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마지막에 남을 벽이라고 생각했다. 성경을 읽어 보려고 성당에 다니려 했던 적도 있고, 몇 번이나 정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구약은 남의 나라, 그것도 좋게 봐주기 힘든 이스라엘의 역사일뿐이니 안 읽어도 된다고 위안도 해보았지만 늘 가슴 위의 돌이었다. 단테의 『신곡』 을 읽자니 더 답답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주원준 박사의 강의는 1년 전쯤 고대 근동에 관한 것을 인상 깊게 들었다. 미지의 신화적 세계 같이 느껴지던 고대 근동을 전공한 학자도 처음이었고, 차분한 말솜씨에 깊이 배어든 매력이 상당했다.
이번에 EBS에 올라온 강의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고대 근동학의 맥락에서 구약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해 주는 <구약의 사람들> 이다. 전체 15강으로 기획되었고 오늘 현재 6강까지 업로드 되어 있다.
마침 1강에서 6강까지가 '창세기'여서, 오늘 간단히 정리하려고 한다.
1강 아담과 하와
뉴턴의 사과, 파리스의 사과와 더불어 이브의 사과 이야기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알고 있게 된 그런 이야기들 중의 하나다. 그러나 뉴턴의 사과도 허구고, 이브의 사과도 허구라고 한다. 창세기에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만 되어 있고 어디에도 사과는 없다는 것이다.
늘 궁금했지만 하느님은 왜 금기를 눈 앞에 버젓이 보이게 하셨을까? 더구나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의 혐의도 받고 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도 죽지 않았고 오히려 눈이 열려서 지혜로워 졌다. 진실은 뱀에 더 가깝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진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다. 눈이 열린 이후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행동에 그 핵심이 있다. 지혜를 얻은 최초의 인간은 자신을 부끄러워 한다. 지혜가 행복이 아니라 수치이다.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희랍 철학과 비교해 보면 지혜에 대한 이 부정적 서술은 놀랍도록 특징적이다. 지혜를 얻은 인간은 낙원을 잃는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고된 노동과 출산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돌아가는 길은 막혀 있다. 커룹이 지키는 에덴 동산과 인간의 세상은 영구히 단절된다. 커룹은 이집트에서 희랍으로 넘어간 스핑크스와 그 형태가 닮았다.
히브리인들이 떠돌았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방은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변방의 작은 나라들이 다투는 지역이었다. 수메르 문명 이후 아카드-바빌로니아 - 아시리아 등으로 이어지는 메소포타미아의 찬란한 문명과 고왕국-중왕국-신왕국의 놀라운 문화를 꽃피웠던 이집트 문명 사이에 끼인 변방의 야만인들에 불과했다.
영웅과 괴수와 신이 만들어 내는 화려하고 거대한 서사들은 성벽을 쌓고 도시와 문명을 향유하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것이었다. 성 밖의 작은 떠돌이 무리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거칠고 냉혹했다.
히브리인들은 가혹한 인간의 조건을 수용하면서 독특한 신화를 만들어 냈다. 성을 쌓은 거대 문명들이 화려하게 전시하는 반신반인의 인간 같은 것은 없다. 인간은 모두 동등한 피조물일 뿐이며, 그 누구에게도 신의 피는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죄인의 자손이다.
히브리인의 냉소적 시선은 성 밖 야만인의 성 안 문명인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지혜'가 이루어 낸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기도 하다. 눈을 뜬 지혜가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가? 전쟁과 정복과 화려한 신전과 높은 성벽으로 인간은 행복해졌는가?
고대 근동의 화려한 문명은 그들의 신화와 함께 오랜 세월 속에 사라지고 잊혀졌다. 그런데 가난한 백성들의 작은 이야기는 끈질기게 살아 남아 오늘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영웅과 파라오와 괴수와 성벽은 사라져도 가난한 사람들, 작은 가정들은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의 이야기가 인간 보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영웅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작은 인간들의 끈질긴 삶의 이야기다.
2강 카인과 아벨
카인은 농부고 아벨은 양치기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다. 왜 하느님은 카인을 외면한 것일까?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하느님은 아무 말이 없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카인과 아벨이 살아야 할 세상은 이런 곳이다. 잘 사는 악인도 많고 고통받는 의인도 많은 지금의 세상은 이때 시작되었다. 수없이 하느님을 찾고 묻고 또 물어도 왜 16개월의 아기가 부모라는 인간의 손에 맞아 죽어야 하는지 답하지 않는다.
악은 이렇게 찾아 온다. 부조리를 견딜 수 없을 때,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했을 때 악이 찾아 온다. 카인은 아벨을 죽여 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카인 이래 되풀이 되어 온 인간의 악마적 속성이다. 사회 구조적인 위기 상황이 찾아 오면 '나의 아벨'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그랬고, 일본의 조선인 학살이 그랬다. 사실 1차, 2차 세계 대전이 모두 그랬다.
