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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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캉,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는 우리 일반 독자들도 제법 많이 듣는 이름이다. 아마 그 만큼 현재 인문학계에 주요한 인물일 것이다. 저자들의 글은, 라캉과 알튀세르는 각각 핵심 논제 하나를 중심으로, 푸코는  전체적인 사유를 중심으로, 들뢰즈는 '존재론' 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한꺼번에 쓰려고 했으나, 알튀세르에 대한 리뷰는 분량이 많고, 문제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별도로 올렸다. 그래도 역시 길다;;

 

 

 

 

 

<자크 라캉의 소유할 수 없는 편지>

김서영

 

 

  라캉은 수없이 회자되지만, 정작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쓴 단 한권의 책인 『에크리』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지 않았다. 27차례에 걸친 그의 세미나는 녹취록을 바탕으로 몇 권이 출간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세미나 11』 한 권만이 번역되었을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라캉은 대부분 누군가의 재해석을 통해 간접 전달된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아쉬울 것은 없다. 특히 우리 일반 독자의 경우 라캉을 혼자 읽기는 거의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이, 애드가 앨런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분석을 다루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단 포우의 소설이 그 자체로 재미있고, 이 소설에 대한 라캉의 분석이 일반 독자에게도 아주 흥미롭기 때문이다.

 

 

  라캉은 『에크리』의 첫 장을 이 편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라캉을 다루는 책들도 대부분(내 독서 범위 내의 대여섯 권?) 이 편지 이야기를 짚고 넘어간다. 그 만큼 여기에는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대표적인 라캉 입문서인 숀 호머의 『라캉읽기』는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라캉의 세미나를, “주체는 한 기표에 의해 다른 기표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 a signifier represents a subject for another signifier") 라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한다. “주체는 의미작용의 연쇄 안에 포획되어 있는 반면, 기표는 주체를 특징짓고 상징계 안에서 주체의 위치를 결정한다.” (『라캉읽기』p88)

 

  『도둑맞은 편지』는 익명의 편지를 가운데에 두고, 왕-여왕-장관의 삼각형 구조를 그리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 - 편지를 보이는 곳에 둠으로써 완벽히 숨겼다고 착각하는 여왕 -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며 여왕의 눈앞에서 편지를 훔치는 장관. 그런데 여왕이 편지를 되찾아 오라고 지시하게 되자, 동일한 삼각형에 배치되는 인물이 바뀌게 된다. 편지를 찾지 못하는 경찰 - 편지를 보이는 곳에 둠으로써 완벽하게 숨겼다고 착각하는 장관 - 편지가 어디에 숨겨진 것인지를 알아차린 탐정 뒤팽.

 

  편지는 숀 호머가 말한 ‘기표’ 이다. 소설 속의 인물은 물론 독자 역시 그 편지의 내용은 모른다. ‘기의 없는 기표’ 이다. 그런데 이 익명의 편지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인물의 행동과 위치는 달라진다. 주체가 편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가 주체의 위치와 성격을 특징짓는다.

 

  저자 김서영은 여기에, 데리다에 의해 촉발된 “편지” 논쟁을 조금 덧붙인다. 간단히 말하면 편지를 분석하고 있는 라캉 역시, 장관이나 뒤팽처럼 처음에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주체의 위치에 등장하지만, 곧 이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주체의 위치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라캉의 분석을 비판하며 라캉의 위치를 차지하는 데리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논쟁에 뒤이어 뛰어든 바바라 존슨이라는 사람이다. 존슨은 데리다를 재비판하면서, 이번엔 데리다가 착각하고 있는 위치로 이동하고, 자신이 상황을 알고 있는 주체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 다른 누군가가 개입해서 자신을 해석한다면, 자신 역시 착각하는 위치로 옮겨지는, 끝없는 순환이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편지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편지는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끝없이 이동할 뿐이며, 그 이동에 따라 삼각형의 구조를 이루는 각 주체들의 성격 역시 달라진다. 데리다는 라캉의 논리에 따라 라캉을 비판했지만, 데리다 역시 동일한 논리에 의해 비판당한 것이다. 이 논쟁에 뛰어든 사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누구도 불변의 의미를 획득할 수 없고, 영구히 진리의 위치를 차지할 수 없다.

 

  편지letter는 문자와 철자가 같다. 문자, 즉 언어는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를 통하여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무의식을 타자의 담론이라고 정의한다. 대타자는 언어 즉 상징계이다: 이 타자는 결코 주체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근본적인 타자성이다.” (『라캉읽기』p85)

 

  저자 김서영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 덧붙여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를 부연 설명한다. 라캉 이론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이 그래프는 언뜻 보면 복잡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살표(→)로 이어진 비교적 단순한 도식이다. 나는 한권의 책보다 이런 도식을 좋아한다. 기억하기도 쉽고, 한 눈에 다 들어와서 좋다. 물론 이 그래프에 어느 정도라도 익숙해지려면, 몇 권의 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책 한권을 읽고 이 그래프를 다시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보이고, 또 다른 책을 읽고 한 번 더 들여다보면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다.

 

 

 

 

 

<미셀 푸코와 자기 변형의 기술>

허경

 

 

  얼마 전까지 나는 푸코와 에코를 자주 혼동했다. 프랑스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인데도 그랬다. 나는 푸코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도서관에 푸코의 책은 많았지만, 왠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이년 전쯤, <안전, 영토, 인구>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부터 참 지루해 보였는데, 웬걸 뜻밖에 참 재밌었다.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10여 년 간 강의한, 강의 녹취록 중의 한 권인데, 우리나라에도 이런 강의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주제를 위해 수집한 그 방대한 사례들이 놀라웠고, 지금 눈앞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 그 기원을 밝히는 작업이 참 흥미진진했다. 철학자에 대한 선입관을 깨고, 철저히 자료나 통계를 통해 현상을 분석해 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계보학이나 고고학이란 말이 이런 것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푸코의 그런 개념들이 무엇인지 그 이후로 찾아본 적이 없어서 지금도 잘 모르긴 하다. 어쨌든 올해 또 다른 강의가 번역되었는데,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이 그것이다. 이 강의는 <안전, 영토, 인구> 다음 해에 진행된 강의로, 두 강의는 연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내가 아는 푸코는 달랑 이 두 권 뿐이다. 그 유명한 <성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 등은 여전히 제목만 알고 있다.

