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시대 서사시 2
임형택 지음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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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권과 함께 봐야 한다. 그래야 조선시대 백성들의 참상을 볼 수가 있다.

이 책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저 번역만을 다루며 의미만을 파악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문과 함께 자세한 주들까지 인용하고 있어 한문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한시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게 최고의 참고서가 된다.

거기에 한문이란 과목으로 교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책이라 할 수 있다.

2014년에 임용고시의 체제가 바뀌며 3차로 진행되던 임용시험은 2차로 변경되었는데, 이때부터 엄청난 변화가 따라왔다. 그건 바로 서사시가 매년 문제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임용에 합격하고 싶은 수험생이라면 이 책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한 번 정도는 읽고 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임용을 보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조선 시대의 사회상을 보고 싶거나, 민중의 고단한 삶을 연구하고 싶거나 하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참고하며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본문의 내용도 상세히 해석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설까지도 정성스레 실려 있어 작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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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서사시 1
임형택 지음 / 창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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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시대에 나온 백 편이 넘는 서사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서사시의 흐름을 알 수가 있다. 서사시라고 하면 뭔가 색다른 장르가 있나 하는 착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현대시에 들어와 사회시와 낭만시가 나눠지던 시기의 사회시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훨씬 쉬울 것이다. 사회시란 무엇인가? 사회시는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게 서글픈 사회상이라도, 민중의 아픈 역사일지라도 그걸 시인은 담담하게 시라는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조선사회는 지금으로부터 고작 100년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시기적인 차이오는 별도로 지금의 우리에게 조선은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처럼 아득하고 온갖 비합리적인 상식이 판을 치던 시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하지만 조선사회도 지금의 사회처럼 긍정적인 부분과 함께 부정적인 부분이 함께 있던 사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며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책에선 그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고 회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그 시대에 펼쳐진 백성들의 삶의 자화상에 빠져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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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협화음론자 비고츠키 그 첫번째 이야기 - 탈심리학을 선동한 미완의 사상가와의 대화
박동섭 지음 / 서현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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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고츠키 강의가 끝났다. 6강 동안 치열하게 무언가 알고자 했지만 헛수고였다. 불량주부님의 관점이 있어야 상이 맺힌다라는 말처럼 무언가 나만의 관점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 것도 없으니 맺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 특기는 무조건 열심히 듣는 것이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열심히 들었는데, 내 귀는 어찌나 뻥뻥 잘 뚫려있던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다. 흘리는 과정 속에 뇌를 거쳤기에 뇌에 잔상이 남아 있을 만도 한데, 별똥별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건 순간순간 끼적거려 놓은 글일 텐데, 지금 들여다보면 도무지 무슨 말을 듣고 이런 글을 써놨나 싶기도 하다. ~ 참새보다 약간 좋은 나의 기억력이 한스럽다ㅠㅠ

 

기억은 추억을 배반한다

그런데 이런 넋두리도 사실 부질없는 짓이다. 언제나 기억은 추억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기억했다 한들, 그러한 기억은 왜곡된 사실일 수밖에 없다. 강의를 듣는 순간, 나에게 의미 있는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기억한다. 그걸 글로 적거나 남에게 이야기할 땐, 모두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취사선택하게 마련이다. 두 번의(또는 그 이상의) 취사선택 과정을 거치며 표현하다보면 어느새 강의 내용과 표현 내용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메멘토란 영화는 이러한 기억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기억과 기록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을 때 불행은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던 영화

 

그렇기에 객관적인비고츠키 강의 후기를 쓰려는 욕심은 버리련다. 그저 느낌 그대로, (feel)을 살려서 나에게 비고츠키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써보려 한다.

 

마리가 요리를 만든 이야기로 학습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열강하던 교수님 모습.

결연한 듯, 당당한 듯.

 

人間 그리고 삶

사람이란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 도구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한자로 표현하면 人間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내 안에 있는 지식이 나의 독창적인 것일 수 없으며,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만 뚝 떼어내어 객관화시켜서 말할 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렇게 저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한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장 석주

어디 대추만 환경과 통하였겠는가. 사람도 똑같은 것을.

 

한 개인에게 책임지우는 개체환원주의의 오류

우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들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모든 문제점을 한 개인으로 환원하여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면 능력의 유무, 성실성 유무, 장애의 유무 등을 말이다.

