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부 메타블로그 난장과 알라딘 서평단이 함께하는 12월 좋은 도서 증정
일상을 철학한다 - 세계와 의식 세계와 나 바로보기
오모리 쇼조 지음, 이경덕 엮음 / 가인비엘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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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된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읽었던 책이 있다. 마틴 부버의 “나와 너”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관계이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들어 주는 힘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나와 너 관계여야 하는데 자주 나와 그것(it)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쉽게 발견되는 비인간화 현상이 여기에 이유를 두고 있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나와 너의 관계이지만 너무나 자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질되어 버린다.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결국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계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상을 철학한다”는 책의 서평을 기록하면서 그 첫머리에 뜬금없이 마틴 부버의 “나와 너”를 언급하고 있냐면, 나는 이 책이 같은 맥락에서 쓰여진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들이 독일과 일본, 20세기와 21세기, 신학과 철학이라는 너무나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일상을 철학한다”는 제목을 통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을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이라 착각하면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나도 같은 오해를 했었기 때문에 부담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내용이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되었다. 저자가 얼마나 심하게 말장난하고 있는지, 철학자병이 또 도졌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즈음이면 “내가 읽는 게 읽는 게 아니야.”라는 노래가 내 입에 나도 모르게 나오고, “내가 난독증이 있는가?”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지금 다시 읽으라고 한다면 웬만하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어느 정도 높게 평가한다. 위에서도 이야기한 나와 너의 관계,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다.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는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인생을 거는 것은 단순히 예측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의 생활을 거는 것이다. 단지 미래를 방관자처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예측된 미래로 향하는 각오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예측에 부가된 확률은 그 마음 자세의 표현이며 각오의 표현이다.(P.23)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예측을 한다. 아침에 텔레비전에서는 오늘의 날씨 혹은 내일의 날씨를 예측해주고, 많은 책들은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서 주가에 대해서 예측해 준다.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인생의 어려움을 미리미리 준비하라면서 많은 조언들을 해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가? 왜 그리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가? 그것은 예측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니고 빗나갔기 때문도 아니다. 예측에 대한 잘못된 정의 때문이다. 저자는 예측이란 방관자처럼 가만히 다가올 일을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향하겠다는 굳은 각오라 정의한다. 그렇다. 예측은 위험의 확률을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앞으로 나가려는 각오요,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 나는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가? 나의 인생의 자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게 만들어 주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인간관계에 대하여 저자의 통찰을 살펴보려고 한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나영이 사건이고, 얼마전에 일어났던 10대 소년이 보험금을 노리고 자기 가족을 살해한 사건이 아닐까? 왜 천륜을 어기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는가? You를 It으로 보는 사고 때문이 아니겠는가? 상대방을 있는 내가 말을 하고 존중해야하는 인격체가 아니라 나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사용해도 되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인간이 아닌 사물로 여기는 마음 자세가 문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 불어 넣기를 멈추었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물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마음을 불어 넣기 시작한다면 로봇도 인간처럼 존중할 수 있겠지만 마음 불어 넣기를 멈추어 버린다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대해도 되는 로봇처럼 사물화 되어 버린다고 주장하면서 과거보다 오늘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지만 인간성은 더 메말라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You를 It으로 바라보는 것은 존재의 유무가, 과학적인 증명이, 물질의 빈곤과 풍요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에 그 원인이 있다. 

  목석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또는 로봇이 되었든 그 자체는 마음이 있는 것도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것들과 얼마나 교제하며 살았는가에 따라 마음이 있는 것이 되기도 하고 마음이 없는 것이 도기도 한다. 거기에 따라 나 또한 인간이 된다.(P.73) 

