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에 조금 어렵지만, 베트남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PBS 베트남 전쟁을 다시 보게 됐다. 4년 전에 이미 봤지만, 한 번 더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 1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보유한 작품이라 사실상 책 한 권의 분량이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로 보는 재미가 제법 있는 작품이다. 1화는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1961년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점에서 끝났다면, 2화는 존 F. 케네디 집권 2년 동안의 베트남 전쟁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격적으로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 전쟁을 다큐멘터리가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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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ding the Tiger 오프닝, 맥나마라와 케네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미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전쟁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독일과 일본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개입한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논리를 적용했다는 데 있다. 즉 미국은 오류가 없는 ‘선’이고, 미국의 적국은 오류가 많은 ‘악’인 것이다. 이러한 선악구도식 논리는 특히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세력과 냉전시기 경쟁하면서 많이 악용됐고, 베트남 전쟁도 그런 구도에서 미국이 침략한 전쟁이었다.
1967년 DMZ 근처에 있는 콘티엔에 배치된 미 해병대 참전용사인 존 머스그레이브는 자신이 젊은 시절 아버지나 삼촌 세대들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로 참전했었고, 이웃 아저씨나 집 근처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었다. 즉 그러한 사회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존 머스그레이브의 젊은 시절 사례는 적잖은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영화 <7월 4일생>을 보면, 주인공인 론 코빅 또한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 또한 어린시절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잖게 회고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서 깨진 것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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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와 최고의 인재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와 베트남 정책을 추진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 잘생겼고, 똑똑하며 많은 이들에게 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참전용사는 “당시 나에게 존 F. 케네디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어요.”라는 찬양어린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던 1960년대 초반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점차 당기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본인은 고문단 지원을 통한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원했지만, 그가 고문단을 파병할수록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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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오딘지엠, 친미반공주의자인 그는 남베트남 민중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른바 전략촌이라는 반민중적인 계획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다. 이들이 죽인 베트콩들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사실 베트콩과 민간인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다. 베트콩에게는 제대로된 군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민중적 정책은 오히려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을 베트콩 편으로 만들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야심차게 건설한 전략촌 대다수는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민중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무기나 물자 훈련면에서 당연히 남베트남 정규군보다 항상 열악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콩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충성심 경쟁에만 몰두했지, 베트콩과 싸우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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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레주언, 1959년 북베트남은 아이젠하워와 응오딘지엠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자, 남부통일을 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남부에서 혁명투쟁을 했던 레주언은 호치민보다 더 무력통일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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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존 F. 케네디는 반공국가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를 정부에 결집시켰다. 월트 로스토, 맥스웰 테일러,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등 미국 정치계나 경제계 그리고 군사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소위 존 F. 케네디는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ist)’을 결집시킨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이 점을 간과했다. 케네디 본인은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킨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케네디의 적이었던 호치민은 케네디가 그러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만의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켰다. 거기다 그들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또 독립을 쟁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케네디의 정책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응우옌응옥(Nguyen Ngoc)과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는 다큐멘터리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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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응옥,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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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슈안다이,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호치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일부러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수염을 길렀어요. 모두에게 자신을 호 삼촌이라고 부르라 했어요. 일부러 아주 겸손한 이미지를 만들었고요. 항상 간단한 말을 썼어요. 사람들과 소통할 땐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습니다.”