 

    능력의 경우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런 학생일수록 역시 난 놈은 뭘해도 잘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 공부 못하는 학생을 보고선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고, 뭘 조금이라도 잘 한다면 어쩌다 보니 그런 것 뿐이라고 단정짓기 쉽다. 이런 판단을 통해 우린 능력개인의 특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여기서 유능이라는 판단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추상적 사고 능력의 뛰어남. 바로 그런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니, 기준에 맞는 사람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맞지 않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학교 시스템 자체가 운동 능력이 좋은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지금의 유능한 사람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반면에 무능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유능한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결국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체가 지닌 능력이란 개인이 지닌 게 아닌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장애의 경우

능력은 그렇다 쳐도 장애 또한 사회시스템에 의해서 정해진다는 말엔 반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눈이 멀었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건 장애이지 정상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이미 푸코의 책 광기의 역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광기 또한 근대 이전엔 좀 남다른 사람이라는 인식만 있었을 뿐 사회에서 배제하거나, 정신병원에 가둬야 할 질병으로 인식되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 사고와 효율이 사회 전면의 가치로 떠오른 근대에 이르러선 광기가 있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격리되고 치유되어야만 하는 질병을 지닌 존재로 취급받기 시작한다. 이처럼 개인의 정신 상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장애로 취급될 수 있다.

이런 예에 빗대어 박동섭 교수님은 노라 엘렌 그로스Nora Ellen Groce가 집필한 여기서는 모든 이들이 수화로 말하였다 Everyone Here Spoke Sign Language라는 책을 소개했다. 미국 근해에 위치한 비니어드 섬엔 유전적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태어났는데, 이 곳 사람들은 수화를 기본 언어로 익혔기에 청각장애인들이 차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문화인류학자가 그러면 그동안 살면서 할머니가 만났던 청각장애인들은 전부 몇 명이었습니까?”라고 묻자, 할머니가 대답을 하는데 이 대답이야말로 장애도 사회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그들은 장애인이 아니었어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요.”

 

 

단지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과 장애인이라는 인식엔 레테의 강만큼의 격차가 있다. 현대엔 심리학이 주요 학문으로 떠오르면서 현대인은 모두다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 과연 우린 정신병자인가, ‘팔팔 끓는 감정을 지닌 사람인가?

 

엑스맨은 남다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돌연변이로 볼 것인가, 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영화다.

교정이나 치유는 한 개인을 장애인이나 돌연변이로 인정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린 결코 닫혀 있는, 완결형의 존재들이 아니다. 환경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열려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린 왜 개체환원주의를 의심하거나, 되묻지 못한 채 사회나 학교가 규정지은 특성이 나의 모습인양 착각하며, 그런 기준으로 남까지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건 무언가를 묻고 새롭게 디자인할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개체의 관점이 변하면 학습이란 관점도 변해야 한다

박동섭 교수님이 말해준 마리의 요리 만들기라는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건 지금까지 지녀왔던 학습=획득의 공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며 학습=실천이란 새로운 관점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도 끊임없이 화두로 삼아야 할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다. 그래서 몸조차 가누기 힘든데 글쎄 요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만 듣고 보면, 누구나 마리가 직접 요리 재료를 샀고 직접 손을 움직여 요리를 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마리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빌려 요리를 만들었다. 마리는 재료도 직접 사지 못했으며 요리도 손수 만들지 못했다. 단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을 미묘하게 움직이는 동작을 통해 요리 만들기를 선두지휘했을 뿐이다. , 그녀는 의지만으로 요리를 만든 것이다.

과연 이걸 학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고 나선 잠시 멍해졌다. 이건 학습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뿌리째 뽑지 않고서야 도무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보통 정의하는 학습이란 개인의 내면에 어떤 능력을 획득하는 것인데, 마리는 어디에서도 그런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으로 나를 보면, 나 또한 여러 문화적 도구와 성취물의 도움을 통해 무언가를 해왔을 뿐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컴퓨터를 개발한 사람들의 도움, 전기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끼적거릴 종이를 발명한 사람의 도움 등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등에 업고 있다마리와 나는 다양한 도구(물론 사람의 도움도 포함된다)를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는 점에서 같은 게 아닐까?

더욱 현실적인 예로 대기업 회장들은 어떤가? 그들이 직접 반도체를 만들기를 하나, 각 계열사의 일들을 일일이 알아서 할 수 있길 하나. 회장은 자신의 어떤 의지만을 직원들에게 보일 뿐이고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부하직원들이다. 마리와 대기업 회장의 모습은 비슷한 게 아닐까. 하지만 마리는 중증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요리도 만들 수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히고 회장은 최고경영자라는 이유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이와 같은 부조화를 어떻게 재평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학습능력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보는 눈도 달라질 것이다.

 

안다는 것, 그건 끊임없는 투쟁의 길이다

관성대로 살 때 우리의 삶은 편하다. 더 이상 머리 아프게 공부할 필요도, 내가 발 딛고선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불편함에 익숙해진 결과이고 왜곡을 합리화한 결과이지 않을까? 학교에서 정한 성적 따위로 사람을 판단하고, 기업이 정한 기준으로 나만의 가치를 죽이고 스펙으로 가득 찬 기계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과연 편하고 좋은 것일까. 그렇기에 박동섭 교수님은 어떤 사실을 알았다는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야 합니다.”고 말했던 것이리라.

