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모든 신화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이충호 옮김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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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 

  이 말에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하고 많은 신화 중에 왜 하필 그리스 로마 신화인가? 단군 할아버지가 나오는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도 있고, 북유럽의 켈트족 신화도 있고, 이집트의 신화도 있고, 메소포타미아의 마르둑 신화도 있지만 왜 우리는 신화라는 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 올릴 수밖에 없는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아닐까? 

  첫째는 신화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박하다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로도, 책으로도 어린 시절부터 읽어야할 도서 목록에 들어가지만 나머지 신화를 알아야한다는 노력도, 필요도 그다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슨 말이냐? 시험에 나오지 않으면 신화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라는 말이다.(신화가 재미가 아니라 공부로 읽힌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그러니 미술이나, 문학이나 여러가지 모양으로 시험과 연관이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닌 북유럽 신화 혹은 메소포타미아 신화 같은 비주류(?)들은 찬밥 신세일 수밖에 없다. 

  둘째는 다른 나라의 신화는 신화로 보지만 한국의 신화는 神話가 아니라 身話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단군 신화에 대하여 어떻게 배웠는가? 환웅이라는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나 곰을 토템으로 삼는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 중 전자를 택하여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신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아닌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다음의 문제이다. 일단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 넣고 본다.(이 또한 시험의 폐단이리라.) 한국의 신화는 신화가 아니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빗댄 것이기에 그다지 신비롭지도 않고 로맨틱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다는 것이 우리의 사고 깊숙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는 기본 바탕이다.  

  신화에서조차도 시험에 그리고 서구 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 책이 내게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은 세계의 여러 신화에 대하여 특히 비주류 신화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그나로크라는 만화의 제목이 신들의 전쟁을 듯하는 북유럽 신화에서 왔다는 사실도, 마르둑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신이 오늘날 슈퍼 히어로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다만 아쉬운 것은 동양의 신화에 대하여 간략하게도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의 신화를 다루면서 한국의 신화를 빠뜨린 것도 그렇고 아메리카의 신화는 겉핥기 식으로 지나갔고, 태평양 섬의 신화는 제목이 무색하다. 

  이 책은 신화는 神話일뿐 아니라 身話이기도 하다. 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파하는 이야기, 간절히 소원하는 이야기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읽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신화를 神話로 그리고 身話로 읽게 될 때 그것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재미를 선사해 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신화를 재미있게 읽고 싶다는 생각을 나에게 심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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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도덕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진환.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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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 

  이상하리만치 딱딱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당당하게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일단 저자의 이력이 화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누가 뭐라고 해도 20대에 하버드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출판사도 이 점을 다분히 의식했는지 정의란 무엇인가를 선전할 때 저자의 화려한 스펙을 가장 앞세웠다. 

  다음으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 아닐까? 한미 FTA, 촛불 집회에 대한 강압적인 탄압, 용산 참사 등 민주화된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을 법한 굵직한 사건들이 요 몇년 사이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투표의 소중함에 대하여 철저하게 깨달았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이 무엇이겠는가? 다름 아닌 정의일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딱딱한 이 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만든 동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두가지 이유가 정말 상반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화려한 스펙에 현혹되었다는 말은 나도 저만큼 성공하고 싶다는, 혹은 성공한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이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테고, 정의에 대한 고민은 지금가지 우리가 추구했던 성공이 결국은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일테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닌가? 그러나 민주화의 주된 세력이었던 386에 의해서 승자독식과 사교육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떠 올린다면 그다지 새로운 사실도 아닐 것이다. 

  어찌되었든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고, 그의 인기에 기대어 생명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이 나왔다. 여기에서 멈추기에는 지금가지 띄워놓은 샌델의 인기가 아가운 것일까? 결국 "왜 도덕인가?"라는 책이 숨가쁘게 나왔다. 숨가쁘게 출판되었다는 말이 정말 맞을 것이다. 만약 이 책이 딱 3달만 뒤에 나왔어도 이렇게 비상한 관심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샌델이라는 이름값에 휘말려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다 읽고 난 평을 한 마디로 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공리주의와 개인주의의 입장을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정의에 대한 태도를 설파했다면 이 책은 정의가 실행되어야 하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으로 도덕을 보고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르다면 다를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미 파악했듯이 샌델은 공리주의적인 입장도, 그렇다고 개인주의적인 입장도 지지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중립적인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정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은 결국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생명 윤리를 말한다에서는 생명 공학을 통한 인간 강화가 공동체에 새로운 불평등을 낳을 것이며, 그 결과 공동체가 심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논지의 주장을 폈다. 이 책에서 샌델은 그렇다면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한다. 

