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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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말 할 수 있을까..

알아도 알지 못했던 것들..

 

한강은 "제대로 써야합니다" 의 압박을 어떻게 이기고,

제대로 쓸 수 있었을까?

그것도 자기 특유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지켜며.

 

나도 리뷰를 제대로 쓰고 싶지만,

쓸 수가 없다.

다만, 습기많은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아침에,

나는 펑펑 울었다,

고 써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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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1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에 대한 평이 다들 좋군요....

말리 2014-07-15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아는 이야기를 흡인력있게 써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원래 제가 한강의 글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인물들이 구체적보편성을 획득함으로써 감성적 공감과 전체적 조망이 모두 가능한 소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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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반쯤 읽었는데도 재미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다 읽나 한숨이 났다. 좋은 책이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집중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슬렁슬렁 살았다 해도, 중년으로 보일 정도가 되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들이 꽤 되기 마련이라, 대부분 아는 내용들이었다. 예전 생각이 났다. 하숙촌에는 이름이 거창한 만화방들이 몇 군데 있었다. 또렷이 기억나는 이름은 집현전과 만화궁전. 24시간 만화방이었는데, 나는 가끔 등굣길에 기어들어가 해가져서 빠져나오곤 했다. 그때 ‘만화광장’ 이라는 월간 만화잡지가 굉장한 인기였다. ‘만화광장’의 꽃은 단연 허영만의 <오! 한강> 이었다. 들은 소문에 불과하지만, <오! 한강>은 안기부의 요청으로 그린 반공만화라고 했다. 일제강점 말기부터 80년 오월 광주까지, 주인공 강토의 파란만장 인생사의 끝을 놓고 보면 친공이랄 수는 없지만, 이런 것이 반공만화? 우리는 안기부의 뒤통수를 멋지게 후려갈긴 허영만에 환호하고, <오! 한강>에 열광했다. 그 후 ‘만화광장’이 폐간되었는데 (일시 정간이었는지, 폐간이었는지, 그 이후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 한강>때문이라는 설이 분분했다. <오! 한강>은 안기부가 선전용으로 기획했지만, 그 기획 의도의 촌스러움과는 정반대로 80년대 정치만화의 명작을 탄생시켰다. 이념을 별개로 한다 해도, 작품 자체만으로도 엄청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만화였다.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책이다. 안기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만, 이 책 역시 이를테면 계도 혹은 홍보의 목적으로 쓴 책이다. 아홉 가지 영역의 인권을 다루고 있는데, 쉽고 흥미 있게 다가가기 위해, 다양한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고 있다. 읽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이제 워낙 흔하기도 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독특한 시각이 아니라 일반적 독법으로 영화를 풀기 때문에 구미가 그다지 크게 당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물론 좋은, 혹은 선한 책이다. 아쉬움이라면, 좋은 책이니 더욱,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긴장감 넘치게 쓰였다면 하는 것이다.

 

삼분의 이 정도 까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8장과 9장은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 9장 제노사이드 편은 더 그랬다. 중앙아프리카의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에 벌어진 인종청소에 관한 사실들은 내가 모르던 것들이다. 간혹 르완다에 관한 단신을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너무 먼 나라들, 그리고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 후진국의 미개한 종족 간의 분쟁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아프리카 종족들 사이의 학살전이 맞지만, 거기에는 벨기에와 독일의 과거 식민통치가 그 배경원인이라는 진실이 덧붙여져야 한다. 이 비극의 배후에는 서방세계의 제국주의가 있다. 영화 <호텔 르완다>는 유엔군이라는 명목으로 르완다에 들어온 서방국가들이 자국 국민들만 구해 나가고, 현지인들은 학살의 현장에 그대로 버려둔 냉혹한 ‘인권’ 의식을 고발한다. 그들의 인권은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 즉 서방세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권리인 것이다. 동물들에게 인권이 없듯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도 인권은 없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언제나 인권을 떠든다. 북한의 인권이 어떻고, 중국의 인권이 어떻고... 고맙게도 그들에게 동양인들은 그래도 사람이긴 한 건가.

 

그런데 인권이 인간의 타고난 권리로만 규정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렇게 접근하면 인간 개개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진다.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식의 휴머니즘이 해법으로 제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권이란 사회구조와 결부되어 있다. 식민통치가 있는 한 식민지 원주민의 인권은 없다. 독재가 있는 한 그 국민들의 인권은 없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저개발국의 기아는 해결될 수 없다. 김두식의 한계도 여기에 있다. 독일과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는 잘 설명해 놓고도 결론은 이런 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매달 약간의 기부를 하면 충분합니까? 먹을 것을 줄여서라도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약간의 기부’와 ‘먹을 것을 줄여서 도우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리 많은 도움도 그저 ‘도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도움이기도 하지만, 잔혹한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깨닫고 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분노를 그 구조를 향한 진정한 분노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선진국들이,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뒤에서 부추기는 갈등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들을 중단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지젝이 말하듯 지구상 최고의 자선가 빌 게이츠는 한 편으로 그 어마어마한 빈부격차를 유발하는 장본인이다. 소로스 역시 그렇다. 그는 업무 시간의 반은 인도주의적 활동에 할애하지만 나머지 반은 금융투기를 함으로써 (바로 그 인도주의가 필요하도록) 빈곤을 만들어낸다.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선진국들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p52 <폭력이란 무엇인가?>