 

현실의 부조리를 아는 순간, 어떻게 살지 막막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의 혼란은 짜릿한 황홀감이었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한 채 디자인된 현실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을지, 그게 고민이다. 밑에 인용해 놓은 구절은 바로 이와 같은 긴장감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한 백정이 문혜군 앞에서 소를 잡았다. 그가 손을 놀리고 어깨에 힘을 주며, 발로 밟고 무릎을 굽힐 적마다, 칼질하는 소리가 쓱싹쓱싹 울려 퍼져 음악의 가락에 맞았다. 그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고, 그 소리는 경수의 악장을 연상케 하였다.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문혜군이 말했다. “과연 훌륭하구나. 솜씨가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느냐?”

文惠君曰, 善哉! 技蓋至此乎?”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이며, 이는 솜씨 이상의 것입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소의 겉모습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온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만 마음으로 일할 뿐, 눈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멈추고 마음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큰 틈을 벌리고 그 속에 칼을 넣는 것은 본래의 생김새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힘줄이나 근육을 베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다귀겠습니까?

庖丁釋刀對曰臣之所好者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全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노련한 백정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뼈에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칼로 19년 동안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칼날은 새로 숫돌에서 빼낸 듯합니다.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원래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으나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에 밀어 넣어 여유 있게 놀리는 까닭에 19년이나 써도 칼날은 여전히 숫돌에 간 듯이 예리합니다. 그러나 막상 뼈와 힘줄이 엉겨 있는 곳에 다다르면 저는 늘 긴장합니다. 저는 눈을 그 곳에 응시한 채 동작은 더디게 하고 칼의 움직임은 심히 섬세히 합니다. 그러다가 살덩이가 후두둑 아래로 떨어져, 일이 끝나면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됩니다. 그때서야 저는 칼을 든 채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보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흐뭇해져서 칼을 닦아 넣어 둡니다.“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如士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文惠君曰善哉! 吾聞丁之言, 得養生焉.”                          莊子』「養生主篇

 

 

비고츠키는 백정이다. 이게 웬 막말인가 할 테지만, 내가 볼 땐 두 사람이 지닌 삶의 긴장도는 같기 때문에 이런 막말을 한 것이다.

윗글은 백정, 소와 통하였느냐?’쯤 될 것 같다. 백정이 소에게서 살을 베어낼 때 뼈와 살의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칼을 들인다. 그러니 칼은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뼈와 살이 자연스럽게 분리되더라는 것이다. 백정은 전문가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러니 처음엔 잔뜩 긴장하여 소의 겉모습에 기가 질렸던 것이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감각기관 너머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되었단다.

그쯤에서 글이 끝났다면 이글은 평범한 글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능숙하다 할지라도, 뼈와 살이 엉켜있는 곳(나의 능숙함으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르면 모든 자의식을 걷어내고 더욱더 긴장을 해야만 한다고 말을 이어가기 때문에 이 글은 명문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알게 된 것만으로는 절대 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건 매순간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출발점일 뿐이다. 그럴 때 우린 관성의 늪에 빠지지 않고 디자인된 세상의 그물망에 걸려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야 새롭게 환경을 디자인할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것이다 

 

돗대가 아닌 연대로

돗대(담배의 돗대를 말함*^^*)는 외롭다. 아무리 깨어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배척되게 마련이다.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이 보이는 주인공은 눈먼 자들의 왕이 되긴커녕 배척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박동섭 교수님이 게재불가에 울분을 삭히지 못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린 돗대로 머물러선 안 된다. 디자인된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았다면, 좀 더 나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함께 모여 힘을 보태야 한다. 돗대로 남기보단 연대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비고츠키 강의에 모였던 당신들이 소중했고 오래 만나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6강의 시간을 함께 하며 비고츠키 강의를 들었던 수강생들에게 아래의 노래를 바치며 문화적 실천을 함께 할 수 있길 희망해 본다.

 

언제든지 누군가가 꼭 곁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그 멋있는 이름을

마음이 울적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꼭 꼭 누군가가 언제나 곁에 있어

태어난 마을을 멀리 떠나 있어도

잊지 말아주세요. 그 마을의 바람을

언제든지 곁에 있어

비오는 아침엔 도대체 어떻게 해

꿈에서 깨어나도 역시 외톨이야

언제든지 네가 꼭 옆에 있어

생각해주세요. 멋있는 그 이름을

싸움에서 상처 입고 빛이 보이지 않으면

귀를 기울여봐요. 노래가 들려와요

눈물도 아픔도 언젠가 사라져가

그래 꼭 너의 웃는 얼굴을 원해

바람 부는 밤엔 누군가를 만나고파, 꿈속에서 봤지. 너를 만나고파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엔딩송 いつでもかが

 

 

[동영상:8]

 

주말에 쉬고 싶을 텐데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참여한 그대들이여~ 아름답습니다!

