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오류 - 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
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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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년 3월 11일, 카페 소모임 책 감상문입니다.

 

 

나의 오류는 무척 상식적이었다. ‘아담’ 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덴동산의 그 벌거벗은 아담을 떠올리지, 단번에 아담 스미스를 떠올릴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말이다. 어쨌든 나는 약간 화가 났던 것 같다. 원죄만으로도 억울한데, 아담의 오류라니? ‘오류’란 꼼짝없이 아담 자신이 책임져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인데, 사과 한 입 베어 먹은 죄 같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도 수 천 년 동안 닦달을 당하고 있는 판에, 털어 먼지 하나라도 나오는 날에는 또 무슨 죄를 얼마나 오랫동안 업보로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살짝 호기심이 당기긴 했다. 아담의 오류란 건 도대체 뭘까? 인류의 뭔가 치명적 오류가 드러났다는 것은, 원죄 운운하는 그 분만 아니면, 어쩌면 전화위복임이 분명할지도 모른다. 드디어 인류 보완 프로젝트가 가동될 수 있는 걸까? 유토피아가 더 이상 불가능의 땅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인가? 

  물론 한 입 베어 먹은 푸른 사과 안에 뉴튼인지 스미스인지의 사진이 박혀있는 책, 「아담의 오류」를 넘겨보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펼칠 상상력 따위는 없었겠지만, 여하튼 300페이지 정도 되는 「아담의 오류」에는 에덴이나 이브는 없었다. 그 대신 아담 스미스를 필두로 맬서스, 리카도, 마르크스, 파레토, 베블런, 케인즈, 하이에크, 슘페터 따위의, 들어본 듯은 한데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이름들이 잔뜩 포진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 아담의 후예들이여! 세계의 99%를 고통에 빠뜨린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는 바로 아담의 원죄를 청산하지 못한 이 후예들의 작품이 아니던가! 물론 숨차게 나열한 저들 모두 가 아담의 후예라는 건 아니고, 아담의 반-후예들도 있다, 물론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우연이겠지만, 이번 달 우리 지역 도서관의 ‘목요 인문학’ 강좌는「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이다. 인문학 책을 읽다보면 좋든 싫든 마르크스란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없고, 또 「자본론」의 명성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자본론이 어떤 책인데, 덥석 덤벼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웬만한 사람들도 자본론 1장 상품편인가 뭔가에서 다 꼬꾸라진다고들 하니까. 그런데도 다들 윗집 강아지 부르듯 맑스, 맑스하니까 , 나도 아~ 마~악스! 하게 된다,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그러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 마르크스 연구의 일인자인(그렇게 들은 것 같다..) 김수행 교수가 하는 그런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강의는 아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 임승수는 사실 우리 카페가 목표로 내세운 ‘일반인 저자’ 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공대 나와서 IT 업계에서 월급쟁이 5년을 하다가, 「자본론」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서 이 길로 나섰다는 것인데, 그 충격은 네오가 빨간약을 먹었을 때의 그것과 같다고 했다. 지금은 인문학계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종 강연과 글쓰기를 한다고 하는데,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차베스, 미국과 맞장뜨다」,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공저), 「청춘에게 딴 짓을 권한다」, 「글쓰기 클리닉」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는 소모임의 「아담의 오류」대신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3월 한 달 동안 매주 목요일에 하는 강좌여서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물론 공짜이기도 하고 ㅎ.

  첫 강의의 소감은 따뜻한 숭늉을 마신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강렬하지는 않지만 뭔가 은은한 맛이 있는...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조심하는 그런 까탈스럽고 예민한 학자도 아니고, 머리에 든 것을 쏟아내기에 숨 가쁜 그런 폭압적 스타일도 아니고, 간결하고 쉽고 그렇지만 울림이 있는...그런 느낌이어서 나는 좋았다. 경제학에 얼마나 해박한 지식이 있는지, 「자본론」을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제학을 전공할 것도 아닌데 큰 틀에서 오류가 없다면, 너무 단순화했다고 해서 걱정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나는 「아담의 오류」가 다루고 있는 대결하는 두 그룹 중 한 쪽 편의 이론을 도서관 강좌를 통해 배우는 셈이다. (이걸로 모임 불참에 대한 변명을 ;;)

 

 

