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
엘렌 호지슨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 / 이른아침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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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년 3월 27일, 카페 소모임 선정 책 감상문입니다.  

 

 

경기 동부 는 내가 2년 정도 살았던 곳이다. 그 때가 마침, 2002년 대선을 즈음했던 때라 경기 동부는 나와도 관련이 있다. 노사모 경기 동부 회원이었고, 2002년 12월 19일 그 밤, 덕평 수련원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을 보았던 것이다. 그 열광의 밤에 노무현 대통령이 했던 말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제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입니까?” 우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감시! 감시!”를 외쳤다. “저를 흔들 사람은 많습니다...” 그때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 새 시대의 첫 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순진하기만 했던 우리 지지자들은 이제 권력은 온전히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우리는 그 권력을 감시하기만 하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 믿었다. 권력은 이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그 때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예감했거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를 흔든 손이 그들뿐 이기야 했을까 만은.

  「달러」를 읽으며, 나는 맨 먼저 두 가지가 떠올랐다. 권력은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요즘 떠도는 ‘경기 동부’(물론 나의 경기동부와는 다른 경기동부이다;;) 괴물 설.

  작년에 「화폐 전쟁」을 읽었다. 놀라웠지만 사실 음모론의 냄새가 났다. 세계제국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 악마 같은 유대인 금융황제 ‘로스차일드’ ..... 진짜 미국의 적지 않은 대통령들이 그들에 대항하다 암살을 당한 것일까?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소설로 치부하기엔 세상 돌아가는 일이 하 수상하고. 어쨌든 음모론은 세상이 수상하거나 미쳐 날뛰는데도 똑 부러진 설명도 해결도 없을 때 안개처럼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음모론이 꼭 사실이 아니란 법이 있는 걸까?, 음모론의 형태 말고는 달리 그 엄청난 비밀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세상이 꽉 막혀있고 사람들이 그들의 약에 취해 있다면?

  몸통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진중권의 말이 맞는지, 이미 10년 전에 해체되었다는 NL측의 주장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 논쟁이 불거진 계기가 너무 찌질해서 한숨이 나온다. 성추행을 했으면 후보 사퇴시키는 것은 당연하고, 선거부정 했으면 그것도 후보사퇴 이외는 방법이 없다. 보수가 하면 성추행이고 진보가 하면 사소한 실수니 덮어야 한다면 강용석은 억울해서 분신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정희 보좌관의 선거법 위반은 최구식 비서관의 디도스 공격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데모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걸린 것이 아니다. 선거하겠다고 해놓고 그 선거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속이 터지는 건 진짜 지켜보는 국민들이다. 도대체 뭐 봐줄만한 일이라야 봐주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두 말 없이 정리해도 모자랄 판에 버팅기기까지 하니 결국 경기 동부니 괴물이니 소문이 떠돌지 않을 수가 없다. 엄하게 불붙는 경기 동부 논쟁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경기 동부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따위 논쟁거리도 안 되는 웃기는 일에다 그런 논쟁씩이나 한다는 것이 어이없을 따름이다. 민노당 주사파는 음모라고 핏대만 올릴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음모론을 불 지피게 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걸 할 의사가 없다면 나는 오히려 음모론을 믿어야 할 것 같다.

  이야기가 진짜 엄한 데로 샜다. 「달러」는 그럼 음모론이란 말인가? 「달러」의 내용은 「화폐 전쟁」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달러」는 음모론의 냄새가 좀 덜하고, 궁극적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민간 은행이 아니라 국가가 자국의 통화를 발행하고 유통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폐 전쟁」내용이 조금 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여하튼 「화폐 전쟁」은 읽으면서도 이걸 다 믿을 수 있을까 싶었다.

 

 

「달러」의 전체 내용은 미국의 통화발행권이 국가가 아니라 연방준비은행(FRB)이라는 민간 은행에 넘어가게 된 피의 역사와 그 결과 전 세계의 경제가 몇몇 민간 금융업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된 현실을 갖가지 자료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다. 사실 전체 내용은 아닌데, 왜냐하면 삼일을 틈틈이 부지런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체 700쪽 중 400쪽 정도 밖에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모임이 코앞이고, 이번 모임의 토론 분량이 1부까지이기 때문에 일단 전체 독서 감상문은 되지 못하지만, 생각나는 것들을 조금 적어 보기로 했다.

  책을 중간에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것이다. 권력이 자본의 손에 넘어간 것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도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 거슬러 올라가면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했을 때 이미 넘어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본의 손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이제 이 세계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삼성의 권력은 그저 로스차일드라는 거대 금융왕국이 흘린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은 수백 년 전에 이미 자본의 손에 넘어갔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화폐란 무엇인가?” 혹은 “화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박하게 말해, “돈은 뭘까?” 이다. 우리는 돈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놈의 돈을 빼고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법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 산다. 그러니 돈은 늘 우리 머리에, 우리 가슴에, 우리 뼈에 사무쳐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달러」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이 뭔지 진짜 몰랐구나, 혹은 돈이 무기란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 진짜 몰랐구나.

  생각해보면 돈이란 단순하다. 거래를 위한 매개 도구일 뿐이다. 내가 파는 것도 물건이고, 내가 사는 것도 물건이다. 필요한 것은 물건이지 돈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 된 세상에 살고 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강사가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돈을 몽땅 꺼내 쌓아놓고, 1년 동안 우주여행을 갔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고 하자. 무엇이 만들어져 있을까? 빌딩이? TV가? 돈 자체로는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무엇인가 만드는 것은 인간의 노동이다. 그런데도 이 이상한 세계는 돈이 돈을 만든다. 이런 마술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거기에 대한 하나의 답은 마르크스가 들려준다. 마르크스가 설명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상품은 화폐다.

  “상품은 얼핏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하여 보면 실제로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에 차 있는 기묘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상품이 사용가치인 한에 있어서는, 그 속성들에 의하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관점에서 보든지 인간노동의 생산물로서 비로소 이러한 속성을 획득한다는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상품에는 신비한 요소가 없다. 인간이 자기 활동에 의하여 자연요소의 형태를 인간에게 유용하게 변경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이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상품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다만 상품형태가 인간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들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 노동물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하는데 있다.”

  상품이란 자기가 사용하려고 만든 물건은 아니다. 상품의 목적은 교환이다. 상품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라는 것이다. 어떤 물건이 사용을 목적으로 해서 만들어질 때, 그 물건에는 어떤 신비함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교환을 목적으로, 상품으로서 만들어질 때, 그것이 상품이라는 형식을 취하게 될 때, 그것은 수수께끼와 같은 신비함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돈이 그저 물물 교환을 위한 매개의 수단일 뿐일 때, 돈은 그저 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돈이 그 자체로 상품이 될 때, 돈은 한 순간에 한 국가를 파산으로 몰아넣는 무시무시한 마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달러」가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마법을 획득한 달러가 어떻게 라틴아메리카를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집어삼키고, 아시아의 용들을 쓰러뜨리고, 그리고  미국을 휩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은 그림자 정부, 금융 왕국, 민간 국제 은행 연합이라는 주장이다. 나는 이 막후의 거대한 지배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마르크스라면 달러의 이 가공할 파괴력과 그 실상은 인정하겠지만, 배후 조종설 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할 것 같다.(잘은 모르지만;;)

  돈 자체가 최고의 상품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별반 이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이 시대를 ‘금융자본주의’ 라고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간단한 공식이 있다. C-M-C ; 이건 교환의 매개로서의 화폐다. 자본주의 이전의 거래 형태. 물건을 교환하기 위해서 돈이 가운데에서 거래의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로 넘어오면 M-C-M′ ; 목적은 돈이다. 가운데 있는 상품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중간 생산물일 뿐이다. 그런데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사실 상품마저 필요가 없어진다. 바로 M-M′ 주식시장. 금융시장.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가능하다. 돈 쌓아놓고 우주여행하고 돌아오면 잘해야 그 돈이 그 돈이고, 비바람에 날려 가면 종이 쪼가리 한 장 남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주식부자 박경철이 가능할까? 그건 누군가의 돈이다. 주식시장은 국가가 거대한 하우스인 도박판이다. 돈이 돈을 불린 것이 아니라, 개미들의 피 눈물 나는 돈이 거대 투기꾼들이나 누군가 억세게 운 좋고 약삭빠른 사람들의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 문화강좌에서 들은 내용이고, 「달러」가 다루는 것은 화폐의 다른 측면이다.

