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102년 1월 25일, 모임 후 쓴 글입니다.

 

하고 싶은 말이 꽤 있었는데, 아쉽다. 말 재주도 없지만,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닌데 반풍수 될까봐 더 그랬던 것 같다. 혜초님이 후기에서 ‘도전 정신’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나도 살짝 공감했다. 도핑님이 멋지게 칠판 앞에서 설명하시는 걸 보며, '아! 나도' 했더랬다 ㅋ. 마이크 잡고 서 본지 십 여 년이 훌쩍 지난 것 같다. 다음번엔 펜을 들고 서 보고 싶지만, 하필 ‘하이데거’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저 책에서 조금씩 눈 동냥한 하이데거는 너무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하고 별로 친숙하지도 않다. 나찌 연루설이라든가, 한나 아렌트와의 연애(?)라든가 풍문만 조금 들어봤을 뿐이다. 여하튼 세미나에서 못했던 이야기, 그림도 그려가며 조금 정리해 놓고 넘어가고 싶다. 본 글에 들어가기 전에, 깜짝 놀라움을 선물하시며, 구성원들의 투지를 자극해 주신 도핑님께 그날 전하지 못한 감사를 드린다.

 

 

 

  데카르트는 무조건 Cogito, ergo sum 이다. 데카르트 자신이야 어떠했던, 우리에게 데카르트는 그렇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처음 데카르트에게 cogito는 포괄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의심’이었던 것 같다. 칠일 만에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이 하늘과 땅과 동·식물은 물론 인간까지 창조하셨으니, 그 모든 것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나는 엄연히 살아있고, 밥 먹고 잠자고 이것저것 할 건 다할 뿐 아니라 그때마다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는 등, 그 모든 것에 대한 생생한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무슨 의심할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신을 의심하고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의심했다.

  의심의 극단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육체조차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걸 느꼈을까?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텅 빈 우주에서 한 점 ‘생각’으로 움츠러들었던 데카르트는 그 ‘생각’으로부터 ‘생각하는 물건’인 실체로 돌아왔다. 생각하는 물건 res cogitans의 res 는 物, 즉 실체, 물건을 뜻한다. 저자 바이셰델은 “이것으로써 인간적인 있음인 ‘나’의 고유성에 대한 응시가 가로막혔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라는 책에서 어떤 단서를 얻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고 썼다가, 너무 길고 어려워서 인용문¹은 맨 아래에 덧붙였다.

 

 

  cogito 와 res cogitans의 차이를 이해하기는 물론 쉽지가 않다. 인용문¹의 데카르트적 주체와 칸트의 ‘초월적 통각 transcendental apperception’ 사이의 차이점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지만, 사실 칸트의 ‘초월적 통각’이라는 개념은 더욱 만만치가 않다. ‘초월적’과 ‘통각’이 분명 한글이긴 한데, 그 의미는 전혀 우리의 상식 범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핑님은 더 어려운 칸트의 개념들도 잘 설명해 주셨다. 도핑님이 설명하신 내용들은 아마도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었던 듯하다. 칸트는 세계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걸 표상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물物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아무튼 칸트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는 주체의 감각, 지성(오성), 이성을 통해 구성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이 주체는 바로 ‘초월적 통각’이다.(가끔 순수통각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초월적 통각’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아니다. 어떤 ‘실체’는 아니라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 res cogitans' 이 아니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에서 생각의 주체인 ‘나’, 그러니까 생각을 하고 있는 ‘경험적인 나’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확신을 끌어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다.’고 해서 그 내가 진짜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걸까? 여기서 좀 쉬운 길을 통해 돌아가 보자. 세미나에서 잠깐 언급했고, 영실업님이 생각을 연장해 주신 영화들이 있다. <매트릭스>와 <블레이드 러너>.