 

김두식의 이런 시각은 5장 노동 부분에서도 드러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설명한 후 비정규직으로 불안정성을 높이면 잘리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자본의 생각이 다음의 이유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불안정성이 외형적인 생산성을 높일지는 몰라도, 불안한 영혼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에는 혼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혼이 빠진 상품이 고객에게 감동을 줄 리도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경제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면이 너무 많습니다.....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날로 행복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삶의 질은 갈수록 떨어지고 양극화만 심화됩니다. p188” 날이 갈수록 경제가 악화되는 것은 상품에 혼이 들어있지 않아 사람들이 사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 늘어가고, 임금이 낮아지는데, 혼이 들었건 넋이 빠졌건 어떤 상품이건 구매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순환이 가장 중요하다. 노동자는 곧 소비자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임금이 낮아지면, 단기간 자본의 이익은 증대하겠지만, 노동자 즉 소비자의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판매량 자체가 감소한다. 사고파는 흐름이 막히면 경제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노름판과 마찬가지다. 큰 손이 싹쓸이를 하면 판은 끝난다. 고스톱을 칠 때도 개평이라며 딴 돈을 떼어주는 이유는 딴 놈이 착해서가 아니다. 고스톱 판이 돌아가려면 참가자 모두에게 일정액의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파산은 곧 소비자의 파산이다. 그것은 곧 자본가의 파산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전히 착취할 후진국이 존재하는 한, 원료는 싸게 사고, 생산품은 비싸게 팔 그런 나라들이 존재하는 한, 자본이 쉽게 파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 하나, 둘 손을 털면 자본도 끝장이다. 당장 눈앞에,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라고 모른 척 하지만, 계산은 간단하다. 출산율 저하 운운하면서,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하느니 경제가 후퇴하느니 난리를 칠 때, 나는 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일자리는 적고 일할 사람은 많아서 이 난리인데, 앞으로 기술이 더 발전하면 사람이 필요한 일이 더 적어질 텐데, 평균수명도 늘어나 일할 수 있는 연령도 훨씬 높아질 텐데, 왜들 문제라고만 할까? 사실 우리나라는 국토면적에 비해 인구수가 많은 편이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와서 알게 되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활동인구가 준다는 말의 진실은 일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이 아니라 소비할 사람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매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로봇이, 아무리 높은 기술이 저 비용으로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면 무엇할 것인가? 그걸 사 줄 사람이 없는데. 혹시 미래에는 로봇이 구매자가 될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소비자들의 목을 이렇게 옥죄이는 것일까?

 

 

여하튼.... 나도 훈훈하게 마무리 ;;

착한 책이고, 필요한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으면 세상에 대한 관심을 좀 더 폭넓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인권감수성의 핵심은 ‘불편’이라고 한다. 불편해도 인권을 위해서라면 괜찮아. 좀 지루해도 인권을 위한,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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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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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를 다시 읽었다. 독서회 발제를 맡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았는데, 올해 『투명사회』가 나오면서, 저자 한병철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자, 어느 회원이 제안을 했고, 『투명사회』보다는 『피로사회』가 읽기 쉽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2012년,『피로사회』가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던 여름 즈음, 나는 서점 간이의자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훑어보고 살까 했는데,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워낙 얇은 책이라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면역학에 빗댄 시작이 매혹적이었으나, 2012년 현재 우리사회와는 조금 엇나있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스스로를 닦달하며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자기 탓만을 하던 시기를 지나, 이미 구조의 문제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2011년 9월의 ‘월가를 점령하라’를 통해 명시된 ‘99% : 1%’의 사회구조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1%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더 이상 모른척할 수 없게 되었다. 알지 못했던 것, 알고 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하필 미국에서, 그 경제 대국 미국에서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미쿡’ 사람들이 보따리를 안고 쫓겨나는 판에, 그깟 토익 만점을 받는다 한들 그것이 1%를 보장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사회는 이미 피로사회를 지나 잉여사회로 진입해 가고 있었다.

 

오늘 독서회 책은『채털리 부인의 연인』이었다. 다음 주가 『피로사회』인데, 회원들의 반응이 큰일이다.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단다. 『투명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편인데,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하지 않는 회원들에게는 너무 압축적이어서 힘든 것 같다. 한병철은 길게 설명하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대중에게 불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발제해야 할 지 고민이다. 처음에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먼저 책 내용을 쉽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내가, 쉽게 가능할까? ;;

 

  

 

 

 

(이게 더 어려울까? ::)

 

 

 

