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그래서 어제 이 책을 인터넷 구매했습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학습을 해야 남북관계를 더 정확히 분석하고 대비할 수 있으리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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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찌민인가? - 베트남의 진실이 위기의 한반도에게 묻는다
송필경 지음 / 에녹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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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함락시킴으로써 외세를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이룩했다. 1965년 베트남 전에 개입한 미국의 요청으로 대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한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부는 75년 월남이 해방되자 이를 계기로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던 민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전쟁, 경제발전에 기여한 소중한 전쟁 혹은 공산괴뢰 월맹이 자유월남을 적화시키게 된 전쟁”으로 인식했고 군사독재의 끄나풀이었던 대한뉴스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 민주화 투쟁하는 학생과 지식인들을 월남패망을 예시로 들며 대중매체를 통해 지속적인 반공반북 선전을 하였다. 박정희 전두환의 반공선전의 여파로 지금까지도 자유한국당과 박사모세력들은 월남패망을 들먹이며 반공선전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을 보다 큰 틀에서 바라보려는 사람들은 종북좌파, 좌경, 용공분자로 몰아붙인다.

사실 수구세력의 이러한 반공선전 때문에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난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미국이 참전한 전쟁”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다른 자료를 접하고 리영희 선생이 쓴 책과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 관련한 서적을 여러권 읽으며 나의 생각은 점차 변했고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호치민 아저씨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왜 호치민인가” 저자 송필경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박정희 전두환의 반공주의로 인하여 대한민국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혹은 지금까지도) 베트남 전쟁과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을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과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매우 불필요한 관점이다. 우선 베트남의 역사를 볼 필요가 있다.

베트남은 2천년 전부터 중국의 침략에 저항해온 역사다. 수많은 중국의 침략에 저항했고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고군대가 아시아 대륙을 정벌할 때 베트남은 몽골의 지속적인 침략을 막아냈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침략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나라가 베트남이다. 그러던 중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제국이 된 프랑스가 19세기 중반 베트남을 침략하였고 베트남을 3등분(북부는 통킹, 중부는 안남, 남부는 코친차이나)하여 식민지화 하였다. 이와 같은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베트남의 위대한 영웅 호치민이 1890년 베트남의 시골마을 킴리엔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민중은 프랑스 제국주의에 저항해왔다. 호치민도 20대 때부터 독립운동을 해왔다.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히틀러의 동맹국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애국자들은 베트남 독립 동맹(베트민)을 창설하여 일본에 저항해왔고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항복 서명식에 맞추어 호치민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이를 무시했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려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프랑스가 떠난 뒤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원래는 2년 이내에 통일을 위한 선거를 해야 했지만 미국은 민중성이라고는 1%도 없는 민족반역자 반공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분단을 구축했다. 그러던 중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북베트남에 대규모 폭격을 감행하였다. 1965년부터 미국의 지상부대가 상륙하였고 1967년에는 54만9천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프랑스를 대신하여 싸우게 된 미국은 수많은 전쟁 범죄와 학살 그리고 폭력을 자행하였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구정공세를 감행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미국의 선전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렸고 미국 내에서는 반전운동이 일어났다. 결국 미국은 1969년부터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했고 1972년 크리스마스에는 대규모의 융단폭격을 가한 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나서 베트남에서 철수 했다.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부정부패와 비리를 일삼던 남베트남 정권은 결국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베트남의 역사는 2천 년간 중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해왔고 몽고군의 침략도 막아냈으며 프랑스와 일본 그리고 미국의 침략까지 막아냈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이 미국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위대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1969년 9월 2일 심장병으로 죽었지만 호치민이 베트남 인민들에게 보여준 친 민중성과 따뜻함 그리고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열정은 베트남 인민들을 자발적으로 침략자들의 야만적인 행위에 저항하게 만들었고 미국을 몰아내고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채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을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치민 그는 비록 잘살지 못하는 나라의 지도자였지만 그가 민중에게 보여준 진심과 따뜻함 마음 그리고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열정은 분명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 전에 참전하여 온갖 범죄와 민간인 학살을 일삼았던 우리의 과거도 분명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저자 송필경 선생이 베트남 평화 기행을 배경으로 한 기행문에 가깝지만 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들이나 수구세력들이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해 얼마나 잘못알고 있는지를 아주 잘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한국인이 쓴 책 중에 호치민을 주제로 한 몇 안 되는 매우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틈만 나면 월남패망과 보트피플 같은 얘기만 외치는 대한민국의 수구적폐세력들의 논리와 지식이 얼마나 흠이 많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책의 저자 송필경 선생님처럼 베트남 평화기행에 꼭 동참하고 싶어졌다.

