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폴리테이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막스베버의 책이 나왔다고 해서 샀더니 쌩뚱맞게 절반이 최장집 교수의 강의이다. 책을 읽다가 포기해버리면 정작 막스베버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약간은 지루한 면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읽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왜 갑자기 베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라딘에서 관련된 글을 검색하던 중에 프레시안의 "좋은 정치인?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먼저 따지자"라는 페이퍼를 정독하게 되었다. 이 페이퍼에 최장집 교수의 강의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의도에 대하여 조목조목 비판되어 있으니 이것이 궁금한 사람은 그 페이퍼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최장집 교수의 의도를 꿰뚫을 지식도 학식도 부족한 내가 프레시안과 같은 의도의 글을 쓸 힘도, 이유도, 그리고 마음도 없다. 그래서 나는 최장집 교수가 막스베버의 입을 빌려 말하는 좋은 정치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좋은 정치인이란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치인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막스 베버의 생각을 잘 요약해 놓았기 때문에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 본질이 힘의 정치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정치의 핵심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통치/지배할 때, 통치자 내지 지도자가 어떻게 피치자 내지 대중으로부터 정당성을 획들할 수 있는가에 있다. 베버는 지배의 정당성을 위한 기초를 세 가지 이념형으로 구분한다.  

  첫째 전통이나 관습, 또는 선례에 기초를 둔 전통적 정당성, 둘째는 법의 절차적 원리를 중심으로 한 합리적 정당성, 셋째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자질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카리스마적 정당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의 두 가지 정당성이 하나는 전통 사회,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사회에서 지배적인 방식을 대표하는 데 비해, 카리스마적 정당성은 전통 사회나 근대사회 어디에나 속하는 유형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통치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가? ...... 베버는 민주주의를 카리스마적 지배 형태로 범주화한다. 물론 현실에서 정당성의 기반은 그것이 이념형적 유형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순수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혼합된 것이다. 다만 그것이 중심적이라는 말이다.(p 44~45)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들여왔다. 과거에는 천자와 신수설로, 근대에는 법과 절차의 합리성을 근거로 정당성을 획득하려 했다. 사회에서 객관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이 두가지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한 가지 뿐이다. 법과 절차의 합리성을 통해서만이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과거처럼 천자와 나랏님을 외쳐봐야 사람들은 코웃음칠 뿐이다. 노무현 개새끼, 쥐박이를 외치는 판에 나랏님 소리를 들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오직 헌법과 법 집행의 절차적 합리성을 통해서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카리스마적 정당성이라는 것은 마치 덤과 같은 것이지 베버가 주장하듯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카리스마적인 정당성이 집단 내에서야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도 있지만 외부로 확장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 버린다.(북한을 보라.)  때론 우리 나라의 경우처럼 내부적으로도 카리스마적인 정당성이라는 것은 동네 개이름만도 못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대단한 착각을 한다. 입만 열면 서민 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의 사고구조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머물고 있다. 공공연히 사용하지 않지만 그들의 머릿 속을 꽉 채운 것은 나랏님이다. 이러한 사고가 국가의 정책에 그대로 드러난다. 결정은 자기들이 하고, 국민들은 따르기만 하면 된다. 감히 토를 다는 일은 삼족을 멸해야 하는 반역 행위이다. 그러니 빨갱이로, 좌파로, 용공 세력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첨가하면 효과는 확실하다. 지난 총선 친박연대라는 아주 황당하면서 훌륭한 작명 실력을 보여주신 분이 있지 않은가? 한나라당도 아니면서 한나라당의 박근혜(좀더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겠지만) 의원과의 친분관계를 내세우면 표를 구걸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들을 찍어 준 사람들도 이해 안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느새 대선에서 정책이 사라져 버리고 사람 이름만, 그것도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죽은 사람들의 이름만 가득하다. 어느 정당인지, 그 사람의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그럴 듯한 이름만 등에 업으면 표를 얻는다. 어쩌면 베버는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아주 우아하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 이런 기현상이 벌어질까? 이유는 간단하다. 법을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법을 세우는 분들이라 그런지 법을 무시한다. 자기들은 국민들을 법이라는 쇠창살에 가두고 감시하는 교도관이요 자유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국회에서 화려한 액션씬이 난무하는 것이 아닌가? 오죽하면 국K-1이라는 별칭을 얻었겠는가? 그들의 이러한 발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판결문이 있다. "절차는 위법이지만 결과는 합헌이다." 법적인 정당성이 설 자리가 어디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정당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오로지 전통적 정당성과 카리스마적 정당성밖에 없다. 전자를 주로하고 거기에 후자를 가미하는 것이 제일 효과가 좋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좋은 정부, 좋은 정치인인가 고심해봐야할 문제이다. 