피로사회란 한마디로 성과사회의 이면이다. 성과사회란 자기가 자기를 달달볶는 사회다. 이거는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일일이 지시하고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 9시 출근 6시 퇴근, 눈치 볼 것도 없다. 오후에 느지막이 출근하든, 아예 집에서 뒹굴든 관여하지 않는 회사도 많다. 규율과 통제가 사라져 간다. 다만 성과만 있으면 된다. 이제 호봉제도 옛말이 된지 오래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우리 기업들은 급속도로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회사 오래 다녔다고 월급 많이 주는 시대는 끝났다. 성과만 좋으면 대리도 팀장이 되고, 연봉이 과장을 능가할 수 있다. 무능하고 연차만 높은 상사들은 눈치가 보여, 쪽팔려서 회사를 떠난다. 성과사회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성과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없다. 자기착취의 시대가 온 것이다.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를 직접 착취하지 않는다.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닦달하는 부모의 방식도 ‘성과사회’ 적이다.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저자 김두식이 딸에게 한 말이다.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든 말든 상관없다. 그런데 대학을 가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에 빠져 살기 쉽다. 네가 그런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자신만 있다면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이렇게 세련되게 나오면 더 숨이 막힐 것이다.

 

이제 누구를 탓할 수 없다. 열 받아도 욕할 대상이 없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내가 무능하고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자신을 몰아붙여야 한다. 탓할 대상을 잃은 분노는 외부로 표출되지 못하고, 내 속에서 곪아터진다. 우울하다. 하나의 일에 느긋하게 집중할 시간도 없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멀티태스킹이 기본이다. 성과사회의 우리는 모두 집중력결핍과잉운동장애를 앓을 수밖에 없다.

 

일분일초도 허투루 할 수 없다. 특별한 목표 없는, 그래서 성과도 없는 어떤 활동도 낭비다. 여가활동마저 전투적이 되어버린다. 등산을 좋아하면 100대 명산을 모두 정복해야 하고, 여행을 다니면 20대에, 30대에 꼭 가보아야 할 명소는 다 찾아다녀야 한다. 산에서도 뛰어다니고, 여행지에서도 녹초가 될 때가지 걸어야 한다. 책을 읽어도 일 년에 50권 목표를 세운다. 등굣길에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하고, 차를 몰며 일어 회화를 들어야 하고, 청소를 하면서 고전읽기라도 켜 두어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가장 견디기 어렵게 되었다. 제레미 벤담처럼 우리 역시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은 계산되어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나 과부하하가 걸린 기계가 정지하고, 무리하게 뛰는 심장이 갑자기 멈춰버리는 것처럼 과잉활동의 결과는 완전한 소진과 고갈이다. 피로가 몰려온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증상이다.

 

왜 우리 사회는 성과사회가 되었을까? 왜 자본은 더 이상 직접 착취하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틀에서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자기착취의 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됨에 따라 착취의 방법도 발달했지만 노동자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규율과 통제에 의한 강제적 착취는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방식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노동자의 연대를 약화시키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성에 목매달게 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해졌다. 성과급이란 같은 시간을 일해도 그 실적에 따라 차등 대우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동료는 더 이상 나의 동지가 아니라 나의 경쟁자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내가 가져야 할 몫이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성과급제가 도입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면서, ‘만인(의 동료)에 대한 만인(의 동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피로사회』의 개요만 짚자면 대충 이렇다. 이런 정도는 한병철의 고유한 분석도 아니다. 차라리 신자유주의 체제가 가져온 사회구조적 현상에 대한 많은 통찰들이 빠져있다. 아무리 자기착취를 해도 낙오할 수밖에 없는 승자독식 체제, 무한 경쟁 체제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이 주목받았던 것은 20세기의 규율사회를 면역질환으로, 21세기의 성과사회를 신경증으로 해석해낸 그 독특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병철 스스로도 “이러한 예상 밖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이 책이 소진증후군,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운동장애 등과 같은 정신 질환의 역사적 위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경험했고, 경험하고 있는 시기다. 면역학에서 신경증으로의 변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이 모두 우리가 직접 겪은 것이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운 것이 아닐까?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0세기는 면역학의 시대다. 면역반응이란 나와 이물질, 나와 타자의 투쟁이다. 면역학의 시대란 타자와의 대립의 시대다. 타자는 나를 억압하고 통제한다. 주인이 되지 못한 우리는 복종의 주체가 된다. “~해서는 안된다” 혹은 “~해야만 한다” 라는 금지와 강제에 따라야만 한다. 규율을 어기면 범죄자가 된다. 규율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광인이 된다.