  단순히 말하자면, 매트릭스가 보여주는 세계는 빨간 약의 세계와 파란 약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파란 약의 세계는 매트릭스 안의 세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계. 바쁘고 힘들고 정신없지만 또 한편으로 즐겁고 안락하고 매끄러운 세계. 24시간 빈틈없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흘러가는 세계. 이산화탄소의 과다 배출로 오존층이 구멍 나지 않을까 걱정은 하지만, 이 세계 자체가 이미 구멍 뚫린 세계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는 완전한 세계. (w)hole! 라캉은 세계를 이중적 의미에서의 (w)hole 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도 꼭 네오 같은 사람들이 있다. 뭔가 아닌 것 같고,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뭔가 세계의 ‘틈’, 구멍을 느끼는 사람들. 빨간약을 삼키는 사람들. 그들이 본 것은 거대한 인큐베이터 공장, 엄마의 자궁 같은 시험관 안에서 환상을 보며 실제로는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인간 모양의 육체 덩어리들이다. 매트릭스 1편은 이렇게 매트릭스라는 가짜 세계와 진짜 세계인 시온을 대비시키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의 문제는 간단하다. 빨간 약을 먹고 잠에서 깨어나 진짜 인간의 의식으로 돌아오면 거짓된 환상의 세계를 끝장낼 수 있다. 그런데 3편으로 가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온 뿐 아니라 기계와의 전쟁까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프로그램의 일부이다. 그 안에서 버그인 네오와 또 다른 변종인 스미스 요원 등등,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고 해석자에 따라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지만, 어쨌든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단순화시켜 본다면 인간이 생각한다고 해서 그 생각의 주체가 실체로서의 나, 생각하는 사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의심’한 네오마저도 여전히 가상의 프로그램일 뿐, 실체로 존재하지 못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도주 중인 리플리컨트를 추적하는 형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놀랍게도(혹은 예측하신대로) 그 형사 역시 리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 에 관한 이 영화에서 우리의 결론은 우리 역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인공 형사는 자신이 쫒던 리플리컨트가 ‘자신을 인간으로 (오)지각하는 리플리컨트’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떻게 그것은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가?” 라고 놀라워한다. 물론 우리는 그 놀라움을 주인공 형사에게 되돌려야만 한다. “어떻게 너는 네가 리플리컨트임을 모를 수가 있니?” 하지만, 그 질문이 ‘자신을 인간으로 지각하는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일찍이 세익스피어께서,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라고 던졌던 그 질문에 우리 인간 역시 뚜렷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밖에서 우리의 존재를 확인해 줄 그 무엇이, 혹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의심은 곧 존재에 대한 증거이고, 그것은 또 인간 보다 더 완전한 신에 대한 증명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 완전한 신은 인간이 인간임을 확인해 줌으로써, 데카르트의 존재 증명은 순환 논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처음 ‘의심’이라는 부피 없는 한 점으로 응축되어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 본 순간, 철학의 역사는 이미 되 돌이킬 수 없이 방향을 바꾸었다.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확신에서 세계에 대한 의심으로. 칸트가 데카르트적 주체를 이어 받아 ‘초월적 통각’ 이라는 개념으로 해낸 일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인 물 자체에 대한 허망한 사고는 일단 접어두고, 인간 이성으로 확신할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주워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존재를 확신한다. 레스 코기탄스로. 이것이 칸트가 데카르트를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주장이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칸트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를, 데카르트적 레스 코기탄스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하는 계기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p28>”

