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에스프레소 - 위대한 철학자 34인의 일상과 사상
빌헬름 바이셰델 지음, 안인희 옮김 / 프라하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2012년 2월 6일 카페 소모임 발제입니다.

 

 

도팽님 말씀처럼 <철학의 에스프레소>에 나오는 34명의 철학자 중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2,500년도 더 되는 철학의 역사에서 추리고 추려낸 34명을 두고, “모모씨는 듣보잡인걸요.” 운운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당찬 고백일 따름이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름도 못 들어본 사람에 이름만 겨우 들어본 듯도 한 사람까지, 줄잡아도 10여명은 생판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 중에 한 사람이 하이데거다.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이라고, <존재와 시간>이라는 대표작은 독일 사람들도 독일어 번역본이 언제 나오느냐고 물을 정도라고 하니, 당연히 넘겨 볼 엄두도 내지 않았지만, “여기 있음”인지 “현존재”인지 당체 알아먹을 수가 없으니, 발제라고 몇 자 끄적이려면 어린이 도서관이라도 어슬렁거릴 수밖에 없다. 주니어 김영사에서 나온 만화 <존재와 시간>을 뽑아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도 찾아 놓았다. How to read 시리즈는 예전에 라캉편을 읽었는데, 비교적 쉬웠기 때문에 용기를 냈다. 이 시리즈는 영국 그란타 북스라는 곳에서 기획한, 세기의 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안내서이다. 저자들 역시 세계의 석학이라고 하는데, 세기의 사상가도 이름이 가물가물한데 세계의 석학이라고 해봐야 당연히 처음 들어보지만,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믿는다.

  다행히도 두 책 모두 쉽게 읽혔다. 물론 그래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일반인을 혹은 어린이를 상대로 정교한 사상을 쉽게 전달하자니, 10,000 피스 퍼즐을 100피스 퍼즐로 그려 놓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해야 할까, 뭐 까다로운 개념들을 무 자르듯 숭덩숭덩 잘라놓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지만 그거라도 읽으면 대강 윤곽이라도 잡힐까 싶어서 열심히 읽었다 ㅋ;;. 어쨌든 엿가락 늘이듯 구질구질 사연을 읊어대는 것은 ‘열(10)매’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니고, 알아서들 읽어주시길 바라는 맘에서 다.

 

 

 

 

  하이데거의 문장은 이런 식이다. <존재와 시간> p78 이란다.

  「현존재Dasein는 그의 존재에서 이해하면서 이 존재와 스스로 관계하는 존재자다. 이것으로써 실존의 형식적인 개념이 제시되었다. 현존재는 실존한다. 게다가 현존재는 그때마다 나 자신의 존재자다. 실존하는 현존재에게는 각자성이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속해있다....」

  의 저자께서는 영어로 제대로 번역할 수 없는 하이데거의 이런 낯선 용어들과 문장 때문에 영어권 독자들은 하이데거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걸 다시 한글로 번역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뭔가 싶어 먼저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섣불리 그렇기 때문에 영어 독해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둥 하는 결론을 내리지는 마시기 바란다. 나는 결사반대다. 영어 안다고, 독어 안다고 이 책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유의 능력은 언어 능력과 반드시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금상첨화기야 하겠지만 나는 비단 짜기도 힘이 부치는 사람이다. 헤일 수 없이 많을 영어학· 영문학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카이스트에서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는 바람에, 강의하는 선생님이나 듣는 학생 모두 정작 전공과목 자체는 뒷전이고 영어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인데, 영어만 하면 과학은 저절로 다 해결된다는 것인지, 정말로 상식 밖의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는 멀쩡히 수학천재 소리를 듣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서 제발 우리나라말로 강의를 해 주실 수 없냐고 탄원서를 뿌리기에 이르렀단다. 대학에서 하는 수학 강의는 하나도 알다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세종대왕께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홇배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못할노미 하니라’ 하셨는지 백번 공감이 된다. 멀쩡히 만들어 준 한글은 버리고 왜 남의 나라 말에 유아원 아기부터 머리 허옇게 쉰 아줌마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내 오랜 지인은 이 영어 광풍으로 일찌감치 대학 교수에의 꿈을 포기했다. 동양철학 전공인 지인이 대학에서 공자를 가르치려면 먼저 미국 유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교수 자격을 위한 일종의 스펙일 뿐 아니라, 공자를 영어로 강의해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그 짓만은 죽어도 하기 싫단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 온 공자, 논어를 두고 confucius, the Analects of Confucius 따위를 찾아 외워야 하는 학생들은 도대체 學而時習之의 뜻이나 제대로 새길 틈이 있을까 싶다. ...... 다혈질은 아닌데, 갑자기 열이 ;; 여하튼 계속....