  그러니까 당신이 인간인 이상, 제정신을 가진 인간인 이상, 타인의 마음을 불어넣는 일을 그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이 불어 넣기는 인간성의 핵심이다 때문입니다. 서로 불어넣기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고 인간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그에 따라 서로의 인간이 서로를 인간으로 만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끼리 서로 마음이 있는 존재로 보는 태도는 애니미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관용적임 태도로 애니미즘을 수용하였습니다. 짐승, 물고기, 곤충 뿐만 아니라 산천초목 모두 마음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매우 인색한 애니미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고나 혈연관계를 주축으로 한 애니미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배타성이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곤혹스럽습니다. 어째서 내게 마음을 불어 넣어 주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 이미 불어 넣어 주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당신들의 마음을 조금 열고 당신들 사이의 애니미즘 속에 나를 넣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들의 인간성도 보다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 17장 로봇의 변명 중에서(P.132) 

  인간성을 풍요롭게 하는 것,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상대방을 It이 아니라 You로 바라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아니겠는가? 더더군다나 상대방을 생사대적으로 바라보면서 찍어 누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대한민국의 비정한 현실에서는,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 무한 경쟁의 체제에서는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겠는가?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관계가 다시 정립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고민하던 나에게 이 책은 사막 한 복판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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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보 지음, 박여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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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일상 기록법”이라는 부제에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라는 제목이라. 거기에다 성긴 편집의 하드커버. “이건 확실히 낚시다.”라는 의심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 책. 확실히 성긴 편집과 채 2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은 단 몇 시간 만에 책을 다 읽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낚였다.”라는 배신감이 결코 들지 않는다. 오히려 “대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간만에 글쓰기에 관한 좋은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과 함께 “오호, 이건 써먹을 수 있겠는걸. 이건 한번 해볼까?”라는 혼자만의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게다가 이 책은 중학생이 읽어도 될만큼 쉽다. 그러나 그 쉬운 글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중학생이상이라면(혹 조숙한 초등학생이라도 가능할 것 같다.) 충분히 읽고 실제 작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이다.  

  “감각을 자극하고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글쓰기”라는 제목의 프롤로그로 시작하여 저자는 인간에게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 강력하지만 명료하게 밝힌다. 글쓰기는 우리의 삶을 정리하고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대입 논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스캔하듯이 요약본을 읽고 그 내용을 적절하게 버무려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글쓰기만큼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해주며,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무리 맛있고 훌륭한 음식을 먹고, 호사를 다 누린다고 할지라도 내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단 한권의 책만 하겠는가?  

  저자는 우리에게 당장 지금이라도 글쓰기를 시작하라고 부추긴다. 소설을 쓰고, 문학 작품을 남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글로 남겨보라고 주문한다. 일기를 써도 좋고 노트에 끄적여도 좋다. 주제가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상관없다. 다만 두려움 없이 시작하라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신만의 노트에서는 가능하다. 어떤 민감한 사안을 다루었다 해도, 아무리 신랄한 비판을 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당신의 글을 보고 비난할 일은 없을 것이다. 글 쓰는 형식, 문법이나 철자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잘못을 지적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세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동물인 인간이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마음을 방해한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겁 없이, 두려움 없이 글을 쓸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인 일기 쓰기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P.26 ~ 27) 

  그런데 말이다.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글쓰기, 인생을 의미있게 만들어 주는 글쓰기의 전제조건으로 저자는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이런 글쓰기가 우리에게 가능할까? 방학동안 억지로 일기를 써서(그것도 밀려서) 숙제로 제출하는 대한민국에서, 매일 일기를 쓰고 담임선생님께 제출해서 “참 잘했어요”도장을 받는 것이 대한민국의 오랜 교육 방법인데 과연 이러한 토양에서 자유로운 글쓰기가, 장의적인 글쓰기가 가능할까? 학생 때 그렇게도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사람들에게 글쓰기 자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행을 고치기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글쓰기는 그저 숙제를 위해서 일기를 쓰는 정도, 혹은 대입을 위해서 학원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 뻔하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전혀 맛보지 못하는 것만큼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내내 “이제 일기를 다시 서볼까?” 생각해 봤다. 중고등학생 때는 일기를 참 열심히 썼는데, 특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한창 방황하던 사춘기 시절인 고등학교 때에는 꼭꼭 시간을 내서 일기를 썼는데 대학 3학년 즈음부터 쓰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그저 귀찮아서였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니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2학년 때까지의 기억은 있는데 3학년 이후의 기억은 없다. 정말 기억이 없다는 것이라기보다는 특별히 감사한 것도 특별히 기억이 날만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왜 없었겠냐마는 그 일을 겪는 가운데 고민하고 기뻐하고 아파했던 기억들이 가물가물해져 버렸다. 결혼할 때의 두려움과 두근거림, 아이들이 태어날 때의 감동과 아내에 대한 걱정 등 매우 중요하고, 그래서 잊지 말아야 할 것까지 희미해져 버렸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아쉬움을 더 이상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장 오늘부터 일기를 쓰려한다. 문구사에 들어서 작은 노트를 하나 사던지,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책상에 꽂혀있는 노트를 사용한다라든지 괜히 이런저런 핑계대지 않고 시작하자. 그렇게 남겨진 기록이 먼 훗날 나에게 위대한 작품이 되지 않겠는가? 저자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내일의 글쓰기가 익숙해질 즈음에 당신 자신을 돌아보라. 당신이 어떻게 변해 가고 있으며, 당신의 삶이 어떻게 진화해 기는지를 비켜보라. 당신이 쓴 글은 단순히 종이 위에 남은 펜의 흔적이 아니라 당신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열망과 좌절을 그려 낸 위대한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P.182) 