  영실업님의 글과 관련해서, 나는 세계 밖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리플리컨트나 좀비나 프로그램이라고 혹은 아니라고 확인해 줄 수 있는 세계 밖의 신이나, 아키텍터나 거대 컴퓨터 기업은 없다. 다만 뭔가가 이상하고, 찜찜하고, 흰 토끼가 나타나면 따라 나설 것 같다는 생각에 가끔씩 시달릴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내가 누구라고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내 살아 온 세월은 대하소설로도 모자라다는 엄마의 넋두리를 곧이곧대로 받아 적어 진짜 대하소설을 쓴다고 해도 아마 그 속에도 엄마 자신이 고스란히 모두 담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은 불가능하다. identity는 정체성이자 동일성이다. ‘법은 법이다’ 라거나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은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는 동어반복이 아니고는 그 정체성을 그것 자체와 동일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체성/동일성은 사실 불투명하다. “피라미드의 비밀은 이집트인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res cogitans가 자기 투명한 주체임에 반해 칸트의 초월적 주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누군가 나를 부를 때, 나는 그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부름에 동일하게 응답한다. 엄마, 아줌마, 고모, 이모, 여보, 선생님, 고객님 등등.... 이런 호명에 “나는 과연 누구인가?” 따위의 생각으로 망설이다가는 정신병원에 격리되기 십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진짜 내가 누구인가와는 상관없이 각종 부름들에 적당하게 혹은 적절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 정체성의 떠맡음’ 이라고 하는데, 이 정체성은 가만히 있으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촉박한 동일화 precipitate identification'를 통해 스스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라캉은 죄수 이야기를 통해 이 동일화의 제스처를 설명하고 있는데, 역시 길고 까다로운 인용문²이어서 맨 아래에 덧붙인다. 죄수가 쓰고 있는 모자의 색깔을 함께 맞춰 보시면 재미있을 것이다. 죄수 셋, 모자는 하얀 모자 셋, 검정 모자 둘이다. 죄수는 각각 하나씩의 모자를 쓰고 있고 상대방의 모자 색깔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의 모자색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모자 색을 맞추어야 한다. 모두가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경우가 ‘촉박한 동일화’의 경우에 해당한다. 요점은 “내 모자는 하얀 색이다”를 외치는 순간에도 주체는 자기 모자의 색깔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이 상징적 세계의 일원이 된다. 내가 인간인지 리플리컨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나는 스스로를 인간으로 떠맡음으로써 이 세계에서 인간적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저자 바이셰델은 데카르트에게 두 가지 혐의를 씌웠다. 코기토를 레스 코기탄스로 환원함으로써 “한 순간 인간의 여기있음을 독특하게 해석할 전망을 열었다가 다음 순간에 그것을 도로 덮어버렸다 p201”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데카르트와 더불어 현실이, 한편에는 세계 없는 주체로, 다른 한편에는 단순한 객체로 나뉘어버리는 근대의 특성도 시작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인간에 대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철학적 부담이 되고 있다. p202” 는 것이다. “단순히 의식 속에 살고 있는 ‘나’는 물건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p202” 길어봤자 20페이지 정도에 한 철학자의 일생과 사상을 담고 있는 이 책의 구성 방식상 이런 언술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레스 코기탄스에 관한 부분은 두어 해 전에 읽은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다시 떠올리며 나름대로 이해해 보려 노력했다. 물론 자신은 없다. 칸트와 헤겔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 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내 속에 들어있던 것을 끄집어 내 보았다는 것에 약간의 뿌듯함도 있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마음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글은 읽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쓰기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데카르트에 의해 주체와 객체가 분리된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영화 <아바타>였다. 바이셰델의 의도와 동떨어진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아바타>는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를 가진 영화다.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사용한다면, 판도라 행성을 침공한 인간이 근대적 주체의 자리에, 그리고 나비족과 판도라 행성의 자원이 객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역사상 근대는 식민지를 개척한 제국주의 시대이기도 했다. 서구인들은 피식민지 원주민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하나의 대상, 자원으로 취급했다. 근대적 발전은 자원의 개발 혹은 자원의 착취와 나란히 진행되었으므로, 근대적 주체가 판도라 행성을 공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바타>는 이런 근대적 주체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의 대비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물론 영화가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 역시 잃어버렸던 낙원인 유기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잃어버렸던’ 낙원이라는 것이 잃어버리기 전에도 존재한 적이 있었을까? 그 낙원은 오직 잃어버린 후에만 사후적으로, 회고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요즘 금요일 밤에는 ‘남극의 눈물’을 본다. 펭권이 너무 귀여워서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연 다큐들이 다 그렇듯이, 그것이 전달하려고 하는 의도와는 별개로, 자연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펭귄은 제 새끼를 먹이려고 바다 속의 물고기들을 잡아먹어야 하고, 자이언트 패트롤이라는 새는 또 제 새끼를 먹이기 위해 아기 펭귄의 목덜미를 찢어 놓는다. 코끼리 해표가 새끼를 낳자마자 새들이 날아와 자궁 속까지 부리를 들이밀고 태반을 먹어 치우는 모습에는 속이 느물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연이다. 남극의 밤하늘과 푸른 빙벽과 차가운 바다가 아름다운만큼이나 그 속의 생명들은 잔인하고 처절하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인간은 바로 그곳, 그 대자연의 질서로부터 안간힘을 쏟으며 빠져나왔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다. 인간은 자연과 단절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비족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그들에게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어 없이도 교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족들은 그들의 머리채와 이크란의 갈기 같은 것을 맞대는 것으로 서로의 생각을 저절로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관적 지성’ 이다. 칸트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는 직관과 지성 사이에 벗어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함을 주장했다. 무한한 존재(신) 속에서만 직관과 지성은 일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직관적 지성이 가능하다면 인간들 사이에 오해는 없을 것이다. 오해의 근원인 말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한번 쓰윽 보거나 그윽하게 응시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투명하게 읽혀진다. 신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런데 말도 필요 없고, 오해도 없는 세계는 무지하게 심드렁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서로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인정받거나 이해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사랑을 감추고 눈물 흘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저 느끼면 되고, 느낀 대로 행하면 된다. 느낀 대로 행하지 않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런 자유가 가능할까? ‘자유’라는 주제는 ‘주체’의 문제와 함께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라고 알고 있다. 이 묵직한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철학자들과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있을 것이니 여기서는 그냥 질문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아바타>에서 내가 진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이 지겨운 글은 이제 끝을 내야겠다. 판도라 행성과 나비족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근대적 주체인 제이크였다는 사실이다. 침입자였던 제이크의 근대적 문명(사고) 없이는 나비족의 거주지는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는 “상처는 상처를 낸 창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는 대사가 있다고 한다. 적합한 비유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으로의 회귀가 근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그 ‘자연’은 잔인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바로 그 자연일 뿐이다. 우리가 돌아 갈 수 있는 판도라 행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인용문 :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중에서 ....