“호치민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호치민은 우리에게 말했어요. 전쟁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겁먹지 않을 겁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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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프랑스 침략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참전용사 바오닌, 국내에도 번역된 <전쟁의 슬픔>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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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F. 케네디와 니키다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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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네이팜 폭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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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수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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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군을 훈련시키는 미군고문단)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을 믿었다. 반면 존 F.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은 사실상 대다수 농민을 적으로 규정한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케네디가 보낸 미군사고문단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를 지원하여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응오딘지엠 정부가 반공정책으로 죄다 적으로 만든 이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구금하고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그리고 전략촌 건설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1954년에 체결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인권’이라는 부분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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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촌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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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시핸 기자, 196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심층보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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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폴밴,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남베트남의 현실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닐 시핸기자가 쓴 <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으로 출판됐으며,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던 이들은 남베트남을 지지했지만, 남베트남군의 문제를 깨닫게 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고문단 및 주월미군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던 존폴밴(John Paul Vann)이다. 존폴밴은 전형적인 미국 군인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와 대중성 결여의 문제점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존폴밴은 주로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고문단 기지에서 초기에 근무했는데, 대다수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지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존폴밴이 보기에 남베트남군은 너무나도 부정부패한 집단이었지만, 그의 적이던 베트콩은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며 대중과 소통하는 세력이었다. 밴은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폴 하킨스에게 이러한 사정을 여러번 보고했지만, 하킨스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은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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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의 작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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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전투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 1951년 12살의 나이때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으며, 이후 미국에 맞선 전쟁에도 참전하여 베트콩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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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에 의해 격추된 헬리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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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의 스탬프)
결국 문제는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서 터졌다.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의 지원을 받은 15대의 헬기와 10대의 장갑차 그리고 최소 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베트콩 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투의 패배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됐다. 심지어 베트콩들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총기와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5대의 헬기 중 14대에게 손실을 가했다. 이 중 5대는 완전히 파괴됐으며, 장갑차 또한 막았으며 파괴했다. 당시 베트콩의 병력은 300명도 채 안됐다. 거의 1/6이나 적은 병력으로 화력과 병력이 뛰어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영광스럽게 승리했다.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압박 전투를 통해 응오딘지엠 정부의 지방 통제능력이 사실상 바닥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킨스는 압박 전투가 남베트남군의 승리였다고 오보를 했다. 압박 전투에 대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존폴밴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기자인 닐 시핸과 말컴 브라운 그리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이를 알렸지만, 결국 본국으로 잠시 송환되어 베트남을 떠나게 됐다. 압박 전투의 처참한 패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 정부는 자국 내 불교도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애초에 민중과 전혀 소통할 생각이 없던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그리고 제수인 쩐레쑤언은 가족 독재정치를 하며 자신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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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공양을 하는 틱광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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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1월 쿠데타군에게 총살당한 응오딘지엠)
이들이 자행한 반민주주의적 탄압은 특히나 불교도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응오딘지엠 일가친척이 가톨릭 주교가 된 것은 축하해줬지만,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자 이들을 총기와 경찰력으로 진압했다. 불교도들을 탄압하며 이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베트콩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불교도 탄압에 맞서 1963년 6월 13일 수도 사이공에서 한 승려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교도인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자, 뒤를 이어 적잖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소신공양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이들 중에는 남베트남 의회정치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마져도 지엠 정권에겐 공산주의 동조자였다.
이들에 대한 지엠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도 기가막혔다. 그의 제수인 쩐레쑤언은 방송에 나와 “중놈이 한 일은 바비큐가 된 것 뿐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이는 미국의 정치인마져 경악하게 만들었다. 학생들과 불교도들의 시위는 계속됐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결국 존 F. 케네디는 일부 남베트남군 장성과 쿠데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과거 미국은 이란의 모사데그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그 외에도 여러번 레짐 체인지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미국의 레짐 체인지 사례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도자 제거라는 성격을 많이 가졌지만, 응오딘지엠의 사례는 “이 지도자가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이 공산화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쿠데타는 게시됐고,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총살된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자신의 베트남 전쟁 관련 자서전에서도 밝힌 일이지만, 케네디는 지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지엠 사후 몇일 만에 이러한 살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유지할 방안에 대해 계속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암살범에게 총에 맞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존 F. 케네디가 죽자 베트남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에게 이어졌고, 남베트남에는 16,000명 이상의 미군고문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의 상황은 점차 암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닐 시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다큐멘터리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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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헬기에서 뛰어 나오는 미군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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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 부대, 남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헬기를 투입했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미국인들이 역사에서 예외라고 생각했어요. 역사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우리에게 못 이기는 전쟁은 없으며, 나쁜 대의명분을 나타낼 수도 없다고 말이죠. 우린 미국인이었어요.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닌 게 증명됐죠.”
1부에 비해 2부는 미국 케네디 정부의 베트남 개입을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부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소개서에 가까웠다면, 2부는 이 다큐멘터리의 메인 주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베트남 전쟁의 초기 케네디 정부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1시간 30분 동안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베트남 정책이 민중을 무시하는 정책이었음을 다큐멘터리가 잘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케네디 사후 베트남 전쟁은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계승했다. 그러나 이는 암흑 터널로의 행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대베트남 정책은 실패했으며, 결국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다음에 3부 리뷰를 올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