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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회 -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한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평점 :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한병철의 『투명사회』때문이었다. 『투명사회』는 한병철의 명성 덕분인지, 책 자체의 가치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들리는 통에 읽기는 읽어야 할 책으로 세뇌되어 있었다.
손바닥 정도의 판형에 겨우 100여 쪽에 불과한 『피로사회』는 2012년 출간하자마자 한병철이라는 재독 철학자를 단숨에 장하준과 같은 세계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2012년은 이미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와 2011년 9월의 “Occupy Wall Street” 시위가 휩쓴 후였고, 우리 중산층들 역시 파산하고 있거나 언제 닥칠지 모를 몰락에 두려워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우리사회의 바닥에서 축축하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이미 피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나는 너무 늦게 왔다고 해야 할, 아마도 5~10년 전이었다면 우리 역시 중산층의 꿈속에 잠들어 있을지도 몰랐으니, 『피로사회』를 서점 한 귀퉁이에서 읽어 내리며, 여전히 ‘피로’를 말할 수 있는 독일사회가 부러웠다. 그럼에도 『피로사회』가 그렇게 화제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에 심히 공감했던 사람들과 서평을 지면에 싣는 지식인들은 여전히 중산층에 속해 있었고 게다가 한병철이 독일사회에서 주목받는 지식인이라는 민족적 자부심이 한몫을 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류현진 경기를 보며 좋아하듯, 장하준이나 한병철을 읽으며 뿌듯해한다고, 빌어먹을 네셔널리즘 운운의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은가. 여하튼 『피로사회』는 한국사회와 살짝 빗나가 있으면서도, 또 한국사회의 어느 부분과는 정확하게 일치했던, 대중적 사회학이었다. 그런 면에서『투명사회』역시 비슷하다. SNS사회의 투명성이 도달하는 곳은 결국 디지털 파놉티콘이 될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은 물론 우리사회에도 어쩌면 우리사회에서야말로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신뢰는커녕 기본적 투명성조차 이루지 못했다. 세월호에서도 총리인선에서도 GOP 총기사건에서도, 무엇하나 투명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이런 꼴을 보며 투명성보다 불투명 속에서의 신뢰를 선택하기는 대단히 힘들다. 투명성에 대해 한병철이 부여한 온갖 부정적 의미들을 다 인정한다하더라도 우리가 ‘투명성’이란 단어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한병철이 독일사회가 아니라 우리나라에 살고 있어도 디지털 파놉티콘에 대한 사유를 그렇게 ‘투명성’이란 개념으로 풀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사회분석 자체로서는 『피로사회』보다는 『투명사회』가 우리사회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투명사회』와 『단속사회』를 묶어 떠올렸던 이유는 하나다. 두 책이 올해 3월에 거의 동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에서 두 책을 묶은 서평을 보았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SNS 사회의 문제점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두 책을 엮어서 소개하거나 평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지만 내 생각으로 두 책은 그것 말고는 별 공통점이 없다. 『투명사회』는 SNS 사회 자체가 논의의 핵심이지만, 『단속사회』는 그렇지도 않다. 『단속사회』가 다루는 관계가 이것저것 많아서 꼭 무엇 하나를 짚을 수도 없다. 사실 단속사회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관계’ 이다. 이 시대의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며, 잃어버린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주장한다. SNS 상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관계가 아니라 관계의 회피, 차단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쉴 새 없이 접속” 하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차단”하는 것이 우리 사회 즉 “단속사회이다.
엄기호가 주로 주목하는 관계는 학교와 노동 현장 등에서의 그것이다. 각 장의 시작마다 ‘예문’처럼 들고 있는, 초등 교과서의 그것처럼 좀 촌스러운, ‘관계의 사례’는 거의 학생이거나 교사, 노동자들이다. 막상 이 예문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우만, 울리히 벡, 기든스 등의 사회학 이론들부터 철학, 경제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이론들이다. 그렇다고 구체적이거나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고, 학자들의 이름과 주요 개념어 혹은 알려진 문장을 인용하는 정도이다. 말하자면 ‘관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여러 권위 있는 이론을 통해 뒷받침하는 동시에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인 듯한데, 산만하다. 사실 새로운 내용은 거의 없다. 어디서 들어본 것들 혹은 누구나 생각할만한 것들이다. 그것들에 유명한 사람들의 권위를 덧대었을 따름이다. 이 책은 정신을 집중하고 읽기에는 느슨하고, 대충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이름들이 나온다. 차라리 1/3 정도로 줄이면 짜임새 있고 팽팽한 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흥미를 끌었던 내용은 교육에 관한 일화다. 수애라는 학생은 전형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에서 배제된 아이다. 수업시간 내내 잠자고 거울만 보는데 선생님들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다. 수애에게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고 했더니, 그 답이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서 수업시간 50분을 참는 법을 자기는 배웠다”였다. 우습게 들리지만, 여기에 근대 교육의 핵심이 숨어 있다.