희생양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은 손쉬운 희생양을 찾는다. 문제를 제대로 푸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 수 없다면 속이라도 풀자는 허약한 인간성을 노리는 사악한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옳게 행동하면' 극복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카인은 무너졌다.
악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인간이 카인의 후예라면. 그런데 욥이 있다. 욥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에도 끝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혼자서 욥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군가 도와주고 이끌어 주고 충고해 주어야 한다. '나의 아벨'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걸려 넘어지는 길이라고 말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이 누구건 그는 성직자다. 무신론자이건 이교도이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그가 성직자다.
그리고 우리 함께 스트레스 상황을 없애 나가야 한다. 그물을 쳐놓고, 함정을 파놓고 피해서 가라고 한다면, 그 그물이 세계를 뒤덮고, 그 함정이 모든 땅 아래 도사리고 있다면, 누구도 넘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은 카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카인의 낙인'은 징벌의 표식이 아니라 용서의 표상이다. 용서받은 '카인의 후예'와 여전히 '부조리한 세상'이 우리 삶의 조건이다.
3강 노아
홍수 신화는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이야기다. 아트라하시스 이야기나 길가메쉬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와 놀랄만큼 비슷하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두 신화와 노아 이야기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이 차이점이야말로 히브리인 특유의 핵심적 가치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분노에 찬 신은 인간을 절멸시키려 한다. 홍수 이전의 세계는 사라진다. 홍수에서 살아 남은 인간은 노아와 그의 가족뿐이다. 메소포타미아 홍수 신화에서 노아는 아트라하시스와 우트나피쉬팀이다.
아트라하시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우트나피쉬팀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인물로 홍수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인간이다. 길가메쉬는 '지혜의 정수'를 본 자로, 이 서사시는 지혜의 문학이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적 지혜를 가진 자만이 죽음을 넘을 수 있다.
노아는 지혜로운 자가 아니다. 노아가 선택된 것은 그가 의롭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은 비슷한 이야기 구조에 전혀 다른 철학을 담았다. 노아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강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의로움, 올바름이다.
세상의 의로움을 따지는 것은 강자의 시선이 아니라 약자의 시선이다. 강자에게 올바름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
기원전 5세기 말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제국 아테나이는 약소 중립국 멜로스를 쳐들어가 이렇게 위협했다. 정의 즉 잘잘못을 따지지 마라. 말로하는 정의가 통하는 것은 힘이 대등할 때뿐이다. 현실에서 정의는 강자는 원하는 것을 얻고 약자는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다. 멜로스인 의원들은 보편적인 선과 정의에 끝까지 매달리지만 결과는 모든 멜로스 시민의 죽음과 여자와 아이들의 노예화였다. 강자는 정의에 구애받지 않고 정의를 멋대로 규정한다.
보편적 정의에 기대를 거는 것은 약자이다. 사실 약자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지 않을까.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와 달리 노아의 이야기는 지혜로운 강자가 아니라 의로운 약자가 살아 남음을 보여 줌으로써 히브리인들이 처한 조촐한 현실, 약한 떠돌이 무리의 현실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의로움이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비종교인으로서, '의로움은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희랍 철학도 올바름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한다. 플라톤은 우주를 선의 이데아를 정점으로 계서화했다. 그런데 올바름의 실천은 그 이전에 올바름에 대한 앎을 요구한다. 희랍 철학이 앎을 인간의 아레테로 꼽는 것은 앎이 삶을 이끌기 때문이다.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올바르게 살 수는 없다.
히브리인의 올바름, 의로움은 다만 믿음인가? 부조리한 세계로 인간을 추방한 신에 대한 믿음인가?
4강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유서 깊은 도시 우르에 살았다. 아브라함의 역사적 연대기는 모두 가설일 뿐이지만 도시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기원전 3500년 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이 발생한 이래 세계는 문명과 야만으로 뚜렷이 양분되었다. 그 경계는 성벽이었다.
성 안은 화려함과 풍요가 넘치는 문명의 세계였고, 성 밖은 거친 야생의 세계였다. 성의 중심부는 신전이 차지했고, 그들의 삶은 늘 '신과 함께' 였다. 신과 함께 사는 삶은 성 밖의 야만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르의 아브라함에게 어느날 하느님이 말했다. 성 밖으로 나가라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우르 밖으로 불러 내어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이끌었다.
