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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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품인데 원래는 지옥문 위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지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주제를 가진 작품이란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학교 곳곳에 설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우스개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화장지가 떨어졌는데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고민을 하는 중이라고. 어찌되었던 이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명확하다. "넌 생각이 있는가?"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 말이다. 

  신입생 때 선배로 들었던 가장 많은 질책은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였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짜증나는 말들이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 말들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이 "책 좀 읽어라."와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이다. 책을 읽고 생각하라는 말은 고민하라는 말이다. 하루하루 그저 때우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고민하라는 말이다. 힘들고 어렵지만 고민한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나이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다. 32살이면 아직도 한창나이이다. 아니다. 어디가서 나이를 밝히기에도 창피한 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20대는 너무 쉽게 살아간다. 쉽게 산다는 말이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하고 산다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라고, 토익 점수에 목을 맨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스킬을 채우기 위해, 스펙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뿐이다.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 Philasophy라는 단어가 철학이라는 뜻은 알고 있겠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와 도스트예프스키가 무슨 책을 썼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 읽지는 않는다.  철학의 개념을 깊이 이해하기 보다는 철학사의 흐름을 암기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니 깊이가 없다. 

  인생의 의미를 고민한다는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의 실존이 무엇이고, 나는 왜 살아가는가 묻지 않는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는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일텐데 그 호기심이라는 인자, 고민이라는 DNA가 마치 현대인들에게는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 내 인생을 결정해 주길 원한다. 주어진 길은 잘 가지만 자기가 갈 길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 과연 이게 성숙한 인간의 모습일까? 

  고민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고민을 통하여, 내 인격이 성숙해지고, 내 사고의 깊이가 깊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비로소 성장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이란 사고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지, 연봉과 나이와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고민하는가?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생각하는가? 착각하지마라.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고민하는 깊이만큼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 없다. 고민하는 그 시간만큼 활발하고 솔직하며, 생생한 시간은 없다. 이것이 고민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일 것이다. 고민이 되는가? 고민해라. 아주 깊이 고민해라. 바닥까지 내려갈지라도 고민해라. 그 끝에서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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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을 리뷰해주세요.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 - 비밀스러운 종교의 역사
에두아르 쉬레 지음, 진형준 옮김 / 사문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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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비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책을 열었다. 거기에데가 출판사 이름이 사문난적이라. 저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요, 1차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읽었다는 책의 소개는 내 궁금증과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라마, 크리슈나, 헤르메스, 모세, 오르페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예수라는 챕터의 주인공들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무엇인가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그냥 팍팍 왔다. 

  그러나 50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을 넘기면서 피식거리는 웃음과 실소가 그치지 않았다.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비하여 내용은 종교진화론에 입각한 환타지 소설일 뿐이었다. 아리안족에게서 부터 시작된 종교가 인도를 거쳐 이집트를 중심으로,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아우른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하다. 태양의 아들들과 달의 아들들, 그리고 다신교와 일신교를 종교를 구분한 다음 둘 사이의 전쟁으로 인류의 역사를 정의한 것도 재미있다. 거기에다가 예수를 가장 진화한 단계의 선각자로 이해하는 것도 흥미롭다. 아마도 유럽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겠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환타지 소설은 한단고기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좋았다고, 신비주의의 핵심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고 서평을 기록했는데 왜 나는 그렇게 흥미가 가지 않았는지. 읽으면서도 계속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은 그래도 뭐가 있겠지, 이렇게 끝나지 않겠지라는 기대는 정말 기대였을 뿐이다.  

  신비주의가 인간의 존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인간의 약함, 존재의 유한함, 상황의 불확실함에서부터 신비주의가 태동했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비주의가 고작 남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돌려먹는 것이라면, 클럽제로 운영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권위에 기대어 신도들을 농락했던 중세의 사제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또한 통과 제의라는 것을 통해 얻는 것 자체가 너무 유치하다. 죽음이라는 깊은 체험을 통해서 결국 얻게 되는 것, 배우게 되는 것이 강신술이고, 접신술이고, 마술이라면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작두타고, 굿하고, 자신을 잃고 황홀경에 빠지는 것, 이것만이 신비주의의 전부인가? 

  게다가 위대한 정신이라고 부르는 초월자의 모습은 무엇인가? 각자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보다 더 추상적인 개념이 되어 전혀 느낌이 다가오지 않는다. 저자가 역시 철학자라는 말장난 잘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들 뿐이다. 