  사족이긴 하지만 글쓰기의 여러 기법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 한 가지, 그래서 꼭 시도해 보고 싶은 한 가지는 아내와 함께 일기를 같이 쓰는 것이다. 예전에 싸이월드에 같이 쓰는 다이어리를 개설하고 글을 썼는데 왠지 맛이 나지 않고 깊은 생각을 나누기는 힘들었다. 예쁜 노트 하나 가지고 아내와 나만 아는 자리에 꽂아 두고, 살아가는 이야기들, 아이들을 키우는 이야기들, 서로에게 말로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함께 적어보려고 한다. 먼 훗날 우리가 백발이 되어서 함께 그 글을 다시 읽는다면 인생의 희노애락이 모두 묻어 있는 둘만의 멋진 작품이 되지 않겠는가? 좋은 책을 소개해준 알라딘 인문 서평단 운영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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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탐>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책탐 - 넘쳐도 되는 욕심
김경집 지음 / 나무수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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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탐!   제목 자체가 탐스럽다.  

  넘쳐도 되는 욕심!!   부제목도 참 욕심이 난다. 

  세상 모든 것들은 과유불급이라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책 욕심만큼은 넘쳐도 좋다고 한다. 아니 넘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책의 핵심을 꿰뚫는 인식과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여 내 책 욕심을 자꾸 부추긴다. 넘어가면 안된다는 간절한 내 마음의 소리는 어느 새 잊혀지고 저자의 말에 내 귀를 팔랑귀가 되어버린다. 내 마음은 갈대로 변한지 오래이다. 김경집이라는 말 잘하는 악마는 자꾸 내 마음에 욕심을 심어 준다. 이 책 진짜 좋다고 내 귀에 속살거린다. 쌓아둔 책이 많다는 굳은 결심과 단호한 결의도 어느 새 사라져 버리고 남겨진 책장의 수와 반비례하여 내 서재의 보관함에는 책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엄청나게 선방했다고 하지만 4권이나 되는 책을 보관함에 담아 버렸다.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에(아마 2주에서 3주 이내에) 그 책들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놓고 아직 읽지 못한 책이 50권 이상이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파란 여우 님이 쓰신 "깐깐한 독서 본능"도 상당히 유혹적이긴 하지만 이 책은 그것보다 더 유혹적이다. 게다가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을 한권 혹은 두권을 묶어서 소개하기 때문에 더 유혹적이다. 소화도 시키지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놈의 탐심은 가실 줄이 모른다. 이러다 언젠가는 탈나지 싶지만 아직까지 탈은 나지 않았다. 이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행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인지..

  한 5~6년 전인가? 대학원을 휴학하고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하루 종일 책 가운데 파묻혀서 어떤 책들을 사야하는지 안목을 익혔지만 여전히 실패는 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들은 풍월이 있어서 완전히 아니올시다라는 책들은 선별해 낼 줄 아는데, 이 책에서 버릴 책들이 거의 없다. 버려야 할 책이 혹 있다면 책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 취향이 아니라서가 이유일 것이다. 