아브라함은 성 밖의 사람이 되었고, 아브라함의 신 야훼는 성 밖의 신이었다. 창세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요셉의 4대는 유랑하는 작은 가정의 이야기이며, 이들과 함께 하는 작은 신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는 영웅도 없고 위대한 정복도 없고 으리으리한 왕궁도 없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가족의 이야기, 지지고 볶고 미워하며 사랑하는 사연 많은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떠돌이들의 시선을 담고 있는 이 이야기는 위대한 제국의 영웅들이 모두 사라진 세계에서도 오래 오래 살아남았다. 가족의 이야기는 어디나 비슷 비슷한 인류 보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5강 이사악과 야곱
4대의 가족 이야기는 할아버지들을 중심으로 보아아도 재미있고, 할머니들을 엮어서 보아도 재미있다. 작은 가정에서는 할아버지들 못지 않게 할머니도 중요하다. 메소포타미아의 어떤 신화와 역사에도 등장하지 않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창세기에는 상세하게 들어 있다.
동아시아 문화권의 장자 상속과는 달리 창세기에는 장자 배척 사상이 들어 있다.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은 장자가 아니다. 주원준 박사는 창세기의 '작은 것들의 시선'이란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유목민들 사회에서는 곧잘 있는 풍습이라고 알고 있다.
그보다 재미있는 것은 노아편에서 '의로움'을 강조한 것과 달리 이 4대의 가정사는 다소 의롭지 못한 편법과 속임수가 많다는 것이다. 동생이 형을 속이고 장인이 사위를 속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속여도 그쯤은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간다.
6강 요셉
요셉은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인물이다. 요셉이 죽으며 창세기가 끝나고, 모세가 등장하는 탈출기로 이어진다.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는데, 동생 축에 속하는 요셉이 아버지의 편애를 믿고 형들에게 까불다가 죽을 뻔하고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가게 되면서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세기는 연대를 측정하기가 어렵지만 가장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내용은 요셉이 이집트에 정착한 이야기다. 기원전 1600년 경을 전후해서 청동기 문명 사회는 대격변을 겪는다. 윌리엄 맥닐의 <세계의 역사>에 의하면 유목민이 대대적으로 남하하면서 유라시아 문명 사회의 서쪽 끝인 유럽부터 동쪽 끝인 중국까지 문명의 파괴와 지배 세력의 교체가 일어난다. 유럽은 크레타 문명이 파괴되고 미케네 문명이 시작되었고, 인도는 인더스 문명이 무너지고 아리아인에 의한 갠지즈강으로의 이동이 시작되었으며, 중국은 상나라가 등장했다.
문명의 뿌리가 깊었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도 유목민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회복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카시트인의 지배를 받는 카시트 바빌로니아 시기가 있었고, 이집트는 힉소스 통치기가 있었다.
이 혼란한 틈을 타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사이에 있던 시리아-필리스티아 지역의 유랑인들이 대거 이집트로 유입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주원준 박사는 힉소스 자체가 별도의 민족이 아니라 시리아-필리스티아 혼종 민족을 가리킨다고 한다.
힉소스의 지배가 끝나고도 이집트로의 이민은 지속되었는데, 척박한 시리아-필리스티아에 비해 이집트는 너무도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넘어간 사람들을 '하피루'라고 불렀다. 부랑아, 강도떼, 쫓겨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이 명칭에서 '히브리'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요셉은 아마도 이때 이집트로 들어가서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나 추정한다. 갖은 고생 끝에 타국에서 출세한 요셉은 기근으로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들어온 형제들을 만나고 이런 저런 사연 끝에 모든 가족을 이집트에 정착시킨다. 한 가정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쫓겨나 타향살이 하던 동생이 집안의 희망이 되었다는 해피 앤딩의 스토리로 창세기가 마무리 된다.
요셉이 이집트에서 성공한 비결 중 하나는 완전히 이집트에 동화된 것이다. 실제 힉소스인들은 이집트를 통치했지만 훌륭한 문화에 감복해 철저히 이집트화 했다. 이집트인들 보다 더 이집트 문화를 받아 들이려 애썼다고 한다. 마치 중국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황허를 차지한 선비족이 북위를 세우고 철저히 한화 정책을 폈던 것과 비슷하다. 모세가 겪었던 이집트와 요셉의 이집트는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주원준 박사가 부탁하는 요셉 읽기는 이민자의 시선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혹은 창세기의 시선으로 이민자를 다시 보라는 것이다. 험한 노동 현장에서 궂은 일을 하는 많은 이민자들과 체류자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요셉이다. 그들 가정의 희망이다.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전 미국에, 독일에 보냈던 언니와 오빠들처럼 그들도 그들 나라를 일으키는 역군이자 가정의 등대로 와 있다. 그 큰 꿈과 희망이 비인간적 차별 아래 질식되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 보자는 당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