  샌델은 도덕이란 결국 공동체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가치체계라는 말을 한다. 정확하게 그러한 표현은 사용하지 않지만 마지막가지 읽고 난 후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다. 왜 도덕이 중요한가? 도덕은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샌델의 말을 들어보자.  

  정의가 구성원 자격에서 시작되는 사회에서는 분배만 염려해서는 안된다. 구성원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적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P.173) 

  도덕적 상황이란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도덕의 이러한 역할이 있은 후에 비로소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의에 대하여 말했다. 왜 우리 공동체가 정의롭지 못한가? 왜 부의 성장과 분배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사회는 상위 1%를 위해 움직인다고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가? 왜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하는가? 이 모든 논쟁의 출발점은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누구인가에 맞추어 질 수밖에 없다. 나와 수준이 비슷하지 않다면, 생각이나 정치적인 입장이 비슷하지 않다면 기꺼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색깔론, 영호남, 386. 88만원 세대 등 지속적으로 계급을 분화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고민이 없이 함게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솎아 버리는 편협한 태도에 있지 않은가? 도덕을 말하는 것은 이러한 편협한 태도에 대한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물론 이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와 상당부분이 겹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전제하게 말이다.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자격을 함양하는 도덕을 이야기하면서 샌델은 마지막으로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옮아간다.   

  진보주의 개혁의 분산화 및 전국화 이슈는 1912년 우드로 윌슨과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대결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해의 선거운동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것은 양 진영 지도자들이 공유한 가정이었다. 한쪽에는 브랜다이스와 윌슨이, 반대쪽에는 루즈벨트와 크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정치 및 경제 제도가 자치에 필요한 도덕을 장려하거나 훼손시키는 경향에 따라 평가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제퍼슨과 마찬가지로 그들 시대의 경제정책이 어떤 부류의 시민들을 만들어낼지 우려했던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서로 다를지언정 똑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논의했다.
  한편 우리 시대의 경제적 논쟁은 진보개혁주의자들을 분열시킨 주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들은 경제구조에 관해 고심하고 민주정부를 어떻게 경제력 집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반면 우리는 전반적인 경제 생산에 관해 고심하고 어떻게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번영의 결실에 폭넓게 접근할 수 있을지 논의한다. 뉴딜정책 후반기에 시작된 성장과 분배의 정치경제학은 1960년대 초에 정점에 달해 마침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P.280)

  과거 정치인들이 왜 그렇게 거대화된 다국적 기업에 대한 견제에 골몰했는가? 그것은 거대화된 기업, 막강한 권력을 획득한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기업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들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고수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권력에 대항하여 국가에 권력을 더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다는 차이만 있을 분이지 모두 다국적 기업이 획득한 권력에 대하여 경계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고삐풀린 기업은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고 물질만능주의를 최우선의 가치로 만들어 버린다. 기업의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증발해 버리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성장과 분배의 매커니즘뿐이다. 물론 그 매커니즘도 선성장 후분배라는 조삼모사식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말이다. 

  말이 어려운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랑스런(?) 삼성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해진다. 일제 잔재 청산, 반민족 특위, 피해 보상과 같은 도덕적인 가치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말 한마디에 힘을 잃고 말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그것들은 함구해야 하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머릿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을 입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반동분자로 몰려 철저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정책을 펴면서 국가는 어떻게 해서든 재벌을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 버렸다. 기업이 정부를 위협하는 단계를 넘어 정부의 모토마저 기업에서 정해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최후의 보루이자, 사회 안전망인 공동체를 상실하게 된다. 여전히 공동체는 존재하지만 그 공동체에 붙어 있기가 지극히 어렵다. 이제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던 입장도, 인간을 절대적인 기준이요 목적으로 삼던 철학도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시장에서 만인을 위한 만이의 투쟁만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이 먹고사니즘에 올인한 결과이다. 국어, 영어 , 수학에 올인하면서 도덕 교육과 윤리, 철학을 경시한 결과이다.(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나도 고동학교 시절 윤리, 철학 시간에 자습이라는 명목하에 국영수 공부할 것을 강요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잘 먹고 잘 살지만, 그 어디에도 만족은 없으며, 인정이라는 훈훈함도 없다. 사회 안전망이 사라지니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보험사가 활개를 친다. 이젠 개인의 미래마저 기업에게 담보물로 잡혀 버린 것이다.  