 

  이제 별반 새로운 사실도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놀라운 것은, 미국의 달러는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방준비은행(FRB)이라는 곳에서 발행하는데, 이 은행은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든 결과적으로 민간 은행이다. 미국의 통화 정책은 실질적으로 국가가 아니라 민간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정부가 돈이 필요하면, 이 FRB에게 돈을 빌리고, 빌렸다는 증서를 발행해 주는데, 이것이 보통 말하는 국채라고 한다. 그런데 정부가 돈을 찍어낸 것이 아니라, 돈을 빌렸으니 당연히 정부는 FRB에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물론 세금으로. 우리는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은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미국도 그렇게 꽁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꽁으로 먹는 작자들이 있다, FRB.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버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않은가? 어떻게 미국 정부는 두 눈 뻔히 뜨고, 돈을 찍어내는 일을 민간에게 빼앗겼는지, 게다가 달러 한 장 찍어낼 때마다 국민 세금을 꼬박꼬박 FRB에게 뜯기고 있는지. 「달러」는 그 역사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인 혈통의 ‘로스차일드’ 금융 왕족이 있고, 그들의 미국 대리인으로 의심받는 J.P.모건, 록펠러 등등이 있고, 그들이 암살한 링컨, 케네디 등등 비운의 미국 대통령과 재무 담당자들이 있고, 금본위제가 있고, 브레턴우즈 협정이 있고, 그린백이라는 것이 있고 등등..... 재미있다. 그런데 화폐발행권이 민간에 있는 나라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많다고 한다. 영국을 비롯해서. (나중에 영국은  법적으로 국가가 이 권리를 가지긴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화폐발행권은 국가에 있는 걸까? 나는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아마 그것이 한국은행 민영화와 관계가 있는 듯하다. 화폐발행권은 단순히 발행권만이 아니라 화폐 유통에 관한 모든 정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이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와 같은 문제는 수시로 한국은행과 정부가 갈등을 빚는 부문이기도 하다. 물론 언론에서는 이것을 한국은행 민영화가 아니라 한국은행의 독립이라고 표현하는데, 독립이라는 말은 사실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곧 시장에 그러니까 자본에 맡기라는 소리다. 「달러」의 저자는 이 독립, 이 민영화가 바로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장하준 교수가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번에 읽은 「아담의 오류」 저자는 경제학이 “사실이 아니라 신념과 믿음, 따라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다.” 라고 했다. 신학이든 과학이든 간에, 경제학은 워낙 복잡하고 미세하고 추상적이어서 나는 사실 이해하기가 어렵다. 「달러」에 나오는 경제 이론이 옳은 것인지, 어떤 입장에서 보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돈이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가져야 하는지, 돈이 어떻게 변용되면 재앙이 되는 것인지에 관한 것만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이 저자가 주장하듯 화폐 발행과 유통에 관한 권한을 국가가 갖게 되면 해결될 문제인지,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해결되기 힘든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파생상품, 공매도 등 반 토막 났던 내 펀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그런 것들이 있다는 광고만 하고, 끝내려고 한다.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법학자란 점에서 학계에서 이 주장들이 얼마나 인정되고 있는지 살짝 의문이 가기는 하지만, 수상한 세계의 불길한 움직임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이 세인들의 이해 범위 안에서 돌아가는 때가 온다면, 어떤 것이 음모론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쉽게 가려질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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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오류 - 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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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년 3월 11일, 카페 소모임 책 감상문입니다.

 

 

나의 오류는 무척 상식적이었다. ‘아담’ 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덴동산의 그 벌거벗은 아담을 떠올리지, 단번에 아담 스미스를 떠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약간 화가 났던 것 같다. 원죄만으로도 억울한데, 아담의 오류라니? ‘오류’란 꼼짝없이 아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인데, 사과 한 입 베어 먹은 죄 같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도 수 천 년 동안 닦달을 당하고 있는 판에, 털어 먼지 하나라도 나오는 날에는 또 무슨 죄를 얼마나 오랫동안 업보로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살짝 호기심이 당기긴 했다. 아담의 오류란 건 도대체 뭘까? 인류의 뭔가 치명적 오류가 드러났다는 것은, 원죄 운운하는 그 분만 아니면, 어쩌면 전화위복임이 분명할지도 모른다. 드디어 인류 보완 프로젝트가 가동될 수 있는 걸까? 유토피아가 더 이상 불가능의 땅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인가? 

  물론 한 입 베어 먹은 푸른 사과 안에 뉴튼인지 스미스인지의 사진이 박혀있는 책, 「아담의 오류」를 넘겨보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펼칠 상상력 따위는 없었겠지만, 여하튼 300페이지 정도 되는 「아담의 오류」에는 에덴이나 이브는 없었다. 그 대신 아담 스미스를 필두로 맬서스, 리카도, 마르크스, 파레토, 베블런, 케인즈, 하이에크, 슘페터 따위의, 들어본 듯은 한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름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아담의 후예들이여! 세계의 99%를 고통에 빠뜨린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바로 아담의 원죄를 청산하지 못한 이 후예들의 작품이 아니던가! 물론 숨차게 나열한 저들 모두 가 아담의 후예라는 건 아니고, 아담의 반-후예들도 있다, 물론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우연이겠지만, 이번 달 우리 지역 도서관의 ‘목요 인문학’ 강좌는「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다.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좋든 싫든 마르크스란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없고, 또 「자본론」의 명성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론이 어떤 책인데, 덥석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웬만한 사람들도 자본론 1장 상품편인가 뭔가에서 다 꼬꾸라진다고들 하니까. 그런데도 다들 윗집 강아지 부르듯 맑스, 맑스하니까 , 나도 아~ 마~악스! 하게 된다,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 마르크스 연구의 일인자인(그렇게 들은 것 같다..) 김수행 교수가 하는 그런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강의는 아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는 사실 우리 카페가 목표로 내세운 ‘일반인 저자’ 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공대 나와서 IT 업계에서 월급쟁이 5년을 하다가, 「자본론」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이 길로 나섰다는 것인데, 그 충격은 네오가 빨간약을 먹었을 때의 그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은 인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종 강연과 글쓰기를 한다고 하는데,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차베스, 미국과 맞장뜨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공저), 「청춘에게 딴 짓을 권한다」, 「글쓰기 클리닉」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는 소모임의 「아담의 오류」대신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3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에 하는 강좌여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공짜이기도 하고 ㅎ.

  첫 강의의 소감은 따뜻한 숭늉을 마신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강렬하지는 않지만 뭔가 은은한 맛이 있는...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조심하는 그런 까탈스럽고 예민한 학자도 아니고, 머리에 든 것을 쏟아내기에 숨 가쁜 그런 폭압적 스타일도 아니고, 간결하고 쉽고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그런 느낌이어서 나는 좋았다. 경제학에 얼마나 해박한 지식이 있는지, 「자본론」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제학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큰 틀에서 오류가 없다면, 너무 단순화했다고 해서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나는 「아담의 오류」가 다루고 있는 대결하는 두 그룹 중 한 쪽 편의 이론을 도서관 강좌를 통해 배우는 셈이다. (이걸로 모임 불참에 대한 변명을 ;;)

 

 

 「아담의 오류」로 돌아와서... 발제를 하거나 독후감이라도 쓰고 싶지만, 史라는 것의 특성상 참 난감하다. (나는 모임에 빠지는 대신 on을 통해 발제하고 함께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 던컨 폴리가 해 놓은 작업이 사실 하나의 발제라고 할 수 있다. 1776년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래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제학계를 주름잡았던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주장과 주의를 요약해서 내 놓은 책이 바로 「아담의 오류」일 텐데 뭘 또 발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경제학에 무슨 조예가 있어, 나는 고전파 이론이 맞다고 생각해 또는 그래도 마르크스의 분석이 더 타당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좀 남겨 두고 싶기는 하다. 적어도 제목 「아담의 오류」라는 것이 뭘 말하는지 정도라도. (그런데 쓰다보니 예상외로 긴 글이 되었다;;)

 

 

 