  마지막으로 일신교를 하나로 묶어 버리는 시도 또한 무모했다. 신비주의라는 틀에서 그리스 철학과, 종교, 유태교, 기독교, 힌두교, 라마교 등등 세상의 모든 종교를 섞어 버리는 이건 죽도 밥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종교간의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없애고자 각 종교의 특성을 없애버린 것은 빈대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 격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예수를 최종 진화형의 선각자로 그리다보니 이슬람이라는 거대 종교가 빠져버린 우를 범하게 되었다. 이슬람에는 마치 신비주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달까? 

  신비주의를 너무 마술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도, 그리고 너무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몰아간 것도 이 책을 재미없게 만든 이유가 아니겠는가?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정말 크게 들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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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먹으면 왜 안되는가?>를 리뷰해주세요.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 - 일상을 전복하는 33개의 철학 퍼즐
피터 케이브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젤란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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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이해하는 33가지의 퍼즐이라... 

  일단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33가지의 철학적인 질문들을 일상을 전복하는 33개의 철학 퍼즐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인가 있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사람을 먹으면 왜 안되는가?"라는 자극적인 제목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오랫만에 읽는 철학서적이기에 더 호기심이 강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철학적인 내용들을 최대한 싶게 풀어서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때론 그 설명이라는 것이 일반인이 받아들이기에는 그다지 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처음에는 쉬운 말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철학자 특유의 말장난에 빠져버린다. 결국 철학이 아니라 논리학에 멈추어 버린다. 논리적으로 이리재고 저리재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철학적인 질문에는 다다르지 못한다. 이쯤되면 읽으면서도 슬슬 짜증이 밀려 올 수밖에 없다. 

  저자는 33가지의 질문을 나름대로 조리있게 묶어 놓았다. 이 질문은 또 어떤 질문과 연결되는가, 같이 읽으면 좋을 것인가를 명시해놨다. 예를 들자면 "퍼즐을 한 조각 던져 놓고 이것과 맞는 것은 이것과 이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할까? 그런데 문제는 그 퍼즐이 무엇을 위한 퍼즐인지, 정확하게 어떤 모양인지가 불학실하다는 것이다. 그림이 그려져있는 퍼즐이 아니라 그냥 모양만 있는 천피스 퍼즐을 맞출때의 답답함이라면 조금 이해가 쉬울까? 여하튼 왜 이것을 퍼즐이라 부르는지, 무엇을 위한 퍼즐인지 모르겠다. 그저 툭 던져놓고 알아서 해라고 명령하는 느낌이랄까? 이정도 된다면 철학은 재미가 없어진다. 이 책이 재미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철학이 무엇인가? 우리는 왜 철학을 해야 하는가?(철학은 암기과목 외우듯이 배우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이들을 보자. 얼마나 호기심이 왕성한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방안을 온통 헤집고 다니면서 그들만의 즐거운 모험을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 호기심을 잃어버린다. 생각하기를 멈춘다. 그냥 주어지 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가다가 "왜?"라는 질문에 생소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라면 철학을 시작해야 한다. 인생을 뒤집어 봐야 한다. 길들지 말고, 흘러가지 말고 계속 살아 숨쉬며 생각의 지느러미를 움직여야 한다. 

  "뒤집어 보라." 이 말을 오랫만에 생각나게 만드는 책이다. 야심찬 의도와 여러가지 말들을 덧붙이지만 이 책의 가치는 딱 이정도이다. 물론 이정도로도 이 책은 추분히 가치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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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을 리뷰해주세요.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 상처에서 치유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24가지 이야기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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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들을 통해 받은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고 인간의 마음을 계속 누르고 일상생할에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을 외상후 스트레스라고 한다. 말로만 들었던 외상후 스트레스를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MMPI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장점과 단점, 그리고 한계에 대하여 배웠고, 그것을 보완할 목적으로 PAI라는 심리검사에 대해서 배우고 실제로 실습하는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강의를 같이 듣던 한 분이 불안을 나타내는 지수가 꽤 높게 나왔는데 누가봐도 그럴 사람이 아니었던 까닭에 관심을 받았고, 그 이유에 대하여 알아가던 가운데 몇 주전에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니었기에 병원에 퇴원했지만 그 이후로는 운전을 하고 가다가 자기 차 뒤에 다른 차가 멈춰서면 긴장이 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자기 뒤에만 서 있어도 긴장이 되고 불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본인도 모르고 있었는데 외상후 스트레스였다. 증상이 가벼워 몇 주가 지나고 없어졌지만 만약 그 상처가 깊었다면, 그ㅐ서 몇 주 지나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 사람의 인생이 평생 고통 가운데 빠져 살아야 하지 않을까? 병명도 잘 모른채로 말이다. 