  "책, 희망을 탐하다. 책, 정의를 탐하다. 책, 정체성을 탐하다. 책, 창의적 생각을 탐하다."라는 4부의 구성은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본의 화끈한 지원을 받아 이름값을 하고 있는 베스트 셀러들, 소위 말하는 누워있는 책들보다는 희망을 품고 있고, 정체성을 심어주고, 정의를 이야기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의 지원이 없어서 구석에 살포시 잠들어 있는 책들을 깨우겠다는, 그리고 널히 읽혀 그 가치를 일깨우겠다는 저자의 옹골진 고집이 그대로 드러난다. 서평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서평집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소개하는 가운데 저자의 생각을 언뜻 언듯 비추는 모습이 상당히 절제되고 세련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부럽다.  

  어느 알라디너께서 깐깐한 독서 본능이 구수한 맛이 있다면 이 책은 세련된 맛이 있다고 평했는데 나도 전적으로 여기에 동의한다. 좋은 책을 소개해준 북멘토, 혹은 내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고 책탐을 부추기는 악마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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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딸콤플렉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착한 딸 콤플렉스 - 착해서 고달픈 딸들을 위한 위로의 심리학
하인즈 피터 로어 지음, 장혜경 옮김 / 레드박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착한 딸 콤플렉스... 

  처음에는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와 같은 류의 책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성질의 책이다. "착한 딸 콤플렉스"라는 제목과 "착해서 고달픈 딸들을 위한 심리학"이라는 부제는 이 책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된다. 왜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일까? 이 책의 원제는 "Wege aus der abhängigkeit(의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인데 이것과 착한 딸들을 위한 위로의 심리학이라는 부제와 제목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물론 "심리학 책이다. 의존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라고 제목을 잡으면 일부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나 전공자들에게나 읽힐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왜 제목을 그렇게 잡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독자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제목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어두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시점이 참 묘하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점수가 발표되고 수시 합격 발표가 나기 시작했다. 외국어 고등학교를 비롯한 특목고들의 입시 또한 발표가 나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입시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듣는다. 그 중에 2가지만 사건만 추려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째는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에 관한 문제이다. 같이 교회를 다니시는 분의 손자와 또 다른 분의 딸이 외국어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게 되었다. 시험보기 한달 전부터 마음이 불안하신지 열심히 기도하시더라. 기분좋게 시험을 보고 왔는데 막상 결과는 둘다 떨어졌다. 그런데 둘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정반대이다. 딸이 시험에 떨어진 것을 보신 이 분은 며칠간 딸과 같이 놀러다니고, 찜질방도 가고 대화도 하면서 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하여 노력했고, 그 결과 딸도 충격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다른 한 쪽의 이야기는 정반대이다. 손자이기에 드러내놓고 아무 말도 못하시는 그 분의 말에 의하면 며느리가 손자를 쥐를 잡듯이 잡는다는 것이다.(조금 표현이 과한가? 내가 듣기엔 그렇다.)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손자가 매일 어머니와 냉전 중이고 그 화를 며느리가 시부모인 자신들에게, 남편에게 풀고 있단다. 그래서 요즘들어 며느리가 많이 미워졌단다. 