  둘째 좋은 정치인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베버는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한다. 정치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정치인도 공동체 구성원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자기 신념에 어긋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너무 타협을 해서는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 자기의 정치적인, 도덕적인 신념이 분명해야 한다. 상호 모순적인 이것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게 될 때 좋은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당이란 무엇인가? 비슷한 정치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모인 단체가 아닌가? 이것은 초등학교 학생이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의 기조라는 것이 신념 윤리에 속하는 것이라면,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협이나 행동, 혹은 정치가의 선택은 책임 윤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다시 한가지만 확인해 보자.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무엇인가?자유선진당은? 국민참여당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한나라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연합한다는 것이 가당키나한 일인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밖에 없다. 막말로 그 놈이 그 놈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떨어져도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민주당이 민주노동당과 연합전선을 펴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당의 기조를 생각한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야권대 연합이라는 것에 대하여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정권 획득을 위해서 고만고만한 똘마니들이 모여드는 것이고, 민주당이 양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신념까지 무시하고 모였다고 한나라당을 이기기나 하는가? 혹은 이기고 난 다음 정권을 획득하고, 금배지를 단 양반들이 한나라당과 다른 정책을 펼치기는 했던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에 급급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도 의원의 급료를 올린다거나 하는 문제에는 일치단결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신념도 없고, 책임도 없다. 설령 신념이 있다고 할지라도 권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것을 포기할 줄 아는 상당히 현실 타협적인 부류일 뿐이다. 이들을 좋은 정치인으로 볼 수 있을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요근래 그 어느 때보다 정치에 관한 관심들이 높아졌다. 성년의 날을 맞이하여 참정권을 소중히하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난생 처음 봤다. 지자체 선거에도 이 사람이 어느 당인가 유심히 살펴보는 일도 많아졌다. 젊은 층들의 투표율과 의지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신념도 책임도 없는 정치인, 법적인 합리성은 무시하고 결과만 자기들 입맛에 맞다면 만사OK라는 정치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진다. 특히 대선은 빅이슈이다. 지금부터 누가 대권후보로 나올 것인지는 모두의 관심사이다.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이 빅3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오세훈, 김문수, 정동영은 탈당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면 대선 후보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민노당에서는 아마도 권영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영길 외에는 사람이 없다. 대선후보감이 없어서보다는 안 키워서이다. 진보신당은 노회찬일 것 같고, 그 외에 군소정당이 난립할 것이다. 가만히 이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도대체 찍을 사람이 없다. 베버의 말대로 소명감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한번 더 깊어지는 대선과 총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투표 용지에 기권란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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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1-05-26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폭력의 세기>에 대한 짧은 댓글을 달러 왔다가...글 잘 읽고 가네요.^^ <폭력의 세기>는 1부가 좀 난삽하지만, 2~3부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전반적으로 평을 하자면 아렌트 번역물로는 그리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더군요. (실은 다른 번역본도 그리 낫지는 않습니다.--;) 글을 명료하게 쓰지 않는 버릇을 가진 독일어권 저자라는 한계 때문인지, 아렌트의 영문 저서도 그리 유려한 글은 아닌 것처럼 보이더군요. 줄입니다.^^

saint236 2011-05-27 11:34   좋아요 0 | URL
헉...그런가요? 난삽한 문장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 그리 콤마가 많은지...가끔은 친절한 의역씨가 그리워질 때도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