  케케묵은 이야기같은 도덕, 공동체의 공동의 가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판단과 철학을 회복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생각과 한 가지 이념으로 뭉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다만 끊임없이 인간다움에 대하여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만 같은 뿐이다. 왜 도덕인가?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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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상은 ‘긍정’을 강요하는가? -
    from 도서출판 부키 2011-04-05 21:07 
    왜 세상은 ‘긍정’을 강요하는가? - 긍정의 배신 밝고 낙천적이고 명랑한 사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항상 환영받는다. ‘긍정’이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 쓰일 뿐, 결코 경계하거나 삐딱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긍정’은 그 이름부터 이를 거부하거나 기피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친화성 또는 강제성을 담고 있다. 흔
 
 
 
논어 교양강의 -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은 지혜와 성찰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3
진순신 지음, 서은숙 옮김 / 돌베개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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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달전 아내가 홈쇼핑에서 갈치를 구입했다. 비교적 싼 가격에 꽤 많은 양이 왔기에 기대했다. 그러나 상 위에 올라온 갈치 조림은 생각만 못했다. 뼈를 발라먹는 것, 생선을 손질하는 것을 귀찮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손질을 다 마쳐온 생선은 얇은 절편 같았다. 생선 살만 들어 있어서 요리를 하면 아이들은 먹기 좋겠지만 생선의 참 맛과는 거리가 멀다. 생선은 여러부위를 먹어야 그 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이런 말하면서 나도 머리 토막은 먹지 않지만) 특히 갈치의 별미는 가는 뼈까지 으적으적 씹어 먹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나로서는 살만 발라서 온 갈치는 이름만 갈치이지 갈치가 아닌 것이다. 

  왜 뜬금없이 갈치 이야기를 하느냐, 이 책이 꼭 갈치같아서 그렇다. 논어는 동양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가 있는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분량도 방대하다. 그런 책을 300 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옮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요약을 할지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공자께서 살아 오신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순신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논어에 흥미를 갖게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무모한 작업을 시작하신 것 같다. 그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역시나다. 에세이 형태로 풀어나가겠다는 말과는 달리 그다지 에세이로 느껴지지 않고 딱딱한 설교를 듣는 것 같다. 게다가 논어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선별하여 뽑은 것까지는 좋으나 그 결과가 논어를 살만 발라져 온 생선토막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내용은 논어를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에게 논어가 아닌 다른 것을 보여주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흥미를 유발시키겠다는 본심과는 달리 논어에 대해 가지고 있던 흥미마저도 없어져 버리게 된다. 

  게다가 한문을 착실하게 배운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패스다. 물론 이 부분은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을 해설하면서 한문 문법을 가지고 설명하는 부분은 도무지 외계어를 듣고 있는 기분이랄까?  