 

면역치료는 나를 침입하는 이물질을 길들여 방어력을 높이는 것이다. 예방주사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균을 우리 몸에 집어넣는 역발상이다. 약한 균을 미리 상대해 본 우리 몸은 자체의 방어력을 갖추게 되고, 진짜 실전이 벌어졌을 때 가뿐하게 제압할 수 있다. 헤겔식으로 하자면 부정의 부정이다. 한병철은 헤겔의 ‘부정성’을 철학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듯 보인다. 『투명사회』도 부정성과 긍정성의 대립에 기초해 있다.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대표되는 투명사회는 긍정성 과잉의 사회이다.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이 사회를 파국으로 몰고 있다는 것이 한병철의 생각이다. 부정성의 회복,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 가 그가 주장하는 해법이다. (『투명사회』리뷰)

 

21세기는 신경증의 시대다. 세계는 하나다. 우리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다. ‘살색’이란 말이 용납될 수 없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다양성과 차이의 시대, 관용이 제 1의 덕목이 되었다. 그런데 타자와의 대립이 없는 동질성의 시대, 긍정성 과잉의 시대는 평화롭고 행복할까? 함정은 긍정성이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거부하고, 버리지 못한 것들이 모두 몸 안에서 쌓인다. 소화불량이 되거나, 비만이 된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더 이상 복종의 주체가 아니라 성과의 주체다. 무엇이든 “Yes, we can." 할 수 없으면 낙오자가 된다. 낙오에 대해서는 외부에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오롯이 나의 탓이다. 젠장! 내가 못난 놈, 내가 쓸모없는 놈이다.

 

적이 사라지면 오히려 무기력에 빠진다. 맹렬한 적의는 분노를 불타게 하고 삶은 활력을 띤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적에게 돌려진다. 환상 속에 살 수 있다. 저 놈만 없으면, 저것만 없으면, 한순간에 유토피아가 열릴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장애물이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은 환상이다. 문제는 그대로다. 현실에서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없다. 적은 상대하기 쉽다. 분명하다. 그러나 현실을 구조 짓고 있는 틀은 알아보기도 힘들거니와 바꾸기는 더욱 어렵다. 그것은 자연처럼 그냥 주어진 것이다.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적응의 대상이다. 그런데 그 틀 속에서는 어떤 해답도 없다. 젠장! 울하다..

 

독일인들이 그렇게 쉽게 반유대주의에 빠져들었던 이유다. 삶의 피폐를 모두 유대인 탓으로 돌렸다. 유대인이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몽땅 차지했다. 유대인만 사라지면 자본주의 경제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빈곤과 퇴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는 유대인 탓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속되도록 유대인이라는 적을 독일인의 분노 속에 던져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진정 피로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인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는 사회인가? 이제 좀 지나갔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와 멘토 열풍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악착같은 자기계발과 자기착취 속에 기진맥진하면서도, 힐링 주사를 맞아가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친다.

 

그러나 한편에는 더 이상의 자기착취를 거부한 인생들이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란 승자독식의 사회이며, 1~10%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낙오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07년 『88만원 세대』가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이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 이후 최근에는 88만원 세대로 지칭되는 이들 세대 스스로가 자신들의 사회학을 생산해 내고 있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최태섭의 『잉여사회』, 그리고 약간 다른 각도의 분석이지만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이 내가 읽은 책들이다.

 

『잉여사회』에서 가장 가슴 아픈 구절은 “우리들의 시대에 가장 대중적이고 절박한 문학의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소설도 시도 아닌 ‘자기소개서’일 것이다.” 이다.(리뷰) 나는 25년 전쯤에 입사원서 딱 두 장을 쓰고 취직했다. 그러나 이런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났다. 대다수의 청년들이 수십 수백 장의 자기소개서를 쓰고도, 겨우 계약직으로나 사무실 책상을 가질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구조적으로 많은 임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나 골라 쓸 수 있는 예비 노동자들이 항시 대기 중인 한 아무 문제도 없다. 여전히 많은 청춘들이 성과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자기착취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는 잉여사회다. 취업준비생의 사회는 잉여사회, 그것도 탈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잉여사회다. 애써 외면하며 “노력이 나를 바꾼다.”고 써붙여 보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처지가 바뀌지 않을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신물이 난 청년들은 스스로 잉여를 선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잉여다. 우리가 병맛이다. 개콘이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잉여들, 자신을 희화하며 차라리 즐긴다. 그 극단에 일베가 있다.

 

