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엮음 / 동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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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독일과 그리스다. 칸트와 헤겔의 독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철학의 중심은 프랑스로 이동한 듯하다.

  이데올로기적 호명, 해체, 광기, 유목, 극소차이, 진리 사건 등 지면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용어들의 탄생지는 대다수가 프랑스다. 프랑스 철학을 모르고는 현대 철학뿐만 아니라 일반 인문학 책조차 읽기가 힘들 정도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에 수록된 12명의 철학자들은 20C 유럽 지성계의 별들이다. 19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들 대다수는 이미 죽었다. 하늘의 별들이 그러하듯이, 그 빛은 죽은 뒤에야  우리에게 도착했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빛날 것이다. 비록 루카치가 탄식했듯, 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는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사유의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별빛이 필요하다.

 

 

 

 

장 폴 사르트르, 타자를 발견하다.

변광배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서양철학을 ‘윤리’ 교과서에서 조금 배웠다. 문과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과생인 우리는 줄긋기 정도로 배웠다. 플라톤-동굴의 비유, 니체-영원회귀 따위로, 그 때 사르트르를 배웠는지 기억에 없지만, 여하튼 내게 사르트르는 사르트르-계약결혼이나, 조금 귀동냥이 늘고 난 뒤에는 사르트르-실존주의, -앙가주망,- 68혁명의 스승 정도에 머물렀다. 이 글(혹은 강연)을 읽는 나의 기대 또한 실존주의였다.

  그러나 저자 변광배는 ‘타자’를 선택했다. 저자는 그 이유로, ‘타자’야 말로 20C 중후반의 인문학 담론을 특징짓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겹도록 듣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나’에 대한 ‘타자’의 반격-대공습으로 요약할 수 있단다. 데카르트 이후 ‘코기토’의 주체는 항상 ‘나’였던데 반해, 프랑스 현대철학은 ‘타자’를 무기로 반격에 나섰고, 그 대공습의 선두에 사르트르가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의심의 철학자였다. 코기토는, 나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의심 뒤에 살아남은 존재 증명의 증거이다. ‘나’의 존재는 코기토에 의해 증명된 것이다. 이런 이해가 너무 거칠겠지만, 일단 ‘나’는 그렇게 철학사에서 그 존재를 인증 받았다.

  그렇다면 ‘타자’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이 글은 사르트르가 타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과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본 텍스트는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다.

 

  타자는 한마디로 ‘나를 바라보는 자’ 이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로잡는 ‘힘’이다. 그런데 타자의 시선에 사로잡힌 나의 신체는 어떤 신체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너무너무 잘 보이고 싶다. 그런데 나는 절대로 그 여자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채로 그 여자의 시선을 무지막지하게 의식하며 살아간다.

  데카르트에게 주체는 항상 ‘나’이지만, 사르트르에게는 ‘나’도 주체고 ‘타자’도 주체다. 나와 타자는 시선을 통해 서로를 객체화시키며,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한마디로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 우위에 서려는 ‘갈등’ 관계이다.

  사르트르에게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나와 나 자신을 연결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 이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이란 소설에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야” 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나 타자는 또한 내 존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협조자다.

  “타자는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이 비밀은 내가 무엇인지에 관한 비밀이다. 타자는 나를 존재케 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 인해 나를 소유한다. 이 소유는 그가 나를 소유한다는 의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p36"

  사르트르에게 ‘나’의 존재근거는 바로 이 “타자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모습” 이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서 반드시 ‘타자’를 통해야 한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관계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관계, 실패하는 관계이다. 나와 타자는 상대를 객체화시키며, 서로 자신이 주체가 되려고 한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서로 주체가 되는 것이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왜 그런지는 설명이 없어 모르겠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서로의 응시에 상대를 가두려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무용한 수난’의 관계이다.