 

 

  허경의 <미셀 푸코와 자기 변형의 기술>은 정리가 참 깔끔하다. <처음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철학자들 12명 중, 전체적인 윤곽이 가장 뚜렷하고 알기 쉽게 그려져 있다. 어떤 한 부분에 대한 세밀화를 그리든, 전체적인 윤곽만 스케치하든 그건 강의자들의 취향이겠지만, 여하튼 초상화로 치자면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알아보기 쉬운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철학함’을 “매일매일 변화하는 오늘-여기-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은 ‘현재의 진단학’, ‘오늘의 진단학’ 이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 고전철학이 다루는,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문제에 대해 푸코는, “ 나는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라고 답했다.

 

  뿐만 아니라 푸코는, 사람들이 ‘어떤 무엇의 본질이 시공을 초월해 있다’ 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역사적 구성물이라고 보았다.

 

  「푸코는 이른바 지도도 달력도 없는 ‘진리’란 사실은 그렇게 구성된 하나의 진리 개념에 불과하며, 그렇게 구성된 진리 놀이의 틀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고 느껴지도록 ‘조건화’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우리가 탐구해야 할 것은 ‘주어진’ 문제 틀 곧 영원불변하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문제 틀 자체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됐는가를 살피는 일일 것입니다. p260 」

 

  푸코는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탐구를 위해, ‘지식·권력·윤리’라는 세 영역에 대해서 ‘고고학·계보학’ 이라는 두 가지 방법론을 적용했다. 그 결과를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말과 사물』로 대표되는 ‘지식의 고고학’ 시기,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계보학’ 시기, 주체화의 문제를 다루는 ‘윤리의 계보학’ 시기이다. 이런 푸코의 작업은 그 자신이 말년에 한 어느 인터뷰를 통해 그 전반적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목표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적〕풍경의 일부가 실제로는 어떤 매우 정확한 역사적 변화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분석은 인간 실존에 보편적 필연이 있다는 관념에 대립합니다. 나의 분석은 제도의 자의성을 보여주고, 또 우리가 여전히 누릴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은 무엇이며, 아직도 얼마만큼의 변화가 가능한가를 보이고자 합니다.” p271」

 

 

  푸코는 죽었지만, 푸코적 탐구는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최근에 가장 문제적으로 떠오른 보편적 진리는 아마도 ‘민주주의’ 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의회주의’, ‘민주적인 제도’ 따위로 인식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시장자유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경제가 불안해져 감에 따라,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 역시 커져 가고 있다. 투표율은 떨어지고, 국회는 경멸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여전히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민주주의는 불변의 진리일까?’ 라는 의문을 품는 것조차 생뚱맞고 불편하다. 특히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민주주의’ 는 절대 척도이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행위는 절대 선이고, 반하는 행위는 악이다. ‘민주주의’는 대체 언제 어디서 생겨난 것인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어떤 ‘고고학’과 ‘계보학’을 가지고 있는지, 민주주의의 보편성은 어떻게 획득되었는지, 감히 질문조차 못하고 있다.

  푸코는 보편적 진리는 없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구성된 것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질 들뢰즈의 존재론 새로 읽기>

김재인

 

 

  김재인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존재론’이라고 새롭게 규정한다. 들뢰즈가 우리나라에 소개된지 25년이나 되었고, 대부분의 책이 번역되었지만, 핵심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들뢰즈야, 전공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의 경우는 수유-너머의 이진경을 통해서 접한 경우가 많다. 노마디즘, 탈주, 탈영토화 따위의 생소한 용어들도 대강 무슨 뜻이려니 짐작은 할 만큼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김재인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들뢰즈의 핵심은 아니라는 말이 된다. 뭐 딱히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도 사정은 비슷하다고 하니, 살짝 덜 억울(?)하긴 하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저자 김재인의 주장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이 글은 들뢰즈 철학의 핵심이 되시는 ‘존재론’ 을 다루고 있다.

 

  들뢰즈의 존재론은 한마디로 ‘비인간주의 존재론’ 이다. 존재론하면 대부분 인간을 토대로, 그것도 인간의 의식을 중심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들뢰즈가 보기에 인간은 의식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물질, 동물로서의 몸, 마음이라는 세 측면이 함께 있으며, 마음 중에도 의식을 넘어서는 측면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서 착안하여, 존재를 무의식의 측면에서 파악하려 했다. 그러나 들뢰즈의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는 달리 정신 현상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이외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의식의 여집합’ 을 의미한다.

 

  「들뢰즈에서 ‘무의식’은 ‘의식’의 여집합을 가리키며, 인간을 구성하는 ‘의식’이 아닌 비인간적 요소를 총칭합니다. 따라서 무의식의 탐구는 비인간주의의 핵심에 있습니다. 오늘날 무의식에 대한 탐구에 있어 첨단에 있다고 자임하는 분과가 정신분석이죠. 따라서 정신분석과의 대결은 들뢰즈 작업의 중심을 관통합니다. 그러나 들뢰즈가 보기에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발견한 공로가 분명히 있지만, 무의식을 재차 의식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정신분석 이외의 자원을 동원하여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수행합니다. p282」

 

  들뢰즈에게 무의식은 우주 전체에 대한 탐구다. 들뢰즈는 무의식을 ‘고아’라고 한다. 천체 물리학은 아직까지도 우주 탄생, 즉 ‘최초의 원인’에 대해 해결을 못 보고 있다. 들뢰즈의 ‘고아론’은 아예 최초의 탄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시작이 아니라, 순환의 관점을 주장한다.

