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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ㅣ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평점 :
최원의 글은 거칠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글(원래는 강의)에서, 전문가의 ‘거침’은 오히려 미덕에 속한다. 간명한 만큼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에서 최원이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둘러싼 복잡한 논쟁을 보여주려 하면서, 이 ‘거침’은 이면의 문제를 드러낸다. 비판과 재비판이 꼬리를 무는 논쟁은 정치한 논리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단순화 시킨 논리는 의문을 일으키고, 성급한 비판은 섣부른 편견을 심어준다. 특히 비전문적인 우리 독자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 위험성이 적지 않다.
최원은 먼저 알튀세르의 대표 테제인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간략히 소개한다. 이 테제의 내용은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는 것이다. 이 짧은 정의가 그토록 논쟁적인 이유는, 이것이 ‘주체’에 관한 관념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명 테제가 당시 주체에 대한 논의에 강력한 개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음으로써 주체를 근본적으로 자율성이 아니라 타율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p212」
말하자면 알튀세르 이후 주체는 자율성을 잃고, 타율적 존재가 되었다. 그 결과 주체는 “왜 주체는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잘못된 생각에 그토록 쉽게 설득 당하는가?” 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주체는 구성된 존재니까,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적 자유 따위는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주체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그렇다면 주체에게 ‘저항’이나 ‘반역’이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최원은 여기서 우회로를 선택한다. 알튀세르의 후계자인 발리바르, 랑시에르, 혹은 바디우를 통하지 않고, 최원 자신이 알튀세르의 비판자로 지목한 지젝을 경유하여, 알튀세르를 변론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를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 이 미로를 경유하다 보니, 글은 자칫 거칠어지기 쉽다.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는 책에서 지젝은 알튀세르에 대한 볓볓 비판을 제출하는데, 그 핵심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구성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옳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완전한 방식으로 주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항상 어떤 나머지 또는 잉여로서의 공백을 남기는 방식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뿐인데, 이 공백이야말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는 상상적 동일성의 주체와 구분되는) 진정한 주체이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나중에 주체가 저항하고 반역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정한 주체는 사실 호명이 있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며, 이 주체가 없다면 호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공백으로서의 주체는 호명의 가능성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것의 궁극적 실패 원인을 이룬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적) 주체 이전에 오는 (진정한) 주체가 있다’ 고 말입니다. p214」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지젝에게서 ‘진정한 주체’ 라는 표현을 본 기억이 나는 없지만, 그리고 ‘주체 이전의 주체’ 는 매우 엄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용어지만 말이다.
‘주체 이전의 주체’에서 두 주체는 동일한 층위에 있지 않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지젝은 ‘주체 이전의 주체’ 가 아니라 ‘주체화 이전의 주체’(『까다로운 주체 p261)』 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 일반 독자들은 ‘주체 이전의 주체’ 를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나’란 주체의 등 뒤에서 이 ‘나’를 조종하는 또 다른 실체로서의 주체가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공백’ 이다. ‘공백으로서의 주체’ 라고 최원 자신이 언급했듯 말이다. 그렇다면 지젝이 주장하는 ‘공백’인 주체 혹은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무엇인가?
「라캉식으로 하자면,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로 반전되기 이전의 죽음 충동의 순수한 부정성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라캉의 요점은 주체가 우주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 속에 그것의 구성적 공백으로서 기입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 존재의 바로 그 존재론적 구조를 지탱하는 행위의 우연성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존재의 온전한 질서 속에 구멍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존재의 바로 그 보편적 질서를 구성하는 우연적-과잉적 제스처다. 」(『까다로운 주체』,지젝, p261~2)
어렵지만 최원의 말과 비교하며 조금 따라가 보자. ‘어떤 새로운 주인기표와의 동일화’ 란 알튀세르의 개념에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응답하는 것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합리성을 따져 주체로 하여금 부름에 응하도록 옆구리를 콕콕 찌르는 또 다른 실체가 아니다. 주체는 ‘순수한 부정성’ 이며 ‘공백’이고 ‘우연적’인 제스처 이다. 최원 역시 그런 의미로 지젝을 요약했겠지만, 일반 독자인 우리로서는 그 짧은 요약을 통해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즉 주체는 주체화의 제스처에 의해 메워지는 바로 그 틈새이다. 요컨대 알튀세르, 데리다, 바디우와 같은 상이한 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그리고 부정적 방식으로 답변된) 물음 - ‘주체화의 제스처에 선행하는 그 틈새, 열림, 공백은 여전히 “주체”라 불릴 수 있는가?’ - 에 대한 라캉적 답변은 단호한 ‘그렇다!’이다. 주체는 존재론적 틈새인 동시에 보편자와 특수자 간의 단락에 의해 이 틈새의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이다. ‘주체성’은 이 환원불가능한 순환성에 대한 이름이며, 외부의 저항하는 힘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내속적인, 궁극적으로 바로 주체 그 자신인 장애물과 싸우는 권능에 대한 이름이다. 다시 말해, 틈새를 메우려는 주체의 바로 그 능력은 사후적으로 이 틈새를 지탱하며 생성한다.」 (『까다로운 주체』, 지젝, p259)
‘상처는 상처를 입힌 창에 의해서만 치유된다.’는 지젝이 자주 인용하는, 바그너의 <파르시팔>에 나오는 대사다. 여기서는 ‘주체화 이전의 주체’를 비유하고 있다. 주체는 틈새 즉 상처인 동시에, 그 틈새를 메우는 즉 상처를 치유하는 주체화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주체와 주체화는 서로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다. 내부에 상처가 있고, 그 후에 외부로부터 치유가 오는 것이 아니다. 상처가 치유이고, 치유가 상처이다.