 

  하이데거는 그 만큼 어렵다는 것이 통념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은 저 두 권의 해설서를 통한 하이데거는 어이없게도 대단히 쉬웠다는 것이다. 칸트처럼 물자체가 있느니 없느니, 범주가 어쩌고저쩌고 뜬 구름 잡는 소리도 하지 않고, 헤겔처럼 절대정신이니, 정신은 뼈니 하는, 카이로스님 표현대로라면 정신 나간 그런 정신 어지러운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 내 삶을 대입해 보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고 있다. 철학이 이렇게 단순해도 돼?, 하는 의문이 살짝 들 정도로 말이다. 물론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그것이 다시 역전되어 무슨 말인지 요령부득인 개념으로 바뀌기는 하는데 일단 <시간과 존재>의 전기 하이데거는 비교적 명료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 ‘있음’의 철학자다. Sein이라는 독어는 영어로는 being, 우리말로는 존재라고 보통 번역되는데, <철학의 에스프레소>의 역자는 ‘존재’ 대신 ‘있음’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는 p39~40에 걸친 *주에 상세히 나온다. 핵심만 말하자면 Sein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영원히 그대로 있음’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해도, 옛날부터 들어온 존재라는 말이 더 편하다. 있음은 왠지 어정쩡해서 귀에 착착 감기지가 않는다. 존재론을 있음론이라고 하면 영 이상하잖아 -.-;;

  어쨌든 하이데거에 대해 말해보려면 일단 이 존재 또는 현존재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현존재 Dasein’은 ‘Da, 거기에’와 ‘Sein, 존재’가 결합된 것으로 ‘거기에 있음’을 뜻한다. 그러면 거기는 어디? 거기는 ‘세계’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럼 사람이 세계 안에 있지 밖에 있을까, 물론 하이데거의 의미는 조금 더 심오하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철학자 34명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도 하고 또 ‘공동 존재’이기도 하다.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현존재는 세계 내에서 다른 현존재와 공동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인간을 현존재로 보는 이유는 인간이 돌이나 나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인간 정신(사유 res cogitans)과 사물(연장 res extensa)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비난하면서 사물들 역시 ‘존재자’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존재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인간 고유의 존재 방식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 혹은 ‘실존주의’라고 하면 내게는 제일 먼저 까뮈나 사르트르가 떠오르지만, 실존주의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뿐 아니라 그 이전의 파스칼, 하이데거, 니체를 통해 이어져 오는 전통이라고 한다.

  나는 대학 2학년 때에 어쩌다가 까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읽게 되었다.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 책의 시작은 이렇다. "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철학이 있었다. 밤늦도록 실험실에 갇혀서 쥐나 토끼와 씨름을 할 때도, 도서관에 처박혀 알쏭달쏭한 공식들에 넌더리를 낼 때도 시지프스가 굴려 올리는 바위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까뮈의 책들을 샅샅이 찾아 읽고, ‘부조리’, ‘자유’ 같은 말들에 취했다. 그리고는 물론 오랫동안 잊어 버렸다. 그래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실존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히 설레기도하고 슬프기도 하다. 정작 실존주의가 뭔지 그런 것은 하나도 몰랐고 지금도 모르지만 그렇다.

