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부터 10강까지는 구약의 '큰 인물', '영웅', '스타', '여장부'가 펼치는 한판승의 이야기다. 떠돌이 작은 민족이 만든 통쾌한 전복의 서사가 오늘도 고달픈 삶에 위안과 용기가 되면 좋겠다.
7강 모세
모세는 구약의 가장 '큰 인물' 이다. 구약 성경의 첫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 한다. <창세기>를 제외한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의 이야기다.
모세가 등장하면서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로 모인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규합하여 정치적 갈등을 일으키고 파라오와 대적한다. 문제를 덮고 견디며 사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한다.
모세는 엑소더스를 결행한다. 이집트를 버리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노예로나마 안주하던 삶을 버리고 미지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밖에 있다면 벽을 넘어 밖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세와 히브리인들을 이끄는 것은 그들의 작은 신이다. 이 신은 작은 백성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하잘 것 없는 백성들을 위해 직접 싸우는 신이다.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신 중의 신, 파라오에 대적하여 그의 백성에게 길을 열어 준다. 작은 신이 큰 신을 이기고, 작은 백성들이 이집트의 사슬을 끊고 넘어 나아가는 탈출기는 구약 성경 최고의 뒤집기 한판승이다.
갖은 고난을 겪고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섰을 때 모세는 백스무 살이었다. 모세는 요르단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평생을 바쳐 들어가고자 한 땅이 눈 앞에 있다.
신은 단호히 금지한다. 누구보다 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몫이 큰, 자격이 있는 모세에게 너의 시대는 끝났고, 강 너머의 시대는 다음 세대의 것이라 말한다.
모세의 마지막 사명은 여호수아를 훌륭한 지도자로 만드는 것이다. 백스무 살의 노인은 다음 세대의 밑거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임 베네딕토16세 교황은 모세의 마지막에 서려 있는 이 '우수'에 대해 말했다.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서 건널 수 없는 약속의 땅을 눈에 담았다. 모세는 항변하지 않았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히브리인들의 앞에 모세는 없을 것이다. 그가 용기와 힘을 준 여호수아가 서 있을 것이다.
느보산을 찾는 사람들은 모세의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의 숙명과 그 한계, 그리고 다음 세대에 물려 줄 나의 유산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모세오경》의 대미에 깊은 울림을 준다.
다음 세대의 몫을 빼앗아서라도 움켜쥐려는 욕망이 건강 백세, 백 이십세로 포장되고, 다음 세대는 결혼과 출산의 포기로 맞대응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의 공동체라면 늙지 않는 영약을 찾기 보다 느보산에 올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8강 삼손
참 유명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아는 마지막 세대는 몇 살쯤일까? 모세가 구약의 '큰 인물'이라면 삼손은 '영웅'이다. 삼손의 영웅성은 태어날 때부터 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손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머리에 면도칼을 대어서는 안된다. 삼손의 힘의 원천은 잉태받을 때 하느님과 약속한 머리털에 있다. 들릴라에게 이 비밀을 말한 순간 삼손은 머리털을 깎여서 힘을 잃고 사로잡히게 된다.
왜 머리털일까?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강력한 국가들에 전해지는 영웅들은 머리를 모두 여섯 가닥으로 땋았다. 라흐무도 길가메쉬도 정확히 여섯 가닥이다. 그런데 이 작은 백성의 영웅은 머리를 일곱 가닥으로 땋았다. 고대 근동의 신화를 많이 수용한 구약의 이야기에서 작은 백성의 영웅이 큰 제국의 영웅보다 한 가닥 많은 머리털을 갖고 있다. 살짝 하나 더 얹었을 이 한 가닥의 머리털이 작은 백성의 간절한 바람을 엿보이게 한다.
삼손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러 4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들의 통치를 받던 시대에 태어났다.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하기 전 두 명의 필리스티아 여인을 더 얻었다. 삼손은 히브리인들의 관습애 구애받지 않고 필리스티아 여인들을 만나려 했다. 첫 번째 필리스티아 여인과의 결혼이 파탄에 이른 후 삼손은 필리스티아인들을 쳐죽였다.
필리스티아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압박하자 동족 삼천 명이 올라와 삼손을 묶어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넘긴다. 이민족의 압제 아래 살고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필리스티아에 대항하고 나선 삼손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는 재앙이다. 동족의 손에 잡혀 넘겨진 삼손은 그야말로 작은 민족의 비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뛰어난 동족 하나 보호해 주지 못하는 지질한 민족의 아픔이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간도에서 숱하게 겪었던 우리 민족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들려 간 삼손은 신의 도움과 괴력으로 필리스티아인 천 명을 가뿐히 쳐부수고 돌아왔다.
삼손 이야기는 세 번째 필리스티아 여인 들릴라에서 절정을 맞는다. 들릴라는 삼손을 날마다 들볶고 졸라서 기어이 머리털의 비밀을 알아낸다. 머리가 깍인 채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붙잡힌 삼손은 눈까지 후벼 파내진 채 청동 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연자매를 돌리게 된다.