「수애에게 학교는 교육기관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노동력 양성기관으로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수애가 말한 것처럼 “노는 시간 10분을 위해 수업 50분을 참는 힘”을 기르는 데에는 온전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벨트의 육체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해 50분 수업의 그 지루함을 참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식전달에 실패했다고 하여 학교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은폐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결국 졸업장은 “이 종이를 받은 사람은 50분 지루함을 참고 10분 숨을 돌리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증하는 증명서다. p200」
교육과 노동의 근본 관계를 짚고 있는 이 서술은 대체로 류동민이라는 경제학자의 책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미 칸트도 통찰하고 있던 것이다. 칸트의 교육론을 소개한 어떤 책에는(Kant and Education) “예컨대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뭔가를 배우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조용히 앉아서 시키는 그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다.” 라 쓰였다.
바네겜이라는 사람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했다는데, 근대교육이란 결국 굶어죽지 않기 위해 지겨워 죽을 위험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가만히 있으라” 이후, 자꾸 이런 글들이 눈에 뜨인다. 근대교육의 숨겨진 목표는 지금까지 너무나 잘 수행되어 왔고,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무시무시한 효력이 비극적으로 발동한 것이다. 아이들은 지시대로 가만히 있었고, 어른들을, 교육을 믿었단 이유로 희생당했다. 우리교육은 이중적으로 아이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다. 교육의 맨얼굴은 승자독식의 경쟁구도로 뻔뻔히 내몰고, 숨겨진 얼굴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며 아이들을 죽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사회” 류의 책이 꽤 된다. 피로사회를 비롯해 잉여사회, 투명사회, 단속사회까지. 그 외에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베의 사상 등 제목에 ‘사회’가 들어가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를 분석한 책들이 여럿 있다. 사회학에 별다른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책 구경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읽게 된 책들이다. 사회학이란 그다지 오래된 학문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사회학의 창시자쯤 된다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읽었다. 출간 연대가 1897년이니, 사회학이 정립된 것이 19세기 말쯤 되는가 보다. 『자살론』은 엄청 재미없다. 유럽 각 지역의 자살률을 근거로 자살과 사회 구조의 관계를 분석하고, 자살을 그 유형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고 뭐 등등인데, 지금으로 보면 통계치도 엉성하고 근거도 박약하다. 그래도 사회학 역사에서는 엄청 중요한 책이란다.
사회학이란 학문을 모르니, 왜 사회학이 발생했는지 따위는 잘 모른다. 다만 대중적인 사회학 책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 삶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능력과 의지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별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반 없다. 아이들도 이제 열심히 공부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신화를 믿지 않는다. 아니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는 먼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경제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세간의 농담거리가 아니라 냉혹한 사실이다.
도대체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되었을까? 사회학이란 이런 것들에 대한 현재적 답이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와 공자 이래 철학 역시 수 천 년을 우리 삶에 대해 질문해 왔다. 그러나 철학은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체는 무엇인가? 등등....
우리는 왜 고독한가? 라는 질문에, 철학은 먼저 인간이란 원래 개별적인 존재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물론 이렇게 단순하지 않지만 그냥 쉽게 대비하자면;;) , 사회학은 신뢰가 깨어졌다든가, SNS가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식의 구체적이고 현재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 대중서는 바로바로 읽어야 한다. 몇 년 혹은 몇 십 년만 지나면 벌써 시대에 동떨어진 낡은 사고가 되어버린다. 어떻게 보면 철지난 신문과도 비슷하다. 그런 반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 우리가 지금 걸려들어 허우적대는 사회적 관계들, 구조들을 분석해줌으로써 현실적인 눈을 갖도록 안내한다. 내가 이런 책들을 읽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