  사르트르의 ‘타자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보부아르, 레비나스, 메를로-퐁티는 물론 라캉, 푸코, 들뢰즈, 리쾨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철학자들이 사르트르의 영향권 아래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처음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중 나와 타자의 관계는 대충 정리되었다. 그런데 타자의 존재 증명은 어떻게 되었나? 이 책 23쪽에 존재 증명의 다섯 가지 조건이 제시되어 있는데, 나는 이것을 사르트르가 어떻게 충족시켰다는지 모르겠다. “사르트르는 이 조건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타자는 나와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라는 사실을 단언하게 됩니다. p23”  이어지는 두 쪽에 걸쳐 사르트르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 조건을 충족시킬 타자에 대한 정의’를 도출하고 있는데, 이것이 타자 존재 증명의 근거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타자’의 시선이니, ‘타자’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의해 당위적으로 전제된다고 보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사르트르를 시작으로 ‘타자’가 서양 철학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만 꼬옥 기억하자!

 

 

 

 

몸과 살, 그리고 세계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

정지은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란 책을 빌려 온 적이 있다. 웬만하면 끝까지 읽는 편인데, 몇 장 넘기다 그냥 반납했다. 현상학에 대해 감이라도 잡으려던 건데, 한글로 씌어 있다고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했을 뿐이다. 여하튼 그 책은 네 명의 현상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들은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이다. 그러니까 메를로-퐁티는 현상학 4인방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에 대한 이런 나의 체험을 감안한다면, 정지은이 안내하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일종의 반전이다. 메를로-퐁티는 보통의 철학자들처럼 머리를 싸매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인들이 그러듯이 몸으로 느끼고, 그 체험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따위는 콧방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 자고 노는 내 몸과 살이 번연히 만져지는데, 그것이면 충분하지, 내 존재의 증거가 달리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멜르로-퐁티는 체험과 분리된 본질은 없다고 한다.

 

  메를로-퐁티는 물론 콧방귀를 뀌지 않았다. 그는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순간까지 데카르트의 책을 얼굴 아래 깔고 있었다. 그는 평생 데카르트의 사유와 씨름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한없이 까다로운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그저 한 편의 글(강의)을 통해 본 느낌을 크로키처럼 표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철학이라 할 것 없이 그냥 체험이네, 뭐 그런. 어쩌면 저자 정지은의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는데, 첫 페이지에 달린 ‘현상학’에 대한 주석에서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현상학이란...“우리가 커피 잔을 들었을 때 커피에서 풍기는 향기, 따뜻함 등과 같은 다양한 것을 지각, 감각하는데 이것들에서 철학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해서 뭔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는 ‘현상’이라고 하면 그 이면에 무슨 ‘본질’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은  단순하게 말해, 현상이 곧 본질이지, 이면의 본질 같은 것은 따로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현상과 본질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딱 일치하는 것일까? 현상이 세계의 전부인 것일까? 그렇다면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왜 그렇게 난해한 걸까? ... 이런 것들이 이 글을 매개로 내게 ‘현상’한 의문들이다.

 

  생각은 어지럽지만, 어쨌든 이 글의 내용에 대해 약간의 언급은 필요할 것 같다.

 

  메를로-퐁티는 데카르트와 대립한다. 코기토의 주체는 ‘사유’의 주체이다. 이에 반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사유 이전에 오는 ‘육화된 주체’ 이다. 데카르트의 주체가 ‘나는 생각한다.’ 고 말하는 반면,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나는 할 수 있다’ 고 말한다.

  메를로-퐁티는 동시대의 철학자 사르트르와도 대립한다. 대중적으로는 사르트르가 승리(?) 했지만, 포스트이론의 시대를 맞으면서 뒤늦게 메를로-퐁티의 가치가 주목되었다고 한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주체’, ‘자유’ 개념에서 대립하는데, 저자의 글에서 한 대목을 인용한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무화하는 주체입니다. 메를로-퐁티의 주체는 무를 출현시킵니다. 이것은 세계를 계속 생성하게 한다는 것이죠. 반면 사르트르는 세계를 계속 없앱니다. 사르트르의 주체는 자신과 자신을 결정했던 세계를 무화시키면서, 자신의 존재를 ‘존재했었음’이라는 과거 속에 밀어 넣으면서, 그 자신이 사건이 됩니다. 즉 세계가 변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새롭게 변합니다.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주체가 우연적인 사건을 경험할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반면에 메를로-퐁티의 주체에게 사건은 그 자신의 출현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출현으로서 경험됩니다. p66 」

