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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7
이국운 지음 / 책세상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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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라는 듣보잡의 단체에서 친북 반국가 명단을 발표했다. 트위터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글인지라 믿지를 못했다. 도대체 이게 조선시대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거리들인가? "설마"하는 마음에 기사를 검색했더니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도대체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라는 단체는 어디서 갑자기 뚝 떨어진 단체란 말인가? 그들이 발표한 100명의 명단도 황당한데,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의 친북 반국가적 행위가 무엇인지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건 뭐 카더라는 것도 아니고 한참 증권가에 돌았다가 물의를 일으킨 찌라시도 아니고... 



  100명의 명단 중에서 정치권의 명단만을 여기에 인용한 이유는 이 명단이 국가 정상 추진 위원회의 속셈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이 시비를 건 국회의원들의 출신 성분은 모두다 진보신당, 민노당, 대통합 민주신당 혹은 열린 우리당 출신인 것이다. 국민들의 눈치는 전혀 보지 않고 반국가적인 행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유독 야당 혹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김대중 노무현 시절의 여당만을 명단에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국가를 말아먹은 수없이 많은 장관 중에서 유독 통일부 장관만 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보수 단체에서 김대중 노무현 두 전 대통령의 이름이 친북 반국가 명단에 올라있지 않다고 그렇게 애석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의 소망대로 잘 풀려서 정상회담을 했다면, 그래서 노벨평화상을 탔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름도 친북 반국가 인사 명단에 등재되어야 하는 것인가?(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탄 것을 가장 배아파 한 사람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라는 것은 소문은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마지막으로 전 의문사 진상 규명위 위원장 한상범씨는 정말 쌩뚱맞음을 넘어서 이들의 똘끼를 그대로 보여주는 행위이다. 군대의 비리를 캐면 친북 반국가 행위인가? 그러면 하나회를 무너뜨리고 수없이 많은 장군들의 모가지를 자른 분도 이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이 또한 김영상 전 대통령. 금융 실명제와 하나회 일소는 내가 이분을 보면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부분이다.) 

  친북 반국가 명단 발표의 의미는 명확하다. 친일 반민족 행위 인명 사전에 이름을 올린 측의 반격일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을 보는 나는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우리 집안이 친일 반민족 명단에 이름을 올리거나 친북 반국가 행위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대단한 집안이 아니기 때문에 막말로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이 두 명단이 나를 씁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나라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통과 관용의 부재, 적개심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닌가? 가장 상위법이라는 헌법마저 헌재에서 정치적인 이해 득실을 위하여 왜곡되고 헌정질서 수호라는 미명하에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 위해 날뛰는 아수라장이 대한민국의 현상태가 아니던가? 이 상황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 민국은 헌정국가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헌정 국가의 의미가 무엇인가? 헌법의 질서로 유지된다는 말이 아닌가? 헌법의 의미가 무엇인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헌법은 소통과 관용을 통해 극단을 피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합정체 이론에 전제된 좋음이란 중용, 즉 모순적 가치들 사이에서 극단을 피하면서도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덕성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혼합 헌법은 중용의 원리가 이끄는 중도적 헌법이다. 귀족정과 민주당은 일면적 성격이 강조될 때 과두정과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혼합정체는 양자를 조정하는 것이므로 양자의 고유한 악을 피할 수 있다. 최고의 이상 국가를 염원했던 플라톤과 달리, 최선의 정부 형태를 찾으려 했던 서구의 고전적 헌정주의자들은 중용의 논리에 기초해 혼합정체라는 해결책에 도달했다. 이 온건하지만 어려운 해결책은 폴리스의 중추를 이루는 중산 계급에게 균형자의 역할을 부여하는 까닭에 내부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폴리스가 붕괴될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P.57 ~ 58) 

  예나 지금이나 헌법의 가장 큰 역할은 양 극단을 피하여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는 내부 투쟁으로 붕괴될 위험을 줄이면서 지속적으로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대한민국은 이런한 헌법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케케묵은 색깔론으로 시비를 건다. 양극단으로 치달린다. 상대방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일 뿐이다. 헌법이 이런 상황을 제어해야 하는데 정치적인 이해득실에 의해서 헌법의 기본 정신마저 왜곡해 버린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헌법은 중환자실에 입원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헌정질서를 회복할 것인가? 국가 정상화 추진 위원회의 말처럼 리스트와 명단을 발표하면 헌정 질서가 수호가 되겠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사흘 삶은 호박에 이빨도 안들어갈 소리다. 오히려 리스트를 남발하는 것은 헌정 질서를 더 흐리고 무시하는 행위이다. 과연 대안은 무엇인가? 헌정 권력의 본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이처럼 헌정권력은 다양한 차이 속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 내는, 다시 말해 그 누구도 특권적일 수 없는 평정한 네트워크를 전제한다. 여고생, 예비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와 아이, 아베크족, 장애인, 할아버지, 이주 노동자 등 이들의 모든 차이를 그대로 둔 채(레비나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두가 모두에게 여전히 비밀인 채로), 그들 사이에서 공통의 것을 이끌어 내는 그들 자신의 권력이 헌정 권력이다. 따라서 헌정 권력은 언제나 소통과 연대, 재미와 창의성, 웃음과 감동, 다음과 하나 됨이 어우러지는 대동의 현장을 연출한다.. 이 대동의 현장이 헌법적 현장이다. 이 헌법적 현장은 대표와 피대표의 이분법을 사라지게 한다. 표상정치가 전제하는 무대와 관객의 이분법은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다. 무대가 있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설무대일 뿐이며, 지금의 관객이 잠시 뒤면 배우가 될 수 있다. 모두가 배우이면서 동시에 관객이 될 수 있는 헌법적 현장의 생동감!
  헌정 권력은 주권이면서 인권이기도 한 매우 독특한 개념이다. 자유주의의 일방적 팽창과 민주주의의 작동 불량으로 찌그러진 근대적 헌정주의의 표상 정치를 보완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독특한 헌정 권력의 개념으로부터 주권과 인권의 논리를 보완하고 재구성해야 할 것이다.(P.157 ~ 158)  

  헌정은 오랜 세월동안 수없이 많은 철학자들의 논쟁과 인민들의 투쟁과 희생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수없이 많은 형태로 흐르고.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절대로 포기될 수 없었던 한가지는 소통과 관용을 통하여 자신을 계속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결점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끌어 안고 소통하면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헌정국가의 특징이자 장점인데 이 장점을 포기하고 헌법을 규범화하여 지키지 않으면 처벌한다고 윽박지르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헌정국가와는 많이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오히려 전체주의 혹은 국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지 않은가?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소통하고 공통의 것을 끌어 내지 않으면 그 사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균형이라는 중도를 버리고 양극단으로 치닫는 이 상황이,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상황이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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