  이 책은 영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트라우마에 대하여, 그리고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촉발 기재인 트리거에 대해여, 그리고 트라우마를 해소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영화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사는 특성 때문에 트라우마를 한번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며, 언제 문제를 만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트라우마 해소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을 소통과 대화와 신뢰, 지지라고 말한다. 아무리 훌륭한 치료법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밑받침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저자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군대에서 수없이 많은 상담을 통해 얻은 결론도 이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이 책을 보다가, 지금 대한 민국은 트라우마 가운데 제대로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리를 공황 상태에 빠뜨리고, 의지와 활력을 깎아 내리는 것들이다. 얼마전 미디어법이 통과 되었을 때 그것을 바라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나만 그런줄 알았는데 동생도 그렇다고 한다. 어떤 분은 소주 한잔 하고 답답함에 이리저리 웹서핑을 하다가 내 글을 발견하고 들어왔다고 답답하다고 하소연하는 글을 달고 가셨다. 어떠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떠나가고 싶다고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한나라당, 민주당, 국회 이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것들이 트리거가 되어서 내 마음에 답답함을 불러 일으킨다. 때론 대한민국 국미니라는 것이 창피하다는 자괴감까지 불러일으킨다. 

  비단 이뿐이겠는가? 쌍용차 사태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밖에서 봉쇄하는 전경들은 전경들대로, 농성하는 이들은 농성하는 이들대로, 밖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은 또 그 가족들대로, 사측은 사측대로 각자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각자의 트라우마를 보듬고 치료하지 못하니 더 공격적으로 나서고 더 악에 받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단계까지 왔다면 단순히 정치의 논리 경제의 논리만은 아니라고 본다. 신뢰, 소통, 대화, 지지가 문제 해결의 가장 좋은 해법이라는 말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상황인가? 그러나 쌍용차 사태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아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들의 방"에 등장하는 가족들처럼 서로의 문제를 감싸 안기에만도 힘겨워 하고 있는 것 같다.  

  누가 해결해야 할까? 누가 트라우마에 갇힌 대한민국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으라? 누가 문제에 직면하여 대화로 하나씩 풀어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청와대? 국회? 경제계? 노동계? 국민?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꽤 오랜시간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는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공권력의 투입, 국회, 민생, 경제, 민주주의라는 정치적인 말들이 트리거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를 것 같다.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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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를 리뷰해주세요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윤용인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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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대로 나이를 먹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그때가 되면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다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이 먹음을 당한다고나 할까? 말장난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나이를 먹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나이 먹음을 당하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나이를 먹는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라면 나이 먹음을 당한다는 것은 그저 철없이 살다 보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는 느낌이랄까? 능동과 수동, 성택과 강요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찌 되었든 이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갖게 되는 생각은 저자가 부럽다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마흔의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간에 따른 피해의식이나 1년만 젊었어도라는 후회가 없다. 그저 주가가 처한 상황이 즐거울 뿐이다. 아니 즐겁지 않더라도 즐겁게 받아들이려하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세월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서 그 사람의 연륜도 경력도, 그리고 지혜도 나올 수 있을테니까!  

  스무살 때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저 멜랑꼬리한 것이 좋았다. 이유도 없다. 그냥 좋았다. 비가오면 비가 온다고 기숙사 방 불을 끄고 포터블에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걸고 몇시간이고 들었다. 가끔 방으로 들어오던 형들이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오다가 깜짝 놀랐던 적이 종종 있을 정도로 노래에 심취해 있었다. 그냥 좋았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왠지 낭만적이라 생각이 들었고, 그때가 되면 나는 무엇이 되어 있을까, 결혼해서 아바가 되어 있을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현실적인 감각도 노력도 없이 그저 서른이라는 나이를 기다렸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서른이 되어 보니 황당하다. 아니 허무하달까?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 감상적인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에 걸맞는 노력이 없다면 주책없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른 둘을 지나 마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 마흔이란 어떻게 다가올까? 그저 학부형이 되어 있고 중년의 나이, 유혹에 흔들림이 없다는 불혹의 나이를 맞을 수 있을까? 10년을 돌아보면 글쎄올시다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신변잡기를 통하여 가르쳐 주는 저자가 고맙다. 그러면서도 딴지 일보의 경력 대문인지 여전히 딴지를 걸고 있는 저자의 말투 가운데 나이 먹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마흔을 향하여 지금부터라도 조금식 준비해야겠다. 멋있는 성숙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번쯤은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PS 엄밀히 따지면 심리학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자기의 생각을 설명하는 에세이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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