  사실 ‘아담 스미스의 오류’가 무엇인지는 책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특히 p10~12에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저자는 경제학이 수학이나 물리처럼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철학 혹은 신학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아담의 오류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그의 시장 방임주의적 주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경제적 삶의 공간과 윤리나 세계관에 의해 작동하는 그 밖의 나머지 사회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사고 자체에 있다고 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경제학이, 가장 흥미롭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보면,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인 과학이 아니라 사변적인 철학 담론이라고 생각하며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책에 “경제 신학에 관한 안내서”라는 부제를 붙였다. 나는 이와 관련된 논거들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관점으로 “아담 스미스의 오류”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아담 스미스의 저작이 지닌 가장 중요한 측면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경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의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 신념과 믿음, 따라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다.』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빌 클린턴이 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지만 이 슬로건으로 빌 클린턴이 대선이라는 정치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또한 역으로 경제란 사실 정치 철학 혹은 정치적 믿음과도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란 말과 그것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의 법칙이란 주장을 했지만 (사실 요즘 좌파들은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의 영역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발전의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더 타당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인 본문 내용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p 27~8) 아담 스미스나 그 이후 아담의 후예들이 전제로 삼는 법칙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주장이다.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고? 아담 스미스 시대에 분업과 노동 생산성의 증가로 당연히 실업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세의 법칙”에 의거해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실업자는 사실상 ‘자발적 실업자’라는 것인데, 상황이 변했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돈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에 있다는, 요즘도 자주 듣는 그런 주장의 오래된 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업이라는 이 심각한 문제가 전 세계의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도대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여전히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금과옥조인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언제쯤 이 세계적 실업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유럽에서의 청년 실업 문제는 벌써 수 십년 이래 악화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쨌건 아담 스미스하면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잠깐이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스미스는 타인들에게는 해로울 수도 있는 냉혹한 이기심의 추구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도덕적 선으로 변형된다는 독창적인 주장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철학적 ·도덕적으로 옹호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이 주장이 타당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의 역사가 얼마나 간단하겠는가! 스미스는 자신의 자본주의적 기획에 대한 찬양에 걸맞은 논리적 기반을 엄밀하게 구축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일반적 선의와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고기집 주인이나 제빵사의 선한 의지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유명한 이야기는 스미스의 주장의 좋은 사례다. 이런 주장의 명백성과 현실성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가 작동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기심의 추구가 긍정적인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적대적인 시장 관계가 분업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의 저녁 식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관계가 수반하는 분배적 불평등과 도덕적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스미스는 상품 가치에 대한 지대의 의존성과 구성 가치론을 조화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주장을 제기하는 데에 실패했다. 』p 64~5

  나는 가끔 중국의 경제체제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공부를 하면 그래도 좀 알게 되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면 뭔가 싶기도 하다가, 국가 자본주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잘 모르겠지만, 궁금하기는 한데, 또 알아보려고 선뜻 공부하게 되지는 않는다. 누가 좀 알기 쉽게 말해주면 좋겠다. 분업과 생산력의 향상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도 옹호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국가의 계획이나 혹은 윤리적 태도를 지닌 공동체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발전 가능한 것인지, 그에 관한 하나의 답을 중국에서 찾을 수 있을 런지가 궁금하다. 물론 북유럽의 사민주의나 심지어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역사적인 사례가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여하튼 중국이 참 궁금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맬서스다. 맬서스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정도의 기억만 있는데, 이 주장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것인지는 정말 몰랐다. 구빈법에 대한 멜서스의 비판은 이렇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이런 비인간적인 주장이 통하는 것은 200여 년 전이기 때문이지 하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미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연방복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고 한다.(p79) 맬서스의 입장에서는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인간 개개인에 대한 연민은 없지만 인류 전체에 대해서만은 성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꼬아 보다가도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눈을 돌리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요즘 맬서스에 동의 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고령화 사회니, 저 출산이니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출산 장려 운동을 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청년 빈곤 문제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의 등장은 이 시대의 비극이지만, 관점에 따라 적극적 의미로 전환될 수도 있다.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3포’를 넘어 ‘삶포’가 되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이 빈부격차의 시대에, 기껏해야 실업자로 노동예비군으로 상품 소비자로서의 권리만이 허락되는 이 사회에, 무엇하러 또 똑 같은 운명의 노예를 길러내어 바친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출산을 거부하고 더 이상 아무런 노동자도 소비자도 재생산해 내지 않을 때,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갈지 나는 참으로 궁금하다. 노예 없이 주인들만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도 궁금하고, 자본가들이 전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어 내는 그 훌륭한 상품들을 구매해 줄 소비자가 없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전 세계의 99%가 일제히 출산을 포기할 때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상상은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절멸이다. ‘바틀비적 태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푸른바다님이 쪽글 과제로 내주신 진중권의 <아이콘>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바틀비다.

 (몇 년 전에 읽은 <시차적 관점>의 인상을 기억하면서 아래 내용을 썼으나, 막쪽글을 위해 다시 <시차적 관점>의 몇몇 부분들을 읽으면서, 내가 여전히 바틀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진중권의 글은 무언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진중권의 표현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아래부분의 글은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읽을 분들은 모두 읽은 이후 이므로 삭제하지 않고, 내 사고의 오류의 흔적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글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지젝의 바틀비가 무엇인지 참으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의 문장들은 사실 단순히  <시차적 관점> 뿐만 아니라 지젝의 다른 책들에 대한 기억이 얽혀서 나온 것들이어서, 내 나름대로 종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불완전한 기억과 독서 당시의 표면적 인상에 의지했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그리 믿을만한 것은 될 수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나중에라도 다시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를 부탁드린다. : 3.15에 덧붙임)

바틀비적 태도란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의 태도다. 비폭력 저항과 유사한 것도 같은데, 사실 그것 보다 더 수동적인 형태로 보인다. 진중권이 자신의 글에도 소개했듯,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 갑자기 ‘ I prefer not to~’라고 말하며, 일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사무실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거기서 먹고 자면서 그냥 버틴다. 참다못한 변호사가 사무실을 옮기고 난 후, 바뀐 주인에 의해 바틀비는 사무실을 쫓겨나 방랑하게 된다. 방랑죄로 감옥에 들어간 바틀비는 감옥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음식을 거부하고 끝내 굶어 죽는다. 진중권은 삶의 포기라는 이 소극적 저항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꼬는데,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 바틀비적 태도를 대단히 강력한 저항의 형태, 심지어는 이 시대의 유일한 저항의 형태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나도 사실은 바틀비가 뭐 그렇게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런 주장이나 설득도 없이 혼자서 하는 저런 저항이, 자기 자신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전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바틀비의 ‘ I prefer not to~’란 적어도 진중권이 희화화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 혹은 ‘참여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중권의 글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그 자신의 몰이해를 드러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진중권 자신이 들뢰즈, 아감벤, 네그리, 지젝이 ‘바틀비’를 이론화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결론에 가서는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참여의 거부’로서 바틀비적 태도를 왜곡해 버린다.

  바틀비적 태도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기를 소멸시키면서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주춧돌 하나를 조용히 빼냈을 때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빼기의 형태가 바틀비적 태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촛불 시위대의 진압 경찰이라면 ‘나는 진압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사교육 현장의 선생이라면 ‘나는 가르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그리고 ‘나는 대기업에 취업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결혼을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과 그리고 후세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나는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따위의 자기 합리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세계의 모든 청년 실업자들이 동시에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란 태도를 견지한다고 상상해 보자. 2~30년 후에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불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3포 세대의 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선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부정어, not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 I would not prefer to~'를 ’I prefer not to~'로 전환시키는 것,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하기를 선호하지 않습니다.’에서 ‘나는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로. 극복할 수 없는 빈곤과 실업에 의해 수동적으로 떠맡게 된 ‘3포’, 그 비극적 부정성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긍정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불가능성, 부정성을 가능성으로, 부정의 부정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냥 ‘아무것도 안’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님’의 차이, 극소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일시에 세계는 정지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폭삭 무너질 수도 있다.

  하나의 멋진 상상, 혹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자기 절멸’은 인간 본성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하는 것일 테니, 윤리적이든 뭐 어떤 측면이든 하여튼, 뭔가 당당히 주장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장 마르크스 부분을 읽다보면, 뜻하지 않게 멜서스와 비슷한 생각을 만나게 된다. 물론 전혀 다른 목적에서긴 하지만, 방법적으로는 참 유사한 면이 있다.

