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2월 13일 카페소모임 발제입니다.
사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하이데거의 이름을 아주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주의자, 라캉주의 좌파, 레닌주의자 쯤으로 불릴 수 있겠지만, 그의 철학적 연구는 하이데거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의 3장은 사실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하이데거가 생소했다. 그 책에는 하이데거에 관한 ABC는 없다. 그 장의 제목은 “급진적 지식인들, 혹은 왜 하이데거는 1933년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올바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일까?”인데, 하이데거의 정치적 참여와 그 한계가 하이데거의 사상과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논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보다 더 오래 전에 읽었던 <까다로운 주체> 1장 역시 온전히 하이데거론이라 할 수 있는데, 제목은 “초월적 상상력의 곤궁, 혹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이다. 말하자면 초급 수준이 아니라 고급 중에서도 특 고급 수준이라, 사실 읽었다고 할 수도 없다. 이 어려운 내용을 간신이나마 읽어보기 위해 내가 개발한 꼼수는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라는 용어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반복해서 나오는 이 용어들의 의미는 물론 몰랐다. 어쨌거나 ‘존재적’이 나오면 부정적, ‘존재론적’이 나오면 긍정적이라고 딱 구분을 해 놓고 읽었다. 우리 편 저쪽 편을 갈라놓은 것인데, 왜냐하면 워낙 문장이 복잡해서 저자가 옹호하는 것인지, 비판하는 것인지도 잘 구분을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턱도 없는 방법이었지만... 그렇게 접했던 하이데거였다. 그래서 <철학의 에스프레소>에서 하이데거를 읽었을 때, 진짜 모두 처음 보는 내용이었다. 하다못해 헤겔하면 변증법, 칸트하면 정언명령, 키르케고르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 정도는 들어 보았는데, 하이데거는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존재적’과 ‘존재론적’이란 용어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거짓말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다. 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거짓말일 것이다. 어쨌든 하이데거 발제를 하면서 지젝이 떠올랐고, 다시 그 책들을 찾아보았다. 여전히 ‘존재적’과 ‘존재론적’ 은 설명하기 힘들뿐이고!!이고, 더욱이 지젝이 옹호하려고 하는 하이데거의 이론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비판하는 하이데거의 오류에 관해 요약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왕 다시 읽은 김에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몇 가지 추려서 소개해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아래 인용문들이 이 책들의 주요 내용은 절대 아니다.
하이데거와 아렌트를 둘러 싼 스캔들은 단순히 유부남 스승과 여 제자 사이의 불행한 연애 사건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을 때까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비본연적’인 것으로 거부했다. 반면 아렌트는 역설적이게도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1.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4~ 185>
하이데거와 아렌트 사이의 난해한 관계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하이데거의 집요한 비난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자유민주주의를 인격들 간의 특이한 결합관계가 아닌 것으로, ‘비본연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아렌트는 여성 대 남성의 대립 축과 ‘세계적’ 유대인 대 ‘지방적’ 독일인이라는 이중적 대립 축에서 하이데거와 대립될 뿐 아니라,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한데) 최초의 자유주의적 하이데거주의자로서, 하이데거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적 세계에 재결합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다. 물론 세밀한 독해를 통해서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통찰에 기본적으로 충실하면서도 자유주의를 지지할 수 있게 한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그녀의 반-부르주아적 입장, 경쟁적이고 탐욕적인 부르주아 사회의 표현으로서, 정치를 ‘이해-집단’의 정치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한 비판적 경멸 말이다. 그녀는 부르주아 사회의 실용적 공리주의와 영웅주의의 결핍에 대한 불만의 측면에서 대가 보수주의자들과 입장을 공유한다.