 「아담의 오류」로 돌아와서... 발제를 하거나 독후감이라도 쓰고 싶지만, 史라는 것의 특성상 참 난감하다. (나는 모임에 빠지는 대신 on을 통해 발제하고 함께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저자 던컨 폴리가 해 놓은 작업이 사실 하나의 발제라고 할 수 있다. 1776년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이래로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제학계를 주름잡았던 경제학자들과 그들의 주장과 주의를 요약해서 내 놓은 책이 바로 「아담의 오류」일 텐데 뭘 또 발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경제학에 무슨 조예가 있어, 나는 고전파 이론이 맞다고 생각해 또는 그래도 마르크스의 분석이 더 타당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좀 남겨 두고 싶기는 하다. 적어도 제목 「아담의 오류」라는 것이 뭘 말하는지 정도라도. (그런데 쓰다보니 예상외로 긴 글이 되었다;;)

 

 

 

  사실 ‘아담 스미스의 오류’가 무엇인지는 책의 서문에 잘 나와 있다. 특히 p10~12에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저자는 경제학이 수학이나 물리처럼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과학이라기보다는 사변적인 철학 혹은 신학에 가깝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아담의 오류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그의 시장 방임주의적 주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근본적으로는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경제적 삶의 공간과 윤리나 세계관에 의해 작동하는 그 밖의 나머지 사회적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는 경제학자들의 사고 자체에 있다고 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경제학이, 가장 흥미롭고 추상적인 수준에서 보면, 연역적이거나 귀납적인 과학이 아니라 사변적인 철학 담론이라고 생각하며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책에 “경제 신학에 관한 안내서”라는 부제를 붙였다. 나는 이와 관련된 논거들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관점으로 “아담 스미스의 오류”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했다. 아담 스미스의 저작이 지닌 가장 중요한 측면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경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의다. 이는 사실이 아니라 신념과 믿음, 따라서 신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다.』

  생뚱맞을지 모르지만 빌 클린턴이 했다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지만 이 슬로건으로 빌 클린턴이 대선이라는 정치 영역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또한 역으로 경제란 사실 정치 철학 혹은 정치적 믿음과도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란 말과 그것은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의 법칙이란 주장을 했지만 (사실 요즘 좌파들은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의 영역에서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발전의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더 타당한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체적인 본문 내용으로 좀 더 들어가 보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p 27~8) 아담 스미스나 그 이후 아담의 후예들이 전제로 삼는 법칙이라고 하는데, 한 마디로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주장이다.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냐고? 아담 스미스 시대에 분업과 노동 생산성의 증가로 당연히 실업이 증가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세의 법칙”에 의거해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실업자는 사실상 ‘자발적 실업자’라는 것인데, 상황이 변했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돈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에 있다는, 요즘도 자주 듣는 그런 주장의 오래된 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업이라는 이 심각한 문제가 전 세계의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도대체 “세의 법칙”이라는 것이 여전히 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금과옥조인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다면 언제쯤 이 세계적 실업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유럽에서의 청년 실업 문제는 벌써 수 십년 이래 악화되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어쨌건 아담 스미스하면 국부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잠깐이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스미스는 타인들에게는 해로울 수도 있는 냉혹한 이기심의 추구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도덕적 선으로 변형된다는 독창적인 주장을 통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철학적 ·도덕적으로 옹호한 이로 알려져 있다. 이 주장이 타당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의 역사가 얼마나 간단하겠는가! 스미스는 자신의 자본주의적 기획에 대한 찬양에 걸맞은 논리적 기반을 엄밀하게 구축하지 않은 채, 그것에 일반적 선의와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고기집 주인이나 제빵사의 선한 의지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유명한 이야기는 스미스의 주장의 좋은 사례다. 이런 주장의 명백성과 현실성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가 작동하고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진정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기심의 추구가 긍정적인 이득이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스미스는 적대적인 시장 관계가 분업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고, 우리의 저녁 식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의 사적 소유관계가 수반하는 분배적 불평등과 도덕적 폭력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스미스는 상품 가치에 대한 지대의 의존성과 구성 가치론을 조화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 주장을 제기하는 데에 실패했다. 』p 64~5