물론 최원의 글 보다 더 이해하기 어렵다. 제목부터 '까다로운 주체' 다. 나와 자아와 주체를 애초에 구분할 생각도 없고, 구분되지도 않는 생활인들에게는 다 개 풀뜯어 먹는 소리처럼 들릴만한 이야기다. 그러니 이해를 위해 이 긴 인용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그냥 지젝이 말하는 이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최원이 지젝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와 같은 것인지, 전혀 다른 것인지 , 척하고 감으로 느껴보자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젝의 것과 최원의 것이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최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최원의 설명은 주체의 등 뒤에 서 있는 또 다른 주체를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꼭두각시와 그것을 조종하는 난장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끝난다면 사실 그다지 불만스러울 것은 없다. 학자는 학자처럼 말하고, 대중은 대중처럼 이해하고, 그 사이의 간극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로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이건 좀 그런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다.
최원이 표적으로 삼은 대상은 단연 지젝이다. 그런데 정작 구체적인 비판에 들어가서는 엉뚱하게도 이글턴과 돌라르를 끌어 온다. 그들이 한통속이기 때문에, 이글턴의 오류도 돌라르의 오류도 다 지젝의 오류가 된다는 식이다. 나는 이 둘에 대해, 지젝의 책을 통해 몇 번 이름을 들어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지젝은 설령 아무리 한통속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이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내 기억으로는 진짜로 없다. 물고 뜯지 않는 사람이 없구나 싶을 정도로 그랬다. 티끌만한 차이, 유행하는 용어로 ‘극소차이’라 해도, 콕콕 짚어내어 비판하지 않고는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최원은 돌라르가 지젝의 입장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이글턴이 알튀세르 편에서 지젝 편으로 넘어 갔다는 이유로, 이 셋을 하나로 묶어 뒤섞어 버린다.
최원의 이런 태도는 뭔가 ‘증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알튀세르의 주요 테제를 소개하는 짧고 대중적인 글에서, 너무나 과도하게 지젝에 집착하는 듯이 보인다. 알튀세르는 그냥 알튀세르의 이론만으로도 충분히 공부할 내용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제 다시 지젝, 돌라르, 이글턴의 문제제기를 생각해 볼까요? 이들은 모두 알튀세르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호명당한 개인이 돌아서게 되는가? 이 사람이 돌아서기 위해서는 이미 이 사람이 모종의 주체여야 하지 않는가? 무의미한 의례를 통해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된다고 했을 때, 이 무의미한 의례 자체에 동의하기 위해서라도 믿음 이전의 믿음이 또한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알튀세르는 여기서,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주체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체가 돌발하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개인이 마주침으로써 가능하며, 그리하여 그가 특정한 주체로 구성되어지는데 그렇게 일단 이데올로기적 주체로 구성이 되면, 그는 자신의 동일성을 자신의 과거로 투영해 자신이 마치 항상 그러한 주체로 늘 존재해온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체에 앞선 주체, 믿음에 앞선 믿음, 이런 것들은 그 자체가 다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들이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야기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는 사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야기를 정리하면,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마주침으로써 어떤 동일성을 부여받으면, 이 동일성을 과거를 향해서 투영함으로써 이 주체는 마치 자기가 언제나 이 동일한 주체로 살아온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신이 영원한 주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p224~5」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은 이 지점에 있지 않다. 돌라르가 어떻게 ‘믿음 이전의 믿음’을 주장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은 ‘믿음 이전의 믿음’ 따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글턴이 호명에 응답하는 주체에 대해 어떤 전제를 역설했는지 모르지만, 지젝의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그런 인지 능력과 이해 능력을 가진 합리적인 주체가 아니다. 믿음이든 이데올로기든 애초에 주체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며 이해할 수 없는 외상이다.
