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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의 철학
마시모 도나 지음, 김희정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디오니소스의 철학이라는 뭔가 있어보이는 제목, 게다가 술과 철학이라는 더 있어보이는 주제.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열었으나 실망했다. 고대부터 시작하여 현대까지 철학의 사조를 간략하게 훑어가면서 술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늘어 놓는다. 그렇지만 결코 술과 철학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철학자들이 술을 좋아했다더라, 술을 먹으면서 토론을 했다더라,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더라 등등등. 술과 철학자에 관한 신변잡기이지 술을 주제로한 철학은 아니다. 차라리 제목을 술과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저자가 하는 술에 관한 생각은 아주 간단하다. 술은 양면성이 있어서 과하지 않는다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과하면 실수를 유발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술에 관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이 양면성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술에 관한 철학의 전부이다.   

  마시되, 무분별함 속으로 난파 당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선까지 마셔야 한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엄청난 정신적 자제력과 육체적인 저항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과제이다.(P.202) 

  마시되 무분별하지 않고 제 정신을 잃지 않을 정도까지만 마시라는 것이 디오니소스의 철학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가지고 나온 이 책의 결론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왜 한국 사회는 그렇게 술에 목을 메는가 생각을 해본다. 20살이 된 녀석 중에 한 녀석이 매일밤 술을 마시고 예배시간을 늦기에 물었다. "왜 그렇게 술을 마시냐? 다른 애들 안마셨을 때 넌 마셨으니 이제 좀 자제해라." 그 녀석은 14살 어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녀석이다. 젊어서 술을 마시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를 하지만 다음날 무리가 될 정도로 밤을 새서 술을 마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녀석 말에 의하면 술 마시지 않으면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너무나 빈곤한 문화적 상상력과 배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술집이 아니면 대인관계를 맺는데 어렵도록 만들었다. 매일 모이면 술집이다.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도 억지로 술을 마신다. 입학 오리엔테이션을 가서 술먹고 죽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가끔 나오기도 했었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를 만나고 자리를 만드는 것 같다. 월요일에는 원래, 화요일에는 홧김에, 수요일에는 술술들어가서, 목요일에는 목구멍에 찰 때까지, 금요일에는 금방 먹고 또 먹는다고, 토요일에는 토할 때까지, 일요일에는 일삼아서 마시는 것이 한국의 술문화다. 술을 마시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술을 마시는 능력이 대인관계의 척도가 된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마시고 행한 추태들은 용납이 된다. 조금 싸가지 없어도 용서가 되고, 실수해도 용서한다. 술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끄집어 내면 순식간에 쪼잔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런 분위기 때문일까? 아주 웃기는 일도 발생한다. 미성년자 성폭행 범죄자들이, 성추행범들이 법원에서 선처를 호소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하나같이 똑같다. 술마시고 술김에 실수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같이 정상참작이 되어 형량이 줄어든다. 고대에도 자신의 실수와 범죄를 술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있었는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술 취한 상태에서의 범법 행위에 대해 정상참작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는 여러 근대 법률에서 정한 견해들을 예고하면서 술에 취해서 법한 우발적인 범죄는 가중처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술이 행위의 결과에 있어 비자발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는 무의식 상태의 원인이 되기는 하지만, 그러한 무의식을 일으키는 동기는 자발적으로 술을 마시는 행위이다. 따라서 잘못의 근본은 술에 취하도록 자신을 내팽개친 사람에게 있다. 이런 이유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죄를 진 자는 응당 처벌받아야 하고, 그 형벌은 더욱 무거워야 한다고 여겼다.(P.55) 

  실수를 유발하게 만든 술취한 상황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책임을 져야 하며, 정상참작이 아니라 가중처벌하여 일벌백계해야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다. 몇년전 국회의원이 술김에 성추행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그리고 술김에 그랬다고 말하면서 전혀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술에 대해 관대한 사회, 술을 권하는 사회, 이런 사회 속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술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 내용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책의 내용은 그다지 건질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술자리에서 유식한 척하면서 풀어 놓을만한 이야기들 외에는 없는 것 같다. 아폴론 철학에 짝을 이루는 열정과 혼돈으로서의 디오니소스 철학을 기대한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 먹은 술이 시바스리갈이었다." 이 정도가 이 책의 수준이 아니겠는가? 책임감으로 읽은 두번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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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out 2010-04-30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별볼일 없는 책이었는데.. 완전 공감합니다. 저는 반만 읽다가 고만둬 버렸는데.. 안 읽은 반에도 전혀 미련이 가질 않네요.