  『 마르크스는 진정한 정치투쟁은 노동계급이 경제를 관리하는 책임감 있고, 신뢰할 만한 행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노동계급의 개혁 지향적인 정치와 싸우는 것 역시 진정한 정치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양면적 정치의 토대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러 조건들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던 이들에 대해, 자본주의의 점증하는 모순으로 말미암아 장기적으로는 부적절함이 입증될 개혁주의자들에 불과하다고 끊임없이 혹평했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운전석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노동계급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것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p173~4

  다시 진중권의 이매진으로 돌아가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바틀비에 관한 진중권의 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 있다.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가 바로 그것이다. 진중권은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와 함께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를 바틀비적 태도의 예시로 들면서 싸잡아 ‘참여 거부’ 행위로 폄훼한다. 그런데 사민주의에 대한 좌파적 반대가 단순히 정치 행위에 대한 참여 거부와 동일시 될 수 있을까? 아마, 당신이 좌파라면 펄펄 뛰고도 남을 모욕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에는 그런 오해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아닌 개혁에는 분명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은 아무 때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으라는 걸까? 사실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열광에는 좌파의 어떤 딜레마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개선시킬 그 어떤 행위도 혁명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능동적인 행위 보다는 바틀비적 수동성, 빼기의 행위만이 가장 혁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빼기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옴이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빼기를 의미할 것이다. 체계를 붕괴시키는 빼기, 이를테면 ‘나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모든 개미들이 일시에 주식에서 빠져 나온다면 주식으로 먹고 사는 부자들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 본 적이 거의 없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무작정 헤치고 들어가는 무모함도, 용감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쓸 때면 자주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잘 모르는 길이고 사방이 얽힌 길이라, 자칫하면 꼬꾸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뻗치는 대로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터무니없는 비약을 하기도 하고, 무슨 소린지 나도 의심스러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일관성도 없고, 마무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름 있는 필자도 아니고 논객도 아니니 책임도 없다는 똥배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심이 쪼금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독후감 삼아 써 본 글인데, 실타래를 풀려다 오히려 엉클어 놓은 것 같다. 오늘은 엉킨 실타래지만 언젠간 또 어떤 문제를 살살 풀어 낼 실마리가 되 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뒤죽박죽 써놓은 글이라도 일단 띄워 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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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2월 13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사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하이데거의 이름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주의자, 라캉주의 좌파, 레닌주의자 쯤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그의 철학적 연구는 하이데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3장은 사실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하이데거가 생소했다. 그 책에는 하이데거에 관한 ABC는 없다. 그 장의 제목은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일까?”인데, 하이데거의 정치적 참여와 그 한계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보다 더 오래 전에 읽었던 <까다로운 주체> 1장 역시 온전히 하이데거론이라 할 수 있는데, 제목은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말하자면 초급 수준이 아니라 고급 중에서도 특 고급 수준이라, 사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어려운 내용을 간신이나마 읽어보기 위해 내가 개발한 꼼수는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반복해서 나오는 이 용어들의 의미는 물론 몰랐다. 어쨌거나 ‘존재적’이 나오면 부정적, ‘존재론적’이 나오면 긍정적이라고 딱 구분을 해 놓고 읽었다. 우리 편 저쪽 편을 갈라놓은 것인데, 왜냐하면 워낙 문장이 복잡해서 저자가 옹호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도 잘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턱도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접했던 하이데거였다. 그래서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하이데거를 읽었을 때, 진짜 모두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하다못해 헤겔하면 변증법, 칸트하면 정언명령, 키르케고르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 정도는 들어 보았는데, 하이데거는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란 용어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하이데거 발제를 하면서 지젝이 떠올랐고, 다시 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여전히 ‘존재적’과 ‘존재론적’ 은 설명하기 힘들뿐이고!!이고, 더욱이 지젝이 옹호하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이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비판하는 하이데거의 오류에 관해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왕 다시 읽은 김에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몇 가지 추려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아래 인용문들이 이 책들의 주요 내용은 절대 아니다.

 

 

  하이데거와 아렌트를 둘러 싼 스캔들은 단순히 유부남 스승과 여 제자 사이의 불행한 연애 사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비본연적’인 것으로 거부했다. 반면 아렌트는 역설적이게도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1.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4~ 185>

  하이데거와 아렌트 사이의 난해한 관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집요한 비난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인격들 간의 특이한 결합관계가 아닌 것으로, ‘비본연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아렌트는 여성 대 남성의 대립 축과 ‘세계적’ 유대인 대 ‘지방적’ 독일인이라는 이중적 대립 축에서 하이데거와 대립될 뿐 아니라,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한데)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로서, 하이데거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적 세계에 재결합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다. 물론 세밀한 독해를 통해서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통찰에 기본적으로 충실하면서도 자유주의를 지지할 수 있게 한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녀의 반-부르주아적 입장,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표현으로서, 정치를 ‘이해-집단’의 정치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경멸 말이다. 그녀는 부르주아 사회의 실용적 공리주의와 영웅주의의 결핍에 대한 불만의 측면에서 대가 보수주의자들과 입장을 공유한다.

 

2.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6~7>

  어떻게 아렌트는 부르주아 문화 속에서 그녀가 존중하는 것을 분리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의 구성주의, 근본적 인권의 확신, 법 이전의 평등성,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면제된 인간 삶의 사적 지대에 대한 고집, 종교적 관용 등을,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 즉 그것의 세속주의, 자기-이익의 보편성에 대한 냉소주의적 확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화폐 가치의 도착된 영향, 탈정치화하는 경향, 전통과 장소 감각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달리 말해서 이것들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 아닌가? 그래서 아렌트가 어떠한 공리주의적인 이해관계의 계산에도 오염되지 않을 정치적인 실천의 윤곽을 진정한 ‘세계의 돌봄’으로 주장했을 때 그녀가 환기할 수 있는 것들은 모든 시민들이 공회당에서 회합했던 초기 미국의 전통에서 독일 혁명에서의 혁명적 평의회까지 혁명적 상황에서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러한 사례를 환기할 때 그녀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유토피아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그녀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질서와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찌즘에 손가락을 데이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하이데거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고 한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정치 체계가 현대의 기술에 가장 적합하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아니라, 니체 강의에서도 ‘유럽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럽의 치명적인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 유명한 사상가들이 오랜 역사 동안 꾸준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의혹과 경고를 표명해 왔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놀라웠다. 민주주의는 결코 성역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권에 대한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과 모호함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란 그 텅 빈 형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현실화 될 때는 반드시 그 대립물에 의해 채워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 세미나에서 이영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이후 자본주의 국가를 통치하는 법체계의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날은 ‘자유’ 라는 개념으로 토의되었고, 나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속임수 혹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니 폐기해버려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 머리가 어지럽지만, 최근에 읽은 책들에는 다양한 관점이 드러나 있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 > <대중들의 공포>

 

  여하튼 하이데거는 나찌즘을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항할 새로운 정치 체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하이데거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에 관해서 여기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보여주는 그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적 결단이 세인들의 관습과 통념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어떻게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에 연결되는 것일까?

 

3. < 까다로운 주체 p32~4>

  이런 폭력적 부과 행위에 대한 하이데거의 명칭인 기획투사는, 주체가 내던져져 있으며 또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길을 읽은 상황을 ‘뜻이 통하게’ 해주는 근본적 환상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하이데거가 유한하고 우연적인 상황 속으로의 내던져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길을 본래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라는 기획투사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라는 그 연관성이 숙고되지 않은 두 층위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층위에서, ‘언제나 오로지 나만의 것’인 죽음과의 본래적 조우는 나로 하여금 나의 미래를 본래적 선택 행위 속에서 투사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공동체 역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야하는 우연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반복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별적 층위에서 사회적 층위로 이행한다. ‘존재해온 실존가능성 -현존재가 자신의 영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본래적인 반복은 실존론적으로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성에 근거하고 있다.’ ..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행위에서 본래적 존재 양태를 획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별적 현존재의 ‘내던져진 기획 투사’로부터 과거의 가능성의 반복으로서의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집단적 행위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역시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이라는 인간 공동체로의 이와 같은 이행은 현상론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근거지어지지 않았다. 집단적(사회적) 거기-있음의 매개는 온당하게 배치되지 않았다. 즉 하이데거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헤겔이 ‘객관적 정신’이라고 칭했던 그것, 상징적 대타자, 상징적 위임들의 ‘객관화된’ 영역 등등인데, 이는 아직 ‘비인칭적’ das Man이지만 또한 더 이상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의 전근대적 몰입도 아니다.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의 이런 위법적 단락은 하이데거의 ‘파시스트적 유혹’의 뿌리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존재와 시간>의 암묵적 정치화는 가장 강력하다. 일상적 관심사를 따르느라 분주한 근대적이고 익명적이고 분산된 ‘그들’의 사회와 자신의 운명을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 간의 대립은 광란적 거짓 활동의 퇴폐적 근대적 ‘미국화된’ 문명과 그것에 대한 보수적인 본래적 반응간의 대립과 공명하지 않는가?