 

주말에 쉬고 싶을 텐데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참여한 그대들이여~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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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3-01-14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고츠키, 저만 어려운게 아니었군요 ^ ^

아이러 2013-03-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돗대가 아닌 연대가 필요하다는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힙니다.

leeza 2013-03-07 12:26   좋아요 0 | URL
비고츠키는 충분히 파고들만한 철학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철학자를 알려준 박동섭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변산공동체학교 -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살아있는 교육 17
윤구병.김미선 지음 / 보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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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그대, 청춘이어라

대학교 도서관을 둘러본다. 방학인데도 도서관 자리는 꽉 차있다.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이들에게 방학이란 무슨 의미일까. 예전엔 농활을 가거나 여행을 떠나는 친구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학생들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정해진 루트에서 벗어나는 일은 꿈도 못 꾸며, 기득권 체제에 빨리 합류하기 위해 스펙을 쌓고 시험공부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표정은 굳어있고 좀비가 걸어가듯 흐느적거리며 걷고 말엔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이들은 애늙은이.



공부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왜 공부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예술회관을 둘러본다. 여기저기 흩어져 농악을 배우고 있는 노인분들이 보인다. 장구를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는 할머니는 진즉부터 오려고 했는디. 사느라 바빠서 여지껏 미루다가 인제 왔당게라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얼굴엔 낯선 공간에 대한 긴장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다는 기대감이 엿보인다. 강사의 지도에 따라 연신 장구를 쳐보지만 도무지 손이 따라주질 않는다. 그래도 할머니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덩기덕 쿵더러러러 쿵기덕 쿵덕이란 가락에 맞춰 신나게 두드린다. 몸 따로 맘 따로지만 할머니의 모습에선 열정이 느껴진다. 할머니는 청춘이다.

흔히 청춘이라는 단어는 나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이 청춘은 나이와 아무 상관없다. 삶을 고민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실히 표현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청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꿈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상관없다.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딪히며 나아갈 때, 우린 젊어지기 때문이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나긋나긋한 무릎이 아니라

씩씩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로는 정열을 가르킨다.

인생이라는 깊은 샘의 신선함을 이르는 말이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무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선호하는 마음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는 60세 인간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려가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고뇌, 공포, 실망에 의해서 기력은 땅을 기고 정신은 먼지가 돼버린다.

60세든 16세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경이에 이끌리는 마음,

어린애와 같은 미지에 대한 탐구심,

인생에 대한 흥미와 환희가 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있는 무선 우체국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으로부터

아름다움, 희망, 격력, 용기, 힘의 영감을 받는 한

그대는 젊다.



영감이 끊기고, 영혼이 비난의 눈으로 덮이며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20대라도 인간은 늙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청춘사무엘 울만







청춘되기의 힘겨움

그러나 아무리 청춘이 좋다고 해도, 자신의 열정만 믿고 함부로 나갈 수는 없는 법이다. 보통 사람으로 살기도 힘든 세상에, 일부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뭔가 특이한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괜히 분란 일으키지 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만 살아. 니가 아무리 그렇게 발버둥 쳐도 세상은 변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체념하게 만든다. 이런 핀잔을 듣노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주눅 들어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다. ‘청춘애늙은이로 만드는 사회다. 이렇듯 청춘은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질문과 고민들 속에서 주체를 세우고 허무주의와 맞서 싸울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청춘 윤구병의 이야기

교육자라고 해서 모두 다 청춘일 순 없다. 아무리 의식 있는 교육자라해도 학교라는 공동체에 들어가는 이상, 조직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을 위하고 소통하는 교육을 하고 싶어도 현실 교육 여건은 그러한 의지를 매번 꺾는다. 그런 식으로 여러 번 좌절하다보면, 예전에 가졌던 생각은 흐려지고 어느덧 학생을 억압하거나 방치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육 조직에서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외줄 타기만큼 힘들다.