 

  「순환의 관점이 아니고서는 최초의 원인, 초월성을 도입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생산, 순환 운동이 정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들뢰즈가 보기에 지금껏 우리가 ‘자기-원인’ 내지 ‘자기-생산’의 영역에 이르지 못한 것은 생산에 대한 인간주의적 착상 때문이었습니다. p285」

 

  들뢰즈에게 우주를 이루는 요소는 ‘욕망(적) 기계’이다. 우리는 들뢰즈하면 ‘욕망하는 기계’ 를 떠올리는데, 저자는 번역의 오류를 주장한다. ‘욕망하는 기계’라고 하면 기계가 마치 욕망하는 주체인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은 거꾸로 욕망이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욕망은 기계의 ‘내재적 원리’ 다. 우주 운행을 추동하는 힘이 욕망이다. 이 욕망, 욕망 에너지를 들뢰즈는 리비도라고 부른다. ‘기계’란 우주의 운행이나 생산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존재는 기계들이며, 존재의 내재적 가동 원리는 욕망이다.

  「잠깐 정리를 해볼까요? 무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은 우주 전체라는 것이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것이죠. 초월적인 생산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주의 구성 원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바로 욕망 기계였지요. p294 」

 

  저자는 마지막으로 ‘생산의 수동적 종합’ 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데, 조금 복잡하니 요약은 생략하겠다. 다만 여기서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기관 없는 몸’이 나오는데, 조금 인용해 놓겠다.

 

  「존재의 운행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며 창조될 수 있으려면, 그 내부에 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틈이 순간이며,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시간 계기입니다. 기관 없는 몸은 기존의 규정성이 박탈되고 해체되어 규정성을 상실하게 된 바로 그 순간 상태입니다. 물론 바로 새 규정을 부여받는 다음 순간 상태로 이행하지만 말입니다. 기존 것들이 무화되고, 새로운 것들이 탄생하는 시간인 것이죠. 우주의 운행은 시간의 단절을 내포합니다. 기관 없는 몸은 ‘죽음 본능’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생성이 계속되려면 죽음이 필연적 계기로 개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주 삶의 동력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단절이, 끊어 냄이 없다면 시작이, 탄생이, 새로움이, 창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p299」

 

  이 ‘기관 없는 몸’이 들뢰즈의 주체다. 그러나 기관 없는 몸이 모든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없는 몸은 결과에 불과하다. 주체는 존재 생성의 경과에서 마지막에 생산되는 신경 상태들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능동적이지 않고, 고정된 정체성을 갖지도 않고, 행동의 출발점 또는 중심에 있지 않고, 주도적이지도 않다.  들뢰즈의 ‘비인간주의 존재론’에 주체는 주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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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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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의 글은 거칠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원래는 강의)에서, 전문가의 ‘거침’은 오히려 미덕에 속한다. 간명한 만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 최원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을 보여주려 하면서, 이 ‘거침’은 이면의 문제를 드러낸다. 비판과 재비판이 꼬리를 무는 논쟁은 정치한 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단순화 시킨 논리는 의문을 일으키고, 성급한 비판은 섣부른 편견을 심어준다. 특히 비전문적인 우리 독자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 위험성이 적지 않다.

 

 

 

 

  최원은 먼저 알튀세르의 대표 테제인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간략히 소개한다. 이 테제의 내용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는 것이다. 이 짧은 정의가 그토록 논쟁적인 이유는, 이것이 ‘주체’에 관한 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명 테제가 당시 주체에 대한 논의에 강력한 개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음으로써 주체를 근본적으로 자율성이 아니라 타율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p212」

 

 

  말하자면 알튀세르 이후 주체는 자율성을 잃고, 타율적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주체는 “왜 주체는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잘못된 생각에 그토록 쉽게 설득 당하는가?” 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주체는 구성된 존재니까,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자유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주체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주체에게 ‘저항’이나 ‘반역’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최원은 여기서 우회로를 선택한다. 알튀세르의 후계자인 발리바르, 랑시에르, 혹은 바디우를 통하지 않고, 최원 자신이 알튀세르의 비판자로 지목한 지젝을 경유하여, 알튀세르를 변론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를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이 미로를 경유하다 보니,  글은 자칫 거칠어지기 쉽다.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 지젝은 알튀세르에 대한 볓볓 비판을 제출하는데, 그 핵심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완전한 방식으로 주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어떤 나머지 또는 잉여로서의 공백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인데, 이 공백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상상적 동일성의 주체와 구분되는) 진정한 주체이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나중에 주체가 저항하고 반역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주체는 사실 호명이 있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이 주체가 없다면 호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공백으로서의 주체는 호명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것의 궁극적 실패 원인을 이룬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주체 이전에 오는 (진정한) 주체가 있다’ 고 말입니다. p214」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지젝에게서 ‘진정한 주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나는 없지만, 그리고 ‘주체 이전의 주체’ 는 매우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용어지만 말이다.

  ‘주체 이전의 주체’에서 두 주체는 동일한 층위에 있지 않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지젝은 ‘주체 이전의 주체’ 가 아니라 ‘주체화 이전의 주체’(『까다로운 주체 p261)』 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일반 독자들은 ‘주체 이전의 주체’ 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란 주체의 등 뒤에서 이 ‘나’를 조종하는 또 다른 실체로서의 주체가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공백’ 이다. ‘공백으로서의 주체’ 라고 최원 자신이 언급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지젝이 주장하는 ‘공백’인 주체 혹은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캉식으로 하자면,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로 반전되기 이전의 죽음 충동의 순수한 부정성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라캉의 요점은 주체가 우주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 속에 그것의 구성적 공백으로서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 존재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를 지탱하는 행위의 우연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존재의 온전한 질서 속에 구멍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존재의 바로 그 보편적 질서를 구성하는 우연적-과잉적 제스처다. 」(『까다로운 주체』,지젝, p261~2)

 