 

  우선 기획투사라는 말이 어렵다. 이것은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자신이 내던져진 이 세계가 자신의 선택항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그에게 허용된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중에 제일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기획으로  떠맡는다는 것으로 보통 이해된다고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에 독특한 면이라고 하는데, 지젝은 여기서 조금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중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미래라는 것인데, 조금 뒤에 인용할 반복이라는 개념과 함께 설명될 수 있다.

  여하튼 실존적 결단, ‘앞질러 가보는’ 결단은 개인적인 행위로 설명되는데, 하이데거는 별 다른 매개 없이 이 개인적 결단을 집단적 선택으로 바꾸어 놓는다. 개인의 의지가 집단의 의지가 되려면 상식적으로도 선거라든가 여론이라든가 하는 위임의 절차가 필요하다. 이 위임 과정 없이, 개별적 결단이 곧바로 민족적 운명의 떠맡음으로 번역된 것이 어떻게 나찌즘에 대한 찬양과 곧바로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라는 것이 개인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4.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5~6>

  오직 반복만이 순수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유명한 분석에서 현존재의 시간성이 갖는 탈-존 구조를 미래로부터 과거를 통해 현재로 진행되는 순환운동으로 기술했다. 이것을 미래에서(나에게, 나의 기획에 개방된 가능성들에) 출발한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내가 던져진 역사적 상황의 결들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여) 거기로부터 나의 기투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미래 자체를 ‘존재해 온 것 having-been'으로 규정할 때, 혹은 보다 정확히 ‘존재해온 것으로 존재하는 is as having-been’ 어떤 것으로 규정할 때 그는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미래적 가능성이 이미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오직 과거로부터 상속된 구조로 현재화된 것만을 반복하고 실현할 수 있을 뿐인 닫힌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 자체의 ‘개방성’이라는 보다 급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자체는 단순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는 비현실화된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진정한 미래란 바로 이 과거의 반복/부활이다. 이 반복은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의 과거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현실 속에서 실현에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억눌려진 그런 요소들의 반복이다.

 

5.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3~4>

  키르케고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반복은 ‘역전된 기억’이자 앞으로 향한 운동이며 새로움의 창조이지 낡은 것의 재생산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반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조 어법이다. 그래서 반복은 단지 새로운 것의 출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한다. 이 역설의 핵심은 물론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Spirit)과 현실적인 것(Letter)의 차이로 지칭한 것이다. 칸트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경우를 들어 보자. 칸트를 반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칸트의 자구적 의미에 집중하다가 신-칸트주의의 정신 속에서 그의 체계를 정교화하고 바꾸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칸트가 자신의 체계를 현실화하면서 배반했던 창조적 충동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다. (즉 이미 ‘칸트 속에 있는 칸트 이상의 것’, 그 명시적 체계 이상의 것, 그 체계의 잉여적 중핵과 접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배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진정한 배반은 최고의 충실성 속에서 일어나는 윤리-이론적 행위이다. 즉 우리는 칸트적 사유의 ‘정신’에 충실하기(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칸트의 문자를 배반해야 한다. 칸트의 문자에 충실한 것은 진실로 그 사유의 핵심, 그 근저의 창조적 충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로부터 끄집어내야 하는 결론은 어떤 작가(그 사유의 현실적 문자)를 배신할 때 진정으로 그에게 충실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원의 진실은 거꾸로다. 어떤 작가를 반복함으로써, 그 사유의 핵심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진실로 그를 배반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작가를 반복하지 않고 단지 그를 비판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에둘러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지평과 개념 장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가 과거를 구원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참으로 아리송했다. 과거는 이미 실행되어 굳어져 버린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승자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과거의 패배로 묻혀 버린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발굴하여 새롭게 배치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 순서이다. 승자의 관점에 의해 과거를 재해석 한다는 것과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 매김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사실 반복이라는 개념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는 반복이 혹은 반복만이 미래를 창출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든 간에, 어쨌든 하이데거, 들뢰즈, 지젝으로 이어지는 ‘반복’의 개념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철학책을 읽으면 끊임없이 과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취향(?)에 따라 때로는 플라톤이 때로는 칸트가 또 때로는 스피노자, 니체, 헤겔이 되풀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지난 시대의 죽은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대는 이유가 아마 이것이 아닌가 한다. 위대한 사상가의 문자 letter가 아니라 그들이 문자화하지 못했던 그 정신spirit를 반복함으로써 그들을 뛰어 넘기 위해, 진정으로 그들을 배반하기 위해서. 단순히 그들의 문자를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그 문자들은 충분히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것이니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그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시작이야 어짜피 문자를 반복하는 것만도 어렵고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문자를 배반하며 그들의 정신을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소수의 사상가에게만 허용된 축복일지 모르지만, 꿈은 야무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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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2월 6일 카페 소모임 발제입니다.

 

 

도팽님 말씀처럼 <철학의 에스프레소>에 나오는 34명의 철학자 중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2,500년도 더 되는 철학의 역사에서 추리고 추려낸 34명을 두고, “모모씨는 듣보잡인걸요.” 운운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당찬 고백일 따름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름도 못 들어본 사람에 이름만 겨우 들어본 듯도 한 사람까지, 줄잡아도 10여명은 생판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이라고, <존재와 시간>이라는 대표작은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라고 하니, 당연히 넘겨 볼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여기 있음”인지 “현존재”인지 당체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발제라고 몇 자 끄적이려면 어린이 도서관이라도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다. 주니어 김영사에서 나온 만화 <존재와 시간>을 뽑아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도 찾아 놓았다. How to read 시리즈는 예전에 라캉편을 읽었는데,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이 시리즈는 영국 그란타 북스라는 곳에서 기획한, 세기의 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안내서이다. 저자들 역시 세계의 석학이라고 하는데, 세기의 사상가도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세계의 석학이라고 해봐야 당연히 처음 들어보지만,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믿는다.

  다행히도 두 책 모두 쉽게 읽혔다. 물론 그래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일반인을 혹은 어린이를 상대로 정교한 사상을 쉽게 전달하자니, 10,000 피스 퍼즐을 100피스 퍼즐로 그려 놓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해야 할까, 뭐 까다로운 개념들을 무 자르듯 숭덩숭덩 잘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그거라도 읽으면 대강 윤곽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ㅋ;;. 어쨌든 엿가락 늘이듯 구질구질 사연을 읊어대는 것은 ‘열(10)매’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니고, 알아서들 읽어주시길 바라는 맘에서 다.

 

 

 

 

  하이데거의 문장은 이런 식이다. <존재와 시간> p78 이란다.

  「현존재Dasein는 그의 존재에서 이해하면서 이 존재와 스스로 관계하는 존재자다. 이것으로써 실존의 형식적인 개념이 제시되었다. 현존재는 실존한다. 게다가 현존재는 그때마다 나 자신의 존재자다. 실존하는 현존재에게는 각자성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속해있다....」

  의 저자께서는 영어로 제대로 번역할 수 없는 하이데거의 이런 낯선 용어들과 문장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은 하이데거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걸 다시 한글로 번역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뭔가 싶어 먼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섣불리 그렇기 때문에 영어 독해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둥 하는 결론을 내리지는 마시기 바란다. 나는 결사반대다. 영어 안다고, 독어 안다고 이 책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유의 능력은 언어 능력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금상첨화기야 하겠지만 나는 비단 짜기도 힘이 부치는 사람이다. 헤일 수 없이 많을 영어학· 영문학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카이스트에서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바람에, 강의하는 선생님이나 듣는 학생 모두 정작 전공과목 자체는 뒷전이고 영어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인데, 영어만 하면 과학은 저절로 다 해결된다는 것인지, 정말로 상식 밖의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는 멀쩡히 수학천재 소리를 듣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서 제발 우리나라말로 강의를 해 주실 수 없냐고 탄원서를 뿌리기에 이르렀단다. 대학에서 하는 수학 강의는 하나도 알다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세종대왕께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홇배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못할노미 하니라’ 하셨는지 백번 공감이 된다. 멀쩡히 만들어 준 한글은 버리고 왜 남의 나라 말에 유아원 아기부터 머리 허옇게 쉰 아줌마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내 오랜 지인은 이 영어 광풍으로 일찌감치 대학 교수에의 꿈을 포기했다. 동양철학 전공인 지인이 대학에서 공자를 가르치려면 먼저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수 자격을 위한 일종의 스펙일 뿐 아니라, 공자를 영어로 강의해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짓만은 죽어도 하기 싫단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 온 공자, 논어를 두고 confucius, the Analects of Confucius 따위를 찾아 외워야 하는 학생들은 도대체 學而時習之의 뜻이나 제대로 새길 틈이 있을까 싶다. ...... 다혈질은 아닌데, 갑자기 열이 ;; 여하튼 계속....