  나는 가끔 중국의 경제체제가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공부를 하면 그래도 좀 알게 되겠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중국이 자본주의가 아니면 뭔가 싶기도 하다가, 국가 자본주의라는 것이 말이 되는가 싶기도 하고, 하여간 잘 모르겠지만, 궁금하기는 한데, 또 알아보려고 선뜻 공부하게 되지는 않는다. 누가 좀 알기 쉽게 말해주면 좋겠다. 분업과 생산력의 향상 같은 것들은 마르크스도 옹호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국가의 계획이나 혹은 윤리적 태도를 지닌 공동체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발전 가능한 것인지, 그에 관한 하나의 답을 중국에서 찾을 수 있을 런지가 궁금하다. 물론 북유럽의 사민주의나 심지어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에서도 역사적인 사례가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여하튼 중국이 참 궁금하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은 맬서스다. 맬서스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정도의 기억만 있는데, 이 주장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것인지는 정말 몰랐다. 구빈법에 대한 멜서스의 비판은 이렇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이런 비인간적인 주장이 통하는 것은 200여 년 전이기 때문이지 하고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저자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미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연방복지 정책을 비판하면서,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고 한다.(p79) 맬서스의 입장에서는 비인간적이라는 말이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인간 개개인에 대한 연민은 없지만 인류 전체에 대해서만은 성자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비꼬아 보다가도 참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눈을 돌리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요즘 맬서스에 동의 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고령화 사회니, 저 출산이니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출산 장려 운동을 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청년 빈곤 문제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3포 세대의 등장은 이 시대의 비극이지만, 관점에 따라 적극적 의미로 전환될 수도 있다.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3포’를 넘어 ‘삶포’가 되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이 빈부격차의 시대에, 기껏해야 실업자로 노동예비군으로 상품 소비자로서의 권리만이 허락되는 이 사회에, 무엇하러 또 똑 같은 운명의 노예를 길러내어 바친다는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출산을 거부하고 더 이상 아무런 노동자도 소비자도 재생산해 내지 않을 때, 이 사회가 어떻게 굴러갈지 나는 참으로 궁금하다. 노예 없이 주인들만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지도 궁금하고, 자본가들이 전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어 내는 그 훌륭한 상품들을 구매해 줄 소비자가 없는 세상은 또 어떤 모습일지도 궁금하다. 전 세계의 99%가 일제히 출산을 포기할 때 과연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상상은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절멸이다. ‘바틀비적 태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푸른바다님이 쪽글 과제로 내주신 진중권의 <아이콘>에도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바틀비다.

 (몇 년 전에 읽은 <시차적 관점>의 인상을 기억하면서 아래 내용을 썼으나, 막쪽글을 위해 다시 <시차적 관점>의 몇몇 부분들을 읽으면서, 내가 여전히 바틀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진중권의 글은 무언가 핵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진중권의 표현을 표면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아래부분의 글은 쓰지 않는 것이 더 좋았겠지만, 이미 읽을 분들은 모두 읽은 이후 이므로 삭제하지 않고, 내 사고의 오류의 흔적으로 남겨 두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글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지젝의 바틀비가 무엇인지 참으로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래의 문장들은 사실 단순히  <시차적 관점> 뿐만 아니라 지젝의 다른 책들에 대한 기억이 얽혀서 나온 것들이어서, 내 나름대로 종합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불완전한 기억과 독서 당시의 표면적 인상에 의지했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그리 믿을만한 것은 될 수 없지만 말이다. 여하튼 나중에라도 다시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를 부탁드린다. : 3.15에 덧붙임)

바틀비적 태도란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I would prefer not to~' 의 태도다. 비폭력 저항과 유사한 것도 같은데, 사실 그것 보다 더 수동적인 형태로 보인다. 진중권이 자신의 글에도 소개했듯,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던 바틀비는 어느 날 갑자기 ‘ I prefer not to~’라고 말하며, 일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사무실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거기서 먹고 자면서 그냥 버틴다. 참다못한 변호사가 사무실을 옮기고 난 후, 바뀐 주인에 의해 바틀비는 사무실을 쫓겨나 방랑하게 된다. 방랑죄로 감옥에 들어간 바틀비는 감옥에서 사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음식을 거부하고 끝내 굶어 죽는다. 진중권은 삶의 포기라는 이 소극적 저항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꼬는데,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은 이 바틀비적 태도를 대단히 강력한 저항의 형태, 심지어는 이 시대의 유일한 저항의 형태로 격상시키기까지 한다. 나도 사실은 바틀비가 뭐 그렇게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런 주장이나 설득도 없이 혼자서 하는 저런 저항이, 자기 자신에게는 목숨을 건 사투라 할지라도 실질적으로 전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바틀비의 ‘ I prefer not to~’란 적어도 진중권이 희화화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 혹은 ‘참여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진중권의 글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그 자신의 몰이해를 드러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진중권 자신이 들뢰즈, 아감벤, 네그리, 지젝이 ‘바틀비’를 이론화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결론에 가서는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따위의 ‘참여의 거부’로서 바틀비적 태도를 왜곡해 버린다.