윤구병 선생님의 실험학교 이야기

하지만 윤구병 선생님은 너끈히 외줄타기를 해냈다. 제도교육기관이 지닌 문제점을 보며 실험학교 이야기를 펴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도 막상 행동은 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단계에서만 그친다. 자신이 누리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확신, 사회와 사람이 가하는 유언무언의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저력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수직만 유지해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고난의 행군을 자처한단 말인가. 그런데 윤구병 선생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짝 더 나갔다. ‘청춘윤구병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결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윤구병 선생님, 참 잘 생기셨다~



삶터일터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펼칠 공간으로 변산을 택한다.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을 모두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변산에 내려와 몸에 익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루어 간다. 공동체엔 당연히 어린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변산공동체학교는 바로 이런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과연 제도권 학교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이 학교의 교육 목표는 단순하다. ‘스스로 제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기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목표 속에 제도권 교육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다. 제도권 교육은 적게는 12년 동안, 많게는 20년 넘게 사람을 붙잡아뒀으면서도 자신의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엘리트 한 사람이 99명을 먹여 살린다는 허황된 논리를 앞세워, 한 사람을 위해 99명이 들러리 서게 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었다. 앞가림도 못하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드는 제도권 교육을 보며, 윤구병 선생님은 위와 같은 목표를 내세운 학교를 만든 것이다.



첫째는 시간문제입니다. 어떤 생명체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 삶의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는 식물, 동물, 하다못해 미생물까지도 예외가 없습니다. 싹트고 꽃피고 열매 맺을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식물이 어떻게 제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짓을 보십시오. 부모들이나 교육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아이들이 걸음마와 옹알이를 제대로 익히기 전부터 아이들 시간을 뺏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집단 학살할 정도로 극한에 이르는 집단 학대를 교육의 이름으로 부끄러움 없이 버젓이 저지르는 사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스무 해가 넘도록 시간 단위로 다른 사람에게 통제당하고, 기계적인 시간 계획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스스로 제 앞가림하는 힘을 기대하는 것은 삶은 밤에 싹 돋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둘째로 함께 사는 힘은 무한 경쟁 체제에서는 절대로 길러질 수 없습니다. 윤구병 pp 24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과 다른 시간표를 짤 수밖에 없다. 제도권 교육은 주요 교과 위주의 이론교육을 중시한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교육 내용이 삶과 괴리되어 현실에서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우면 배울수록 창의력은 말살되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이 학교는 오전엔 정보 교육이라는 이론 수업을 하고 오후엔 노작교육이라는 활동 교육을 한다. 정보교육 시간엔 주요 교과 뿐 아니라(물론 국영수 위주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다) 삶에 직접 필요한 과목들을 배우게 된다. 선생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인이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대안교육을 고민했던 분들이고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에 아이들 수준에 맞춘 교육을 할 수 있다. 노작 교육 시간에는 집짓기, 천연염색, 발효식품 등을 만든다. 일과 앎, 그리고 삶을 일치시키는 교육을 통해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자신을 앞가림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지식을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삶터, 일터, 배움터가 하나인 변산공동체학교

이곳은 방학 때면 자율학습이란 미명의 보충수업이 아닌, ‘계절학교를 연다. 45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의 주제는 놀다 죽자!’.(이렇게 선정적인 주제(?)를 전면에 내걸 수 있는 이 학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계절학교의 시간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맘껏 놀 수 있도록 날짜별로 장소만 달리 했기 때문이다. 갯벌, , 산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놀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니 아이들은 장소에 맞게 여러 놀이를 만들어 맘껏 놀면 된다. 자연 속에서 한껏 어우러지며 놀다 보니, 자연히 자연 속의 인간’, 즉 생태학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다. 생태학이란 구호도 이론도 아니다. 자연과 나와의 연관 속에서 나를 사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나는 하나이므로 계절학교에선 똥을 그냥 버리지 않고 거름으로 재활용한다. 이 때문에 도시환경에 익숙한 아이에겐 큰일보는 게 여간 큰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더 큰일은 따로 있다. 막상 시간과 장소가 주어졌는데 놀 줄 모른다는 게 문제다.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맘껏 놀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 줄 몰라 두리번거린다고 한다. 이건 돈벌이와 돈벌이를 위해 쉬기만을 반복하는 어른의 모습과 똑같다. 하긴 그런 어른에게서 배운 아이들이니 오죽할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놀지 못하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 환경에 익숙해지면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호이징가(Huizinga)호모루덴스라는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교육이란 이름으로 이와 같은 본능을 억누르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다.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게 맘껏 놀아본 아이들은 커서도 신나게 놀 줄 알며 자신의 창조적 역량을 발휘할 줄 아는 어른이 될 것이다. 밑의 글은 저자의 계절학교 체험평인데, 계절학교의 가치가 잘 드러난 것 같아 발췌해 둔다.



45일의 경험을 안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죽어도 못 먹을 것 같은 것을 먹었다. 또 게임기 없이 못 살 것 같았는데 게임을 안 하고도 재미있게 놀 수 있었다. 물에 빠지거나 옷이 더러워지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던 아이는 막상 해 보니 재미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만으로도 변산 여름 계절 학교가 있어야 할 까닭은 충분해 보였다. 김미선 pp 231



변산공동체학교의 여름캠프. 놀다죽자!



