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한국인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북한 김일성이 기습 남침을 감행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 우방이 참전하여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다.”로 요약이 된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 극구 반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1950625일만 놓고 본다면 북한이 먼저 시작한 것은 맞는 이야기라고 본다. 1990년대 들어 박명림 교수나 정병준 교수 등이 찾아낸 소련측 기밀문서는 김일성이 1950625일에 계획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남한에서 진행된 이쪽 연구는 1980년대 당시 소위 남침유도설로 대표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집필한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1950625일이라는 날짜에 초점을 맞추지 않은 아주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연구성과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커밍스의 책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진행되던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줬다. 커밍스의 저서는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적 징크스를 벗어던지려 했던 리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만큼이나 영향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 책을 읽었던 뜻있는 대학생들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점을 자각하면서, 해방 후 국가 정통성 면에서 한국이 북한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국가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그런 영향을 주었던 커밍스 교수의 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자, 반박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의 연구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동구권의 붕괴 속에서 흐름을 같이 했다는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당시 상황은 남한의 경제력은 88 올림픽을 전후로 상승했던 반면 북한의 경제력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 및 교류가 끊기면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참사를 겪고 있던 시기였다. 거기다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이 1991년에 해체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은 단순히 사회주의는 실패 자본주의는 생존이라는 정형화된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셈이다. 1990년대 우고 차베스와 같이 사회주의를 시도하려는 중남미의 움직임과 미국의 패권에 맞서려는 이들의 진보적인 투쟁 등은 이 정형화된 틀 속에서 외면 받았다.

 

따라서 박명림 교수와 정병준 교수 등의 연구 또한 이런 시대적 흐름속에서 나타난 것이기에, 절대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특히나 전쟁의 기원을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 맞추어 북한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에서, 기존의 한국사회가 주장하던 김일성 침략자, 북한에게 아주 큰 책임이 있다.”는 식의 논리를 보다 많은 근거를 통해 세련되게 다진 측면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논리는 오히려 한국전쟁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 접근과 다방면적 시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당시 벌어진 사건들 중에는 그러한 논리로만 접근할 수 없는 사건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생각해보자. 미국은 1950629일부터 1953727일까지 이른바 북폭을 단행했다. 미국은 대략 65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고, 남한 또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북한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대략 1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민간인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도 남북한 전역에 투하됐다. 이런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 기간 자행됐고, 미군 폭격은 한국전쟁 민간인 사망자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을 과연 김일성의 침략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을까? 이는 당연히 억지논리를 양산해내기 쉽다. 그 외에도 국민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나 북한 지역에서 반파시즘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활동하던 국제여맹의 활동, 북한과 중국 베트남의 사회주의 반미 국제연대 등은 앞에서 언급한 정형화된 틀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책임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를 당연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필자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국의 공화국 전면적인 침공에 대해서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쟁의 기간을 1950년이 아닌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에 의해 분단이 획책된 시점부터 따진다면, 그런 북한의 주장에는 다소 부정하기 힘든 근거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북한이라는 대상을 평화적으로 협력해야할 대상이 아닌 무력으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의 통일관은 정복주의적 통일관이었다. 실제로 1948년부터 1950년까지 38선을 중심으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히 있었고, 이러한 교전들 중에선 남한에게 전쟁책임을 물어야 할 만큼 중대한 사건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9년 대한민국에서 창설된 호림부대의 정탐행위가 그렇다. 한왕룡 소령이 부대장을 맡아 출범한 이 특수부대는 여순항쟁 이후 지리산으로 숨은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도리어 북한 지역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벌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원도 양양군에 침투했으며, 실제로 조선인민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106명이 인민군에게 사살됐고, 44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을 하게 됨에 따라, 미군은 북한관련 자료들을 노획했는데, 미국이 노획한 북한측 비디오 중에는 호림부대 재판 관련한 자료도 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모란봉극장에서 공개로 진행되어 사형이 선고됐으며, 침투되었던 이들 중 탈출하여 남하한 이들은 이후 대한민국 육군 호국군에 편입됐다.

 

호림부대 사건은 현재 북한이 주장하는 미제국주의자들과 남조선 괴뢰의 침략행위라는 점에 있어서 하나의 부정할 수 없는 근거가 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토대로 보았을 때, 한국전쟁 발발을 1950625일에 맞춰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만 전가시키는 행위는 너무나도 정형화된 사고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있던 이른바 작은전쟁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소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기 진행된 작은전쟁에서 최소 1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이들에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홀거 하이데라는 학자는 그 수를 2배로 측정하여 1945년에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20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상황을 외면하며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것은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주장대로 전쟁의 책임을 북조선에게 떠넘기는 데 기여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1950625일이라는 시점에만 맞춰 보기에는 오류가 많은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사회는 한국전쟁의 그 모든 책임을 북한의 김일성,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떠넘기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듯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세련된 반공주의적 관점을 뛰어넘어야 할 시점이며, 그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을 많이 넓혀야 할 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자꾸 1950625일 북한의 침략이라는 일부 사실 관계에만 맞추려는 점은 앞으로 우리가 극복해야할 사안인 것이다. 이제는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야 한다. 앞으로는 보다 더 많은 연구가 나오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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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7-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박명림 정병준 둘 다 읽어본 입장에서 그 둘의 책의 의의와 시사점을 너무 좁고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건 아닌지

NamGiKim 2022-07-27 16:22   좋아요 0 | URL
박명림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서 읽어봤지만, 사회주의의 실패를 지엽적으로 강조하죠. 그 분들의 연구 성과가 없다는 것이 아닌 한계점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