무튼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의 본질과 호치민을 아주 정확히 잘 파악하고 있는 매우 좋은 책이다. 비록 절판되었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본다. 이처럼 좋은 책을 써주신 저자 송필경 선생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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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버 다이빙 시작하기 - 다이버로 살아가는 당신이 알아야 하는 모든 것
Arnold J. Kim 지음 / psdc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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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버 다이빙 입문격으로 읽기 괜찮은 책이다. 물 안무서워하는 다이버초보들은 읽어보길 바란다. 참고로 내 외삼촌이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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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문제적 인간 12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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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025(러시아 구력은 현재 달력보다 13일 느림) 2월 혁명으로 탄생했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이로써 반민중적이던 케렌스키 정권은 무너지고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았다. 10월 혁명 성공이 선언된 다음날인 1026일 레닌은 군중들이 모인 여성귀족학교인 스몰리학교 건물에서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24,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MBC, 러시아 혁명 1, 2006)

 

이어서 레닌은 평화에 대한 포고령토지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레닌의 연설 이후 군중들 사이에 서있던 어느 병사가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콜론타이도 백발의 늙은 노인도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당시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전쟁으로 지쳐있었다. 그로 인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스몰리학교에 모인 군중들과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10월 혁명 성공의 성취를 만끽했다. 거기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사회주의가 실현됐으리라는 생각에 빠졌다.

 

19183월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러시아는 4년간 지속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러시아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인다. 적백내전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적백내전은 혁명 러시아 경제를 피폐화시켰고, 결국 1921년 내전 시기 레닌이 고집했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경제정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4121일 레닌은 사망했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사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대표적으로 연구한 영국인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이다. 8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은 주로 레닌의 전반 생애와 레닌의 사적인 이야기에 매우 초점을 두었다. 특히 91년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썼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다.

 

분명 이 책은 1870년 레닌이 태어났던 시점부터 191710월 혁명을 성공시키는 과정까지의 일대기와 당시 혁명가적인 레닌의 생애는 잘 조명했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도 서술했다는 점에선 나름 칭찬받을 만 하다. 그러나 책에 나온 10월 혁명 이후의 레닌의 일대기는 지나치게 우익적이고 서비스의 편향된 관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 부분에서 레닌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판을 보는 것 같았다.

 

1. 적백내전의 책임은 레닌에게 있을까?

 

191710월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혁명 러시아를 분쇄하기 위해서 백군을 도와 적백내전을 일으켰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백군은 구 황제체제를 복원하고자 했다. 혁명 직후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이런 상황은 트로츠키가 군대를 지휘하게 됨에 따라 군대의 규모와 군사력이 차츰 막강해졌고, 1920년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204월에서 5월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했지만,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극심한 대기근과 인플레이션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는 원래부터 열악했다. 1914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하게 됨에 따라 가뜩이나 열악했던 경제는 더더욱 열악해졌다. 그 결과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적백내전이 일어났다. 쉽게 말해 러시아 경제는 전쟁으로 인한 직격타를 2번이나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의 경제는 상당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기후가 안 좋아 농사짓기 힘들고 식량생산 자체가 매우 힘든 러시아는 결국 기근이 닥쳤다. 그 결과 수백만이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허덕였다.

 

책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러한 책임을 전적으로 레닌에게 묻는다. 서비스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올바른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적백내전을 일으킨 건 황제체제 복원을 원했던 백군 세력과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따라서 적백내전과 대기근의 책임은 전적으로 백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과 서방의 고립으로 100만 명이 아사했던 이라크 사태를 이라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듯이, 전쟁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과 볼셰비키들에게 전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2.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은 무자비 했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적백내전 시기 적군과 볼셰비키들이 보였던 폭력성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일부분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단순히 레닌과 볼셰비키들에 대한 폭력만 강조한다. 그렇다면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가 가장 폭력적이었을까?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적백내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체카라는 정치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체카의 임무는 반혁명세력과 테러예방 그리고 적백내전에서의 승리기여였다. 적백내전 시기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을 보여줬고, 체카가 공식적으로 처형한 인원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도 체카였다. 그렇다면 왜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보였던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는 전시였고, 백군을 비롯한 반동세력들의 백색테러가 끊임없었다. 적백내전 승리에 기여했던 트로츠키는 타려던 마차가 폭발해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레닌 또한 백색테러를 숱하게 당했다. 백색테러의 잔인함은 정말 엄청났다. 백군이 저지른 테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얘기로 돌려 니콜라이 2세의 일가족 몰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첨언하자면, 니콜라이 2세는 죗값을 물어 루이16세처럼 당연히 죽었어야할 암군이었다. 물론 백군 옹호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있으면서 그가 인민과 사회주의자들에게 행한 반혁명 반동적인 그의 행적을 생각해봤을 때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체카 창설은 백색테러에 맞서기 위한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이었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는 분명 잔인했고, 그들이 만든 체카라는 경찰조직 또한 테러를 일삼았으며, 레닌 또한 그러한 행위를 옹호했다. 그러나 테러와 학살 그리고 무자비함에 있어서 적백내전을 일으킨 백군이 적군보다 훨씬 심했고, 방법 또한 적군보다 더 잔인했다. 백군 쪽에 있던 운 게른 슈테른베르크만 보더라도 백군의 광기와 잔인함은 적군의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된다. 백군의 잔인함과 테러는 전혀 얘기치 않으면서 적군의 무자비함만 강조하는 로버트 서비스의 서술은 우익적이고 편향된 관점이다.

