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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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를 드디어 만났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체스터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탐정 포와르의 생김이 브라운 신부와 닮았다. 작달막하고 못생긴 얼굴. 그러고 보니 이 시기 영국은 세계적 탐정들이 여럿 활약했다. 홈즈, 브라운 신부, 포와르와 마플. 아서 코난 도일이 1859년생, 체스터튼 1874년생, 아가사 크리스티 1890년생으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영국은 탐정소설의 전성기를 누렸던 것 같다. 지금도 이 불후의 탐정들은 케이블 화면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쉽게도 브라운 신부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명성에서 살짝 뒤처지는 모양이다.

 

북하우스의 <브라운신부 전집> 1권 후기에는 추리소설 장르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있다. 이 장르는 에드가 엘런 포에 의해 확립되었다. 포는 1809년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브라운 신부의 많은 이야기가 포의 『도둑맞은 편지』의 테마를 천재적으로 변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포와 체스터턴 사이에는 코난 도일이 있다. 그리고 코난도일의 뒤에는 디킨스가 있다. 디킨스는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라 한다. 체스터튼은 디킨스에 관한 유명한 비평집을 직접 쓰기도 했다.

 

이 복잡한 이름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19세기에 태어난 이 대가들, 1809년 포를 필두로, 1812년 디킨스, 1859년 코난 도일, 1874년 체스터튼, 1890년 아가사 크리스티에 의해 추리소설이란 장르가 탄생·발전했으며, 1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의 명성은 견고하다.

 

 

         

 

그런데 내가 체스터튼을 알게 된 것은 철학책을 통해서다. 지젝이 가끔씩 언급하는 체스터튼은 매우 흥미로웠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1부 3장은 체스터튼의 <부러진 검의 의미>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현명한 사람은 나뭇잎을 어디에 숨길까? 숲속에 숨기겠지. 그렇지만, 숲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결백 p422)

 

시체를 숨기려면 어떻게 할까? 나뭇잎을 숨기기 위해 숲을 만들듯이, 시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시체의 산을 만들면 된다. <부러진 검의 의미>의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한 짓이 바로 그것이다.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악마적 행위에 대해 체스터튼은 이렇게 말한다.

 

  “아서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내가 이미 말했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사람이었네. 모든 이들의 성서를 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나 이해하게 될지 답답하구먼. 출판업자는 오자를 찾기 위해 성서를 읽고, 모르몬교도들은 성서에서 일부다처제의 근거를 찾아낸다네. 또 그리스천 사이언스 신자들 역시 그들만의 성서를 읽고는 사람에게 손도 발도 없다는 부분을 찾아내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은 인도에서 자란 영국인으로 개신교 신자였네.... 물론, 그는 신약보다 구약 성서를 더 자주 읽었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 즉 육욕, 전제, 그리고 반역을 바로 구약 성서에서 찾아낸 거라네. 나는 그가 정직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건 아니네. 하지만 정직하지 않은 것을 찬양하는 정직한 사람을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나?

   그는 뜨겁고 비밀스러운 열대의 나라에 정부情婦를 두고 증인을 고문하며,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눈을 똑바로 뜨고 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할 거네. 내가 알고 있는 신학대로라면, 그에게 그것이 어떤 신이냐고 물어봐야 할 거네.” (결백 p435)

 

아서 클레어 장군의 악행은 신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신을 자신의 방식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전국사찰을 돌아다니며 악마를 쫒는 우리나라의 기독 광신교도를 본다면, 체스터튼은 그들이 성경에서 무엇을 찾아냈다고 했을까.