물론 우리사회는 여전히 성과사회기도 하다. 한쪽에서는 자기착취가 한쪽에서는 자기 희화가 일어나고 있다. 성과사회인 동시에 잉여사회이고, 자기착취인 동시에 자기 희화이다.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성과사회에 대한 한병철의 해법은 ‘부정성’ 이다. 헤겔의 부정성, 니체의 ‘아니오’ 이다. 한병철은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을 성과사회의 ‘과잉활동’과 동일시하여 비판한다. 생각 없는 활동의 연속은 천재 백치, 자폐적 성과 기계를 낳는다. 니체는 “활동적인 사람은 보통 고차적으로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고 했다. 멈추어 서는 부정성, 무위의 부정성이야말로 사색의 본질이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부정성의 존재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한병철이 아렌트를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인상이다. 아렌트는, 잘 모르지만 몇 권 읽은 책으로는, 행위와 노동을 엄격하게 구분 한다. 한병철이 말하는 과잉활동은 아렌트에 따르면 노동이지 행위가 아니다. 설마 아렌트가 돈 받고 하는 일은 노동, 자유롭게 하는 일은 행위 따위로 단순하게 구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 이상하다.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사유이다. 아렌트는 노동이 아니라 사유와 행위를 주장했다. 한병철의 과잉활동은 그것 자체로 성과사회의 특징을 잘 포착하고 있다. 과잉활동을 굳이 아렌트의 행위개념과 무리하게 연관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하튼 과잉활동에 대한 무위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한병철이 가져오는 것은 ‘바틀비’이다.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 ~" 로 유명세를 타면서, 현대의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그런데 한병철은 바틀비의 무위를 규율사회의 무감각과 동일시하며 기각한다. 사실 『필경사 바틀비』를 직접 읽어보면, 이게 뭐? 하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의 필경사인데, 맡겨진 일들을 하나씩 거부한다. 그는 항상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며, 긍정문을 써서 거부한다. 끝내는 모든 일을 거부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가라는 말도 거부하고, 감옥에 가서는 먹는 것도 거부하고, 죽는다. 그런데 짧고 어이없는 이 단편을 두고, 많은 철학자들은 찬사를 쏟았다. 들뢰즈는 “바틀비는 간장병과 위축증 환자이면서도, 실은 환자가 아니라 병든 미국의 의사, 메디슨 맨, 새로운 그리스도, 우리 모두의 형제다.” 라 했다. 내가 바틀비를 처음 접한 것은 지젝을 통해서다. 지젝 역시 한병철과 마찬가지로 무위의 부정성을 역설했다. 이것저것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러나 조용히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병철과는 달리 바틀비를 그 무위의 부정성으로 보았다. 여기서 지젝을 설명하는 것은 복잡한데, 단순히 말하자면 이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틀 자체를 건드릴 때, 바틀비의 무위는 어떤 행위보다 파괴적인 전복이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이제부터 “우리는 삼성의 주식을 사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라고 선언하면, 삼성은 일시에 파산할 것이다. 삼성의 주가는 삼성의 생산력 자체와는 관계없이 움직인다. 삼성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주가이지, 매출액이나 영업이익 따위가 아니다. 혹은 “우리는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기를 선호합니다.” 라며, 한꺼번에 모두가 현금을 인출한다면 금융계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은행은 가상의 돈으로 움직인다. 은행에는 실제로 모든 예금을 인출해 줄 돈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삼성이 만들어 놓은 시장의 틀,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무너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죽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는 단순한 거부나 무기력, 무력함이 아니다. 목숨을 건 투쟁이다. 바틀비는 결국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틀비의 “~ 하지 않기를 선호합니다.”가 무시무시한 부정적 힘이 되는 것이다.

 

한병철이 바틀비를 기각하는 데에는 성과사회에 대한 그의 대안이 다분히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부정성을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성과사회가 한병철의 말대로 자기착취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현상일 따름이다. 성과사회는 규율사회와는 달리 외부의, 타자의 착취가 없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틀렸거나 제한적이다. 성과사회에서는 아니 잉여사회에서는 구조 자체가 착취를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승자독식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무한 경쟁을 유발하며, 자기착취에 빠져들게 한다. 수레를 훔친 도둑의 이야기와 같다. 수레를 샅샅이 뒤져도 무엇을 훔쳤는지 찾지를 못했는데, 사실 그 도둑이 훔친 것은 수레에 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수레 자체임이 밝혀졌다. 성과사회 안에서는 착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과사회라는 수레 그 자체가 착취이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는 잉여사회의 우리 젊은이들은 그 속임수를 벌써 알아챘다. 그 수레를 되찾기 위해, 그 틀을 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성과사회를 사는, 잉여사회를 사는 우리의 과제이다.

 

구조의 착취에 눈을 감은 한병철의 결론은 그러므로 모호하다. 결론에서 그는 난데없이 나쁜 피로와 좋은 피로를 구분한다. 피터 한트케를 가져와 ‘부정적 힘의 피로’를 주장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한병철이 원하는 사회는 ‘오순절-사회’와 같은 피로사회다.(신자가 아니므로 이 비유는 더욱 절망적이다.)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가 무장을 해제하여 막간의 휴식과 평화를 주는, 그런 피로 사회다. 그의 피로사회는 긍정성이자 또한 부정성인데, 그래서 그런 부정성의 피로가 말 그대로 ‘막간’의 휴식 외에 무엇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카프카의 말처럼 피로사회의 끝에 치유가 저절로 올까?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 한병철 역시 돌고 돌아 성과사회의 그 많은 ‘힐링’ 의 대열에 합류한 것일 뿐인가?

 

한병철은 재독 철학자다. 그는 독일사회와 한국사회가 본질에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사회의 이 잉여들을 어떻게 설명하지 궁금하다. 처음에 나는 독일은 아직도 피로를 느낄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부러웠다. 독일이 상황이 좋은 것인지 한병철이 일면만 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투명사회』도 우리사회와는 어딘지 어긋나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여하튼 저자 소개에 의하면 한병철은 『피로사회』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피로사회 잉여사회 부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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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9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좋은 리뷰를 본 적 없는데 이 리뷰는 책보다 좋군요....

말리 2014-07-09 19:34   좋아요 1 | URL
무슨 말씀을 ^^ ;; 감사합니다.