 

  어쨌든 이 기회에 실존이 무엇인지 조금 들어보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실존이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세계-내-존재 혹은 공동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예를 들어 밀림에 야생으로 살던 늑대 인간이 문명 세계로 들어오면 그는 이 세계 내의 존재일까? 하이데거식으로 하면 늑대 인간은 세계-내-존재가 아니다. 문명 세계의 어떤 존재자와도 적절히 관계 맺지 못하고, 현존재들과도 공동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늑대 인간의 세계는 밀림이다. 거꾸로 문명인이 밀림으로 들어가면 그는 그 세계 안에 존재하지 못한다. 단순히 말해 세계란 지구 내의 국가들의 총합이나 대륙이나 바다와 같은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이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을 인위적인 고립 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가지며, 그가 다른 존재들 사이에서 다른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세계-안에-있음’과 ‘다른 것들과 함께 있음’을 말한다. 이런 개념에서 보면 인간은, 그가 개입하지 않으면 닫힌 채로 남아 있는 세계가 그를 통해 열리고, 세계가 인간에 의해 관찰되고 인식되고 감각된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존재보다 뛰어나다. ‘있는것(존재자) 전체 속으로의 침입’을 통해 이 전체가 ‘열리게’ 된다. 」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0~1

  그런데 세계는 인간의 마음대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짓듯이 그렇게 세계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 안의 다른 존재자들과 공동 존재들에 의해 인간은 존재 방식을 제한받게 된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배우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살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국회의원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 투표권에 의해 내가 원하는 국회의원을 뽑을 것이라는 희망은 거의 품지 않는다. 최악이 아닌 차악 정도만 얻어도 성공이라고 할 판이다. 다른 예로는 제자에게 철학을 하지 말라고 권유한 스승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여건상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사실상 선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일할 자유 혹은 굶어 죽을 자유는 일세기 전의 낡은 구호만은 아니다. 나도 그 분의 마음을, 그리고 그 분에게 격하게 공감하는 분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세계-내-존재는 우리가 늘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에 처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우리는 ‘거기에’를, 즉 의미 있게 구조화된 상황을 갖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행동하고 실존하게 마련이다. 현존재의 한 가지 존재 구성 틀은 세계가 언제나 우리로서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특정한 방식으로 짜여 있거나 기분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구성 틀은 우리 자신이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과 관련해서 기분에 젖어 있고 또 그 사물들이 언제나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우리를 습격한다는 사실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69

  사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하기는 힘들다. 밥도 먹어야 하고, 스마트 폰도 사야하고, 그럴듯한 명함도 있어야 하고, 자동차도 집도 필요하다. 남들보다 낫지는 못해도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 사람들, ‘세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아직도 서점에는 자기 계발서라는 책들이 쏟아진다. 이렇게 살아라, 죽기 전에 이건 꼭 해봐라, 마흔이 되면 이 책은 꼭 읽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라, 아침에 푹 자는 것이 낫다 기타 등등에 목을 매는 것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살기위해 기를 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왜?

 「 우리가 접하거나 우리가 행하는 거의 모든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언제나 타인들과 공유하는 세계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상당한 정도로 결정되어 있으며, 우리가 이러한 세계에서 실존하는 방식은 늘 본디부터 타인들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즉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다.”라는 말이다. 결국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해석은 언제나, 적어도 처음부터 타인들이 사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의해서 정해진 이해와 해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98~9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존재 방식이 딱 이것이다. 소위 엄친아들의 방식.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 방식을 ‘비본래적’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본래적인 존재방식은 무엇일까? 현존재는 세계 안에,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존재에게 세계가 단 한 가지 가능성으로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실존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현존재의 가능성으로 묘사한다. 나는 내가 사는 방식으로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는 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책임을 내가 솔직하게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문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가 앞에 인용된 문장에서 적고 있듯이 현존재의 근본 특징은 ‘각자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존재는 나의 것이라는 말인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는 나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사람의 특징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는 그러한 실존의 성격을 놓고 하이데거가 붙이는 명칭은 ‘본래성’이다....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이 된, 즉 개인이 된 사람을, 이렇게 해서 현존재로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것을 자각하게 된 사람을, 요컨대 자신의 각자성 또는 홀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떠맡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비본래적인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 오지 않았기에 남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삶의 방식을 좇아서 산다. 하이데거가 생각하기에, 실로 한 사람이 누구여야 하고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결단할 수 있는 권한을 남에게 양도하는 경향성이 만연되어 있다. 책임이란 무서운 것이다.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존재는 이 비본래적인 존재마저 책임져야 한다. 내가 비본래적이라고 해도, 내 비본래적인 존재는 여전히 내 것이라는 말이다. 」How to read 하이데거, p28~9