  어렵지만 최원의 말과 비교하며 조금 따라가 보자.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 란 알튀세르의 개념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응답하는 것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합리성을 따져 주체로 하여금 부름에 응하도록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또 다른 실체가 아니다. 주체는 ‘순수한 부정성’ 이며 ‘공백’이고 ‘우연적’인 제스처 이다. 최원 역시 그런 의미로 지젝을 요약했겠지만, 일반 독자인 우리로서는 그 짧은 요약을 통해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즉 주체는 주체화의 제스처에 의해 메워지는 바로 그 틈새이다. 요컨대 알튀세르, 데리다, 바디우와 같은 상이한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그리고 부정적 방식으로 답변된) 물음 - ‘주체화의 제스처에 선행하는 그 틈새, 열림, 공백은 여전히 “주체”라 불릴 수 있는가?’ - 에 대한 라캉적 답변은 단호한 ‘그렇다!’이다. 주체는 존재론적 틈새인 동시에 보편자와 특수자 간의 단락에 의해 이 틈새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이다. ‘주체성’은 이 환원불가능한 순환성에 대한 이름이며, 외부의 저항하는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내속적인, 궁극적으로 바로 주체 그 자신인 장애물과 싸우는 권능에 대한 이름이다. 다시 말해, 틈새를 메우려는 주체의 바로 그 능력은 사후적으로 이 틈새를 지탱하며 생성한다.」 (『까다로운 주체』, 지젝,  p259)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는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바그너의 <파르시팔>에 나오는 대사다. 여기서는 ‘주체화 이전의 주체’를 비유하고 있다. 주체는 틈새 즉 상처인 동시에, 그 틈새를 메우는 즉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주체와 주체화는 서로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다. 내부에 상처가 있고, 그 후에 외부로부터 치유가 오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치유이고, 치유가 상처이다.

 

  물론 최원의 글 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제목부터 '까다로운 주체' 다. 나와 자아와 주체를 애초에 구분할 생각도 없고, 구분되지도 않는 생활인들에게는 다 개 풀뜯어 먹는 소리처럼 들릴만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해를 위해 이 긴 인용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냥 지젝이 말하는 이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최원이 지젝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와 같은 것인지, 전혀 다른 것인지 , 척하고 감으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것과 최원의 것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최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최원의 설명은 주체의 등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주체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꼭두각시와 그것을 조종하는 난장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끝난다면 사실 그다지 불만스러울 것은 없다. 학자는 학자처럼 말하고, 대중은 대중처럼 이해하고, 그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로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건 좀 그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다.

 

 

  최원이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단연 지젝이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서는 엉뚱하게도 이글턴과 돌라르를 끌어 온다. 그들이 한통속이기 때문에, 이글턴의 오류도 돌라르의 오류도 다 지젝의 오류가 된다는 식이다. 나는 이 둘에 대해, 지젝의 책을 통해 몇 번 이름을 들어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젝은 설령 아무리 한통속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진짜로 없다. 물고 뜯지 않는 사람이 없구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티끌만한 차이, 유행하는 용어로 ‘극소차이’라 해도, 콕콕 짚어내어 비판하지 않고는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최원은 돌라르가 지젝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이글턴이 알튀세르 편에서 지젝 편으로 넘어 갔다는 이유로, 이 셋을 하나로 묶어 뒤섞어 버린다.

  최원의 이런 태도는 뭔가 ‘증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알튀세르의 주요 테제를 소개하는 짧고 대중적인 글에서, 너무나 과도하게 지젝에 집착하는 듯이 보인다. 알튀세르는 그냥 알튀세르의 이론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내용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 다시 지젝, 돌라르, 이글턴의 문제제기를 생각해 볼까요? 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호명당한 개인이 돌아서게 되는가? 이 사람이 돌아서기 위해서는 이미 이 사람이 모종의 주체여야 하지 않는가? 무의미한 의례를 통해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을 때, 이 무의미한 의례 자체에 동의하기 위해서라도 믿음 이전의 믿음이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알튀세르는 여기서,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체가 돌발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개인이 마주침으로써 가능하며, 그리하여 그가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어지는데 그렇게 일단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구성이 되면, 그는 자신의 동일성을 자신의 과거로 투영해 자신이 마치 항상 그러한 주체로 늘 존재해온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 앞선 주체, 믿음에 앞선 믿음, 이런 것들은 그 자체가 다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는 사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야기를 정리하면,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마주침으로써 어떤 동일성을 부여받으면, 이 동일성을 과거를 향해서 투영함으로써 이 주체는 마치 자기가 언제나 이 동일한 주체로 살아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영원한 주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p224~5」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은 이 지점에 있지 않다. 돌라르가 어떻게 ‘믿음 이전의 믿음’을 주장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은 ‘믿음 이전의 믿음’ 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글턴이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에 대해 어떤 전제를 역설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그런 인지 능력과 이해 능력을 가진 합리적인 주체가 아니다. 믿음이든 이데올로기든 애초에 주체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며 이해할 수 없는 외상이다.

 

 

  「 파스칼의 신앙에서 가장 전복적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내밀한 신념과 외부적인 ‘기계’ 사이의 단락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관한 이론에서 알튀세르는 이 파스칼적인 ‘기계’의 현대적이고 정교화된 판본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엔 그나 그의 학파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이데올로기적인 호명 사이의 연관을 전혀 사유해 내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장치들은 어떻게 자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어떤 대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주체화의 상호 연계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의 인정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보았듯이 국가 장치들의 이 외부적인 ‘기계’는 그것이 오직 주체의 무의식적인 경제 속에서 외상적이고 몰상식한 명령으로서 체험되는 한에서만 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인 기계를 의미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인 체험으로 ‘내면화 시키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 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스칼로부터 이러한 ‘내면화’는 구조적인 필연성에 의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거기엔 항상 무분별함과 외상적인 비합리성의 오점과 잔여물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잔여물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명령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법에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과하는 것은 바로 이 몰상식한 외상의 통합되지 않은 잉여이다. 바꿔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벗어나 있다는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것, 의미 속의 쾌락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잉여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지젝, p85~86)

 

 

  지젝은 최원이 요약했 듯,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최원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젝은 알튀세르에게, 주체가 어떤 합리적 과정을 거쳐 호명에 응답하는지를 밝히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애초에 그 호명에 대해 합리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튀세르가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에 논쟁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합리성과 믿음은 인과관계가 아니다. 법 역시 그렇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킨다. 법은 철저히 합리적이거나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법이 대답할 수 없는 지점이 출현한다. 예전에 아버지도 논리가 막히면 이렇게 소리 지르셨다. 아버지 말에다 어디 토를 달고!!