saint236 2010-04-30 18:28   좋아요 0 | URL
정말로 책임감으로 읽었습니다. 마지막 장은 대충대충 스킵으로

sprout 2010-05-03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도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잘 엮이지 않고 겉돌던 이야기들의 상당부분은 또 거친 번역 탓은 아니었을까요. 마치 팔십년대 전공서적을 보는 듯 했어요.

saint236 2010-05-03 23:12   좋아요 0 | URL
여하튼 이번에 인문좌파를 위한 가이드 보내주지 않았으면 서평단에 많이 실망했을뻔 했습니다. 여러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 시간이 아깝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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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무언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게다가 표지도 깔끔하면서 심플하면서 아름답다. 거친 촉감도 좋다. 그래서 하이드님이 이달의 아름다운 표지로 선정을 했던가? 먼저 표지를 펴면 몇 장에 걸쳐서 추천사가 적혀있다. 감동적, 휴머니즘적, 유머러스, 과학적, 천재적 등등 온갖 찬사들로 치장되어 있는 추천사들이 일렬 종대로 늘어서 있다. 문학 동네에서 알라딘신간 서평단으로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 책이 건네지게 된 이면에는 나도 일렬종대 가운데 동참하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참 고민이다. 만약 내 돈주고 이 책을 샀다면 불같이 화내고, 똥밟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아직 책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겠다고 투덜대고 말겠지만, 서평을 써달라고 받은 책이기 때문에 고민을 좀 해본다. 좋은 평을 썽줘야 하는 것인가? 나도 일렬 종대에 동참해야 하는 것인가? 잠깐 고민 끝에 그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작 책 한권 때문에 독자로서의 양심이랄까, 혹은 투덜거림을 잊어버린다면 안하느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서두에 한참 잡설을 놀어 놓는 이유는 책이 마음에 안들기 때문이다. 

  우선 이 책이 인문학으로 분류된 이유를 모르겠다. 내용은 에세이다. 자기 아버지 이야기, 자기 이야기, 어릴 때 농구한 이야기, 지금은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등등 정말 사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늘어 놓는다. 어느 부분에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유언만을 모아 놓았다. 중간중간 과학적인 사실들(대체로 인체의 성적인 부분들에 관한 이야기이지만)이 끼워져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이 책을 인문학으로 분류하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까? 문학으로 분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이 책은 정말로 두서가 없다.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으로 내용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진도는 철학책을 읽는 것보다 더 안나간다. 편집과 구성이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문맥이 많이 끊긴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쌩뚱맞게 들어가 있다. 한참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어느 작가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번역하면서 혹시 몇 페이지씩 빼먹은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정도로 문맥이 맞지 않는다. 마치 책 한권을 다쓴다음 그것을 믹서기에 넣고 약간 거칠게 갈아서 다시 늘어 놓은 것 같다. 솔직하게 어설픈 무협지 한권만 못하다. 여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찬사들이 주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복잡한 내용을 읽고 간신히 저자의 생각을 끄집어 내 본다. 우리는 언젠가 다 죽는다, 인생은 생식과 번성을 마치고 나면 죽음으로 달려간다는 지극히 파괴적이고 비관적인 결론이다. 인생 뭐 있어, 죽으면 그만인데. 대충 이정도가 되지 않을까? 보통 죽음에 관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낸다면 인생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면서 열심히 살자는 시각과 어차피 죽을 거 뭐하러 열심히 사는가라는 허무주의적인 시각으로 양분되는데 이 책은 철저하게 후자이다. 그러다보니 이 책을 덮고 나서 갖는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래서 어쩌라구? 

  참 재미없는 책이다. 내용도 없다. 기억에 남는 건 일렬 종대의 찬사문구뿐. 서평단 도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읽지 않았을 책이다. 마지막으로 서평을 추천하면서 남긴 코멘트는 꿈보다 해몽이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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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2010-04-0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그래서 이런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읽었다. 그래서 어쩌라구~"

saint236 2010-04-09 17:08   좋아요 0 | URL
서평단 왈 "서평쓰라구..."
맘에 들지 않아도 책을 읽고 서평을 써주는 것(비록 좋은 서평을 써주는 것은 아닐지라도)이 서평단의 책임이 아닐까요.