삼손은 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신은 삼손에게 응답한다. 삼손은 필리스타아인들 삼천 명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곳에 불려 나가는데, 그 집의 기둥을 뽑아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깔려 죽으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신의 구원과 함께 죽은 비극적 영웅, 삼손은 모세나 다윗, 엘리야 등과 더불어 구약 곳곳에 등장하는 한판 뒤집기 승의 대표적 영웅이다. 적의 여인을 거듭 사랑하며 신과의 맹세를 깨고 나락으로 떨어진 영웅이지만 끝내 회개하고 신의 용서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원한 영웅으로 솟아났다. 작은 민족의 초라한 식탁에서 되풀이 되어 왔을 삼손의 이야기는 고된 삶의 끈질긴 희망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종교는 세상의 질서를 상대화 시키는 힘이 있다. 세계의 질서는 절대적이고,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넘어 뜨리는 전복의 서사가 종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를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의 체계, 실천의 체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9강 다윗
<다비드상, 미켈란젤로, 1504>
다윗은 구약 최고의 '스타'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라는 관용어는 종교와 무관하게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다윗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수많은 곡절 속에는 영웅적인 면모뿐 아니라 치졸하고 비열한 악인의 모습까지 다면적 얼굴이 들어 있다. 영웅 중의 영웅이라는 전통적 시각에 반하여 최근에는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비판이 적지 않다.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소년 다윗은 사자나 곰을 쳐 죽이고 그 아가리에서 새끼 양을 빼낼 만큼 힘센 장사요, 전사다. 다윗은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을 무릿매(돌팔매?)로 제압하고 목을 베어서 단숨에 이스라엘의 스타로 부상한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다윗에 환호하며 노래를 부르고, 사울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한다. 헬레니즘 문학의 '아킬레우스-아가멤논 문제'의 헤브라이즘 판본이다. 스승과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 상사와 상사보다 뛰어난 부하 사이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비극의 원천이 되고 있다. 청출어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그다지 쉽지 않다.
사울왕에게 쫓기며 다윗은 망명과 유랑을 일삼지만, 사울왕이 죽고 결국 유다의 임금이 된다.
왕이 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밧 세바라는 여인을 그녀의 남편에게 빼앗으면서 신의 징벌을 받게 된다. 다윗은 비열한 술수로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이고, 밧 세바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만, 신은 그 아이를 병들어 죽게 한다.
다윗은 이레 동안 단식하고 기도하였으나,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멀쩡히 일어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목욕하고 음식을 먹는다. 다 끝난 일에는 미련 없이 툭툭 털고, 또 다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다윗의 스타일이다. 일을 벌이고, 잘하면 칭찬받고, 잘못하면 벌을 받고, 하나의 일이 끝나면 새로운 일을 또 벌이고, 또 실수를 저지르고, 또 벌 받고, 또 툭툭 털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과오들 때문에 오히려 다윗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표상이 될만하다는 점을 깨우친다.
훌륭한 인간도 수많은 과오와 실패를 저지른다. 다윗의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지르고 실패해도 다시 저지를 수 있는 용기가 끝내 성취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꿈이 독이 되는 세상, 꿈꾸지 않을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는 세상에 젊은이는 없다. 건물주가 꿈이라는 초등학생들의 미래에 젊음은 없을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릿매질 한번에 제압하여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느 시대에나 골리앗이 있는 것처럼 어느 시대에나 다윗이 있다. 우리 시대 다윗은 젊은이다. 다윗임을 모르고 있는 젊은이다.
10강 유딧
10강까지 <구약의 사람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작고 약한 것이 큰 것을 이긴다는 전복의 서사다. 예나 지금이나 약자 중의 약자는 힘없는 아이와 여성이다. 과부 유딧은 이 주제의 정점이 아닐까?
솔직히 <구약의 사람들> 1강에서 10강까지 중 이름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 유딧이다. 남자의 목을 치는 여자나 남자의 목을 들고 있는 여자를 그림에서 본 기억은 있지만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유딧기의 배경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다. 기원전 1000년 간 고대 근동 세계를 지배했던 아시리아 제국 → 신바빌로니아 제국 → 페르시아 제국 → 마케도니아 제국 중 앞의 세 제국이 뒤섞여 있는 형태이다.
이런 혼란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침략을 받아온 이스라엘의 역사 속 여러 전쟁이 유딧 이야기에 녹아들었기 때문으로 본다.
어떤 제국이 되었건 대제국이 유다 땅을 침략한다. 남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느님께 울부짖고 차라리 항복을 원한다. 이때 유딧이 나선다.
유딧은 먼저 남자들을 안심시키고 용기를 준다. 그리고 경건히 기도하고, 공동체를 위해 홀로 결단을 내린다. 한껏 치장하고 음식을 만들어 시녀와 단둘이 적진으로 들어간다.
적군을 홀리는 데 성공하고, 치밀한 계략 끝에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쳐서 자루에 담아 유유히 적지를 빠져 나온다. 적장을 잃은 제국의 군대는 달아나고 이스라엘이 승리한다.
유딧기는 여성이 공동체를 구한 이야기의 전형이다. 작은 민족 이스라엘 중에서도 작은 여성 그 중에서도 더 작은 과부가 혼자서 대제국을 물리치고 공동체를 구해낸 전복의 서사야말로 그 통쾌함과 놀라움의 절정이다.
클림트의 그림을 가끔 흘낏흘낏 보았지만 저 가슴을 드러낸 여자가 유딧인 것은 오늘 알았다. 유딧은 일종의 팜므파탈로 그려진다. 그러나 적장의 죽음은 유딧의 성적 유혹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욕망 때문이라고 강사는 설명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유딧이 덫을 놓은 것은 사실처럼 보이고 그 덫에 걸어 들어간 것은 홀로페르네스 자신이다. 사기가 탐욕스런 사람들의 덫이듯 유딧 또한 욕정을 다스리지 못한 자의 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