  신영복 선생이 고전을 읽는 재미라고 했다. 사기와 손자병법은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다. 그 덕에 이 책을 사게 되었는데, 만약 이 책을 먼저 접했더라면 다른 책들은 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전을 읽는 재미도 신영복 선생처럼 논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본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본래 내용을 알고 있으니 이 부분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이 부분이 이렇게도 해석이 되는구나 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논어의 본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나에게 이 책은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해주는 그런 얄팍한 책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혹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읽지 말 것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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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완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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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나의 쉼플레가데스를 건너기로 작정했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5권의 내용은 묘하게도 아르고스 원정대의 모험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아니다. 아르고스 원정대의 모험에 대하여 적고 있기 때문에 저자가 쉼플레가데스를 건너기로 했던 과거의 결심을 다시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스토리텔러 이윤기는 아르고스원정대의 일원으로 프릭소스의 금모양피를 찾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쉼플레가데스를 건너 콜키스에 도착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프릭소스의 금모양피를 손에 넣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역시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잃어버렸던 왕위를 되찾는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다. 금모양피를 손에 넣어 돌아오는 순간 이아손의 역할은 주인공에서 조연으로 내려간다. 아니다. 조연도 과분하다. 엑스트라의 역할로 대폭 축소된다. 이제 스토리의 주인공은 메데이아로 넘어간다. 여행이 끝나는 순간 이아손의 역할이 끝났달까? 이윤기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아손에게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아버지 아이손이 있고, 되찾아야할 나라가 있다. 숙부 펠리아스에 대한 복수도 이아손이 마침내 해내야 할 숙제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는 메데이아를 중심으로 가파르게 전개된다. 이아손의 역할은 금양모피를 찾는 데서 사실상 끝난다. '이아손이 찾아다닌 것이 실은 금양모피가 아니었다'고 한 오비디우스의 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양모피는, '노모살달로스'였던 이아손이, 모험과 탐색의 여행 끝에 마침내 되찾은 한짝의 가죽신인지도 모른다.(P.224~225) 

  이아손은 헤라클레스의 말마따나 어른이 되기 위하여 아르고스 원정대를 조직했고, 금양모피를 찾아 나선 것이다. 금양모피가 단순한 목표요, 물건이었다면 보레아스의 아들들을 보내거나 도둑질의 명수를 보내어 훔쳐오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헤라클레스가 원정대의 대장을 맡기를 고사하고 스무살의 이아손에게 원정대의 대장을 맡긴 이유가 무엇인가? 금양보피를 찾아 나선 원정은 이아손이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되기 위해 꼭 통과해야할 과정이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여행의 기회를 갖게 된 젊은이들이 한결 성장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쉼플레가데스를 건너고 목표하였던 금양모피를 찾아 집으로 돌아온 이아손의 모습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젊음의 활기참도, 모험심도 사라져 버리고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지고가야할 무거운 책임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이아손이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아 복수심에 두 아들을 죽이고 외국으로 가버린 메데이아를 정말 분노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다른 여인에 대한 질투심일까? 글쎄... 내 생각은 다르다. 질투심이 아닌 이아손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조국과 아버지를 버리고 그 빛나던 이아손을 따라 왔는데 이아손이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되었을 때 메데이아가 느꼈을 실망과 배신감, 사랑만큼 깊은 분노를 애써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는데 그 사람이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음식을 먹다가 런닝셔츠에 음식을 흘릴 때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뭇 기혼 여성들의 마음처러 말이다.(물로 나도 애는 쓰지만 배불뚝이 아저씨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T.T) 모험심, 활달함, 호기심 등등 이아손을 빛나게 하는 것들이 사라져버리고 한 곳에 정착하여 평범하게 변해버린(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아손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었을 것이다.) 이아손은 더이상 메데이아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매력 덩어리가 아니다. 물론 이아손에게 메데이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만약 이아손이 끊임없이 자신을 매력남으로 갈고 닦던지, 메데이아에게도 이아손처럼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팔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던지, 혹은 그것을 참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약간은 넓은 마음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진행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이 없었다 보다. 

  여하튼 쉼플레가데스를 건너 금양모피를 얻은 후 정착한 이아손의 뒤끝이 너무 안타깝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호모 비아토르(떠도는 인간)'는 나그네길에 머물 때 아름답다. 이올코스에 정착한 이아손의 뒤끝은 이렇듯이 누추하다.(P.239) 

  그의 책을 덮으며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 생각한다. 나는 나의 쉼플레가데스를 건너고 있는가? 아르고나우타이로서 아르고스호에 탑승해서 살고 있는가? 아르코스호(쾌속이라는 의미)에 탑승하여 눈깜짝할 사이에 떠밀려 내려가고 있지는 않는가? 젊은 날의 생명과 열정을 잃어버리고 금양모피를 얻은 양 한 곳에 정착하여 그저 그런 사람으로 떠내려 가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뒤끝 또한 저자의 말대로 누추하지 않겠는가?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모 가수가 노래 불렀는데, 그 나그네 인생길에서 혹 아르고스호에 탑승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흐린 주점에서 쉼플레가데스를 건너기로 결심하고 아르고나우타이가 되어 길을 떠난 이윤기가 그립다. 진정한 호모 비아토르 이윤기가 떠난 길을 부러워하며 그를 그린다. 아울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새롭게 아르고나우타이가 된 그의 자녀들에게도 용기를 잃지말라고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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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7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저자 이윤기 씨의 삶의 내력을 보면 자신이 글로써 표현하고자 했던
신화처럼 된 거 같습니다. 마지막에 이윤기 씨를 호모 비아토르로 비유한 표현이
참 공감이 갑니다.