 

  지젝은 이런 비합리성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야 말로 주체로 하여금 복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주체가 내면화시킬 수 없는 외상적 경험으로 남는다. ‘파스칼의 기계’를 통해 지젝은, 최원이 주장하듯 믿음 이전의 믿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면화라는 목적 자체가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원의 이런 주장은 돌라르에게 해당될지는 몰라도 지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돌라르는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을 알튀세르가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의례를 행함으로써 나중에 오는 이데올로기적 믿음뿐 아니라 개인이 이 무의미한 의례를 행하기로 애초에 동의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는데, 알튀세르는 바로 이 첫 번째 믿음을 이론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믿음에 앞선 믿음, 주체에 앞선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p218"

 

 

 

 

  40도를 육박하는 여름 한낮에, 달랑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후끈 달아 오른 컴퓨터 앞에서 이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학자를 상대로 일반 독자가 무슨 겁 대가리 없는 짓인가 우습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뭔가 참기 힘든 억울함이 있다. 여러 번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리뷰를 읽는 분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젝의 책을 웬만한 건 다 읽어 보았다고는 해도(국내 번역본 중에서 말이다, 이번 신간은 사놓기만 했다), 아마도 이해한 것 보다는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더 많을 것이다. 학계에서 벌어지는 그 복잡한 논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주체’라고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지젝이 어렵게 어렵게 말했지만, 최원이 지젝의 것으로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 나 지젝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사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지젝이 비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비판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직접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듯 보다 모를 듯이 더 큰 엄밀한 개념 논쟁을 두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일반 독자에게 휘~리릭 던져 버리는 그 태도 말이다. 논문도 아닌 대중 적인 글에서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지젝 없이도 알튀세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을까? 편견없이 상식적으로 알튀세르에 이르는 길, 그것이 대중 글(강좌)에서 우리 독자에 대한 제일 배려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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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2014-03-2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리님, <40도를 육박하는 여름 한낮에, 달랑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후끈 달아 오른 컴퓨터 앞에서 이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말리님의 쌩고생이 저에게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글2007로 옮겨서 출력하니 네 장이 나오네요 밑줄쳐가며 열심히 읽었습니다. 알튀세르 챕터 부분에 단풍잎처럼 말리님 글을 끼워놓았어요^^

프랑스현대철학을 이 책으로 처음 읽어보는 터라 이 책에서 알튀세르 챕터 읽을 때도 그저 참 재밌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는데 말리님 글 읽어보니 제가 아무래도 단순화된 설명 때문에 쉽게 재미를 느꼈던 거 같아요^^;;; 말리님의 상세한 설명 덕분에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라는 책에도 관심이 갑니다. 감사합니다..

말리 2014-03-29 10:01   좋아요 0 | URL
아! 예전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이제 제가 쓴 것도 다 잊어버렵습니다;; 겨울이 지나자 벌써 여름이 턱밑까지 온듯 공기가 텁텁하네요.< 처음읽는 독일현대 철학>도 출간되었던데, 전 언제 읽어야 하나 생각중입니다.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런 입문서나 요약강의 보다는 직접 원전을 읽어라고 하던데, 워낙 바탕이 없으니 이런 책도 쉽지가 않습니다. 올 여름이 가기 전에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수양님은 읽으셨나요? 함께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최원 2015-03-0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버틀러, 라클라우, 지젝)의 168-177을 보세요.
 

  책이 도착했다. 생각만큼 무겁지는 않다. 제목이 너무 가벼워서 그런가.. 말하기도 쓰기도 참 그렇다. "책 샀어. 뭔데? 헤겔 레스토랑이랑 라캉 카페 ;;"  번역도 일종의 창작이라면, 번역된 제목을 마땅히 존중해야 겠지만, 이건 아무래도 원제목을 부르는 게 낫겠다. 이해를 위해서나, 책의 무게를 위해서나...

 

  목차를 펴는 순간 오자가 눈에 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목차에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지만, 기분이 상한다.

  1부 2장. 흰 글씨로 된 제목 :

 

     " 아무 것도 없거든 내가 당신을 사랑한는 말로 읽어라"

 

 옮긴이의 이름도 처음 듣는다. 왜 하필 지젝 평생의 역작이라는 책을 지젝을 처음 번역하는(내가 가진 책 중에서는 그렇다) 영어영문학과 출신에게 맡겼을까? 그것도 헤겔에 관한 책을.  염려스럽지만,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번역했기를 바랄밖에 없다.

  책꽂이에 두니 마음은 뿌듯한데, 언제 다 읽을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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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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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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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과 그리스다. 칸트와 헤겔의 독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철학의 중심은 프랑스로 이동한 듯하다.

  이데올로기적 호명, 해체, 광기, 유목, 극소차이, 진리 사건 등 지면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용어들의 탄생지는 대다수가 프랑스다. 프랑스 철학을 모르고는 현대 철학뿐만 아니라 일반 인문학 책조차 읽기가 힘들 정도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 수록된 12명의 철학자들은 20C 유럽 지성계의 별들이다.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 대다수는 이미 죽었다. 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그 빛은 죽은 뒤에야  우리에게 도착했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것이다. 비록 루카치가 탄식했듯,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는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사유의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별빛이 필요하다.

 

 

 

 

장 폴 사르트르, 타자를 발견하다.

변광배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서양철학을 ‘윤리’ 교과서에서 조금 배웠다. 문과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과생인 우리는 줄긋기 정도로 배웠다. 플라톤-동굴의 비유, 니체-영원회귀 따위로, 그 때 사르트르를 배웠는지 기억에 없지만, 여하튼 내게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계약결혼이나, 조금 귀동냥이 늘고 난 뒤에는 사르트르-실존주의, -앙가주망,- 68혁명의 스승 정도에 머물렀다. 이 글(혹은 강연)을 읽는 나의 기대 또한 실존주의였다.