2.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86~7>
어떻게 아렌트는 부르주아 문화 속에서 그녀가 존중하는 것을 분리해 낼 수 있는가? 그것의 구성주의, 근본적 인권의 확신, 법 이전의 평등성,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면제된 인간 삶의 사적 지대에 대한 고집, 종교적 관용 등을, 그녀가 동의하지 않는 것, 즉 그것의 세속주의, 자기-이익의 보편성에 대한 냉소주의적 확신, 인간의 가치에 대한 화폐 가치의 도착된 영향, 탈정치화하는 경향, 전통과 장소 감각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분리해 낼 수 있는가? 달리 말해서 이것들은 동일한 현상의 두 측면이 아닌가? 그래서 아렌트가 어떠한 공리주의적인 이해관계의 계산에도 오염되지 않을 정치적인 실천의 윤곽을 진정한 ‘세계의 돌봄’으로 주장했을 때 그녀가 환기할 수 있는 것들은 모든 시민들이 공회당에서 회합했던 초기 미국의 전통에서 독일 혁명에서의 혁명적 평의회까지 혁명적 상황에서 자기-조직화의 형식들인 것은 너무 당연하다. 이러한 사례를 환기할 때 그녀가 정치적으로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유토피아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그녀가 여전히 신뢰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질서와 결코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찌즘에 손가락을 데이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하이데거는 여전히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고 한다.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어떤 정치 체계가 현대의 기술에 가장 적합하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민주주의가 그 대안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아니라, 니체 강의에서도 ‘유럽은 언제나 민주주의에 집착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럽의 치명적인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실제로 유명한 사상가들이 오랜 역사 동안 꾸준히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의혹과 경고를 표명해 왔다는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놀라웠다. 민주주의는 결코 성역이 아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권에 대한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 개념 자체가 내포한 위험성과 모호함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주의란 그 텅 빈 형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현실화 될 때는 반드시 그 대립물에 의해 채워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번 세미나에서 이영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유·평등·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이후 자본주의 국가를 통치하는 법체계의 토대가 되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날은 ‘자유’ 라는 개념으로 토의되었고, 나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속임수 혹은 유토피아에 불과하니 폐기해버려야 할 가치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 머리가 어지럽지만, 최근에 읽은 책들에는 다양한 관점이 드러나 있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 > <대중들의 공포>
여하튼 하이데거는 나찌즘을 통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항할 새로운 정치 체제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하이데거가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나에 관해서 여기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보여주는 그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적 결단이 세인들의 관습과 통념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어떻게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에 연결되는 것일까?
3. < 까다로운 주체 p32~4>
이런 폭력적 부과 행위에 대한 하이데거의 명칭인 기획투사는, 주체가 내던져져 있으며 또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길을 읽은 상황을 ‘뜻이 통하게’ 해주는 근본적 환상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하이데거가 유한하고 우연적인 상황 속으로의 내던져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길을 본래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라는 기획투사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이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라는 그 연관성이 숙고되지 않은 두 층위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개별적 층위에서, ‘언제나 오로지 나만의 것’인 죽음과의 본래적 조우는 나로 하여금 나의 미래를 본래적 선택 행위 속에서 투사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공동체 역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해야하는 우연적 상황 속에 내던져져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이데거는 반복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별적 층위에서 사회적 층위로 이행한다. ‘존재해온 실존가능성 -현존재가 자신의 영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본래적인 반복은 실존론적으로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성에 근거하고 있다.’ ..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행위에서 본래적 존재 양태를 획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개별적 현존재의 ‘내던져진 기획 투사’로부터 과거의 가능성의 반복으로서의 앞질러 달려가 보는 결단의 집단적 행위 속에서 자신의 역사적 운명을 역시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이라는 인간 공동체로의 이와 같은 이행은 현상론적으로 적합한 방식으로 근거지어지지 않았다. 집단적(사회적) 거기-있음의 매개는 온당하게 배치되지 않았다. 즉 하이데거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다만 헤겔이 ‘객관적 정신’이라고 칭했던 그것, 상징적 대타자, 상징적 위임들의 ‘객관화된’ 영역 등등인데, 이는 아직 ‘비인칭적’ das Man이지만 또한 더 이상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의 전근대적 몰입도 아니다. 개별적 층위와 집단적 층위의 이런 위법적 단락은 하이데거의 ‘파시스트적 유혹’의 뿌리에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존재와 시간>의 암묵적 정치화는 가장 강력하다. 일상적 관심사를 따르느라 분주한 근대적이고 익명적이고 분산된 ‘그들’의 사회와 자신의 운명을 본래적으로 떠맡는 민족 간의 대립은 광란적 거짓 활동의 퇴폐적 근대적 ‘미국화된’ 문명과 그것에 대한 보수적인 본래적 반응간의 대립과 공명하지 않는가?
우선 기획투사라는 말이 어렵다. 이것은 세계-내-존재인 인간이 자신이 내던져진 이 세계가 자신의 선택항들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조건 속에서 그에게 허용된 가능성을 검토하고, 그 중에 제일 적절한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자신의 기획으로 떠맡는다는 것으로 보통 이해된다고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 개념에 독특한 면이라고 하는데, 지젝은 여기서 조금 다른 곳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과거, 미래, 현재 중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미래라는 것인데, 조금 뒤에 인용할 반복이라는 개념과 함께 설명될 수 있다.