 

   실존은 자유와 책임이다. 하이데거는 자유가 무한하다고 보지도 않았지만,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았다.

 「모든 현존재는 모종의 ‘거기에’ 처해 있다. 나의 거기에 자체는 나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나의 자유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사물들에 대한 나의 종속 사이의 긴장으로 꽉 차 있다.」How to read 하이데거, p61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이런 실존적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등따시고 배부를때?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것은 ‘죽음’ 이다.

「 ‘세계-속에-있음’을 실존으로 보고, 그것을 더욱 정교하게 해석하면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일상적인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인간은 맨 먼저, 그리고 대부분 자기 자신으로 있지 않고 세계에 추락해 있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사람들, 그들’일 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넘겨져 있다. 그의 과제는 이렇게 얽힘에서 벗어나 정말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근본적으로 자기가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근본정서, 그리고 아무 반성 없이 편하게 살기와 망상에서 그를 밖으로 끌어내는 근본정서에서 분명해 진다.

  근본정서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하이데거는 불안이라 부른다.... 불안 속에서 그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과 세계가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님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인간은 ‘죽음을 각오한 단호함’과 ‘아무 것도 아닌 실존’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는 낯선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고유한 바탕으로부터 실존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된다.」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판, p452

  인간이 죽음이라는 불안 앞에 직면할 때 오히려 더 독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해가 가는 듯 하면서도 선뜻 무릎이 쳐지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이 부쩍 가깝게 느껴지는데, 그러니 책을 읽어야지 하다가도,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곳 놀러 다녀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려면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 예전에 아버지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듣는 것은 깨닫는 것이고, 깨닫는 것은 행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세계에 대한 ‘이해’는 인식이 아니라 ‘행위’라고 했다. 그러니 하이데거라면 배고픈 자에게도 철학을 권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을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론을 깨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전제한다면, 배고픈 자도 철학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사상이 실존 안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의 결과는 비극적이게도 나찌의 ‘국가사회주의’였을 지라도 말이다. 하이데거는 “한동안 죽음을 향한 여기있음을 영웅적으로 견디기라는 자신의 사상이 국가사회주의에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두게 되었고, 이후 후기 하이데거의 사상에는 많은 변화가 왔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하이데거가 자신의 사상을 철회했던 것일까에 대한 새로운 반론이 제기 되고 있다. 하이데거의 사상과 나찌 참여 그리고 한나 아렌트와의 스캔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시작하기는 힘이 달리고, 세미나 전에 다른 글로 발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보통 하이데거는 나찌 참여까지의 전기와 그 이후의 후기로 나누어진다고 하는데, 나찌 참여 기간을 중기로 잡아서 세 시기로 세분하는 하이데거주의자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발제는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전기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다.

 

  끝으로 하이데거 사상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란 질문을 해 보고 싶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논리 보다 기분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기분으로 말해보자면 글쎄... 우리 사는 세계를 외형적으로는 잘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어째 복잡한 사회와 뒤엉킨 사유의 회로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예리한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해놓고 날카로움 운운할 처지는 아니지만, 하여튼 뻔뻔하게도 그렇다, 기· 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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