 

“우리는 20세기의 윤리-정치적 파국에 대한 책임을, 도구적 이성에 의해 ‘플라톤부터 나토(? 게토가 아닐까..)’까지 직선적으로 이어져 온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 전체에 묻는 하이데거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49~50)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은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악마가 된 것처럼, 서구 형이상학의 도구적 이성이 세상을 읽는 방식이 20세기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즉 체스터튼과 하이데거가 동일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인데, 지젝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튼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동일한 논리가 하이데거를 비롯한 파시즘의 선구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나치 사례들을 서구 형이상학이라는 시체들의 산속에 감추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0)

 

클레어가 시체를 감추기 위해 시체의 산을 만든 것과 같이, 하이데거 역시 자신의 나치 참여를 면죄받기 위해 서구 이성 전체를 나치의 복무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는 것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란 말인가? 지젝은 여기서 체스터튼의 또 다른 책을 가지고 온다. 『목요일이었던 사나이』에서 체스터튼은 철학경찰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한다.

 

 

 

“철학 경찰의 임무는 (....) 통상적인 형사의 작업보다 훨씬 대담하면서도 미묘하다. 보통 형사는 도둑놈들을 잡기 위해 선술집에 가고 염세주의자들을 탐문하러 예술가들의 모임을 기웃거린다. 보통 형사는 숙박부나 일기장을 뒤져서 이미 발생한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소네트 모음집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성적 광기와 지적 범죄로 이끌 끔찍한 사유의 근원을 찾아내야 한다.” (The Man Who Was Thursday p44~5, 각주 인용)

 

철학책을 뒤져서 앞으로 발생할 범죄를 찾아낸다는 이 기발한 생각은 그러나 별반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지젝은 이 상상적 ‘철학경찰’은 이미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유명한 철학자들 자신이 그들의 철학경찰이다.

 

「칼 포퍼나 아도르노, 그리고 레비나스 같은 사상가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에 동의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에 의해 정치적인 범죄는 ‘전체주의’로 언명되고, 철학적인 범죄는 ‘총체성’ 이라는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이들 ’철학경찰‘은 총체성이라는 철학 개념으로부터 정치적 전체주의를 향하는 직접적인 경로를 전제하면서 플라톤의 대화록이나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어떻게 정치적 범죄가 발생할 지 밝혀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 보통의 정치경찰은 혁명가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비밀결사조직을 들이닥치지만 철학경찰은 총체성의 지지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철학 심포지엄에 간다. 통상적인 반-테러리스트 경찰은 빌딩이나 교량을 폭파하려는 계획을 꾸미는 자들을 발본색원 하지만 철학경찰은 우리 사회의 종교와 도덕적인 토대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한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p151~2 」

 

여기 지목된 철학자들에게는 지독한 조롱일 수 있겠지만,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진리, 총체성 따위는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라며 치를 떠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체스터튼의 철학경찰들 못지않게, 총체성의 철학을 뿌리 뽑기 위해 투쟁한다. 내가 보기에 지젝은 자신의 방식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쪽이다. ‘모든 이들의 성서’ 란 없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틀 없이 실재를 직접 볼 수는 없다.

 

 

 

음.....