변산공동체학교에 바라다

그런데 아무리 변산공동체학교가 남다른 학교라고해도 완벽한 곳은 아니다.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삐걱거리기도 했고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해주지 못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변산공동체학교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 제도권 교육의 좋은 점마저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 교육 체제 속에서 자라면서 겪는 가장 큰 손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유치원 교육에서 대학 교육에 이르기까지 제도 교육 기관은 아이들이 제힘으로 자기 적성과 취미, 그리고 삶의 리듬에 맞추어 시간을 통제하고 조절할 기회를 조직적으로 빼앗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리고 싶어 하지만 끝나는 종이 울리면 붓을 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 시간은 수학 시간인데 이 아이는 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50분이나 이어지는 수업 시간 동안 대부분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면서 때웁니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마칠 때까지 다른 사람이 조각조각 빈틈없이 짜 놓은 시간의 틀에 맞추어 10년 넘게 살다 보면 아이의 지적 능력도, 감수성도, 행동 양식도 모두 기계처럼 되어 무엇인가 저 나름으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윤구병 pp 42



학생의 개인 능력에 맞지 않는 교육과정이나 촘촘히 짜인 시간표 때문에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는 비판은 적절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 교육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되, 좋은 점은 무엇인지, 아이들에게 유용한 부분은 없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제도권 교육의 장점은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확실하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 필요한 지식 중에 어떤 것은 강의식 수업을 통해서 전해주는 게 더 효율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것을 가르칠지 교사학생학부모가 모여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둘째, 정보교육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제도권 교육이 이론 교육만을 중시하여 폐해를 키워왔으니, 대안 교육은 반대의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노작교육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래서 타당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보 교육 자체를 너무 홀대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학벌 사회이기 때문에 정보 교육을 강화하자는 얘긴 아니다. 단지 앎과 삶이 일치되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앎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빈민가에서 인문교육을 했던 얼 쇼리스(Earl Shorris)의 이야기는 참고해볼만 하다. 학문이 개인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면, 그러한 단계에 오르기까지 많이 연구한 사람의 도움닫기도 필요한 법이다. 생각하는 방법, 고민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른 삶을 생각해볼 수 있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어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여기서 인문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유와, 절실함, 모두의 문제이다. 만약 당신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거나 갖고 싶다면, 만약 당신이 지금과 다르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면, 당신은 인문학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추방과 탈주pp 148



위 글에서는 인문학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걸 정보교육이라고 바꾸어도 무방하다. 앎과 삶이 일치될 때, 모든 지식은 인문학적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사를 모집하여 제대로 된 정보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아이들의 의식이 자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학생 수가 적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적으면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사람과 관계 맺는데 어려움을 느끼거나 사고가 경직될 수도 있다.



변산공동체학교 아이들의 불만 가운데 하나는 같이 공부하고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변산공동체학교에는 변산에서 농사짓는 집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니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 농촌에서 변산공동체학교에 오는 아이들 수가 적을 수밖에. 김미선 pp 105



변산공동체학교는 보통 10명 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변산공동체학교의 학생을 전국적으로 모집하여 정원을 늘리거나(실제로 2009년엔 전국적으로 30명을 모집했다고 한다), 계절학교를 다른 대안학교와 함께 실시하여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장으로 활용하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럴 경우에 변산공동체학교만의 기치가 흐려질 위험도 있고, 다른 대안학교와의 관계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학생에게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선물한다는 의미에서 해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넷째, 경험의 범위가 너무 작다는 점이다. 사람은 하나의 가치만으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관점을 경험해 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곳은 도시생활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로지 농촌문화, 농촌적 가치만을 가르치려 한다. 아무리 좋은 가치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깨달음 없이 그것만을 강요받을 때 사람은 수동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 도시적 삶도 살아보고, 피상적으로 관계 맺는 것도 경험해 보며, 서열에 따라 자신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도 경험해 보면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 또한 세상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이 학교의 목표는 온실 속의 화초를 기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것이기에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청춘이 청춘을 기름