 

  하이데거는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저 두 권의 해설서를 통한 하이데거는 어이없게도 대단히 쉬웠다는 것이다. 칸트처럼 물자체가 있느니 없느니, 범주가 어쩌고저쩌고 뜬 구름 잡는 소리도 하지 않고, 헤겔처럼 절대정신이니, 정신은 뼈니 하는, 카이로스님 표현대로라면 정신 나간 그런 정신 어지러운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내 삶을 대입해 보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다. 철학이 이렇게 단순해도 돼?, 하는 의문이 살짝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그것이 다시 역전되어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인 개념으로 바뀌기는 하는데 일단 <시간과 존재>의 전기 하이데거는 비교적 명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있음’의 철학자다. Sein이라는 독어는 영어로는 being, 우리말로는 존재라고 보통 번역되는데, <철학의 에스프레소>의 역자는 ‘존재’ 대신 ‘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p39~40에 걸친 *주에 상세히 나온다. 핵심만 말하자면 Sein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영원히 그대로 있음’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해도, 옛날부터 들어온 존재라는 말이 더 편하다. 있음은 왠지 어정쩡해서 귀에 착착 감기지가 않는다. 존재론을 있음론이라고 하면 영 이상하잖아 -.-;;

  어쨌든 하이데거에 대해 말해보려면 일단 이 존재 또는 현존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현존재 Dasein’은 ‘Da, 거기에’와 ‘Sein, 존재’가 결합된 것으로 ‘거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거기는 어디? 거기는 ‘세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럼 사람이 세계 안에 있지 밖에 있을까, 물론 하이데거의 의미는 조금 더 심오하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철학자 34명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도 하고 또 ‘공동 존재’이기도 하다.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다른 현존재와 공동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로 보는 이유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인간 정신(사유 res cogitans)과 사물(연장 res extensa)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비난하면서 사물들 역시 ‘존재자’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존재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인간 고유의 존재 방식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 혹은 ‘실존주의’라고 하면 내게는 제일 먼저 까뮈나 사르트르가 떠오르지만, 실존주의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뿐 아니라 그 이전의 파스칼, 하이데거, 니체를 통해 이어져 오는 전통이라고 한다.

  나는 대학 2학년 때에 어쩌다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책의 시작은 이렇다. "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철학이 있었다. 밤늦도록 실험실에 갇혀서 쥐나 토끼와 씨름을 할 때도, 도서관에 처박혀 알쏭달쏭한 공식들에 넌더리를 낼 때도 시지프스가 굴려 올리는 바위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까뮈의 책들을 샅샅이 찾아 읽고, ‘부조리’, ‘자유’ 같은 말들에 취했다. 그리고는 물론 오랫동안 잊어 버렸다. 그래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실존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기도하고 슬프기도 하다. 정작 실존주의가 뭔지 그런 것은 하나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그렇다.

 

  어쨌든 이 기회에 실존이 무엇인지 조금 들어보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이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내-존재 혹은 공동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예를 들어 밀림에 야생으로 살던 늑대 인간이 문명 세계로 들어오면 그는 이 세계 내의 존재일까? 하이데거식으로 하면 늑대 인간은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문명 세계의 어떤 존재자와도 적절히 관계 맺지 못하고, 현존재들과도 공동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늑대 인간의 세계는 밀림이다. 거꾸로 문명인이 밀림으로 들어가면 그는 그 세계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단순히 말해 세계란 지구 내의 국가들의 총합이나 대륙이나 바다와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을 인위적인 고립 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가지며, 그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세계-안에-있음’과 ‘다른 것들과 함께 있음’을 말한다. 이런 개념에서 보면 인간은,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닫힌 채로 남아 있는 세계가 그를 통해 열리고, 세계가 인간에 의해 관찰되고 인식되고 감각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존재보다 뛰어나다. ‘있는것(존재자) 전체 속으로의 침입’을 통해 이 전체가 ‘열리게’ 된다. 」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0~1

  그런데 세계는 인간의 마음대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짓듯이 그렇게 세계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과 공동 존재들에 의해 인간은 존재 방식을 제한받게 된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우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살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 투표권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국회의원을 뽑을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품지 않는다. 최악이 아닌 차악 정도만 얻어도 성공이라고 할 판이다. 다른 예로는 제자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권유한 스승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여건상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실상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할 자유 혹은 굶어 죽을 자유는 일세기 전의 낡은 구호만은 아니다. 나도 그 분의 마음을, 그리고 그 분에게 격하게 공감하는 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내-존재는 우리가 늘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우리는 ‘거기에’를, 즉 의미 있게 구조화된 상황을 갖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행동하고 실존하게 마련이다. 현존재의 한 가지 존재 구성 틀은 세계가 언제나 우리로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특정한 방식으로 짜여 있거나 기분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구성 틀은 우리 자신이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과 관련해서 기분에 젖어 있고 또 그 사물들이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우리를 습격한다는 사실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69

  사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기는 힘들다. 밥도 먹어야 하고, 스마트 폰도 사야하고, 그럴듯한 명함도 있어야 하고, 자동차도 집도 필요하다. 남들보다 낫지는 못해도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사람들, ‘세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서점에는 자기 계발서라는 책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살아라, 죽기 전에 이건 꼭 해봐라, 마흔이 되면 이 책은 꼭 읽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아침에 푹 자는 것이 낫다 기타 등등에 목을 매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위해 기를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

 「 우리가 접하거나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언제나 타인들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결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세계에서 실존하는 방식은 늘 본디부터 타인들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다.”라는 말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은 언제나, 적어도 처음부터 타인들이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해진 이해와 해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98~9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존재 방식이 딱 이것이다. 소위 엄친아들의 방식.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 방식을 ‘비본래적’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래적인 존재방식은 무엇일까? 현존재는 세계 안에,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존재에게 세계가 단 한 가지 가능성으로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묘사한다. 나는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을 내가 솔직하게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문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앞에 인용된 문장에서 적고 있듯이 현존재의 근본 특징은 ‘각자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것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는 나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사람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 그러한 실존의 성격을 놓고 하이데거가 붙이는 명칭은 ‘본래성’이다....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된, 즉 개인이 된 사람을, 이렇게 해서 현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것을 자각하게 된 사람을, 요컨대 자신의 각자성 또는 홀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떠맡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비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오지 않았기에 남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좇아서 산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실로 한 사람이 누구여야 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단할 수 있는 권한을 남에게 양도하는 경향성이 만연되어 있다. 책임이란 무서운 것이다.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존재는 이 비본래적인 존재마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비본래적이라고 해도, 내 비본래적인 존재는 여전히 내 것이라는 말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28~9

 

   실존은 자유와 책임이다. 하이데거는 자유가 무한하다고 보지도 않았지만,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모든 현존재는 모종의 ‘거기에’ 처해 있다. 나의 거기에 자체는 나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자유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한 나의 종속 사이의 긴장으로 꽉 차 있다.」How to read 하이데거, p61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이런 실존적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등따시고 배부를때?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것은 ‘죽음’ 이다.

「 ‘세계-속에-있음’을 실존으로 보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해석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인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은 맨 먼저, 그리고 대부분 자기 자신으로 있지 않고 세계에 추락해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그들’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넘겨져 있다. 그의 과제는 이렇게 얽힘에서 벗어나 정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근본적으로 자기가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근본정서, 그리고 아무 반성 없이 편하게 살기와 망상에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근본정서에서 분명해 진다.