비단길 2010-04-13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평단이지만. 이책 받고서 서평단 계속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했다는. 다행히 두번째 책은 제대로 된 책이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동네의 이름이 아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님의 평가의 100프로 공감하며, 쥐어짜듯 감상문을 올렸을 몇몇 서평단에게 안타까움도 느낌니다. 저는 고민끝에 쓰지 않기로 했는데, 다들 열심히 쓰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서평이 하나도 안올라오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다는...)

saint236 2010-04-13 22:03   좋아요 0 | URL
솔직하게 의무감으로 읽은 책입니다. 처음 제 서재에 놀러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억의집 2010-04-2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리뷰 읽고 덧글 올릴려다가 지금 올려요. 요즘 이상하게 바뻐서....
김명남씨 정도면 상당한 번역가인데도 그런가요?
김명남씨는 과학책쪽은 알아주거든요. 저는 이 양반이 번역한 과학책은 제법 읽어봐서 이 양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거든요. 이 양반이 지난 번에도 다른 분하고 이야기했지만 관계대명사 문장을 상당히 잘 잡아주거든요.
그런데 그 어려운 과학책도 잘 잡아주는 분이
에세이같은 이 책 번역은 그렇게 허접한가요?

saint236 2010-04-21 11:59   좋아요 0 | URL
번역이 허접하다기보다는 원문이 허접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내용이 두서 없어요. 한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락단락이 연결이 안된다고 할까요? 번역은 이정도면 꽤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의집 2010-04-2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그리고 세인트님 낼 모레 500기기짜리 외장하드 세일하던데..이게 지금 14만원 돈하는데 500기기 정도면 많이 들어가나요? 그리고 500기기가 한 십만원이면 싸게 사는 것인가요?

saint236 2010-04-21 11:58   좋아요 0 | URL
10만원 정도면 적절한 가격이고요, 조금 더 발품팔고 여기저기 찾아보면 9만원대까지 내려가긴 하지만 10만원 정도면 괜찮습니다. 왠만한 영화가 avi파일이 700메가 정도고요, DVD화질 버전이 1.3~1.5기가 정도 하니까 대략 영화로는 400편~450편 정도, mp3파일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갑니다. 요즘 대세가 500기가 외장하드입니다. 1테라 외장하드는 아직....