말리 2014-07-10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기: 어제 '너구리'가 몰고온 열기에 컴터 열기까지 더해, 끙끙거리며 리뷰를 쓰다 지쳐 버렸다. <우울사회> 편의 건강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은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데, 힘이 빠져서 그냥 끝내버렸다. 조금 덧붙여 둔다. P112~113의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관심사는 좋은 삶이 아니다. 다만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심을 뿐이다. 삶은 어떤 가치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으로 환원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다.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건강이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왜 건강해야 하는지, 건강하게 오래살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은 사라지고, 건강 자체가 목적이 된다. 건강은 새로운 여신이다. 아감벤과는 다른 의미에서 우울사회의 우리는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이다. ... 요즘 우리사회의 건강 열풍에 딱 맞는 말이다. 건강하게 오래살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 알려지고 너나할 것 없이 따라하기 바쁘지만, 정작 그렇게 오래 살아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사고는 전혀 없다.

말리 2014-07-1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란여우님 글을 읽다가. 브레히트의 시집을 읽은 적은 없는데, 어떤 글에서 보게되든 놀랍다. 한 편의 시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회원들에게 소개해주려고 여기 옮겨 놓는다.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제가 누더기 옷을 벗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 옷을 힐끗 보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은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의 어깨나 벽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얼룩지니까요.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거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08 15:37   좋아요 1 | URL
자본주의는 좋은 삶에 대해 그닥 관심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다만, 판타지를 제공합니다. 아메리카드림'이나 코리안드림처럼 말이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열려 있지 않은 데 말입니다. 가짜 판타지를 작동시키고는 사람들이 그 목표를 향해 뛰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뛰죠. 문제는 그게 다람쥐집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다람쥐집 통을 돌릴 때 나오는 에너지로 먹고 살죠. 결국 희생은 ....
 
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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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단속사회』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한병철의 『투명사회』때문이었다. 『투명사회』는 한병철의 명성 덕분인지, 책 자체의 가치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들리는 통에 읽기는 읽어야 할 책으로 세뇌되어 있었다.

 

 

손바닥 정도의 판형에 겨우 100여 쪽에 불과한 『피로사회』는 2012년 출간하자마자 한병철이라는 재독 철학자를 단숨에 장하준과 같은 세계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은 이미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2011년 9월의 “Occupy Wall Street” 시위가 휩쓴 후였고, 우리 중산층들 역시 파산하고 있거나 언제 닥칠지 모를 몰락에 두려워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우리사회의 바닥에서 축축하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이미 피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나는 너무 늦게 왔다고 해야 할, 아마도 5~10년 전이었다면 우리 역시 중산층의 꿈속에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으니, 『피로사회』를 서점 한 귀퉁이에서 읽어 내리며, 여전히 ‘피로’를 말할 수 있는 독일사회가 부러웠다. 그럼에도 『피로사회』가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심히 공감했던 사람들과 서평을 지면에 싣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중산층에 속해 있었고 게다가 한병철이 독일사회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이 한몫을 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류현진 경기를 보며 좋아하듯, 장하준이나 한병철을 읽으며 뿌듯해한다고, 빌어먹을 네셔널리즘 운운의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여하튼 『피로사회』는 한국사회와 살짝 빗나가 있으면서도, 또 한국사회의 어느 부분과는 정확하게 일치했던, 대중적 사회학이었다. 그런 면에서『투명사회』역시 비슷하다. SNS사회의 투명성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디지털 파놉티콘이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물론 우리사회에도 어쩌면 우리사회에서야말로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뢰는커녕 기본적 투명성조차 이루지 못했다. 세월호에서도 총리인선에서도 GOP 총기사건에서도, 무엇하나 투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런 꼴을 보며 투명성보다 불투명 속에서의 신뢰를 선택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투명성에 대해 한병철이 부여한 온갖 부정적 의미들을 다 인정한다하더라도 우리가 ‘투명성’이란 단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병철이 독일사회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도 디지털 파놉티콘에 대한 사유를 그렇게 ‘투명성’이란 개념으로 풀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사회분석 자체로서는 『피로사회』보다는 『투명사회』가 우리사회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투명사회』와 『단속사회』를 묶어 떠올렸던 이유는 하나다. 두 책이 올해 3월에 거의 동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에서 두 책을 묶은 서평을 보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SNS 사회의 문제점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책을 엮어서 소개하거나 평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지만 내 생각으로 두 책은 그것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다. 『투명사회』는 SNS 사회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지만, 『단속사회』는 그렇지도 않다. 『단속사회』가 다루는 관계가 이것저것 많아서 꼭 무엇 하나를 짚을 수도 없다. 사실 단속사회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관계’ 이다. 이 시대의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며, 잃어버린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주장한다. SNS 상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회피, 차단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쉴 새 없이 접속”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사회 즉 “단속사회이다.