  둘째는 대입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능 결과가 예상 보다 좋지 않은 녀석들이 주변에 몇 있다. 그 녀석들은 집에서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수능이 끝나서 기분좋게 나가 놀고 싶고 자유를 만끽하고 싶지만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 눈치만 보고 있단다. 그래서 밥 사주면서 "집에 있으면 뭐하냐, 죄인도 아닌데 왜 눈치 보냐?" 이러면서 다독여 주고 있다. 수시 결과도 일부러 묻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귀에 다 들어오지만.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입시철만되면 난리도 아니다.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생각하는 아이들도 많다. 자기 혼자 속으로 실패를 삭히기도 힘든 판에 부모님의 눈치를 봐가면서 숨을 죽여 지내야 한다. 가뜩이나 힘든 여린 마음에 돌을 몇개나 얹는 부모님들을 보면서 묻고 싶다. "정말 자식을 사랑하세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들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과도한 사랑이 아이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시나보다. 아이들의 인생과 생각을 존중해 주어야 하는데 어린애들이 무엇을 아냐면서 진로와 직업까지 본인이 결정해 주려고 하신다. 그럴 때마다 답답하다. 아이들에게 몰래 속삭인다. "네 맘대로 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잘 결정해. 부모님이 네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은 아니야." 부모님들이 이 사실을 알면 믿는 도끼에 발등찍혔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세상에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도 자기 주관이 있고 생각이 있다. 집에 21개월된 딸과 9개월 된 아들이 있는데 그녀석들도 자기들 생각이 있다. 아빠 엄마와 협상을 할줄도 알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도 안다. 나와 아내는 무조건 안된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되고. 안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들의 생각과 인생을 존중해서이다. 지금부터 연습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아이의 인생을 콘트롤하려 들까봐 겁이 나서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이를 먹은 자식이라도 부모 입장에서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일까? 부모님들은 이상하리만큼 자기 자식들의 생각을 무시한다. 어리석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면서 "네가 뭘 알아. 아빠 말들어. 엄마 말 들어. 내가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그렇지만 자식된 입장에서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반발감만 생긴다. 자꾸 집을 떠나고 싶어한다. 내 어머니도 여느 어머니처럼 그랬고, 나도 여느 자식처럼 그랬다. 결국은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데 받아들이질 못하나 보다. 그러다 보니 자식을 약하게 기른다.어디로 떠나지 못하도록 자기 옆에 꽁꽁 매어두려 한다. 자식의 배우자도 본인이 고르고, 자식의 직업도 본인이 선택하는 등 자식을 인형처럼 조종한다. 그러면서도 본인들은 아니라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그림동화 거위치는 소녀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그리고 절대 그러지 말라고 권한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독립된 개체로 키우라고 말하며, 자식들에게는 투쟁해서라도 독립을 쟁취하라고 말한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인용해 본다.

 에리히 프롬은 독립적인 삶을 위해서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존적 상태를 벅어나자면 용기가 필요하다. 발전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과거의 관계를 떠난다는 의미이고, 이는 두려움을 동반하는 과정이다.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며 진실을, 자신의 진실을 말해야 하며, 인간은 많은 점에서 비슷하지만 또 많은 점에서 타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전해야 한다.(198p)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말이지만 특히 자식을 둔 부모들에게 금과옥조가 되는 말일것이다. 자식이 언제까지 어린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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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독서본능>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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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0페이지나 되는 책을 덮고 나서 드는 생각이 "이 책도 서평을 해야 하는가?"이다. 먼저 서평을 쓰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이 쓰신 서평 제목이 유달리 마음에 남는다.  

  "서평을 서평하라고? 글쎄다. 난 이 서평 반대일세."  

  맞는 말이다. 나도 이 책에 대해서만큼은 서평을 쓰는 것을 반대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고 쓴 서평에 대한 서평이라? 왠지 사족을 붙이는 것 같아서 싫다. 더군다나 알라딘의 면장으로 대우해준다는 파란 여우님의 서평이라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괜히 조화롭게 잘 짜여진 곳에 돌을 하나 던지고 뱀에 다리를 붙이는 것 같아서 싫지만 어쩌랴 알라딘 서평단의 의미인 것을. 게다가 이 책은 나에게 올 운명이었는지 알라딘 서평단에서 서평 도서로 책을 받은 그 날 나비님께서 보내주셔서 두권이나 된다. 물론 이 책은 나비님이 주신 책을 읽었다. 알라딘 서평단 도서는 책상 한 구석에서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투철한 책임감을 가지고 책에 대한 서평을 써보려고 한다. 졸작이되더라고 파란 여우님께서는 어린 백셩을 어엿삐 여겨 주셨으면 감사하겠다. 