  근본정서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하이데거는 불안이라 부른다.... 불안 속에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과 세계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님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한 단호함’과 ‘아무 것도 아닌 실존’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는 낯선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고유한 바탕으로부터 실존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된다.」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2

  인간이 죽음이라는 불안 앞에 직면할 때 오히려 더 독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해가 가는 듯 하면서도 선뜻 무릎이 쳐지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부쩍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도,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곳 놀러 다녀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 예전에 아버지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듣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깨닫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하이데거라면 배고픈 자에게도 철학을 권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론을 깨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전제한다면, 배고픈 자도 철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상이 실존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결과는 비극적이게도 나찌의 ‘국가사회주의’였을 지라도 말이다. 하이데거는 “한동안 죽음을 향한 여기있음을 영웅적으로 견디기라는 자신의 사상이 국가사회주의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상을 철회했던 것일까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 제기 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찌 참여 그리고 한나 아렌트와의 스캔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시작하기는 힘이 달리고, 세미나 전에 다른 글로 발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보통 하이데거는 나찌 참여까지의 전기와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누어진다고 하는데, 나찌 참여 기간을 중기로 잡아서 세 시기로 세분하는 하이데거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발제는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전기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끝으로 하이데거 사상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란 질문을 해 보고 싶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논리 보다 기분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기분으로 말해보자면 글쎄... 우리 사는 세계를 외형적으로는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어째 복잡한 사회와 뒤엉킨 사유의 회로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예리한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해놓고 날카로움 운운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뻔뻔하게도 그렇다, 기· 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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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1월 25일, 모임 후 쓴 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는데, 아쉽다. 말 재주도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닌데 반풍수 될까봐 더 그랬던 것 같다. 혜초님이 후기에서 ‘도전 정신’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나도 살짝 공감했다. 도핑님이 멋지게 칠판 앞에서 설명하시는 걸 보며, '아! 나도' 했더랬다 ㅋ. 마이크 잡고 서 본지 십 여 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다음번엔 펜을 들고 서 보고 싶지만, 하필 ‘하이데거’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눈 동냥한 하이데거는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하고 별로 친숙하지도 않다. 나찌 연루설이라든가, 한나 아렌트와의 연애(?)라든가 풍문만 조금 들어봤을 뿐이다. 여하튼 세미나에서 못했던 이야기, 그림도 그려가며 조금 정리해 놓고 넘어가고 싶다. 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깜짝 놀라움을 선물하시며, 구성원들의 투지를 자극해 주신 도핑님께 그날 전하지 못한 감사를 드린다.

 

 

 

  데카르트는 무조건 Cogito, ergo sum 이다. 데카르트 자신이야 어떠했던,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처음 데카르트에게 cogito는 포괄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칠일 만에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동·식물은 물론 인간까지 창조하셨으니, 그 모든 것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나는 엄연히 살아있고, 밥 먹고 잠자고 이것저것 할 건 다할 뿐 아니라 그때마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는 등, 그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무슨 의심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신을 의심하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의심했다.

  의심의 극단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육체조차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을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텅 빈 우주에서 한 점 ‘생각’으로 움츠러들었던 데카르트는 그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물건’인 실체로 돌아왔다. 생각하는 물건 res cogitans의 res 는 物, 즉 실체, 물건을 뜻한다. 저자 바이셰델은 “이것으로써 인간적인 있음인 ‘나’의 고유성에 대한 응시가 가로막혔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어떤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고 썼다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인용문¹은 맨 아래에 덧붙였다.

 

 

  cogito 와 res cogitans의 차이를 이해하기는 물론 쉽지가 않다. 인용문¹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칸트의 ‘초월적 통각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지만, 사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이라는 개념은 더욱 만만치가 않다. ‘초월적’과 ‘통각’이 분명 한글이긴 한데, 그 의미는 전혀 우리의 상식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핑님은 더 어려운 칸트의 개념들도 잘 설명해 주셨다. 도핑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은 아마도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던 듯하다. 칸트는 세계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걸 표상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물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칸트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주체의 감각, 지성(오성), 이성을 통해 구성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체는 바로 ‘초월적 통각’이다.(가끔 순수통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통각’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아니다.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 res cogitans' 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생각의 주체인 ‘나’, 그러니까 생각을 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끌어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그 내가 진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좀 쉬운 길을 통해 돌아가 보자. 세미나에서 잠깐 언급했고, 영실업님이 생각을 연장해 주신 영화들이 있다. <매트릭스>와 <블레이드 러너>.

  단순히 말하자면,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빨간 약의 세계와 파란 약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파란 약의 세계는 매트릭스 안의 세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 바쁘고 힘들고 정신없지만 또 한편으로 즐겁고 안락하고 매끄러운 세계. 24시간 빈틈없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흘러가는 세계.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로 오존층이 구멍 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만,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구멍 뚫린 세계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 (w)hole! 라캉은 세계를 이중적 의미에서의 (w)hole 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도 꼭 네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뭔가 아닌 것 같고,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뭔가 세계의 ‘틈’, 구멍을 느끼는 사람들. 빨간약을 삼키는 사람들. 그들이 본 것은 거대한 인큐베이터 공장, 엄마의 자궁 같은 시험관 안에서 환상을 보며 실제로는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인간 모양의 육체 덩어리들이다. 매트릭스 1편은 이렇게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인 시온을 대비시키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간단하다. 빨간 약을 먹고 잠에서 깨어나 진짜 인간의 의식으로 돌아오면 거짓된 환상의 세계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런데 3편으로 가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온 뿐 아니라 기계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그 안에서 버그인 네오와 또 다른 변종인 스미스 요원 등등,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고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단순화시켜 본다면 인간이 생각한다고 해서 그 생각의 주체가 실체로서의 나,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심’한 네오마저도 여전히 가상의 프로그램일 뿐, 실체로 존재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도주 중인 리플리컨트를 추적하는 형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놀랍게도(혹은 예측하신대로) 그 형사 역시 리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 에 관한 이 영화에서 우리의 결론은 우리 역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형사는 자신이 쫒던 리플리컨트가 ‘자신을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떻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가?” 라고 놀라워한다. 물론 우리는 그 놀라움을 주인공 형사에게 되돌려야만 한다. “어떻게 너는 네가 리플리컨트임을 모를 수가 있니?” 하지만, 그 질문이 ‘자신을 인간으로 지각하는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찍이 세익스피어께서,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던졌던 그 질문에 우리 인간 역시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밖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 줄 그 무엇이, 혹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의심은 곧 존재에 대한 증거이고, 그것은 또 인간 보다 더 완전한 신에 대한 증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 완전한 신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해 줌으로써, 데카르트의 존재 증명은 순환 논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처음 ‘의심’이라는 부피 없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순간, 철학의 역사는 이미 되 돌이킬 수 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칸트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이어 받아 ‘초월적 통각’ 이라는 개념으로 해낸 일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인 물 자체에 대한 허망한 사고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 이성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주워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를 확신한다. 레스 코기탄스로. 이것이 칸트가 데카르트를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칸트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를, 데카르트적 레스 코기탄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하는 계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p28>”