기억의집 2010-04-21 12:19   좋아요 0 | URL
음 그렇군요. 외장하드 하나 장만하려고 하는데 마침 알라딘에서 세일한다고 하길래 괜찮다 싶어서 여쭈어 보았어요. 세인트님의 조언 고마워요^^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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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갑자기 육두문자가 튀어 나왔다. "네 멋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해라." 이런 의미의 말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의 내 느낌을 확 전달해줄 말을 고르다 보니 이렇게 쓰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책을 보고 난 후 내가 가졌던 생각이 가장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창조적 책읽기"라는 말에 끌렸다. 다독술이 답이라는 말에도 호기심이 마구 생겨났다. 알라딘 5기의 마지막 책이 뭔가 대단한 것이 왔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독서에 관한 책이라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지만 뒤로 미뤄두고 이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내 독서 인생에 무언가 중요한 전환점이 생길 것 같아서 기대했음도 사실이다. "부의 미래"라는 엘빈 토플러의 책을 살 때 같이 근무하던 후배가 알라딘을 소개시켜줬고, 아무 생각없이 알라딘에서 책을 산 나는 2년동안 알라딘에서 놀기 시작했다. 첫해에는 30권인가 50권인가 읽었고, 다음해에는 70권인가 80권을 읽었고, 올해는 100권을 목표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알라딘 서평단에 선정되면서 내 책읽기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요즘 살아가는 재미가 "책질"인지라 독서에 관한 책, 그것도 창조적이라는 어마어마한 단어를 사용한 다독술에 관한 책이었기에 기대했지만, 이 책은 내 기대감을 깨끗하게 배신했다.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앉아서 4~5시간이면 충분하게 읽을만한 책이다.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며, 편집이 성기다는 의미다. 지은이 마쓰오카 세이고를 옮긴이는 독서의 신이라고 떠받는다. 하루에 한권씬 일고 서평을 쓰기로 작심하고 초과해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니, 더군다나 소장하고 있는 책들이 몇 만권을 넘어간다하니 내공이 심상치않은 사람임은 확실하다. 그런데 궁금한 건 내가 이 사람의 책읽는 방법에 대해서 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책 읽는 방법에 대한 몇가지 원칙을 소개한다. "목차를 꼭 읽어라. 키북을 찾아라. 한 사람이 맘에 들면 한 놈만 조져라. 비슷한 내용의 책을 몇권씩 같이 읽어라. 책은 두번 이상은 읽어라. 밑줄 그으면서 읽어라. 연표를 작성하면서 읽어라." 등등등. 저자가 권해주는 책읽는 방식은 결국 재미있게 책을 읽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독서의 가장 큰 의미는 재미다. 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 예부터 성현들이 한 말이지만 난 솔직하게 이 말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취미 생활이다. 그냥 재미다. 물론 여러가지 습득하는 것들은 부가적인 것들이지만 그것이 목표가 아니라 재미다. 한권을 다 끝내고 서평을 쓸 때의 그 짜릿함. 전공서적이나 내 일을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단순히 재미를 위해 읽는 책들, 그리고 읽고 난 다음 소화가 되었든 안되었든 끄적거려보는 과정. 솔직하게 난 이게 독서의 목적이고, 이유이다. 물론 나도 원칙이 있다. "전공서적이 아닐 것, 일과 상관 없는 것일 것, 만약 여기에 연관된 책이라면 카운트하지 말 것, 주로 인문 사회 분야를 팔 것, 그 외에는 닥치는 대로 읽을 것" 등등. 이게 내가 독서하는 방식이고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잡식성 독서이다. 

  어릴 때부터 시험을 보면서 자란 사람인지라 답이라는 말에 무척 민감하다. 정답 아니면 오답! 대충 이런 느낌이랄까? 저자가 "다독술이 답이다"라는 표현을 쓰면서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난 이 말이 너무 부담으로 다가온다. 저자의 오만 같아서 눈살을 찡그린다. 여러가지 흥미로운 내용과 해볼만한 것들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순전히 답이라는 말 때문이다. 독서의 답을 원하는가? 꼴리는대로 해라. 그게 답이다.  

ps. 다른 알라디너들에게도 답이라는 말이 무척 거슬렸나 보다. 서평단의 서평들이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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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3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4-03 23: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솔직한 서평이 제일 좋은 거죠. 일단 누군가 보기 전에 자기가 먼저 만족해야 하는 것이 서평이 아닐까요?
 
<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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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하게 리영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78년 생, 97학번인 나는 리영희에 대해서 모른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뿐이다. NL과 PD의 구분마저 모호해져있던 시대에 우연치 않게 PD계열의 서클에 들어갔고, 또 우연치 않게 복학하게 된 80년대 학번들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학번의 끝자락인 99학번 녀석들에게 T를 강요해 사구체와 자본론, 맑시즘, 공산당 선언 등 온갖 빨갱이 서적(?)을 읽히고 학습한 특이한 90년대 학번이다. 내 동기들은 락을 하고, 풍물을 하고, 도서관에 박혀 공부하는 동안에 나는 음습한 지하실에서(왜 그리 운동권 써클은 지하실에 위치해 있는지) 빨갱이 서적을 읽고 있었고, 철학서적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이 당시 읽은 을지서적에서 나온 철학개론이 꽂혀있다. 물론 사구체와 나중에 어렵게 모아들인 비봉사의 자본론도 꽂혀 있다.(절판된 것을 서점 아저씨께 부탁드려 몇 년 동안 간신히 모은 것이다. 아직도 반품된 책들 있냐고 수시로 비봉사에 전화 걸어 챙겨주신 아저씨께 감사를 드린다.)

  남다른 학창 시절과 써클을 전전한 나에게 리영희가 생소하니 다른 친구들에게야 듣보잡일 것이다. "리영희 프리즘 보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글샘님의 글을 보고도 “누구야? 누군데 글샘님이 저렇게 애원하지?”라는 단순한 호기심과 서평을 올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나가길 몇 페이지 했을까? 말 그대로 정수리에 차가운 물 한바가지가 끼얹어진 경험을 했다.  