  바틀비적 태도는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기를 소멸시키면서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다. 주춧돌 하나를 조용히 빼냈을 때 집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빼기의 형태가 바틀비적 태도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촛불 시위대의 진압 경찰이라면 ‘나는 진압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사교육 현장의 선생이라면 ‘나는 가르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그리고 ‘나는 대기업에 취업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고, ‘결혼을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이고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과 그리고 후세의 모든 것을 거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나는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따위의 자기 합리화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어쨌든 세계의 모든 청년 실업자들이 동시에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란 태도를 견지한다고 상상해 보자. 2~30년 후에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 불가능성이 현실화되고 있다. 3포 세대의 연애, 결혼, 출산 포기 선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부정어, not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 I would not prefer to~'를 ’I prefer not to~'로 전환시키는 것,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하기를 선호하지 않습니다.’에서 ‘나는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로. 극복할 수 없는 빈곤과 실업에 의해 수동적으로 떠맡게 된 ‘3포’, 그 비극적 부정성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긍정하는 것이다. 사실 여기서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불가능성, 부정성을 가능성으로, 부정의 부정으로 바꾸어 바라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냥 ‘아무것도 안’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아무것도 아님’의 차이, 극소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일시에 세계는 정지할 수 있고, 그 자리에서 폭삭 무너질 수도 있다.

  하나의 멋진 상상, 혹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자기 절멸’은 인간 본성에 가장 극단적으로 반하는 것일 테니, 윤리적이든 뭐 어떤 측면이든 하여튼, 뭔가 당당히 주장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통쾌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장 마르크스 부분을 읽다보면, 뜻하지 않게 멜서스와 비슷한 생각을 만나게 된다. 물론 전혀 다른 목적에서긴 하지만, 방법적으로는 참 유사한 면이 있다.

  『 마르크스는 진정한 정치투쟁은 노동계급이 경제를 관리하는 책임감 있고, 신뢰할 만한 행위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노동계급의 개혁 지향적인 정치와 싸우는 것 역시 진정한 정치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양면적 정치의 토대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여러 조건들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던 이들에 대해, 자본주의의 점증하는 모순으로 말미암아 장기적으로는 부적절함이 입증될 개혁주의자들에 불과하다고 끊임없이 혹평했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적 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운전석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노동계급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것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p173~4

  다시 진중권의 이매진으로 돌아가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바틀비에 관한 진중권의 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이 있다.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가 바로 그것이다. 진중권은 ‘나는 이명박 정권과 싸우는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 ‘나는 크레인 위의 4대강 농성자들에게 연대를 보내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와 함께 ‘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를 바틀비적 태도의 예시로 들면서 싸잡아 ‘참여 거부’ 행위로 폄훼한다. 그런데 사민주의에 대한 좌파적 반대가 단순히 정치 행위에 대한 참여 거부와 동일시 될 수 있을까? 아마, 당신이 좌파라면 펄펄 뛰고도 남을 모욕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에는 그런 오해를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된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아닌 개혁에는 분명히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혁명은 아무 때나,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 동안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으라는 걸까? 사실 바틀비적 태도에 대한 열광에는 좌파의 어떤 딜레마가 숨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상황을 개선시킬 그 어떤 행위도 혁명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능동적인 행위 보다는 바틀비적 수동성, 빼기의 행위만이 가장 혁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빼기는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빠져나옴이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로서의 빼기를 의미할 것이다. 체계를 붕괴시키는 빼기, 이를테면 ‘나는 주식을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모든 개미들이 일시에 주식에서 빠져 나온다면 주식으로 먹고 사는 부자들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길을 잃고 헤매 본 적이 거의 없다.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무작정 헤치고 들어가는 무모함도, 용감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을 쓸 때면 자주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잘 모르는 길이고 사방이 얽힌 길이라, 자칫하면 꼬꾸라진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이 뻗치는 대로 자판을 두들기다보면 터무니없는 비약을 하기도 하고, 무슨 소린지 나도 의심스러운 말들을 마구 쏟아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일관성도 없고, 마무리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름 있는 필자도 아니고 논객도 아니니 책임도 없다는 똥배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혹시 말이 아주 안 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욕심이 쪼금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독후감 삼아 써 본 글인데, 실타래를 풀려다 오히려 엉클어 놓은 것 같다. 오늘은 엉킨 실타래지만 언젠간 또 어떤 문제를 살살 풀어 낼 실마리가 되 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뒤죽박죽 써놓은 글이라도 일단 띄워 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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