「 파스칼의 신앙에서 가장 전복적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내밀한 신념과 외부적인 ‘기계’ 사이의 단락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 관한 이론에서 알튀세르는 이 파스칼적인 ‘기계’의 현대적이고 정교화된 판본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엔 그나 그의 학파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들과 이데올로기적인 호명 사이의 연관을 전혀 사유해 내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이데올로기적인 국가 장치들은 어떻게 자신을 ‘내면화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어떤 대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어떻게 주체화의 상호 연계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의 인정의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보았듯이 국가 장치들의 이 외부적인 ‘기계’는 그것이 오직 주체의 무의식적인 경제 속에서 외상적이고 몰상식한 명령으로서 체험되는 한에서만 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인 기계를 의미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인 체험으로 ‘내면화 시키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 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스칼로부터 이러한 ‘내면화’는 구조적인 필연성에 의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거기엔 항상 무분별함과 외상적인 비합리성의 오점과 잔여물이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잔여물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명령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방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법에 무조건적인 권위를 부과하는 것은 바로 이 몰상식한 외상의 통합되지 않은 잉여이다. 바꿔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벗어나 있다는 한에서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것, 의미 속의 쾌락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잉여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지젝, p85~86)
지젝은 최원이 요약했 듯,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최원의 이해와는 완전히 다르다. 지젝은 알튀세르에게, 주체가 어떤 합리적 과정을 거쳐 호명에 응답하는지를 밝히라고 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주체는 애초에 그 호명에 대해 합리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튀세르가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이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 사이에 논쟁이 불가능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합리성과 믿음은 인과관계가 아니다. 법 역시 그렇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지킨다. 법은 철저히 합리적이거나 완전히 투명하지 않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법이 대답할 수 없는 지점이 출현한다. 예전에 아버지도 논리가 막히면 이렇게 소리 지르셨다. 아버지 말에다 어디 토를 달고!!
지젝은 이런 비합리성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몰상식하고 권위적인 명령이야 말로 주체로 하여금 복종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주체가 내면화시킬 수 없는 외상적 경험으로 남는다. ‘파스칼의 기계’를 통해 지젝은, 최원이 주장하듯 믿음 이전의 믿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내면화라는 목적 자체가 불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원의 이런 주장은 돌라르에게 해당될지는 몰라도 지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돌라르는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을 알튀세르가 구분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의례를 행함으로써 나중에 오는 이데올로기적 믿음뿐 아니라 개인이 이 무의미한 의례를 행하기로 애초에 동의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믿음이 있는데, 알튀세르는 바로 이 첫 번째 믿음을 이론화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믿음에 앞선 믿음, 주체에 앞선 주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p218"
40도를 육박하는 여름 한낮에, 달랑 선풍기 한 대를 놓고, 후끈 달아 오른 컴퓨터 앞에서 이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다. 학자를 상대로 일반 독자가 무슨 겁 대가리 없는 짓인가 우습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뭔가 참기 힘든 억울함이 있다. 여러 번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리뷰를 읽는 분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지젝의 책을 웬만한 건 다 읽어 보았다고는 해도(국내 번역본 중에서 말이다, 이번 신간은 사놓기만 했다), 아마도 이해한 것 보다는 오해하고 있는 내용이 더 많을 것이다. 학계에서 벌어지는 그 복잡한 논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주체’라고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지젝이 어렵게 어렵게 말했지만, 최원이 지젝의 것으로 주장하는 ‘주체 이전의 주체’ 나 지젝이 자신의 입으로 말한 ‘주체화 이전의 주체’가 사실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답답한 것은 지젝이 비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비판이 전달되는 방식이다. 직접 본인의 입을 통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듯 보다 모를 듯이 더 큰 엄밀한 개념 논쟁을 두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일반 독자에게 휘~리릭 던져 버리는 그 태도 말이다. 논문도 아닌 대중 적인 글에서 그 외에 무슨 방법이 있느냐고 되묻는다면? 지젝 없이도 알튀세르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을까? 편견없이 상식적으로 알튀세르에 이르는 길, 그것이 대중 글(강좌)에서 우리 독자에 대한 제일 배려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