  이상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지능보다도 용기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그렇다.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진 전제와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에 머물 때, 우리는 '기계 부품'에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문제 삼으려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변이 그것이다.(P.24)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지능보다도 용기를 요하는 것이다.”라는 리영희 선생의 말이 내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가, 왜 폴리페서들이 넘쳐나는데 정책은 초딩만도 못한지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던 나를 깨우는 사자후였다. 그렇다. 사회가 역행하고, 소통이 되지 않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 나라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굴러가는 것은 지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지성이 없어서, 학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멸사봉공(滅私奉公)할 용기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386이라는 사람들이 정치권의 실세로 등장한 지난 10년간에도 부정과 부패와 온갖 게이트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정당화 시켜주는 제사장들은 많이 있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악에 대항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흘러야 함을 당당하게 외칠 선지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타협하지 않는 광야의 선지자를 꿈꾸고,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었던 나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타협하고 살면서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도 내가 감당해야할 몫을 감당하지 않았기에 사회가 이렇게 흘러오게 만든 책임이 어느 정도는 있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그래서 소위 고학력자(?)에 들어가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했으니 인텔리겐차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덥잖은 개인의 잡소리이지만 서평의 초반에 이렇게 길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나에게 리영희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선가 “지식인이란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이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고,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리영희 선생이 생각하는 지식인이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나는 리영희 선생을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이라고 칭하고 싶다. 시대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사람,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지만 정신만은 자유로운 사람, 도무지 권력이 길들이지 못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길들이지 못하는 사람. 리영희 선생님에게 딱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리영희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세례 요한에게 예수가 있어 행복했듯이, 리영희 선생에게 누가 있어서 행복할까? 그게 이 시대 리영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후진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리영희 선생이 있어서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행복하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도한다. 

PS.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편집했기 때문에 깊이가 깊지는 않다. 그렇지만 곱씹어 볼만한 글들이 여럿있다. 읽다가 발견한 오타이다. "28p 스승인 아닌자 => 스승이 아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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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도서관 2010-07-2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동대문도서관 입니다^^
『근대의 책 읽기』 저자 천정환 교수님의 강좌 <독자, 그들의 대한민국 - 근현대 문학과 독자의 문화사>가 9월 7일부터 매주 화요일 7시에 동대문도서관에서 열립니다.

강의에 관한 더욱 자세한 사항은 아래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http://blog.daum.net/ddmlib/63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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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월 용산에서 참사가 있었다. 도심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용산 4구역의 재개발을 추진하였다. 빈약한 보상과 MB정권의 상진인 속도전과 밀어붙이기식 사업 진행에 세입자들은 생존을 위해 버티며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철거민들을 응원하는 전철연이 합세하여 사태는 더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을 쏘면서 경찰과 대치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김석기 총장을 비롯하여 경찰 수뇌부는 강경하게 진압 작전을 펼쳤고 그 가운데 철거민들이 가지고 있던 신나가 폭발하여 건물이 불에 휩싸였다. 그리고 경찰과 철거민 양측에서 아까운 생명이 불 속에서 스러져갔다.  

  이 사건은 많은 파문을 불러 왔다. 국민들은 둘로 나뉘어져 치열한 갈등을 시작했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권에서는 경찰이라는 정당한 공권력을 무시한 전철연의 도심테러(공성진 의원 2009년 2월 2일 최고회의 중에서)요, 떼쟁이들이 만든 비극이라고 선언했으며 조중동을 비롯 많은 보수 언론들이 이 선언에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MB식 속도전이 이런 비극을 불러왔다고 비난하면서 철을 만난 물고기처럼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희생자들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으채 지리하게 1년을 끌다가 가까스로 해결 되었다. 물론 분명하게 해결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진행형이긴 하지만 말이다. 

  용산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왜 철거 예정인 건물에 들어가서 목숨걸고 투쟁을 했으까? 그들이 외쳤던 것은 무엇이며, 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태에 무심하고 혹은 공권력에 대항하다 천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답은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내 머릿속에서 질문 자체가 희미하게 사라질 무렵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나에게 그 질문을 다시 환기 시켜 주었다. 