 

엄기호가 주로 주목하는 관계는 학교와 노동 현장 등에서의 그것이다. 각 장의 시작마다 ‘예문’처럼 들고 있는, 초등 교과서의 그것처럼 좀 촌스러운, ‘관계의 사례’는 거의 학생이거나 교사, 노동자들이다. 막상 이 예문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우만, 울리히 벡, 기든스 등의 사회학 이론들부터 철학, 경제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이다. 그렇다고 구체적이거나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고, 학자들의 이름과 주요 개념어 혹은 알려진 문장을 인용하는 정도이다. 말하자면 ‘관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여러 권위 있는 이론을 통해 뒷받침하는 동시에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인 듯한데, 산만하다. 사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어디서 들어본 것들 혹은 누구나 생각할만한 것들이다. 그것들에 유명한 사람들의 권위를 덧대었을 따름이다. 이 책은 정신을 집중하고 읽기에는 느슨하고, 대충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차라리 1/3 정도로 줄이면 짜임새 있고 팽팽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흥미를 끌었던 내용은 교육에 관한 일화다. 수애라는 학생은 전형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제된 아이다. 수업시간 내내 잠자고 거울만 보는데 선생님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 수애에게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그 답이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서 수업시간 50분을 참는 법을 자기는 배웠다”였다. 우습게 들리지만, 여기에 근대 교육의 핵심이 숨어 있다.

「수애에게 학교는 교육기관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력 양성기관으로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수애가 말한 것처럼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 수업 50분을 참는 힘”을 기르는 데에는 온전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벨트의 육체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해 50분 수업의 그 지루함을 참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전달에 실패했다고 하여 학교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은폐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결국 졸업장은 “이 종이를 받은 사람은 50분 지루함을 참고 10분 숨을 돌리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증하는 증명서다. p200」

교육과 노동의 근본 관계를 짚고 있는 이 서술은 대체로 류동민이라는 경제학자의 책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미 칸트도 통찰하고 있던 것이다. 칸트의 교육론을 소개한 어떤 책에는(Kant and Education)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라 쓰였다.

바네겜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했다는데, 근대교육이란 결국 굶어죽지 않기 위해 지겨워 죽을 위험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가만히 있으라” 이후, 자꾸 이런 글들이 눈에 뜨인다. 근대교육의 숨겨진 목표는 지금까지 너무나 잘 수행되어 왔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무시무시한 효력이 비극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아이들은 지시대로 가만히 있었고, 어른들을, 교육을 믿었단 이유로 희생당했다. 우리교육은 이중적으로 아이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다. 교육의 맨얼굴은 승자독식의 경쟁구도로 뻔뻔히 내몰고, 숨겨진 얼굴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들을 죽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사회” 류의 책이 꽤 된다. 피로사회를 비롯해 잉여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까지. 그 외에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베의 사상 등 제목에 ‘사회’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를 분석한 책들이 여럿 있다. 사회학에 별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구경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읽게 된 책들이다. 사회학이란 그다지 오래된 학문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사회학의 창시자쯤 된다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읽었다. 출간 연대가 1897년이니, 사회학이 정립된 것이 19세기 말쯤 되는가 보다. 『자살론』은 엄청 재미없다. 유럽 각 지역의 자살률을 근거로 자살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분석하고, 자살을 그 유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고 뭐 등등인데, 지금으로 보면 통계치도 엉성하고 근거도 박약하다. 그래도 사회학 역사에서는 엄청 중요한 책이란다.

 

사회학이란 학문을 모르니, 왜 사회학이 발생했는지 따위는 잘 모른다. 다만 대중적인 사회학 책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삶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능력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별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반 없다. 아이들도 이제 열심히 공부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경제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간의 농담거리가 아니라 냉혹한 사실이다.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학이란 이런 것들에 대한 현재적 답이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이래 철학 역시 수 천 년을 우리 삶에 대해 질문해 왔다. 그러나 철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는 무엇인가? 등등....