  책을 읽으면서 한 없이 부러운 것은 그 내공이다. 5년 동안 천권의 책을 읽으려면 대충 1년에 200권인데 그 무지막지한 분량에 한번 놀란다.(한번 놀란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더 대단한 분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파워 블로거 중의 하나이신 글샘님이다. 예전에 1년동안 400권을 읽으셨다는데...) 나는 기껏해야 올해 77권을 읽었다. 이 책이 77권째이다. 물론 신앙서적이나 기타 학문을 위한 서적을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야 100권은 넘어가겠지만 그런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고 카운트를 하지 않으니 내가 읽은 것은 77권이다. 그마나 올해 목표가 50권이었는데 초과 달성했다는 혼자만의 만족감이랄까? 5년 뒤에 내가 천권을 읽을 가능성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30%미만? 게다가 모든 분야를 탐독할 확률은 10%미만...인문, 사회과학, 철학, 역사 쪽에 편중된 나인지라 문학 분야를 읽을 일은 에세이 집이 아니면 1년에 소설 책 2~3권? 책을 읽으면서 그 내공에 질려버리고, 한 없이 부러워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 포스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책이 서평 모음집이라는 것이다. 내용이 훌륭하고 내공이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평을 쓰기를 주저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의 생각이 충분히 들어 있고, 예리한 사시미칼 같지만 서평은 서평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이다.  

  예전에 이런 농담이 있었다. "너 로미오와 줄리엣 읽어봤어?" 선생님의 질문에 학생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바빠서요. 로미오는 읽어봤는데 줄리엣은 아직 못 읽었네요." 이게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입시를 위해서, 면접 시험을 위해서 원전을 읽기 보다는 원전을 요약해 놓은 책들을 달달 외우는 20대들에게 이 책이 또 하나의 암기용 도서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우가 든다.  아무리 저자의 생각이 잘 요약되어 있고, 파란 여우님이 그것들을 잘 캐내었닥 할지라도 그것은 파란 여우님의 필터를 통하여 걸러진 것들인데 그것이 정답인양 달달 외우지는 않을는지... 

  솔직하게 책을 읽는 내내 상당부분에서는 공감을 하지 못했다. 왜냐? 내가 읽은 책이 얼마 되지 않아서...물론 내가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이면 내 생각과 비교해 보고 "이렇게 이해하기도 하는구나, 맞아 이 부분은 내가 틀렸어. 이 부분은 내가 더 잘 이해한 것 같은데." 하면서 활기를 띠지만 안 읽은 거의 대부분의 책들에서는 오로지 파란 여우님의 생각을 골라내다가 끝을 맺었다. 그러니 책의 원래 내용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밖에.  

  이 책을 접하면서 몇개 건진 책들이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읽은 보람이 있다. 특히 농사를 짓는 분인지라 그런지 몰라도 환경과 농촌 쪽의 책들은 정말 주옥같다. 권정생님의 우리들의 하나님, 녹생평론에서 나온 쌀과 민주주의, 우석훈씨의 아픈 아이들의 세대 등은 꼭 사볼 책이다. 물론 지금은 밀려있는 수십권의 책을 읽어야 하지만. 서평단 활동하면서 받은 책들 서평 올리는 것이 힘에 겨워서. 그래도 아직은 이렇게 강제로라도 꾸역꾸역 집어넣어야할 단계라 생각한다. 그래도 이 책을 읽고 서평까지 스는데 5년 후에 최소한 500권은 읽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이 책은 알라딘의 모든 주민들이 소통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가져다 줄 독서의 실크로드, 사유의 실크로드로 첫발을 디딘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명박산성으로 대비되이게 저자의 생각이 아닐까?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어설픈 서평을 마친다. 

  실크로드는 결국 사람의 길이다. 사람이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문명을 다듬으며 만든 길이 실크로드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다르지만 실크로드가 하나의 세계문명 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문명의 융합이 성공한 것으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456페이지 인용)  

ps. 432페이지와 431페이지는 내용이 바뀌었다. 432페이지가 먼저이고 그 뒤를 이은 내용인 431페이지이다. 또한 432페이지의 내용은 헌 책방 아벨과는 상관이 없다. 433페이지부터 헌책방 아벨의 내용이다. 다음 판에서는 이부분을 교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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