 

 

1. 인용문¹

 

  데카르트는 존재론적으로 일관적인 우주 속에 최초로 균열을 도입했다. 절대적 확실성을 “나는 생각한다.”라는 점으로까지 단축시킬 때, 잠깐 동안, 내 등 뒤에서 나를 지배하고 내가 “현실”로 경험하는 것을 조종하는 사악한 천재의 가설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박사에 이르기까지 인조인간을 창조하는 과학자-조물주의 원형. 그렇지만 데카르트는 코기토(나는 생각한다)를 레스 코기탄스(생각하는 사물)로 환원함으로써, 말하자면 현실이라는 직물에 그가 낸 상처를 꿰맨다. 칸트만이 자기의식에 내재한 역설을 완전하게 표명한다. 칸트의 “초월적 전회”가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주체를 “존재의 대사슬” 속에, 즉 우주라는 전체 속에 위치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오히려 주체는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탈구되어 out of joint” 있다. 주체는 그 자신의 자리를 구성적으로 결여하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라캉은 주체를 수학소 $로, “빗금쳐진” S로 지칭한다.p26.... 코기토 에르고 숨에서 절대적 확실성의 지점에 도달할 때 데카르트는 아직 코기토를 현실 전체에 상관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현실의 외부이고 현실에서 제외되어 있으면서 현실의 지평을 윤곽 짓는 지점으로서 파악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자신에게 대립된 객관적 세계를 "자발적으로” 구성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기보다는, 내속적인 개념적 사슬관계를 따름으로써 우리를 상위의 다른 표상들로 인도하는 표상이다. 처음에 주체는 코기토가 어떤 내속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에게 속하는 표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의심은 불완전성의 표시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그것은 불확실한 것이 없는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에 대한 표상을 함축한다. 결함이 있는 하위의 존재자나 표상은 상위의 존재자나 표상의 원인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완전한 존재(신)는 있어야만 했다. 더 나아가 신의 진실한 본성은 외부 현실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장해준다. 기타 등등. 따라서 우주에 대한 데카르트의 최종적 관점에서 코기토는 복잡하게 얽힌 총체 속에 있는 수많은 표상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현실의 일부이며 아직은 현실 전체에 상관적이지 않다.(혹은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오로지 “즉자적으로”만 상관적이다.) p27 ..... 데카르트는 모든 대상 표상에 수반하는 텅 빈 “나는 생각한다.”에서 우리가 (사고하는, 그리고 사고하는 그 능력에서 스스로에게 투명한) 어떤 실정적 현상적 실체, 코기탄스를 붙잡는 것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식은 내 안에 있는 사고하는 “사물”을 자기현시적이며 자기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형식과 생각하는 실체 사이의 위상학적 불일치를, 즉 “나는 생각한다.” 속에 포함된 사고의 논리적 주체의 동일성identity에 관한 분석 명제와 생각하는 사물-실체로서의 어떤 인격의 동일성에 관한 종합 명제 사이의 차이를 잃게 된다. 칸트는 이 구분을 표명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데카르트에 선행한다. p28.... 경험적인 “나”의 자기경험을 초월적 통각의 “나”로부터 분리시키는 이 틈새는 경험적 현실로서의 존재와 논리적 구성물로서의 존재, 즉 수학적 의미에서의 존재의 구분과 일치한다.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통각의 “나”의 지위는 필수적인 동시에 불가능한(그것의 개념이 직관된 경험적 현실로 결코 메워질 수 없다는 바로 그 의미에서 “불가능한”) 논리적 구성물의 지위이다. 요컨대 라캉적 실재the Real의 지위이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바로 경험적 현실을 실재적인-불가능한 것으로서의 논리적 구성물과 혼동한 것이었다. p29