saint236 2010-10-27 15:48   좋아요 0 | URL
평생을 신화를 말하다가 신화처럼 삶을 마무리한 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의 글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제일 아쉽죠.

양철나무꾼 2010-10-2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분이 말년에 공부하신 걸 다 풀어내지 못하신 게 제일 아쉬워요~
이제 시작이었는데 말이죠~ㅠ.ㅠ

saint236 2010-10-27 18:2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제 시작이었는데. 재인은 박명인가 봅니다. 다른 분들에 비하여 박명이시니.
 
<영단어 인문학 산책>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영단어 인문학 산책 - EBS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
이택광 지음 / 난장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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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영어 학원을 다녔다. 아직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윤선생 영어 교실이다. 당시 농사지으시던 일을 그만두시고 신학을 공부하셔서 개척교회 담임을 시작하신 아버지의 한달 월급이 20만원이었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학원의 한달 비용이 10만원이다. 특별히 학원비를 내는 것은 아니고 교재비에 학원비가 모두 포함된 시스템이었는데, 한달에 5만원짜리 교재를 대략 2권 뗐다. "큰 일을 하려면 앞으로는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에 촌구석에 살면서도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내 초등학교 동창은 무도 13명이었고 그 어떤 종류라도 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매일 매일 주어진 분량을 위해서 1시간에서 2시간을 오디오 앞에 붙어서 영어 테잎을 듣고 따라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갔다. 내심 영어에 자신이 있었던 나였는데 이런 젠장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 것도 모르겠더라. 성문 기본 영어로 보충수업을 나가는데 아무 것도 모르겠고, 시내에서 학교를 다니던 다른 친구들은 아는데 나는 모른다는 사실이 못내 분해서 성문을 한 10번은 본 것 같다. 3년 동안의 영어와의 사투 끝에 수능에서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말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굳어지는 버릇은 여전하더라. 도대체 왜 그렇게 긴 시간동안 영어에 목숨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것, 도움이 되는 것은 영어 성경을 본 것과 노인과 바다를 본 것, 팝송 몇 곡 정도이다.  영어를 말이 아니라 시험과목으로 배운 결과가 이렇게 처참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서 봤던 단어집이 있다. 그 단어집 이름이 Vocabulary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한번쯤은 봤을 법한 단어집이다. 영단어의 어원을 밝히고 파생된 단어들을 명시하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꽤 획기적인 단어집이었다. 아직도 그때 외운 단어들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집 Vocabulary를 나와 친구들을 "붜케 불노리(부엌에 불노리)"라고 불렀다. 언어유희인 샘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미국 사람들이나 영국 사람들이 Vocabulary를 붜케 불노리로 부르는 우리들의 유머를 이해할까? 아마도 "그게 왜 웃기냐? 발음이 잘못 됐따."라고 지적하지 않겠는가? 

  Vocabulary가 영국과 미국 사람들에게는 어휘라는 단어이지만 우리에게는 어휘라는 의미를 가진 영단어일 뿐 아니라 붜케 불노리라고 부를 수 있는 유희의 대상이다. 이것은 아무리 설명해도 한국 사람이 아닌 이상은 느낌이 오지 않는다. 이해는 되어도 웃기지는 않는다. 이게 문화다. 이택광씨는 이러한 영어 단어를 통하여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보여준다. 어떤 철학과 역사적인 배경에서 이 단어가 나왔는지, 어원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한다. 쉽게 풀어 썼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다. 영어를 시험 과목이 아니라 말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인문 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 비한다면 같은 사람이 썼나 싶을 정도로 술술 잘 읽힌다.  

  이 책에 대한 총평은 "재미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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