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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following 61, followers 46. 내 트윗이다. 트윗을 한다기 보다는 가끔 들여다보는 수준이다. 언젠가, 멘션이 강처럼 흐른다 혹은 비처럼 내린다는 표현을 듣고는 얼마나 신기했던지. 내 멘션창은 항상 정지상태다. 그런데도 나는 종종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공적 발언을 주로 하던 트친께서 어느 밤 느닷없이 사생활 생방을 시작하면, 벌컥 열어 제친 화장실에서 벗은 몸을 목격한 것처럼 부끄럽고 황망하다. 이런 내밀한 것까지 보아도 되는 건지, 몰래 훔쳐보는 느낌에 몹시 껄끄럽다. 감정에 겨운 트친께서 느낌표까지 남발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언팔을 해버린다. 『투명사회』의 저자 한병철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포르노다. 그 사람과 더 가깝고 더 친밀해 지는 것이 아니라, 더 멀고 더 낯설어 진다. 공적 영역에서 쌓인 아우라가 한순간에 무너지며, 신뢰와 존경도 사라진다. 선생님도 똥을 누지만, 똥 누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투명사회』는 재미없다. 한병철의 전작 『피로사회』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선 읽기가 쉽지 않다. 100쪽도 거의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한 페이지 넘기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 미주가 99개니, 한 페이지에 한 개꼴로 주석이 붙었다. 그만큼 문장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압축 속에는 플라톤을 비롯하여 벤담, 헤겔, 니체, 라캉,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바디우, 아감벤 등 이름은 들어본 철학자들과 거기에 더해, 들어보지도 못한 숱한 사상가들이 도사리고 앉아있다. 한 문장을 통째로 이해하려면 철학자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투명사회』는 어렵다.
『투명사회』에 난무하는 현란한 사상들 중 딱 하나의 핵심어를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 헤겔의 ‘부정성’ 이다. 이 책에서 ‘투명성’은 이 단어가 가진 일반적 의미의 긍정성과는 정반대로 철저히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다. 이에 반하여 헤겔의 ‘부정성’은 그 자체가 최고의 긍정성을 의미한다.
「긍정사회는 변증법과 해석학에 작별을 고한다. 변증법의 바탕은 부정성에 있다. 그리하여 헤겔의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 등을 돌리지 않고, 부정적인 것을 감당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다. 부정성은 ‘정신의 생명’에 양분을 준다. 자기 속의 타자는 부정의 긴장을 촉발하며, 이로써 정신의 활력을 유지한다. 헤겔에 따르면 정신이 “힘”이 되는 것은 오직 “부정적인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그 곁에 머무를 때”뿐이다. 이러한 머무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역전시키는 마법”이다. p20」
헤겔은 『정신 현상학』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정신이란 그 자신이 절대적인 분열 속에 몸담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진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길을 돌려 긍정적인 쪽으로 쏠림으로써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주어졌을 때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당장 고개를 내저으며 다른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은 정신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참으로 정신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바로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돌리지 않고 그 곁에 함께 머무르는 바로 그 때, 여기에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전화되게 하는 마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마력이란 앞에서 주체라고 일컬어졌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즉 주체란 자기가 관여하는 범위 안에 있는 내용에 독자적인 존립을 부여함으로써 추상적이고 직접적인 존재 일반을 지양하여 실체를 진리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부정이나 매개를 외부에 맡겨 놓다시피 한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분열과 매개를 행하는 존재만이 주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p71~2」
정신이 힘을 발휘하고, 주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기’ 를 할 때이다. 부정과 부정의 부정을 통해 자기의식은 절대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정신이 나간 상태로 읽고 그 의미의 한 자락이라도 이해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어쨌든 헤겔 변증법의 핵심에는 부정성이 있고, 한병철은 투명사회가 몰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정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투명사회』가 예로 들고 있는 부정성은 가령 이런 것이다. 진리. 진리는 부정성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진리로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없는 참이 있을 수 없다. 그림자가 없는 빛이 없는 것처럼. 에로티시즘. 의미의 불명확함이 없는 것, 지시적인 명백성은 포르노다. 에로틱한 매력에는 알 수 없는, 신에게조차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 사랑의 부정성. 신뢰. 투명성이 신뢰를 만들지 않는다. 신뢰가 없는 곳에 투명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뢰는 지와 무지의 중간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낱낱이 까발려진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상대의 알지 못하는 부분, 그 부정성을 신뢰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한병철의 ‘부정성’이 헤겔의 ‘부정성’ 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겟지만, 저자는 이렇게 부정성을 투명성과 대립시킨다. 소제목으로 나열한 ‘긍정사회, 전시사회, 명백사회, 포르노사회, 가속사회,친밀사회,정보사회,폭로사회,통제사회’ 에 결핍된 것이 바로 부정성이다.
한병철에게 부정성의 반대는 ‘외설성’ 이다. 투명사회는 외설적이다. SNS는 모든 것을 노출한다. “배고파!” 도 “졸려..” 도 전시된다. 저자가 투명사회를 디지털 파놉티콘이라 정의하는 것도 이 포르노적 외설성 때문이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는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여기에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 p102」
벤담의 파놉티콘은 합리주의가 극단적 방식으로 제도화된 사례다. 디지털 파놉티콘은 어떤 가치관의 결과일까? 포스트 정치, 포스트 진리, 포스트 이데올로기 등등의 ‘포스트- ’ 사회. 차라리 가치 자체가 없는 사회의 슬픈 귀착지가 아닐까? 진리는 없고 사실만 있는, 신뢰는 없고 정보만 가득한, 에로티시즘은 없고 포르노만 넘치는, 투명한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