  그러나 저자 변광배는 ‘타자’를 선택했다. 저자는 그 이유로, ‘타자’야 말로 20C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겹도록 듣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나’에 대한 ‘타자’의 반격-대공습으로 요약할 수 있단다.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의 주체는 항상 ‘나’였던데 반해, 프랑스 현대철학은 ‘타자’를 무기로 반격에 나섰고, 그 대공습의 선두에 사르트르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철학자였다. 코기토는, 나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의심 뒤에 살아남은 존재 증명의 증거이다. ‘나’의 존재는 코기토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 이런 이해가 너무 거칠겠지만, 일단 ‘나’는 그렇게 철학사에서 그 존재를 인증 받았다.

  그렇다면 ‘타자’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사르트르가 타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과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본 텍스트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다.

 

  타자는 한마디로 ‘나를 바라보는 자’ 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이다. 그런데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힌 나의 신체는 어떤 신체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너무너무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절대로 그 여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채로 그 여자의 시선을 무지막지하게 의식하며 살아간다.

  데카르트에게 주체는 항상 ‘나’이지만, 사르트르에게는 ‘나’도 주체고 ‘타자’도 주체다. 나와 타자는 시선을 통해 서로를 객체화시키며,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한마디로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 우위에 서려는 ‘갈등’ 관계이다.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란 소설에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타자는 또한 내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협조자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p36"

  사르트르에게 ‘나’의 존재근거는 바로 이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 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 반드시 ‘타자’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관계, 실패하는 관계이다. 나와 타자는 상대를 객체화시키며, 서로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서로 주체가 되는 것이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설명이 없어 모르겠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의 응시에 상대를 가두려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무용한 수난’의 관계이다.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보부아르, 레비나스, 메를로-퐁티는 물론 라캉, 푸코, 들뢰즈, 리쾨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철학자들이 사르트르의 영향권 아래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처음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중 나와 타자의 관계는 대충 정리되었다. 그런데 타자의 존재 증명은 어떻게 되었나? 이 책 23쪽에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사르트르가 어떻게 충족시켰다는지 모르겠다. “사르트르는 이 조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타자는 나와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단언하게 됩니다. p23”  이어지는 두 쪽에 걸쳐 사르트르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 조건을 충족시킬 타자에 대한 정의’를 도출하고 있는데, 이것이 타자 존재 증명의 근거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타자’의 시선이니,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의해 당위적으로 전제된다고 보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사르트르를 시작으로 ‘타자’가 서양 철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 꼬옥 기억하자!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정지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란 책을 빌려 온 적이 있다. 웬만하면 끝까지 읽는 편인데, 몇 장 넘기다 그냥 반납했다. 현상학에 대해 감이라도 잡으려던 건데, 한글로 씌어 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여하튼 그 책은 네 명의 현상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들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이다. 그러니까 메를로-퐁티는 현상학 4인방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에 대한 이런 나의 체험을 감안한다면, 정지은이 안내하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일종의 반전이다. 메를로-퐁티는 보통의 철학자들처럼 머리를 싸매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인들이 그러듯이 몸으로 느끼고, 그 체험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따위는 콧방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 자고 노는 내 몸과 살이 번연히 만져지는데, 그것이면 충분하지, 내 존재의 증거가 달리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멜르로-퐁티는 체험과 분리된 본질은 없다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물론 콧방귀를 뀌지 않았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데카르트의 책을 얼굴 아래 깔고 있었다. 그는 평생 데카르트의 사유와 씨름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한없이 까다로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그저 한 편의 글(강의)을 통해 본 느낌을 크로키처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이라 할 것 없이 그냥 체험이네, 뭐 그런. 어쩌면 저자 정지은의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첫 페이지에 달린 ‘현상학’에 대한 주석에서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현상학이란...“우리가 커피 잔을 들었을 때 커피에서 풍기는 향기, 따뜻함 등과 같은 다양한 것을 지각, 감각하는데 이것들에서 철학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해서 뭔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는 ‘현상’이라고 하면 그 이면에 무슨 ‘본질’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단순하게 말해, 현상이 곧 본질이지, 이면의 본질 같은 것은 따로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현상과 본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딱 일치하는 것일까? 현상이 세계의 전부인 것일까? 그렇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왜 그렇게 난해한 걸까? ... 이런 것들이 이 글을 매개로 내게 ‘현상’한 의문들이다.

 

  생각은 어지럽지만, 어쨌든 이 글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언급은 필요할 것 같다.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와 대립한다. 코기토의 주체는 ‘사유’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사유 이전에 오는 ‘육화된 주체’ 이다. 데카르트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고 말하는 반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나는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동시대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도 대립한다. 대중적으로는 사르트르가 승리(?) 했지만, 포스트이론의 시대를 맞으면서 뒤늦게 메를로-퐁티의 가치가 주목되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주체’, ‘자유’ 개념에서 대립하는데, 저자의 글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무화하는 주체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무를 출현시킵니다. 이것은 세계를 계속 생성하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사르트르는 세계를 계속 없앱니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자신과 자신을 결정했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자신의 존재를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 속에 밀어 넣으면서, 그 자신이 사건이 됩니다. 즉 세계가 변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새롭게 변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주체가 우연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반면에 메를로-퐁티의 주체에게 사건은 그 자신의 출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출현으로서 경험됩니다. p66 」

 

 

 

 

엠마뉘엘 레비나스, 향유에서 욕망으로

김상록

 