 

 

 

 

엠마뉘엘 레비나스, 향유에서 욕망으로

김상록

 

  약간 갸우뚱한 글이다. 전체적으로 레비나스를 하이데거와 비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에 대해 너무 편향적이지 않은가 싶다. 내가 읽은 하이데거라야, 물론 보잘 것 없다. “How to Read 하이데거” 한 권과 지젝의 몇몇 저서를 통한 눈동냥 약간이 전부이다. 그래서 편향된 건 저자가 아니라 나 일수도 있다. 레비나스에 대한 독서는 이 짧은 글이 전부이니 말이다.

  그렇다 해도 하이데거를 너무 단순화시켜 비판하고 있는 것 같아 억울(?)하다. 물론 단순 비교하면 하이데거는 가해자, 나쁜 놈들 무리에, 레비나스는 피해자, 희생자의 무리에 속한다. 저자는 두 사람의 이런 존재적 차이를 철학적 차이의 기초로 삼고 있다.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쁘고, 레비나스의 철학은 착하다고 설명하는 것 같다. 하이데거와 나치의 관계는 분분한 해석을 낳고 있지만, 일종의 추문이다. 여하튼 나치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한 편견을 낳은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며, 이 글을 약간 요약해 놓는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영향 아래 철학적 사유를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철학은 출발만 동일할 뿐 도착지는 완전히 반대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즉, 역사)의 자기 동일화 운동이 개별 존재자들을 노리개 삼아 희생시키는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다고 보고 이에 대하여 개별자를 지켜 내려고 하는 반면, 하이데거는 개별자들에게 민족의 일원으로서 그러한 존재의 운동에 영웅적으로 동참할 것을 호소합니다. 달리 말하면, 하이데거는 존재에 내던져진 존재자에게 이 존재의 운명을 적극 인수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레비나스는 그런 운명을 강제하는 존재에 대해 존재자가 근본적으로 단절할 것을 요구합니다. 주체성의 이념을 거부하고, 존재자를 존재에 예속시키는 존재론적 차이를 역설하는 하이데거에 맞서, 레비나스는 존재로부터 존재자를 독립시키고 개별 존재자의 주체성과 내면성을 옹호하는 존재론적 분리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p95」

 

  존재, 존재자, 존재론적 차이. 어려운 개념이지만 눈치로 때려잡아, 존재자는 우리 개개인들이고 존재는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어떤 것, 자연의 운행, 역사의 흐름 따위다. 존재자들에 관한 것은 존재적 층위에,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은 존재론적 층위에 있는데, 이 두 층위의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주체성을 거부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남들이 사는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본래적 삶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여하튼 레비나스의 존재론적 분리는 존재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는 것이다. 여기서 레비나스는 놀랍게도 타자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유대인으로서 2차 대전 당시 포로가 되었던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의 재앙 속에서 타자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무한 사랑을 발견한다.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망은 자기 본존 충동이 아니라 자기를 초탈하여 타자로 나아가려는 충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생명력의 구조를 레비나스는 ‘타자를-위한-일자’라고 규정합니다. 무한 타자에 대한 욕망, 타인의 잘못까지도 내 책임으로 껴안을 수 있는 사랑이 바로 무의식의 구조인 것입니다. 무한 책임의 대속적 희생은 존재와 의식의 공모 아래 제정된 법과 규칙을 위반하고 초과하는 사태인 것입니다. p115」

 

  레비나스는, 우리 각자에게는 예수와 같은 대속적 희생의 정신과 메시아적 자아가 잠재해 있다고 하는데, 이 살뜰한 착취의 구조를 가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겠다.

 

 

 

 

 

모리스 블랑쇼의 중성과 글쓰기, 역동적 파노라마

김성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네 번째 철학자인 블랑쇼는 ‘철학하다’를 ‘사유하다’와 구분하면서, ‘철학’이 아니라 ‘사유’를 주장한다.