여하튼 실존적 결단, ‘앞질러 가보는’ 결단은 개인적인 행위로 설명되는데, 하이데거는 별 다른 매개 없이 이 개인적 결단을 집단적 선택으로 바꾸어 놓는다. 개인의 의지가 집단의 의지가 되려면 상식적으로도 선거라든가 여론이라든가 하는 위임의 절차가 필요하다. 이 위임 과정 없이, 개별적 결단이 곧바로 민족적 운명의 떠맡음으로 번역된 것이 어떻게 나찌즘에 대한 찬양과 곧바로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라는 것이 개인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4.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5~6>
오직 반복만이 순수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유명한 분석에서 현존재의 시간성이 갖는 탈-존 구조를 미래로부터 과거를 통해 현재로 진행되는 순환운동으로 기술했다. 이것을 미래에서(나에게, 나의 기획에 개방된 가능성들에) 출발한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내가 던져진 역사적 상황의 결들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여) 거기로부터 나의 기투를 실현하기 위해 현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미래 자체를 ‘존재해 온 것 having-been'으로 규정할 때, 혹은 보다 정확히 ‘존재해온 것으로 존재하는 is as having-been’ 어떤 것으로 규정할 때 그는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모든 미래적 가능성이 이미 과거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오직 과거로부터 상속된 구조로 현재화된 것만을 반복하고 실현할 수 있을 뿐인 닫힌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과거 자체의 ‘개방성’이라는 보다 급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과거 자체는 단순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과거는 비현실화된 잠재성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진정한 미래란 바로 이 과거의 반복/부활이다. 이 반복은 이미 있었던 것으로서의 과거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현실 속에서 실현에 실패하고, 배신당하고, 억눌려진 그런 요소들의 반복이다.
5. <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213~4>
키르케고르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반복은 ‘역전된 기억’이자 앞으로 향한 운동이며 새로움의 창조이지 낡은 것의 재생산이 아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은 반복에 대한 가장 강력한 대조 어법이다. 그래서 반복은 단지 새로운 것의 출현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은 오직 반복을 통해서만 출현한다. 이 역설의 핵심은 물론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Spirit)과 현실적인 것(Letter)의 차이로 지칭한 것이다. 칸트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의 경우를 들어 보자. 칸트를 반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칸트의 자구적 의미에 집중하다가 신-칸트주의의 정신 속에서 그의 체계를 정교화하고 바꾸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칸트가 자신의 체계를 현실화하면서 배반했던 창조적 충동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다. (즉 이미 ‘칸트 속에 있는 칸트 이상의 것’, 그 명시적 체계 이상의 것, 그 체계의 잉여적 중핵과 접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를 배반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진정한 배반은 최고의 충실성 속에서 일어나는 윤리-이론적 행위이다. 즉 우리는 칸트적 사유의 ‘정신’에 충실하기(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 칸트의 문자를 배반해야 한다. 칸트의 문자에 충실한 것은 진실로 그 사유의 핵심, 그 근저의 창조적 충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로부터 끄집어내야 하는 결론은 어떤 작가(그 사유의 현실적 문자)를 배신할 때 진정으로 그에게 충실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원의 진실은 거꾸로다. 어떤 작가를 반복함으로써, 그 사유의 핵심에 충실함으로써 우리는 진실로 그를 배반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작가를 반복하지 않고 단지 그를 비판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에둘러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면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의 지평과 개념 장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가 과거를 구원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참으로 아리송했다. 과거는 이미 실행되어 굳어져 버린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말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승자는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다. 과거의 패배로 묻혀 버린 역사적 사실들을 다시 발굴하여 새롭게 배치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되는 듯이 보이는 것은 그 순서이다. 승자의 관점에 의해 과거를 재해석 한다는 것과 미래 자체를 과거 속에 자리 매김한다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관점에서는 사실 반복이라는 개념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후자의 관점에서는 반복이 혹은 반복만이 미래를 창출한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든 간에, 어쨌든 하이데거, 들뢰즈, 지젝으로 이어지는 ‘반복’의 개념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철학책을 읽으면 끊임없이 과거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취향(?)에 따라 때로는 플라톤이 때로는 칸트가 또 때로는 스피노자, 니체, 헤겔이 되풀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지난 시대의 죽은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불러대는 이유가 아마 이것이 아닌가 한다. 위대한 사상가의 문자 letter가 아니라 그들이 문자화하지 못했던 그 정신spirit를 반복함으로써 그들을 뛰어 넘기 위해, 진정으로 그들을 배반하기 위해서. 단순히 그들의 문자를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그 문자들은 충분히 오랫동안 존재해 왔던 것이니 말이다.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그들을 반복하는 것이다. 시작이야 어짜피 문자를 반복하는 것만도 어렵고 힘든 일임이 분명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문자를 배반하며 그들의 정신을 반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소수의 사상가에게만 허용된 축복일지 모르지만, 꿈은 야무지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