 

3. 3인터내셔녈에 대하여

 

3인터내셔널의 창설은 혁명 러시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업적중 하나다. 19141차 세계대전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은 레닌에게 매우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10월 혁명에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는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1919년 창설된 제3 인터내셔널은 국제혁명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특히 1918년 독일 11월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독일사민당의 배신과 독일의 자유군단 같은 우익 반동 군대에 의해 봉기는 진압되고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망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헝가리에서는 벨라 쿤이 이끄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했다가 6개월 만에 체제전복 되는 일도 있었다.

 

유럽에서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은 참담했지만, 레닌은 포기하지 않고 국제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레닌과 볼셰비키의 영향은 아시아에도 끼쳤다. 당시 아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착취당했다. 중국, 조선, 베트남, 인도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식민 지배를 당하는 나라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이 지배자가 되며 일국사회주의로 변질되었지만, 당시 지배받던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게 혁명에 대한 희망과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생전에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는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나라들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섰고, 불합리한 식민지 체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게 바로 제3인터내셔널의 최대 업적일 것이다.

 

4. 결론

 

이 책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생각했던 것 보다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10월 혁명 이후 레닌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레닌의 개인사적인 얘기를 주로 초점을 두다보니 제3인터내셔널에 대한 서술이 매우 적었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독일혁명에 대한 언급도 매우 짧게 했고, 3인터내셔널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적잖은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이다. 그보다 더 잔인하고 민중의 지지도 받지 못한 백군 반동분자들의 만행은 전혀 언급치 않고, 오직 레닌과 볼셰비키의 잔인성만을 강조하는 서비스의 서술이 불편했다.

 

이러한 서술은 전형적인 우익들의 문제점이자 한계다. 그래도 이 책은 맹목적으로 레닌을 비판만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10월 혁명 이전 레닌의 전반 생애를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선 이준구라는 이상한 수꼴이 쓴 레닌을 이겨야 나라가 산다나 네오콘 이론 창시자인 루돌프 럼멜의 레닌에 대한 서술에 비해선 보다 레닌에 대해 긍정적이고, 그나름 바람직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무조건 불쏘시개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보단 다른 책들을 추천해주고 싶다. 인물전기로는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평전이나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을 회상하며를 추천하고, 같이 읽을 책으로선 레닌이 쓴 국가와 혁명과 아고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전집시리즈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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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섬 전투 (Battle of Attu)

2016년 윤동주를 다룬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정친 송몽규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송몽규는 “1943년 5월 미군이 알류산 열도 아치 섬(에투 섬)을 점령하고 미군 잠수함 부대가 진격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그냥 넘겼을 것이다. 영화의 그 장면을 자세히 보면 송몽규가 아치 섬을 언급하며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지도의 위치는 미국 알래스카 근처에 있는 어느 섬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투이기 때문에 오늘은 에투 섬 전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태평양 일대의 섬들을 점령해나갔다. 일본의 팽창 야욕은 알래스카 일대까지 퍼졌다. 일본이 알래스카 령의 에투 섬을 점령한 것은 1942년 6월이었다. 이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알류트인 42명을 훗카이도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일본군이 이리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주둔하는 미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이 섬을 점령한 것은 아무래도 미국의 알래스카를 압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과 1943년 2월 과다카날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1943년 5월 11일 태평양 전선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에투 섬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1943년 5월 21~22일에는 에투섬에 상륙한 미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일본군 함대가 도쿄만에 모여 에투 섬 쪽으로 출발했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1943년 5월 25일에는 에투 섬 수비대 대부분의 일본군 주력부대가 항복했다. 1943년 5월 29일 잔존부대를 이끌던 야마사키 대령은 부상병들에게 청산가리를 먹게하여 죽인 뒤 잔존병력 140명에게 반자이 돌격(덴노 헤이카 반자이 하며 착검한 총을 들고 돌격하는 자살 공격)을 명령했고, 나머지 140명은 미군을 향해 반자이 돌격을 하다가 전멸당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1943년 5월 30일 에투 섬 전투는 끝이났다.

19일간 지속되었던 에투 섬 전투에서 미군 55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 2350명이 전사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알래스카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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