  약간 갸우뚱한 글이다. 전체적으로 레비나스를 하이데거와 비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에 대해 너무 편향적이지 않은가 싶다. 내가 읽은 하이데거라야, 물론 보잘 것 없다. “How to Read 하이데거” 한 권과 지젝의 몇몇 저서를 통한 눈동냥 약간이 전부이다. 그래서 편향된 건 저자가 아니라 나 일수도 있다. 레비나스에 대한 독서는 이 짧은 글이 전부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하이데거를 너무 단순화시켜 비판하고 있는 것 같아 억울(?)하다. 물론 단순 비교하면 하이데거는 가해자, 나쁜 놈들 무리에, 레비나스는 피해자, 희생자의 무리에 속한다. 저자는 두 사람의 이런 존재적 차이를 철학적 차이의 기초로 삼고 있다.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쁘고, 레비나스의 철학은 착하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분분한 해석을 낳고 있지만, 일종의 추문이다. 여하튼 나치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편견을 낳은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이 글을 약간 요약해 놓는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철학은 출발만 동일할 뿐 도착지는 완전히 반대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즉, 역사)의 자기 동일화 운동이 개별 존재자들을 노리개 삼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보고 이에 대하여 개별자를 지켜 내려고 하는 반면, 하이데거는 개별자들에게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존재의 운동에 영웅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내던져진 존재자에게 이 존재의 운명을 적극 인수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그런 운명을 강제하는 존재에 대해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체성의 이념을 거부하고, 존재자를 존재에 예속시키는 존재론적 차이를 역설하는 하이데거에 맞서,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를 독립시키고 개별 존재자의 주체성과 내면성을 옹호하는 존재론적 분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p95」

 

  존재,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 어려운 개념이지만 눈치로 때려잡아, 존재자는 우리 개개인들이고 존재는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어떤 것, 자연의 운행, 역사의 흐름 따위다. 존재자들에 관한 것은 존재적 층위에,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은 존재론적 층위에 있는데, 이 두 층위의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주체성을 거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본래적 삶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분리는 존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놀랍게도 타자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유대인으로서 2차 대전 당시 포로가 되었던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의 재앙 속에서 타자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 사랑을 발견한다.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망은 자기 본존 충동이 아니라 자기를 초탈하여 타자로 나아가려는 충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생명력의 구조를 레비나스는 ‘타자를-위한-일자’라고 규정합니다. 무한 타자에 대한 욕망, 타인의 잘못까지도 내 책임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이 바로 무의식의 구조인 것입니다. 무한 책임의 대속적 희생은 존재와 의식의 공모 아래 제정된 법과 규칙을 위반하고 초과하는 사태인 것입니다. p115」

 

  레비나스는,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와 같은 대속적 희생의 정신과 메시아적 자아가 잠재해 있다고 하는데, 이 살뜰한 착취의 구조를 가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겠다.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김성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네 번째 철학자인 블랑쇼는 ‘철학하다’를 ‘사유하다’와 구분하면서, ‘철학’이 아니라 ‘사유’를 주장한다.

  블랑쇼는 “생각하다 혹은 사유하다라는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발제를 맡았다고 치자. 열심히 읽고 밑줄 치고 요약하고 발제문까지 떡하니 만들어서 완벽하게 읽어내려 갔다. 이런 것은 ‘사유하기’ 가 아니다. 사유는 발제가 끝난 후 시작된다. 질문이 쏟아지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흥분해서 마구 떠든다.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블랑쇼에 따르면 이런 것이 사유하기다.

 

 그렇다면 왜 블랑쇼는 이렇게 논리적이지도 않고 중구난방 같은 ‘사유하기’를 우위에 두는 걸까? 중요한 것은 철학하기의 논리정연함이 아니라, ‘무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관계는 질문의 연속이다. 어떤 정답을 배우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이어지는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을 통해,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다.

  「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 물음의 연속은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 생각의 결과와 목적과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 결과, 목적, 정답이 있다면, 그 결과는 끝이 아닌 무한한 시작으로서의 결과이며, 목적은 이 무한한 시작의 여정이 그 목적이며, 정답은 그 무한한 여정을 통하여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답일 것입니다. p130」

 

  이 글의 저자는 블랑쇼에 대해 기억해야 할 최소한의 지침으로, 블량쇼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하고, 부정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그의 사유와 글을 시작한다는 점을 꼽고 있다. 헤겔 변증법의 일반 법칙으로 알려진, 정-반-합 개념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면서, 블랑쇼의 사유가 헤겔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모르겠지만,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만은 한마디 하고 싶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학자들 사이에 매우 논쟁적인 용어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해석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상식인 것처럼 알고 있는, 소위 “정-반-합”이란 도식은 헤겔 자신이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견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헤겔』p214 」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입문서 혹은 대중 강좌에서 모든 철학자들에 대해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 철학자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의 그것에 비교하고, 그 강점을 주장할 때는 최소한 일반적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의 저자는 여전히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개념이 논쟁적이라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도 부연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호의 모험가, 롤랑 바르트

김진영

 

  롤랑 바르트는 주변부 철학자다. 폐결핵 때문에, 엘리트 과정을 밟아 프랑스 지식인계의 중심부에 진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인 푸코를 통해 62살의 나이에 비로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바르트는 그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3년 뒤 사망했다.

  바르트는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할머니, 이모라는 세 명의 여자들 속에서 자랐다. 바르트에게 어머니, 여자는 사유의 본질이다. 바르트 사유의 특질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여자의 본질이다.

  바르트의 성정체성 역시 그의 ‘부드러운’ 사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동성애적인 성애는 이성애와는 달리 성 이외의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무목적인’ 성애이다. 이성애는 공동체의 목적, 생산력 등과 관련되어 폭력성을 수반하지만, 동성애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다.

 

  바르트의 부드러운 사유가 기호학에 접목하여 어떤 독창적인 논리를 이끌어 냈는지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도 별반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궁금하면 찾아봐야겠지만, 그럴 여력까지는 없다. 너무 더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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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3일에 쓴 글입니다.

