빈쑤옌 등과 같은 세력을 견제했다고 나온다. “1955년 바오다이의 폐위를 거쳐 1956년 4월 호아하오의 지도자인 바꿑(Ba Cut, Le Quang Vinh)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하고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이런 프랑스와의 대결이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 그러나 윤충로 교수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낀 세력이 바로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한 베트민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히 밝혔다.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논문에서 윤충로 교수한 인용한 쩐반짜우(Tran Van Giau)의 인용문을 보자.

 

남부당국은 그 지역의 우리 동포와 모든 애국적이며평화적인 세력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겨우 1년 동안에 그들은 3,000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적어도 4,000명의 애국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5)

 

응오딘지엠 정권의 멸공 반공 정책은 사실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해가고 있던 프랑스를 잠시나마 몰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원에 의존한 것이었고그렇기 때문에 과거 반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애초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아무것도 안했으니당연히 정통성이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과 이승만, 1957년 응오딘지엠은 한국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만났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도 정치 성향도 통치하는 방식도 거의 비슷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맞다이는 낡은 관점이 아니라 응오딘지엠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애초에 미국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남베트남은 미국의 창조물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였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졌고미국 정부에 의해 제거됐다. 1963년 그가 암살당한 것도 CIA가 뒤에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미국이 기존 꼭두각시를 새로운 꼭두각시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내용은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그러나 양측의 성격이 구분된 상황에서 미국이 식민주의의 흔적 없이 베트남에 들어간다는 덜레스의 말처럼 순진한 말도 없을 것이다베트민은 선거를 통해서든전복이나 게릴라전을 통해서든 남쪽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그들은 근대 세력이었고그들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은 봉건주의자들이었다그 상황에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그들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에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웠다아울러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를 쫓아내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베트남 사회에 대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식민 지배 아래에서 그들 사회는 분열되었고서로를 불신하며 의지할 가족에게만 충실했다따라서 그들이 연대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알게 되었다.

 

남쪽은 정반대였다남쪽의 정부 구성원들은 서유럽인들을 상대했고전쟁 때 국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다그들은 프랑스에 협력했고전쟁으로 이권을 챙겼다응오딘지엠은 외국에 있어서 어느 편도 고를 수 없었다남쪽에는 옛 봉건 질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이는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남쪽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대하기보다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의 전통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었다응오딘지엠 정부는 친족 정부였고따라서 지엠이 몰락하던 시기에 오로지 친족만 신뢰했다처음부터 한 베트남 친족만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리더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북쪽은 외국인을 쫓아낸 사람이 이끌었고남쪽은 외국인이 추대한 사람이 다스렸다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주의가 한창인 시기에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명했고지엠은 해방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던 시기에 베트민을 인정하지 못하고 망명했다호찌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그래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농민층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지엠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한 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미국의 정치적 필요성과 야망이 만들어낸 미국의 피조물이었다베트남 기준에서 볼 때 그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지엠은 불교 국가의 가톨릭교도이자 남부의 주류 베트남인이었지만무엇보다도 혁명이 휩쓸고 간 국가의 봉건 귀족이었다.”(최고의 인재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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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탄탄한 스토리 라인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8천엔을 대출해주었고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만주지역필리핀인도차이나 반도버마인도네시아 등이었고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난징한코우수조우우후난창한코우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유괴와 납치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본인 증언에 따르면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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