  영실업님의 글과 관련해서, 나는 세계 밖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리플리컨트나 좀비나 프로그램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확인해 줄 수 있는 세계 밖의 신이나, 아키텍터나 거대 컴퓨터 기업은 없다. 다만 뭔가가 이상하고, 찜찜하고, 흰 토끼가 나타나면 따라 나설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씩 시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가 누구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내 살아 온 세월은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는 엄마의 넋두리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어 진짜 대하소설을 쓴다고 해도 아마 그 속에도 엄마 자신이 고스란히 모두 담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identity는 정체성이자 동일성이다. ‘법은 법이다’ 라거나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은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는 동어반복이 아니고는 그 정체성을 그것 자체와 동일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동일성은 사실 불투명하다. “피라미드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res cogitans가 자기 투명한 주체임에 반해 칸트의 초월적 주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부름에 동일하게 응답한다. 엄마, 아줌마, 고모, 이모, 여보, 선생님, 고객님 등등.... 이런 호명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 따위의 생각으로 망설이다가는 정신병원에 격리되기 십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각종 부름들에 적당하게 혹은 적절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이라고 하는데, 이 정체성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동일화 precipitate identification'를 통해 스스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라캉은 죄수 이야기를 통해 이 동일화의 제스처를 설명하고 있는데, 역시 길고 까다로운 인용문²이어서 맨 아래에 덧붙인다. 죄수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깔을 함께 맞춰 보시면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 셋, 모자는 하얀 모자 셋, 검정 모자 둘이다. 죄수는 각각 하나씩의 모자를 쓰고 있고 상대방의 모자 색깔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색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모자 색을 맞추어야 한다. 모두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촉박한 동일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요점은 “내 모자는 하얀 색이다”를 외치는 순간에도 주체는 자기 모자의 색깔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상징적 세계의 일원이 된다. 내가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떠맡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인간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저자 바이셰델은 데카르트에게 두 가지 혐의를 씌웠다. 코기토를 레스 코기탄스로 환원함으로써 “한 순간 인간의 여기있음을 독특하게 해석할 전망을 열었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을 도로 덮어버렸다 p201”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는 것이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p202” 길어봤자 20페이지 정도에 한 철학자의 일생과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의 구성 방식상 이런 언술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레스 코기탄스에 관한 부분은 두어 해 전에 읽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다시 떠올리며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물론 자신은 없다. 칸트와 헤겔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 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 속에 들어있던 것을 끄집어 내 보았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도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마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쓰기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데카르트에 의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영화 <아바타>였다. 바이셰델의 의도와 동떨어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바타>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가진 영화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사용한다면, 판도라 행성을 침공한 인간이 근대적 주체의 자리에, 그리고 나비족과 판도라 행성의 자원이 객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역사상 근대는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 원주민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의 대상, 자원으로 취급했다. 근대적 발전은 자원의 개발 혹은 자원의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었으므로, 근대적 주체가 판도라 행성을 공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바타>는 이런 근대적 주체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의 대비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물론 영화가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 역시 잃어버렸던 낙원인 유기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잃어버렸던’ 낙원이라는 것이 잃어버리기 전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그 낙원은 오직 잃어버린 후에만 사후적으로,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요즘 금요일 밤에는 ‘남극의 눈물’을 본다. 펭권이 너무 귀여워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연 다큐들이 다 그렇듯이, 그것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펭귄은 제 새끼를 먹이려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자이언트 패트롤이라는 새는 또 제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아기 펭귄의 목덜미를 찢어 놓는다. 코끼리 해표가 새끼를 낳자마자 새들이 날아와 자궁 속까지 부리를 들이밀고 태반을 먹어 치우는 모습에는 속이 느물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남극의 밤하늘과 푸른 빙벽과 차가운 바다가 아름다운만큼이나 그 속의 생명들은 잔인하고 처절하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바로 그곳, 그 대자연의 질서로부터 안간힘을 쏟으며 빠져나왔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은 자연과 단절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비족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 없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족들은 그들의 머리채와 이크란의 갈기 같은 것을 맞대는 것으로 서로의 생각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관적 지성’ 이다. 칸트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직관과 지성 사이에 벗어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무한한 존재(신) 속에서만 직관과 지성은 일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 지성이 가능하다면 인간들 사이에 오해는 없을 것이다.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번 쓰윽 보거나 그윽하게 응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읽혀진다. 신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런데 말도 필요 없고, 오해도 없는 세계는 무지하게 심드렁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거나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사랑을 감추고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느끼면 되고, 느낀 대로 행하면 된다. 느낀 대로 행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 자유가 가능할까? ‘자유’라는 주제는 ‘주체’의 문제와 함께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라고 알고 있다. 이 묵직한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그냥 질문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아바타>에서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이 지겨운 글은 이제 끝을 내야겠다.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 주체인 제이크였다는 사실이다. 침입자였던 제이크의 근대적 문명(사고) 없이는 나비족의 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는 “상처는 상처를 낸 창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적합한 비유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으로의 회귀가 근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자연’은 잔인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바로 그 자연일 뿐이다.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는 판도라 행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인용문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중에서 ....

 

 

1. 인용문¹

 

  데카르트는 존재론적으로 일관적인 우주 속에 최초로 균열을 도입했다. 절대적 확실성을 “나는 생각한다.”라는 점으로까지 단축시킬 때, 잠깐 동안, 내 등 뒤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을 조종하는 사악한 천재의 가설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박사에 이르기까지 인조인간을 창조하는 과학자-조물주의 원형.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레스 코기탄스(생각하는 사물)로 환원함으로써,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직물에 그가 낸 상처를 꿰맨다. 칸트만이 자기의식에 내재한 역설을 완전하게 표명한다. 칸트의 “초월적 전회”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주체를 “존재의 대사슬” 속에, 즉 우주라는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오히려 주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탈구되어 out of joint” 있다. 주체는 그 자신의 자리를 구성적으로 결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라캉은 주체를 수학소 $로, “빗금쳐진” S로 지칭한다.p26....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절대적 확실성의 지점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아직 코기토를 현실 전체에 상관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현실의 외부이고 현실에서 제외되어 있으면서 현실의 지평을 윤곽 짓는 지점으로서 파악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자신에게 대립된 객관적 세계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기보다는, 내속적인 개념적 사슬관계를 따름으로써 우리를 상위의 다른 표상들로 인도하는 표상이다. 처음에 주체는 코기토가 어떤 내속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에게 속하는 표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의심은 불완전성의 표시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 없는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에 대한 표상을 함축한다. 결함이 있는 하위의 존재자나 표상은 상위의 존재자나 표상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완전한 존재(신)는 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신의 진실한 본성은 외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장해준다. 기타 등등. 따라서 우주에 대한 데카르트의 최종적 관점에서 코기토는 복잡하게 얽힌 총체 속에 있는 수많은 표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현실의 일부이며 아직은 현실 전체에 상관적이지 않다.(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오로지 “즉자적으로”만 상관적이다.) p27 ..... 데카르트는 모든 대상 표상에 수반하는 텅 빈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사고하는, 그리고 사고하는 그 능력에서 스스로에게 투명한) 어떤 실정적 현상적 실체, 코기탄스를 붙잡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내 안에 있는 사고하는 “사물”을 자기현시적이며 자기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과 생각하는 실체 사이의 위상학적 불일치를, 즉 “나는 생각한다.” 속에 포함된 사고의 논리적 주체의 동일성identity에 관한 분석 명제와 생각하는 사물-실체로서의 어떤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종합 명제 사이의 차이를 잃게 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표명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데카르트에 선행한다. p28.... 경험적인 “나”의 자기경험을 초월적 통각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틈새는 경험적 현실로서의 존재와 논리적 구성물로서의 존재, 즉 수학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구분과 일치한다.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통각의 “나”의 지위는 필수적인 동시에 불가능한(그것의 개념이 직관된 경험적 현실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불가능한”) 논리적 구성물의 지위이다. 요컨대 라캉적 실재the Real의 지위이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바로 경험적 현실을 실재적인-불가능한 것으로서의 논리적 구성물과 혼동한 것이었다. p29

 

 

2. 인용문²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체의 상징적 동일화는 언제나 예기적인, 서두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라캉이 그 유명한 논리적 시간에 대한 논문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상징적 동일화, 즉 상징적 위임의 떠맡음의 근본적 형식은, “X에 속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나를 쫒아낼지도 모르는 타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나 자신을 X로서 인지하는”, 나 자신을 X로서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이다.... 교도소장은 특별 사면으로 세 명의 죄수 중 한 명을 석방할 수 있다.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논리적 테스트를 통과하게 한다. 죄수들은 세 개는 하얀 색이고 두 개는 검은 색인 다섯 개의 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자들 중 세 개를 죄수들에게 나누워 준다. 그러고 나서 죄수들은 삼각형으로 앉는다. 즉 죄수 각각은 나머지 둘의 모자 색을 볼 수 있지만, 자기 머리에 쓴 모자 색을 볼 수는 없다. 승자는 자기 모자 색을 가장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이다. 색을 알게 된 죄수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는 것으로 이를 신호한다. 가능한 세 가지 상황이 있다. p145~6

 

 

 

- 검정 모자 둘, 하얀 모자 하나.

- 검정 모자 하나, 하얀 모자 둘.

- 하얀 모자 셋.

 

  내가 하얀 모자를 쓴 경우, 첫 번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약간의 유추가 필요하다. 내 눈에는 검정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이고, 나는 흰색일 수도 검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모자가 검정일 경우, 흰 색 모자를 쓴 다른 죄수의 눈에는 두 개의 검정이 보일 것이므로 그 죄수는 바로 일어나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죄수가 망설인다. 그렇다면 나는 흰색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 번째의 경우다. 역시 내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검은 색이라면, 흰색을 쓴 다른 죄수는 내가 두 번째 경우에 생각한 방식대로 추론해 나갈 것이다. 즉 제 3 죄수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모자는 흰색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죄수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 머리에서 검은 모자를 봤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나의 추론과 동일한 추론을 했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내 모자가 흰색이라고 외쳐야 한다. 두 망설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죄수가 나 보다 먼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p146~7 책 내용을 축약했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하얗거나 검은) 모자는 내가 〔그것〕인 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내가 “나는 하얀 색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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