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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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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월 용산에서 참사가 있었다. 도심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용산 4구역의 재개발을 추진하였다. 빈약한 보상과 MB정권의 상진인 속도전과 밀어붙이기식 사업 진행에 세입자들은 생존을 위해 버티며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철거민들을 응원하는 전철연이 합세하여 사태는 더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을 쏘면서 경찰과 대치하기를 얼마나 했을까? 김석기 총장을 비롯하여 경찰 수뇌부는 강경하게 진압 작전을 펼쳤고 그 가운데 철거민들이 가지고 있던 신나가 폭발하여 건물이 불에 휩싸였다. 그리고 경찰과 철거민 양측에서 아까운 생명이 불 속에서 스러져갔다.  

  이 사건은 많은 파문을 불러 왔다. 국민들은 둘로 나뉘어져 치열한 갈등을 시작했다.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권에서는 경찰이라는 정당한 공권력을 무시한 전철연의 도심테러(공성진 의원 2009년 2월 2일 최고회의 중에서)요, 떼쟁이들이 만든 비극이라고 선언했으며 조중동을 비롯 많은 보수 언론들이 이 선언에 지지를 표명했다. 반면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MB식 속도전이 이런 비극을 불러왔다고 비난하면서 철을 만난 물고기처럼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희생자들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으채 지리하게 1년을 끌다가 가까스로 해결 되었다. 물론 분명하게 해결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진행형이긴 하지만 말이다. 

  용산 사태를 바라보면서 나는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왜 철거 예정인 건물에 들어가서 목숨걸고 투쟁을 했으까? 그들이 외쳤던 것은 무엇이며, 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태에 무심하고 혹은 공권력에 대항하다 천벌 받은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답은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내 머릿속에서 질문 자체가 희미하게 사라질 무렵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나에게 그 질문을 다시 환기 시켜 주었다. 

  철거민 그들이 외쳤던 것은 정당한 이주비였다. 최소한 다른 곳에 가서도 장사를 하면서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들의 생존에 대한 요구가 무시되었을 때 절박한 심정으로 투쟁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왜 보수 우익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심 테러 집단이라고 규정하였는가?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생각하고 철거민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법마저도 무시하는 떼쟁이집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공성진 의원에게 있어서 철거민들은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하여 떼를 쓰고 있는 이기주의의 표본이요, 공권력을 투입해 박멸해야할 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자유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말, 대한민국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에 국가는 곧 자유의 수호자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저자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윤리학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국 기쁨의 윤리학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쁨을 지향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의 기쁨을 가로막는 타자와 힘써 싸우고, 또한 동시에 타자의 기쁨을 가로막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의 진정한 의미일 테니까요. 그래서 마침내 기쁨의 윤리학은 이제 자유의 정치학으로 변모하는 것입니다.(P.418) 

  자기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면 철거민들에게도 동일한 권리가 있으며 나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만큼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개념이 공의원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들의 죽음에 무관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죽어도 누구 한 사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바로 대도시인들이 가진 삶의 태도이니까 말이지요. 누가 죽는 그 일이 나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고 또 하나의 건물이 철거되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어 갈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P.390) 

  그들이 무슨 일을 당해도 나와 상관이 없다면 내 삶에 그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지극히 개인주의 적인 세계관, 게오르그 루카치가 말한 물화의 세계관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무한경쟁 체제 속에서 잠시라도 동정심을 보인다면 나도 언제 물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외면하고 공격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내가 돌을 던지지 않는다면 내가 돌을 맞게 될것이라는 두려움이 나의 죄와 약함에 대하여 눈감고 그들에게 돌팔매질하게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희생제로 드려질 수조차 없이 존재의 의미를 부정당한 문둥이, 호모 사케르이다. 한하운은 이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고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라는 한하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생존할 권리가 있다는 철거민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은 호모 사케르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들의 절규를 무시하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저자의 다음 말에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현대 철학자 아감벤이라면 이런 문둥이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살해하는 것은 가능해도 희생으로는 바칠 수 없는 존재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소나 양이 희생으로 바칠 수 있는 동물이라면 지렁이 혹은 작은 벌레들은 그럴 수조차 없는 생물들이지요. ---중략--- 호모 사케르로 지명된 인간이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생명체가 벌거벗었다는 이야기는 사회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는 이미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문둥이들만 호모 사케르일까요?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벌거벗은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동남아시아 출신의 노동자들이, 종로 3가에 하는 일 없이 모여 있는 노인들, 을지로 지하철 역 안의 체념한 노숙자들, 취업을 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 광주의 시민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과 집시들. 한하운의 시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바로 이런 모든 벌거벗은 생명들의 목소리, 다시 말해 배제된 자들의 울부짖음을 강렬하게 대변하기 때문입니다.(P.311 ~ 312)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나의 이익을 위하여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로 만들고 문둥이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언젠가는 나도 호모 사케르로 전락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 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두려움, 벌거벗은 생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을 더 공격하고, 더 철저하고 악랄하게 비난하지 않았는가? 좌익에서 뉴라이트로 전향하며 그 누구보다 더 철저하게 좌익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누구처럼 말이다. 그래도 내가 돌을 던지는 하나 오늘 돌을 던지는 내가 내일은 돌을 맞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변하지 않는다. 진정 호모 사케르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저자는 그 방법을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다. 

  문둥이들에게 돌을 던질 때 사실 우리는 자신도 그렇게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그런 과도한 행위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문둥이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포용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 또한 벌거벗은 생명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일정 정도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도 나를 포용해 줄 타자의 몸짓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중략--- 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정치가 우리 내면에 아로새긴 벌거벗은 생명이 대한 공포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까지 말이지요.(P.320 ~ 321) 

  경쟁의 체제를 멈추고, 사회를 획일화하려는 노력, 줄을 세우려 하는 시도를 멈추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능력, 즉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주장한다. 차가 떨어져서 상수원이 오염될 것을 걱정하는 사회가 아니라 물에 빠진 이를 보면서 슬퍼할 수 있는 감수성과 인간미를 회복하는 것, 그것만이 이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게 저자가 굳이 철학을 시와 연결시킨 의미가 아닐까? 시나 철학이나 결국은 인간미를 지향하는 학문이라는 것 말이다. 21편의 시와 21명의 철학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결론은 人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PS. 쉽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힌다. 참신하다. 철학과 영화를 연결시킨 책들은 많이 있지만 시와의 연결은 처음이기에. 그리고 읽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시에서 철학적인 사유를 읽어내려면 먼저 시를 이해할 수 있는 따스함이 있어야 됨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저자가 밝혔듯이 20주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철학을 입문하려는 스터디 그룹에게 많은 도움이 될법한 책이다. 마지막으로 용산 참사를 통해 소중한 생명을 잃은 경찰들과 철거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조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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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za 2010-02-24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신한 시의 해설과 함께 참신한 해설이네요^^
책에 대한 이렇게 깊이 있는 해설이라니요~
잘 읽었습니다.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실천인으로서의 모습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