우리는 왜 고독한가? 라는 질문에, 철학은 먼저 인간이란 원래 개별적인 존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물론 이렇게 단순하지 않지만 그냥 쉽게 대비하자면;;) , 사회학은 신뢰가 깨어졌다든가, SNS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 대중서는 바로바로 읽어야 한다. 몇 년 혹은 몇 십 년만 지나면 벌써 시대에 동떨어진 낡은 사고가 되어버린다. 어떻게 보면 철지난 신문과도 비슷하다. 그런 반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우리가 지금 걸려들어 허우적대는 사회적 관계들, 구조들을 분석해줌으로써 현실적인 눈을 갖도록 안내한다. 내가 이런 책들을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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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7-04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당동 플러스 25 같은 책을 읽고 나서 단속사회'라는 책을 읽으면 못 읽습니다.
단속사회는 몇몇 사례를 통해서 전체인 양 말하는데 그것은 사회 연구의 기본적 자세부터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말리 2014-07-0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책인데 읽을만한 책인가 봅니다. 단속사회는 사례연구에 집중한 것 같지도 않고 딱히 사회학 이론의 개괄서로 포지션 한것 같지도 않고 어정쩡해 보입니다. 산만하고 지루한데도 전체 평점이 좋은걸 보니 또 제가 보지 못한 장점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05 15:19   좋아요 0 | URL
오호, 사당동 25는 빈민 가족을 25년 동안 추적하며 기록한 책입니다. 가난이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추적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록하는 자의 욕망도 함께 노출됩니다. 매우 탁월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11. 명 · 청 제국 그리고 동아시아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지난 주말 끝난 드라마 <정도전>의 배경인 여말선초는 중국의 원·명 교체기이다. 이인임을 필두로 하는 권문세가는 북원과의 화친을, 신진사대부들은 명과의 사대외교를 주장하며 서로 대립하였다. 명의 주원장은 북원을 몰아내고 다시 중국 땅에 한족의 통일왕국을 세웠다. 명은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이웃 나라에 조공·책봉 관계를 요구하며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였다. 고려도 명과 사대의 관계를 맺었는데, 사대의 전제조건은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몽주가 밝힌 바와 같이 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은 이인임을 견제하고 정몽주를 압박하는 등 고려 말, 조선 초의 한반도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반발을 샀다. 그것은 여말선초에 몇 번이나 시도된 우리민족의 ‘요동정벌’ 에 대한 명나라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거대한 중국대륙의 한쪽 귀퉁이 작은 땅이지만, 우리민족은 끝까지 중국에 맞서 독립왕조를 이어올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민족은 중국 변방의 호족들과 연합하거나 때로는 대립하면서 국력을 강화했다. 정도전은 주원장이 죽고 명의 후계다툼이 시작되자, 요동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로 삼고 요동정벌을 추진하였으나,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함으로써, 요동정벌의 꿈은 사라졌다.

  

  <출처 :http://study.zum.com/book/15561>

 

조선 건국에 관해서는 어떤 책보다 드라마 <정도전>이 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너무 TV로부터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예 TV가 없는 집들도 꽤 많다. 그러나 EBS의 다큐들 예를 들면 <빛의 물리학>, <수학과 문명>,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코스모스> 등 훌륭한 프로그램들이 너무 많다. 나도 어릴 때 이런 프로그램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웠고, 요즘 아이들이 부러웠는데, 막상 부모들은 TV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치부하니, 유수의 학자들이 참여해 수백억을 들여 만든 프로그램 보다 더 잘 가르칠 선생님과 자료를 어디에서 찾을 수있을런지, 참 아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 푹 빠져 본 드라마, 영화, 만화에서 배운 것보다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유해한 것도 좀 보고, 시간도 낭비해가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제레미 벤담은 요즘 엄마들이 매우 좋아할 듯하게, “내 인생의 매 순간은 계획되어 있다.” 며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가 남긴 최대의 유산은 ‘판옵티콘’ 이다. 효율성과 유용성의 극단에서 탄생한 것이 숨 막히는 감시체계였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한 시간 달달 외워 조선 -이성계ー1392년 따위나 기억하는 것이 물론 훨씬 효율적인 투자일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 <정도전>에 분노하고, 가슴벅차하고 또 함께 눈물을 흘렸던 일곱 달의 긴 시간들만이 결국 우리의 삶에 남아 우리와 함게 하는 역사가 될 것이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1392년 조선이 건국 된지 딱 200년 만인 1592년에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쳐들어 왔다.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 임진왜란이다. 7년 만에 끝난 이 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정권이 바뀌어 에도막부 시대가 열렸고, 조선의 요청으로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는 더욱 쇠약해져 만주족(여진족)이 새운 청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난 조선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없었다.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중국은 한족의 나라라고 하지만, 중국 역사를 통해보면, 농경민족인 한족과 유목민족인 여러 호족들이 번갈아 가며 혹은 서로 대치하며, 왕조를 교체해 왔다. 현재 중국의 틀을 완성한 청나라는 만주족(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그러나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고 유교가치관을 받아들였다. 한족과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하여, 중국문화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그러나 변발과 만주복 착용을 강제하면서, 반청적인 인사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현재 중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들 중 상당부분이 청나라 때 와서 중국의 영역으로 입되었다. 티베트, 대만, 신강(신장), 서장(시짱) 등을 식민화하였다. 청나 

라는 새로이 편입한 영토에 먼저 한인 관료나 군인을 보내 중국식 체제로 바꾸고 한인들을 그 지역에 이주시켜 민족 융합 정책을 실시했다. 그 외 장족, 후이족, 조선족 등 50여 소수민족이 자의든 타의든 현재 중국이라는 한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 지금도 중국은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탄압은 티벳 독립 나아가 소수민족의 독립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명〮〮· 청 교체기에 조선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광해군일 것이다. 기울어가는 명나라와 세력을 키워가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등거리 외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낸 명에 대한 감사와 사대를 주장하는 세력에 의해 쫓겨났다. 그 결과 조선은 급격하게 명에 기울었지만, 중국의 운명은 이미 청나라에 들어갔고, 조선은 잘못된 선택으로 두 차례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병자’년에 ‘오랑캐’에 의해 일어난 ‘난’, 병자호란이다. 이제 조선은 청나라에 사대의 예를 해야 했다.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양쪽과 다 전쟁을 치렀지만, 이후 200여 년 간은 평화로운 시기로, 청나라에는 연행사를,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내 문물을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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