 

 

2. 인용문²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체의 상징적 동일화는 언제나 예기적인, 서두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1940년대에 라캉이 그 유명한 논리적 시간에 대한 논문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상징적 동일화, 즉 상징적 위임의 떠맡음의 근본적 형식은, “X에 속하는” 자들의 공동체에서 나를 쫒아낼지도 모르는 타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나 자신을 X로서 인지하는”, 나 자신을 X로서 선언하고 공표하는 것이다.... 교도소장은 특별 사면으로 세 명의 죄수 중 한 명을 석방할 수 있다. 누구를 석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그는 그들이 논리적 테스트를 통과하게 한다. 죄수들은 세 개는 하얀 색이고 두 개는 검은 색인 다섯 개의 모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자들 중 세 개를 죄수들에게 나누워 준다. 그러고 나서 죄수들은 삼각형으로 앉는다. 즉 죄수 각각은 나머지 둘의 모자 색을 볼 수 있지만, 자기 머리에 쓴 모자 색을 볼 수는 없다. 승자는 자기 모자 색을 가장 먼저 알아맞히는 사람이다. 색을 알게 된 죄수는 일어나서 방을 나가는 것으로 이를 신호한다. 가능한 세 가지 상황이 있다. p145~6

 

 

 

- 검정 모자 둘, 하얀 모자 하나.

- 검정 모자 하나, 하얀 모자 둘.

- 하얀 모자 셋.

 

  내가 하얀 모자를 쓴 경우, 첫 번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약간의 유추가 필요하다. 내 눈에는 검정 하나, 흰색 하나가 보이고, 나는 흰색일 수도 검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 모자가 검정일 경우, 흰 색 모자를 쓴 다른 죄수의 눈에는 두 개의 검정이 보일 것이므로 그 죄수는 바로 일어나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죄수가 망설인다. 그렇다면 나는 흰색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 번째의 경우다. 역시 내 모자는 흰색일 수도 있고 검은 색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검은 색이라면, 흰색을 쓴 다른 죄수는 내가 두 번째 경우에 생각한 방식대로 추론해 나갈 것이다. 즉 제 3 죄수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모자는 흰색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죄수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내 머리에서 검은 모자를 봤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나의 추론과 동일한 추론을 했기 때문에 망설인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내 모자가 흰색이라고 외쳐야 한다. 두 망설임 사이의 차이를 확인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죄수가 나 보다 먼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 p146~7 책 내용을 축약했다)

 

 

  우리는 촉박한 주체적 제스처를 통해 “우리가 〔그것〕인 그 무엇이 된다.” 이 촉박한 동일화는 대상에서 기표로의 이행을 내포한다. (하얗거나 검은) 모자는 내가 〔그것〕인 그 대상이며, 내가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은 “내가 대상으로서 〔그것〕인 그 무엇”에 대한 통찰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내가 “나는 하얀 색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나의 존재에 관한 불확실성의 공백을 메우는 상징적 정체성을 떠맡는다. 이 예기적 앞지르기를 설명해 주는 것은 인과사슬의 비결정적 성격이다. 상징적 질서는 “불충족이유율”에 의해 지배된다. 상징적 상호주체성의 공간 내부에서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단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인데, 바로 이 때문에 나의 “객관적” 사회적 정체성은 “주체적” 예기를 통해 확립된다.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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