나는 교육이란 청춘이 청춘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 또한 어느 지식 체계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변해야 하고 학생 또한 기존 지식 체계를 허물고 자신만의 길을 고민하며 변해가야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함께 길을 나서기 때문에 師友(스승이자 벗인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언제고 청춘이 되어야 하며, 학생도 청춘의 파릇파릇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제도권 교육은 늙은이애늙은이를 키워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제도권 교육은 교육이라기보다 훈육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변산공동체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비록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아이들에게 교육의 정신이 제대로 이해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가능성은 확인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이 학교가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과, 이 학교를 이끄는 사람들의 청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합치 여부에 달려 있다. 앞으로도 이 학교가 더욱 발전하여 자기 앞가림 할 힘함께 살 힘을 두루 갖춘 청춘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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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과 탈주 트랜스 소시올로지 2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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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느낌의 책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느껴보는 기분 중 상쾌함이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은 힘들게 산에 올라가 정상에 이르렀을 때의 상쾌함이나 도심의 답답함을 벗어나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기분을 떠올리면 된다. 의식의 상쾌함과 육체의 상쾌함은 하나다. 의식이 상쾌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폐쇄되어 있고 감정이 억눌려 있다면, 아무리 산에 올라간 들, 언덕의 바람을 몸소 맞이한 들 상쾌함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아는 사람은 오히려 바람이 몸을 사정없이 흔든다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 상쾌함은 육체적 상쾌함이 들기 이전에 정신적인 상쾌함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말씀. 상쾌함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고서 상쾌함을 느꼈다는 것도 그리 어색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쾌함은 내가 살아있음을 재인식하는 데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훈풍이 불어와 나의 피부를 어루만지며 코 속으로 들어가 나의 머리를 맑게 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에 두서없이 지내며 느끼지 못했던 신체의 각 부위가 그 곳에 그대로 있음을 느끼게 되는 거다. 그 때 비로소 드는 감정이 상쾌함인데, 책 한 편을 읽고 그걸 통해 나의 인식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상쾌함이지 않겠는가.

경험이 버무려진 인문학서

고추장님의 책은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난해하진 않아서 아무 부담 없이 읽게 된다. 고추장님이 쓴 니체 해설서를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터라 이 책도 그런 기대로 읽게 되었다. 이미 서두에서 말했다시피 그의 글을 읽은 소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솔직히 제목만 보고서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철학적인 내용들이 사회적인 현안들에 녹아들어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으니까. 어찌 보면 이게 고추장님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되, 그것도 이해하기 난해한 철학적인 글을 쓰되 이해가 쉽게 쓸 수 있는 것. 그런 까닭에 난 이 책을 한 번에 쉼 없이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나선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얻은 것처럼 상쾌함이 느껴졌다. 역시 실천력을 갖춘 인문학자(사회학자)인만큼 그의 글에는 진정성이 있다.

추방, 그건 우리의 현실이다

추방’, 과연 누가 누구를 추방했다는 것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을 내쫓아 버린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추방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대학의 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오직 어진 사람만이 그를 추방하여 오랑캐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중국과 함께 할 수 없게 했다.)’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전제주의 국가 시절, 왕은 자신의 판단에 어긋나는 인물을 처벌하거나 추방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란 책에선 그런 권한을 지닌 왕이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되며 修身(몸을 수양함)’을 잘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추방이란 단어가 대학의 구절과 맞물린 까닭은, 이 단어 자체가 민주주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서 비로소 깨달았다. 이를 테면 나 자신을 닭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이라 생각했었으나, 그런 체제 자체가 한 마리의 학을 위해 모두가 닭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었고 난 당연히 닭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추방은 결코 과거의 단어가 아니라 현재의 단어였으며,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가 아니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였던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추방하고 학교가 학생을 추방하며 노동부가 노동자를 추방한다. 이게 웬 말이냐고? 그렇게 추방해선 어떻게 국가가 유지되고 학교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고? 걱정 마시라. 모두 다 추방하는 게 아니라 국가의 입장에서 자기의 입장에 반대되는이들만 선별하여 추방하는 거니까. 그래서 미군기지가 들어서야 하기에 평택의 주민들은 쫓겨나야 했고 용산에 살던 상인들도 추방되어야 했다. 여기서 화성 앞 바다 간척사업으로 쫓겨난 어민의 절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 중(2006.02.20)

우리는 국가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국가에 빌붙어서 생계를 꾸렸던 거지였구나. 우리는 국민이 아니었구나 (30p)”

추방과 법질서 강화

문제는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볼만 하다. 추방당한 이들이 많다면 이들이 하나로 뭉쳐 그 절망감을 표현하고 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현실에서 한계를 갖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척도(자본우월주의, 국가지상주의 등)를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면화한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으니까. 오히려 날카롭게 항의하고 대항하려 하기보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떡고물이라도 없는 지 처절하게 매달린다. 이들은 이 없어 이와 같은 어려움을 당한다고만 생각하기에 만 있으면 남들처럼 살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 그런데 지배층은 이렇게 추방당한 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대처하는가? 추방당한 이들은 언제든 맘만 먹으면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추방당한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것. 용산 참사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로 둔갑된 그 논리와 매한가지다. 이때부터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치안강화법질서 확립이다. 유독 돈 없는 자에게만 가혹할 정도로 정확히 적용되는 법의 이중성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와 같은 요인들로 국가는 국민을 추방함에도 별 어려움 없이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어떻게 국민이 추방당하고 추방당한 그들조차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될 수 있는 지, 우린 추방이란 개념을 통해 샅샅이 알 수 있다.





