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신곡 : 중세의 끝

 

 

 

단테는 르네상스인이다. 르네상스를 중세의 末로 본다면 단테는 중세인이고,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면 최초의 근대인으로 추겨진다. 르네상스 시대는 중세와 근대를 이어 주는 가교이며, 시대의 전환기다.  중세인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근대인의 주체적 태도가 공존하는 『신곡』은 르네상스적 특징을 보여 준다.

 

 

 

 

<박상진 강의>

 

 

『신곡』의 원제목은 La Comedia di Dante Alighieri 이다. 그냥 'The Comedy'라고만 해도 통용된다.  강유원 선생은 이 제목을 '기쁜 소식'으로 해석한다.  Comedia는 다양한 뜻으로 풀이되어 왔는데, 희랍 전통 속에서의 Tragodia, 비극과는 다르다는 의미임은 분명하다.

 

신념의 체계가 흔들리는 전환기에 들려온 '기쁨의 노래'는 당대에도 구원의 노래였고, 수백 년을 흐른 지금까지도 사랑의 노래로 즐겨 불린다.

 

 

 

 

 

 

기쁨의 노래는 '어두운 숲속'에서 시작된다. 인생의 한중간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굴러 떨어졌을 때에도, 구원은 가능한가? 노래 안의 단테는 스승의 손을 잡고 지옥과 연옥을 통과하여 천국에 오르고, 노래 밖의 단테는 『신곡』을 노래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40대~50대까지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장년에게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에도 '단테의 삶'과 '기쁨의 노래'는 어두운 숲 너머에서 빛나는 '별'이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강유원 선생은 그렇다고 말한다. 

 

"저는 끝났답니다."

"아니요. 단테라는 사람을 보세요."

 

 

 

 

 

 

 

어두운 숲에서 빠져나와  지옥의 고통과 연옥의 정죄를 겪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는 단테의 순례는 Pathei Mathos의 희랍적 구성과 닮았다.  고전은 계속하여 고전을 계승한다. 특히 『신곡』은 고전을 모르면 거의 읽기 어려울 만큼 고전을 반복하고 변주한다.

 

 

 

 

 

 

 

 

신곡』은 배움의 서사시다. 단테에게는 스승이 있다. 단테는 스승의 손을 잡고 천국에 오른다.  독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시초로, 괴테, 헤르만 헤세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단테가 지옥에서 천국에 오르기까지 그 여정을 이끌어 주는 스승은 베르길리우스 → 베아트리체 → 베르나르두스다.  왜 단테에게는 스승이 필요했을까?

 

 

 

 

 

 

희랍의 서사시는 '무사' 여신으로 시작한다. 무사 여신이 노래하거나 들려준 이야기를 시인이 옮겨 주는 형식이다. 노래의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무사 여신이다.

 

 

 

 

 

 

 

 

신곡』에서는 단테가 직접 노래한다. 신곡』에서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근대적 요소가 '나'라는 주체이다.  중세에 진리의 주체는 신이다.  근대에 와서야 데카르트에 의해 생각하는 '나', Cogito가 진리 인식의 주체로 등장한다.

 

중세인 단테는 근대적 주체의 싹을 보여주지만 근대인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승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잇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단테는 무사 여신을 대신할 권위 있는 스승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7강.  『방법서설』 : 17세기의 위기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라 불리지만, 근본적으로는 위기의 시대였다.  17세기 초반에 시작된 30년 전쟁과 함께 중세는 완전히 무너지고, 17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근대가 펼쳐지는 전환기이다.

 

 

 

 

 

 

 

30년 전쟁은 기독교라는 신념의 체계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삶의 방식을 혼돈으로 몰아 넣었다.  진리 그 자체이던 신은 의혹 속에 냉대받고, 새로운 그 무엇도 진리의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아무것에도 의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삶을 단단하게 뿌리 내릴  '확실한 그 무엇' 을 간절하게 모색했다.  이때 근대의 첫 번째 철학자가 등장했다.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았다. 신도, 스승도 없이 혼자 난롯가에 앉아 오랜 의심 끝에 '나'를 발견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마지막 단 하나, '의심하고 있는 나'는 그 모든 의심에도 살아 남았다. 생각의 대상은 모두 의심스러웠지만, '생각하고 있는 나'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했다.

 

 

 

 

 

 

 

 

근대 철학의 탄생을 선언하는 "Cogito, ergo sum'은 이렇게 새로운 신념의 체계에 첫 번째 주춧돌을 놓았다.