지금 읽어보니 <정치체에 대한 권리>의 리뷰 글을 쓰려다, 중간에 그만 둔 글인 것 같습니다. 나름의 문제 제기 비슷한 것이라 옮겨 둡니다.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가끔, 내 나이가 많은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십 대 때는 ‘나이 서른에 우린 무얼 하고 있을까?’를 부르고, 삼십 대 때는 어서 ‘불혹’의 안정이 찾아오길 바랐지만, 오십에도 ‘지천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스무 살 무렵에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왜 그런 발칙한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 무렵 어떤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기쁨의 감정은 아직도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아, 이 나이에도 배울 것이 있고,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은 참으로 강렬했다. 그 나이에 아마 나는 죽고 싶었고, 세상에서 더 배울 것도, 기쁨을 느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 싶다. 그 한 권의 책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 있으며, 기쁨도 그리고 간혹 행복도 느낄 수 있지 않나 싶다. 평균 수명 구십 운운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때까지 살아야 할 일이 암담하지만, 도서관의 서가 구석구석을 뒤지며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아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뭔가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구십 수명을 고마워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끼어들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오래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대학교 때, 지금의 ‘도를 아십니까?’처럼, 혼자 캠퍼스를 걷고 있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따라 붙는 선교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서 주창하는 것이 ‘영생’ 이었다. 나는 종교 자체 보다 그 영생이라는 말에 질겁해서 종종걸음으로 내빼곤 했는데, 영생이라니.. 영원히 죽지 못하는 고통 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때도 그리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의학과 뇌 과학이 결합해서 언젠가는 인간이 죽지 않고, 장기들을 갈아 끼우며 영원히 살게 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 때 인간들은 진짜 행복할까, 나는 그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일흔 정도까지만, 맑은 정신을 가지고 살다 죽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다지 명료하진 않지만 읽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정신만은 놓지 않고 살다 가고 싶다.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며 산소 호흡기를 수년씩 끼워 두는 행동이 나는 전혀 존엄한 인간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들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산소 호흡기를 뗄 수 없다는 종합병원을 보면, 차라리 돈의 존엄성이라고 말하라고 하고 싶다. 정작 멀쩡하게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없다고 받아주지 않는 병원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있다는 건지, 종교 계열의 병원들이 존엄사를 두고 벌이는 논쟁을 보면 그 위선을 스스로 어떻게 합리화하는지가 궁금하다.

 

  지금 내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다. 살아갈수록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은데, 잠깐 넋을 놓으면 또 세상만사 모두 그렇고 그렇지 하는 상태로 돌아가고 마니, 어떻게 해서든 넋을 붙들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공자를 전공하는 지인에게 不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것도 다 잊어버리고 내가 했던 생각만 남아있다. 마흔은 의심이 없거나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아니라, 세상일이 이제 와서 의심스럽거나 세상일에 이제와 흔들릴까봐 덜컥 겁이 나서, 똥고집이라도 부리며 그 두려움을 감추어야 하는 나이가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의심이 없다는 것은 질문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꼰대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불안을 감추며 굳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으니 슬프다. 그렇다고 어떻게 나이를 먹지 않고 또 기성세대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누가 뭐래도 이십대는 이십대고 사십대는 사십대일 수밖에 없다. 그걸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소통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하는 것들 중에 ‘국가’가 있다. 말이 곰곰이지 가끔 어떤 계기로 그것들을 떠올리면 짧은 생각을 굴리다가, 눈에 띄는 책이 있으면 빌려다 읽는다는 뜻이다.

  예전부터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환율이다. 똑 같은 물건이 어떻게 국경만 넘으면 갑자기 비싸지기도 하고, 또 턱없이 싸지기도 하는지 참 신기했다. 세계 여행기들이 넘쳐나면서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하루 종일 먹고 잘 수 있는 가난한 나라 이야기를 읽노라면 왠지 불편했다.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 나라 사람들이 한 달을 일해서 모은 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하루도 살기 어렵다는 말과 똑 같은 것이다. 일년 내내 선배들에게 빈대 붙어 아낀 점심값까지 탈탈 털어서 유럽에 가서 홀라당 날리고 오는 후배 동료들이 얄밉기까지 했다. 똑 같이 일 년을 일해서 모은 돈이 왜 어떤 나라에 가면 일 년 밥값이 되고도 남는데, 다른 나라에 가면 열흘 밥값도 안 되는지, 이런 것이 부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재밌는 것 중에는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들이 있다. 바다에 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헤엄쳐 다니던 고등어가 우리나라 쪽에서 잡히든, 잠깐 놀다가 중국 쪽으로 가서 잡히든 그 고등어가 그 고등어 일텐데도, 마트에 떡하니 팻말을 달고 있으면 중국산이냐 국산이냐에 따라 가격이 화악 달라진다. 중국 어선이 우리나라 해역을 침범해서 싹쓸이 해 간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은데 그러면 그 배들이 잡아간 갈치는 국산 갈치일까, 중국산 갈치일까? 아, 별 것이 다 신기하다고 하실 지도 모르겠다. 가격이라는 것이 원래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는 것들로 정해지는 거지, 그 물건 자체의 고유한 가치(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와는 암 상관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상식! 하며 역증을 내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고 요상한 것을.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음식점에 가면 차라리 조선족 아줌마들이 없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아줌마들이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아줌마들과 똑 같은 일을 하고도 더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사실에는 별로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그 아줌마들은 심지어는 우리나라 말까지도 완벽하게 하는데 말이다, 물론 약간의 북한식 억양이 섞여 있긴 하지만. 만약 경상도 억양이나 전라도 억양이 있다고 급여를 차별했다면 ‘나꼼수’가 나서야 할 일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것 때문에 들어 올 수 있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힘든 일들에 우리나라 노동력 보다 더 싸게 투입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체류가 가능한 이들이다. 아마 예전에 독일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랬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일까? 그 차별은 외국인 노동자의 태생적 조건이므로 적법하고 정당한 것인가? 고용주는 우리나라 노동자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관계없이 똑 같은 노동의 산물을 얻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는 주민등록증의 유무에 따라 그의 노동의 가치를 차별받는 것을 마땅하게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그래서 국가란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안도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이것을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딜레마에 놓인다. 그렇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도 용인해야 하는 것인가?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증처럼 정규 사원임을 입증하는 사원증을 가진 노동자만이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군말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부당하다면 왜 외국인 노동자의 차별은 정당한 것인가? 역시 국가인가? 어째서 국가란 틀에 놓이면 이 모든 불합리가 완벽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마는 것일까?

 

국가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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