  블랑쇼는 “생각하다 혹은 사유하다라는 것은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발제를 맡았다고 치자. 열심히 읽고 밑줄 치고 요약하고 발제문까지 떡하니 만들어서 완벽하게 읽어내려 갔다. 이런 것은 ‘사유하기’ 가 아니다. 사유는 발제가 끝난 후 시작된다. 질문이 쏟아지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흥분해서 마구 떠든다.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블랑쇼에 따르면 이런 것이 사유하기다.

 

 그렇다면 왜 블랑쇼는 이렇게 논리적이지도 않고 중구난방 같은 ‘사유하기’를 우위에 두는 걸까? 중요한 것은 철학하기의 논리정연함이 아니라, ‘무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의 관계는 질문의 연속이다. 어떤 정답을 배우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 이어지는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을 통해, 끝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이다.

  「 ..그것은 정답이 없는 물음의 연속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 물음의 연속은 생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 생각의 결과와 목적과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그 결과, 목적, 정답이 있다면, 그 결과는 끝이 아닌 무한한 시작으로서의 결과이며, 목적은 이 무한한 시작의 여정이 그 목적이며, 정답은 그 무한한 여정을 통하여 생각하는 그 자체가 정답일 것입니다. p130」

 

  이 글의 저자는 블랑쇼에 대해 기억해야 할 최소한의 지침으로, 블량쇼가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하고, 부정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그의 사유와 글을 시작한다는 점을 꼽고 있다. 헤겔 변증법의 일반 법칙으로 알려진, 정-반-합 개념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면서, 블랑쇼의 사유가 헤겔을 극복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모르겠지만, 헤겔의 변증법에 대해서만은 한마디 하고 싶다.

  프레드릭 바이저의 『헤겔』에는 <변증법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헤겔의 ‘변증법’은 학자들 사이에 매우 논쟁적인 용어다. 헤겔 철학에서 가장 많이 해석되고 있지만, 또한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다. 특히 우리가 상식인 것처럼 알고 있는, 소위 “정-반-합”이란 도식은 헤겔 자신이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비록 변증법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정립-반정립-종합’의 도식에 의해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헤겔 자신은 결코 이 용어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도식의 사용을 비판했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칸트에 의해 다시 발견된 “삼분법적 형식”을 칭찬하여 그것을 “학의 개념”이라고까지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립-반정립-종합의 방법이 아니라 칸트의 범주표의 삼분법적 형식을 언급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이율배반들이 헤겔의 변증법에 영감을 주긴 했지만, 헤겔은 결코 정립과 반정립을 개진하는 칸트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헤겔』p214 」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입문서 혹은 대중 강좌에서 모든 철학자들에 대해 엄밀한 정확성을 추구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한 철학자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의 그것에 비교하고, 그 강점을 주장할 때는 최소한 일반적 오해는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 글의 저자는 여전히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개념이 논쟁적이라면, 반대 주장에 대해서도 부연해 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호의 모험가, 롤랑 바르트

김진영

 

  롤랑 바르트는 주변부 철학자다. 폐결핵 때문에, 엘리트 과정을 밟아 프랑스 지식인계의 중심부에 진입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인 푸코를 통해 62살의 나이에 비로소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어머니가 사망하고, 바르트는 그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3년 뒤 사망했다.

  바르트는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할머니, 이모라는 세 명의 여자들 속에서 자랐다. 바르트에게 어머니, 여자는 사유의 본질이다. 바르트 사유의 특질은 ‘부드러움’이다. ‘부드러움’은 여자의 본질이다.

  바르트의 성정체성 역시 그의 ‘부드러운’ 사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동성애적인 성애는 이성애와는 달리 성 이외의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무목적인’ 성애이다. 이성애는 공동체의 목적, 생산력 등과 관련되어 폭력성을 수반하지만, 동성애는 그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폭력적이다.

 

  바르트의 부드러운 사유가 기호학에 접목하여 어떤 독창적인 논리를 이끌어 냈는지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도 별반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궁금하면 찾아봐야겠지만, 그럴 여력까지는 없다. 너무 더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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