 

 

 

 

 

 

데카르트는 중세 철학의 스승이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발로 밟고,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기하학과 광학 등의 과학적 방법론이었다.  『방법서설』로 불리는 이 책의 원제는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에 있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방법서설, 그리고 이 방법에 관한 에세이들인 굴절광학, 기상학 및 기하학> 이다.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 뉴턴으로 이어지며 17세기는 과학 혁명의 시대로 불리게 되고, 과학이 진리를 보증하는 신념의 체계로 부상했다. 플라톤이 앎의 단계에서 세 번째로 분류했던 추론적 사고가 진리를 추구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는 우리가 사는 현대와 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동일하다. 우리는 의심없이 과학을 최고의 진리로 인식한다. 'modern'은 근대인 동시에 현대이다.

 

 

 

 

 

 

 

데카르트가 찾은 Cogito는 세상을 확연히 이분화했다. 세상의 중심에는 '나'가 있고, 나 이외의 모든 존재는 '타자'이다. 여기서 '나'는 사유의 주체로서의 나, 즉 '사유하는 나'이다.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한다.

 

사유(res cogitans)와 연장(res extensa)으로 이분화된 세계에서 그 중심은 '근대적 주체로서의 나- res cogitans' 이며,  그밖의 모든 것들은 나에 의해 존재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나와 타자의 분리,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근대인을 행복하게 했는지, 불행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물음들이 있지만, 이 분리가 근대인의 특성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도 '신'이 필요했다.  이 세계가 모두 내 의식의 산물이라면 환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내 사유의 진리성, 내 인식의 확실성을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신은 개념상 완전하고 진실하므로, 신이 존재하는 한 내가 올바른 방법으로 인식한 세계가 진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에도 신은 데카르트에 의해 비록 주체는 아니지만 보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부여 받았다.

 

 

 

 

 

 

 

8강 『모비 딕』 : 신을 떠난 인간의 분투

 

 

 

 

 

 

 

허먼 멜빌(1819~1891)은 1851년에 『모비 딕』을 출간했다. 1776년 독립 전쟁 이후 미국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인디언의 피눈물로 점철된 서부 개척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식민지 경쟁을 거쳐 미국은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광대해 졌다. 1861~1865의 남북 전쟁을 끝내고 활기찬 재건시대를 맞으며 쇠락해 가던 유럽을 대신할 새로운 제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총과 돈과 욕망이 뒤엉킨 활력 속에  『모비 딕』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모비 딕은 축자적으로는 '거대한 놈' 이다. Dick은 속어로 남성의 성기를 가리킨다. 성경의 「욥기」의 구조가 그대로 큰 얼개가 되는 이 작품에서 흰 고래, 모비 딕은 '욥의 고래' 다.  「욥기」에서 신이 그 무시무시함을 자랑하는 리바이어던이다.  강유원은 신이라고도 한다.

 

 

 

 

 

 

 

『모비 딕』 41장 소제목도 '모비 딕' 인데 멜빌이 직접 묘사한 모비 딕은  '모든 악'의 응집이다.

 

 

 

 

 <모비 딕. 41장>

 

 

 

하지만 다른 선원들에게 모비 딕은 불가해한 존재다. 

 

 

 

 <모비 딕. 41>

 

 

 

 『모비 딕』을 읽고 나서도 사실 가장 궁금한 것은 모비 딕은 무엇일까? 라는 것이다.  엄청나고 무시무시한데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숭고한 어떤 것.   

 

 

 

 

<문학고전강의>

 

 

 

 

정리하면 모비 딕은 불가사의한 힘인데, 그것은 신이자 또한 악이다.  근대가 절정에 이른 동시에 파국의 조짐을 보이던 19세기, 신은 어떻게 해서 악이 되어 나타난 것일까?  혹은 왜 아직도 인간은 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까?  이 난해한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에이해브는 이교도다. 불가사의한 힘에 돌진하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은 인간이다.  

 

 

 

 

 

 

 

에이해브는 욥의 고래에 작살을 찔러 넣는 순간, '가장 높은 물마루에 이른 파도' 의 순간에 영원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의 파국적 종말은 난파선의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에 의해 전해진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 준 것일까?  에이해브는 광기에 가득찬 신념과 무모한 삶의 방식으로 피쿼드호를 산산조각 내었지만, 거대하고 불가사의한 힘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맞섰다.

 

'신을 떠난 인간'에게 구원은 없는가? 

'신을 떠난 인간'은 구원을 거부하는가?

 

 

 

 

 

 

 

 

3강부터 8강까지 여섯 권의 고전은 서양의 고대에서 근대까지 시대순으로 배치되었다.  전환기의 혼란 속에 바뀌어 가는 신념의 체계와 변화하는 삶의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 작품들을, 이 작품들에 대한 강의를 따라가면, 서구의 역사와 사상사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9강과 10강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 시대와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낸  성찰과 고난의 긴 여정을 마쳤다면, 이제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여행은 돌아와 거울 앞에 설 때에 끝난다.  강의하는 강유원과 그 모습이 비춰진 거울 속의 강유원은 행위하는 나와 그 행위를 반성하는 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적으로 잡아주는 이 화면은  '반성 - Reflection'의  중요성을 말없이 강조하는 듯하다.