용산참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의 일이며 미래의 일이다

추방당한 우리의 힘, 탈주

그렇다면 우린 그렇게 국가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국가의 처분만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바로 이에 대한 대답이 탈주. 탈주는 무언가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이다. 과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나는 대중들의 탈주 현상을 주변화와 대비해서 소수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주변화가 척도에 의한 부차화를 가르킨다면, 소수화는 척도로부터의 탈주를 가르킨다. 주변인으로써의 대중이 지배적 척도에 의해 인정받기를 꿈꾼다면, 소수자로서의 대중은 척도로부터 탈주한다. (39p)”

이를 좀 더 쉬운 이야기로 풀어보자. 내 자신이 학이 아닌 닭이었음을 깨달았다.(이게 바로 추방이다) 예전엔 학을 선망하고 나도 학이 되려 했을 것이다(주변화). 하지만 이젠 그 자체가 허구임을 알기에 더 이상 학이 되려 하지 않는다. 닭인 내 모습을 긍정하며 이 안에서 새 가치를 만들어 간다(소수화). 바로 이런 변화가 탈주이다. 탈주는 그래서 철학적인 용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용어가 된다. 기존의 가치를 허물고 나만의 가치를 찾는다는 점에서 철학적이지만 그렇게 함으로 당당히 소수자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이다.

탈주는 생각함으로부터

과연 이런 탈주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만의 척도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은 현장인문학에 실려 있다. 내가 참 상쾌하다고 느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교육이 학교라는 체계 속에서만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거나 인문학은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정신적 여유를 누리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는 부분이다. 바로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난 나 자신을 배반하며 나를 늘 궁지에 몰아넣기만 하는 척도를 신봉하는 게 아닌가. 잘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에도 오히려 그게 삶을 파괴하는 것이 되기도 했다. 바로 그 생각 없음이 문제였던 것이다.

습관적으로 살아갈 때, 편견이나 통념에 빠져 있을 때, 어떤 강제적 명령 아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입력된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런 명령을 받았으니까’. 우리는 이 경우 아무리 정성을 다해 산다고 해도 '생각 없이' 사는 것이다. (145p)”

바로 그와 같은 관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린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생각하는 삶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하며 전혀 새로운 길을 창출하게 한다(장자는 이를 道行之而成<길은 걸어가면서 만들어진다>라고 했다) .

나만의 탈주법

내가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 건 궁지에 몰렸을 때였다. 임용 시험에 떨어졌다. 집에 돈도 넉넉지 않았다. 배운 게 이것 밖에 없으니 어떻게든 교사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재수생들이 택하는 방법은 임용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에만 신경 써서 꼭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런 공부가 재미있을 리는 없고 삶의 의욕도 없다고 했다. 또 떨어지지나 않을까 겁만 난다고. 의욕도 열정도 다 소진되어 가던 동기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공부해서 몇몇은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난 또 떨어졌다. 떨어진 자의 자기 합리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그들이 그렇게 부럽지는 않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업무에 골치 아파하고 있고 공부의 괴로움만 알고 공부했으니, 그런 공부를 가르칠 때는 더욱 괴로울 거니까.

그들이 임용공부에만 몰두할 때 난 다른 방법을 택했다. 그냥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정도. 친구들은 척도에 매달려 있을 때, 난 탈주를 택한 거다. 그 독서는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가장 큰 수확은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임용 공부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현실을 느끼는 내 마음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용에 떨어진 지금, 임용에 떨어졌다는 사실로 불행한 게 아니라 진정 공부다운 공부를 하고 현실을 긍정할 수 있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는 것. 어찌 보면 현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하지만 내가 주변화되었던 시기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암울하고 빨리 벗어나야할 시기였던 데 반해, ‘소수화를 택하게 되자 지금은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들을 기반으로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현장인문학의 프로젝트를 긍정할 수 있었다. 나도 초보자이긴 하지만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그 프로젝트는 나에게 누군가와 소통을 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였으니까.

추방된 그대여 탈주를 꿈꾸라

추방은 현실에서의 내 위치를 인식하는 것이고, ‘탈주는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것들이 삶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실천될 수 있을지, 그건 각 자의 실천성에 달려 있다. 내 자신이 여러 사상이 모인 코뮨 그 자체이듯, 우리 또한 앎의 코뮨을 이루어(연대하여) 가르치고 배우며 나날이 변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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