  철거민 그들이 외쳤던 것은 정당한 이주비였다. 최소한 다른 곳에 가서도 장사를 하면서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존에 대한 요구가 무시되었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왜 보수 우익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심 테러 집단이라고 규정하였는가?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생각하고 철거민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법마저도 무시하는 떼쟁이집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성진 의원에게 있어서 철거민들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떼를 쓰고 있는 이기주의의 표본이요, 공권력을 투입해 박멸해야할 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자유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 대한민국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에 국가는 곧 자유의 수호자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윤리학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의 기쁨을 가로막는 타자와 힘써 싸우고, 또한 동시에 타자의 기쁨을 가로막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기쁨의 윤리학은 이제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P.418)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면 철거민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으며 나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만큼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개념이 공의원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도 누구 한 사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바로 대도시인들이 가진 삶의 태도이니까 말이지요. 누가 죽는 그 일이 나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고 또 하나의 건물이 철거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어 갈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P.390) 

  그들이 무슨 일을 당해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내 삶에 그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지극히 개인주의 적인 세계관, 게오르그 루카치가 말한 물화의 세계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잠시라도 동정심을 보인다면 나도 언제 물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외면하고 공격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내가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내가 돌을 맞게 될것이라는 두려움이 나의 죄와 약함에 대하여 눈감고 그들에게 돌팔매질하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희생제로 드려질 수조차 없이 존재의 의미를 부정당한 문둥이, 호모 사케르이다. 한하운은 이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고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라는 한하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철거민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은 호모 사케르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저자의 다음 말에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현대 철학자 아감벤이라면 이런 문둥이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살해하는 것은 가능해도 희생으로는 바칠 수 없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이 희생으로 바칠 수 있는 동물이라면 지렁이 혹은 작은 벌레들은 그럴 수조차 없는 생물들이지요. ---중략--- 호모 사케르로 지명된 인간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가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는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미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문둥이들만 호모 사케르일까요?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벌거벗은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동남아시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종로 3가에 하는 일 없이 모여 있는 노인들, 을지로 지하철 역 안의 체념한 노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광주의 시민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과 집시들. 한하운의 시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이런 모든 벌거벗은 생명들의 목소리, 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울부짖음을 강렬하게 대변하기 때문입니다.(P.311 ~ 312)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나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 문둥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언젠가는 나도 호모 사케르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두려움, 벌거벗은 생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을 더 공격하고, 더 철저하고 악랄하게 비난하지 않았는가? 좌익에서 뉴라이트로 전향하며 그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좌익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누구처럼 말이다. 그래도 내가 돌을 던지는 하나 오늘 돌을 던지는 내가 내일은 돌을 맞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진정 호모 사케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저자는 그 방법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다. 

  문둥이들에게 돌을 던질 때 사실 우리는 자신도 그렇게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그런 과도한 행위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문둥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 또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일정 정도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도 나를 포용해 줄 타자의 몸짓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중략---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정치가 우리 내면에 아로새긴 벌거벗은 생명이 대한 공포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까지 말이지요.(P.320 ~ 321) 

  경쟁의 체제를 멈추고, 사회를 획일화하려는 노력, 줄을 세우려 하는 시도를 멈추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능력, 즉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주장한다. 차가 떨어져서 상수원이 오염될 것을 걱정하는 사회가 아니라 물에 빠진 이를 보면서 슬퍼할 수 있는 감수성과 인간미를 회복하는 것, 그것만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게 저자가 굳이 철학을 시와 연결시킨 의미가 아닐까? 시나 철학이나 결국은 인간미를 지향하는 학문이라는 것 말이다. 21편의 시와 21명의 철학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결론은 人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PS. 쉽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힌다. 참신하다. 철학과 영화를 연결시킨 책들은 많이 있지만 시와의 연결은 처음이기에. 그리고 읽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시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읽어내려면 먼저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따스함이 있어야 됨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저자가 밝혔듯이 20주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철학을 입문하려는 스터디 그룹에게 많은 도움이 될법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용산 참사를 통해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경찰들과 철거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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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10-02-2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신한 시의 해설과 함께 참신한 해설이네요^^
책에 대한 이렇게 깊이 있는 해설이라니요~
잘 읽었습니다.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실천인으로서의 모습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