 

 

 

 

 

 

 

 

9강. 『오이디푸스 왕』 : 나는 누구인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귀스타브 모로. 1864>

 

 

소포크클레스의 테바이 3부작 중 『오이디푸스 왕』은 희랍 비극의 백미다. 너무나 유명해 강연자는 줄거리를 이야기 하기도 뭣하고 하지 않기도 뭣할 것이다.

 

 

 

 

 

 

 

 

희랍에 전승되어 오던 테바이 전쟁에 관한 신화(?)를 비극 드라마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와 창작 순서는 다르다. 어느 대목을 공연해도 희랍인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숲. 해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하고 왕이 된다. 스핑크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질문을 던졌다. 오이디푸스, 발이 부은자는 발을 잘 아는 자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에 절망한 스핑크스는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다고 한다. 그런데 스핑크스는 정말 죽었을까? 오이디푸스는 정말 발을 잘 아는 자였을까?

 

  

 

 

 

 

테바이에 역병이 돌자 가장 지혜로운 자, 오이디푸스 왕은 또 한번 테바이를 구하겠다고 자신하며, 역병의 원인으로 지목된, 도시를 오염시킨 살인자를 추적한다.  긴박한 추적은 불길한 예감으로 범인을 향해 가는데, 예정된 운명은 쫓는 자가 쫓기는 자임을 드러낸다.

 

 

 

  <오이디푸스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숲. 해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수께끼는 오이디푸스 그 자신이었다. 3대를 뒤섞을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얼굴과 사자의 몸과 독수리의 몸을 한 스핑크스라는 재앙이기도 하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의 거울상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하고 비극의 운명을 완수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운명의 여신의 베틀에는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가?  오늘도 이 질문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밤을 지새우게 한다.

 

 

 

 

 

 

 

 

 

 

10강. 『욥기』 : 세계에 올바름은 있는가?

 

 

 

 

 

신과 사탄이 내기를 하고 욥은 까닭 없는 고통을 당한다. 신은 게임을 하는데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

 

 

 

 

 

욥은 알지 못하나 다만 복종할 뿐이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어떤 아이는 일생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올바름으로 살려다 떨어져 죽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사악함 그 자체로 칭송 받는다.  신은 무엇을 하는가?

 

 

 

 

 

신은 호통을 친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없는데, 티끌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사리를 따져 묻는다고 불같이 화를 낸다. 신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전지전능하신 신은 왜 답하지 않고 탓하시는 것일까? 탓하면서 답하지 않는 것일까?

 

 

 

 

 

따지고 따져도 알 수 없는 것들로 고통받을 때, "세계에 올바름은 있는가?" 라고 신에게 따져 묻고 싶을 때, 강유원 선생은 조언한다. 그럴 때는 아무 것도 탓하지 말고, 아무도 탓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자. 발버둥치면 오히려 빠져든다.  세상에는 불투명함이 있다. 신만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자.

 

 

 

 

 

그리고 사랑하자. 세상에는 올바름이 있고, 착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훨씬 많으며 결국엔 다 잘될 것이라 믿는 것이  『욥기』의 메시지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세상에 올바름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위기의 시대'에 읽는 고전의 끝이 사랑이라면 조금 허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철학이 앎에 대한 philia 이자 eros라면, 삶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해서 그리 생뚱맞은 것은 아니다. 앎이 삶이고, 앎과 삶은 사랑으로 고양된다.  

 

 

 

 

* 이 글은 강유원 선생의 글을 정리하고 있지만, 중간 중간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이 분명이 구분되지 않을 수도 있어, 강유원 선생의 강의나 그 의도에 벗어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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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2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을 글 잘 보았습니다! 고전의 끝이 사랑이라서 참 좋아요! 말리님 덕분에 이렇게 고전에 한발자국 다가서네요! 오늘은 어느덧 번개같이 흘러가버린 크리스마스연휴의 끝이네요. 남은시간 편안히 보내시고 즐거운 한주되십시요!

말리 2020-12-27 22:22   좋아요 1 | URL
전 어쩐지 약간의 쓸쓸함도 있었는데요. 아마도 세월에 따른 강유원 선생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10여 년 전 녹음 파일은 진짜 힘이 넘치고 혈기가 끓어 오르는 전투적 열정을 느끼게 하거든요. 걸리면 다 죽어, 뭐 이런 느낌까지. ㅎㅎ.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 수록, 삶을 겪을수록 누그러지고, 포용적으로 변해가시는 것 같아요. 원래 크리스천이니 가지고 계신 생각이기도 할 것 같고요.

내꿈다 2021-02-0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잘 정리된 텍스트 감사합니다

말리 2021-02-05 13:05   좋아요 0 | URL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