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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평점 :
솔직하게 리영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 78년 생, 97학번인 나는 리영희에 대해서 모른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뿐이다. NL과 PD의 구분마저 모호해져있던 시대에 우연치 않게 PD계열의 서클에 들어갔고, 또 우연치 않게 복학하게 된 80년대 학번들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그리고 90년대 학번의 끝자락인 99학번 녀석들에게 T를 강요해 사구체와 자본론, 맑시즘, 공산당 선언 등 온갖 빨갱이 서적(?)을 읽히고 학습한 특이한 90년대 학번이다. 내 동기들은 락을 하고, 풍물을 하고, 도서관에 박혀 공부하는 동안에 나는 음습한 지하실에서(왜 그리 운동권 써클은 지하실에 위치해 있는지) 빨갱이 서적을 읽고 있었고, 철학서적을 읽고 있었다. 아직도 내 책장에는 이 당시 읽은 을지서적에서 나온 철학개론이 꽂혀있다. 물론 사구체와 나중에 어렵게 모아들인 비봉사의 자본론도 꽂혀 있다.(절판된 것을 서점 아저씨께 부탁드려 몇 년 동안 간신히 모은 것이다. 아직도 반품된 책들 있냐고 수시로 비봉사에 전화 걸어 챙겨주신 아저씨께 감사를 드린다.)
남다른 학창 시절과 써클을 전전한 나에게 리영희가 생소하니 다른 친구들에게야 듣보잡일 것이다. "리영희 프리즘 보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글샘님의 글을 보고도 “누구야? 누군데 글샘님이 저렇게 애원하지?”라는 단순한 호기심과 서평을 올려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을 읽어나가길 몇 페이지 했을까? 말 그대로 정수리에 차가운 물 한바가지가 끼얹어진 경험을 했다.
이상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지능보다도 용기를 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그렇다. 우리가 우리에게 던져진 전제와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에 머물 때, 우리는 '기계 부품'에 머무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때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 '감히 알려 하고', '감히 문제 삼으려 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칸트의 답변이 그것이다.(P.24)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지능보다도 용기를 요하는 것이다.”라는 리영희 선생의 말이 내겐 커다란 충격이었다. 도대체 이 사회가 어디로 가는가, 왜 폴리페서들이 넘쳐나는데 정책은 초딩만도 못한지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던 나를 깨우는 사자후였다. 그렇다. 사회가 역행하고, 소통이 되지 않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서 나라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굴러가는 것은 지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지성이 없어서, 학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멸사봉공(滅私奉公)할 용기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386이라는 사람들이 정치권의 실세로 등장한 지난 10년간에도 부정과 부패와 온갖 게이트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권력에 아부하고 정당화 시켜주는 제사장들은 많이 있지만, 사회의 부조리와 악에 대항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흘러야 함을 당당하게 외칠 선지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타협하지 않는 광야의 선지자를 꿈꾸고, 시대의 양심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가당치도 않은 꿈을 꾸었던 나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타협하고 살면서 어쩔 수 없잖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도 내가 감당해야할 몫을 감당하지 않았기에 사회가 이렇게 흘러오게 만든 책임이 어느 정도는 있다.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그래서 소위 고학력자(?)에 들어가지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소홀히 했으니 인텔리겐차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시덥잖은 개인의 잡소리이지만 서평의 초반에 이렇게 길게 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나에게 리영희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선가 “지식인이란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는 사람이다. 깨어난 사람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고,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리영희 선생이 생각하는 지식인이 이런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나는 리영희 선생을 이 시대의 세례 요한이라고 칭하고 싶다. 시대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사람,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지만 정신만은 자유로운 사람, 도무지 권력이 길들이지 못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길들이지 못하는 사람. 리영희 선생님에게 딱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겠는가? 리영희 선생님께서 준비하신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 세례 요한에게 예수가 있어 행복했듯이, 리영희 선생에게 누가 있어서 행복할까? 그게 이 시대 리영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후진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리영희 선생이 있어서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행복하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기도한다.
PS.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편집했기 때문에 깊이가 깊지는 않다. 그렇지만 곱씹어 볼만한 글들이 여럿있다. 읽다가 발견한 오타이다. "28p 스승인 아닌자 => 스승이 아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