체스터튼의 추리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샛길로 너무 깊이 빠졌다. 여하튼 체스터튼은 단순 추리소설이 아니라, 혹은 단순 추리소설 안에서, 여러 가지 사유를 촉발한다. 사건의 전개나 문제의 해결방식은 코난 도일이나 애거사 크리스티와 비슷하지만, 체스터튼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건의 내용이 아니다. 사건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주로 사유의 체계나 세계의 구성방식에 기인한다. <부러진 검의 의미>에서 본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가 뽑은 체스터튼의 가장 뛰어난 5편의 작품에는 이런 경향성이 짙게 드러난다. <벼랑 위의 세 기병> 은 너무나 충성심이 강한 두 명의 부하 때문에 일을 실패하게 된 장군의 이야기다. 무조건적 충성심이 일을 그르친 이유가 된 것이다.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 예전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할 때 가장 자주 사용했던 무기가 바로 ‘준법투쟁’ 이다. 철도 운행지침에 글자 그대로 딱 맞추어 운행하면, 서울의 지하철은 한순간 마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상으로 느끼는 지하철은 사실 비정상이다. 콩나물시루, 과속, 정차시간 단축 따위의 비정상적 시스템이야말로 서울 시민의 정상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다. 얼마 전의 광역버스 입석 금지가 야기한 출근 대란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에서 입석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하지만, 그 정상적 시스템은 출퇴근을 마비시키는 비정상적 상황을 불러왔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이 보여주는 것은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체계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체계에 대한 절대적 추종이라는 역설이다. 체계에 뚫린 틈이야말로 체계를 유지시키는 숨구멍이다. 구멍 한 점 없는 풍선은 터진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은 또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 충성스러운 부하는 동료애를 저버린 적도, 자신의 군주를 속이고 그 권위에 도전한 적도,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사람을 죽인 적도 수없이 많았는데, 단지 자신의 직속상관에게는 언제나 복종했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로크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뿐이었다. 아이히만의 머릿속에 의무만이 있었던 것처럼, 그에게도 충성심만이 있었다. 두 악마 모두에게 없었던 것은, 사유이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는 보르헤스가 꼽은 5편 중 가장 재미있다. ‘재미’라는 두루뭉실한 말은 똑 부러진 설명을 못하는 나의 무능함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는 어떤 사기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난파된 아들을 15년간 찾고 있는 엄마에게 이 사기꾼은 그 아들과 전혀 닮지 않은 남자를 아들이라고 속이는 데에 성공한다. 아무리 비슷한 사람도 완전히 똑같아 보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기꾼은 거꾸로, 누가 봐도 다르다고 할 사람을 선택한다. 이렇게 달라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사기를 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방식은 상식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이상한 발걸음 소리>의 체스터튼도 상식의 편견을 이용한다. 절대로 동일성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 동일성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가 깔려 있다.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가능하면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하니, 무엇이 재미있는지 설명하기가 더 힘들다. 그런데 어찌 보면 여기 한, 두 대목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 종업원은 몇 초간 신사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식탁에 앉은 모든 신사들의 얼굴에는 깊은 모욕감이 드러났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 시대의 산물이었다. 즉, 그것은 부자와 가난뱅이 사이의 무시무시한 간극과 새로운 시대의 박애주의가 결합된 것이었다. 진정한 정통 귀족이라면 그 종업원에게 뭐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빈병부터 던지다가 마지막엔 돈이라도 집어던졌을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자라면 동지애를 드러내며 분명한 어조로 그에게 물었을 것이다.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러나 이곳에 모인 신식 금권주의 정치가들은 가난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자기들 근처에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들이 노예이건 친구이건 간에. 그 하인들이 뭔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들은 잔인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한편, 자비를 베풀만한 일이 생기는 것도 꺼려했다. 그들은 그게 무슨 일이든지 간에, 이 일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원했다. p73 」

 

「정말 이상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부유하고, 먹고 살 걱정이라곤 없는 사람들이 냉혹하고 천박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하느님이나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 마당에, 도둑과 부랑자들만 죄를 뉘우쳐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p80」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추리소설에 이런 표현이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발랄하다. 베니스의 샤일록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음모도 탐욕도 없지만, 이스라엘 가우는 성공한 샤일록이다. 피한방울 없이 그는 성공한다. 이 단편에서 내가 읽은 체스터튼의 메시지는 이렇다. 살인사건의 현장에 남겨진 몇몇 단서들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코담배와 다이아몬드, 초와 분해된 시계 태업장치. 그러나 브라운 신부는 즉석에서 이 단서들을 조합하여 서너 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가짜 이론으로도 우주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 글렌가일 성에 들어맞을 거짓 추론들을 열 개도 넘게 만들어낼 수 있듯이. p105” 우리는 각자의 가짜 이론으로 저마다의 우주를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있다.

 

 

<허쉬 박사의 결투>가 주는 교훈은 한가지다. 어떤 주제에 대해 완전히 틀리게 말하려면 엄청나게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정보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사람만이 철저하게 모든 것을 틀릴 수 있다. 우연한 거짓말에는 한두가지 사실이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완벽하게 반대되는 것을 찾았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자네가 찾아갈 집에 대해 적어두었다고 해보세. 녹색 문에 파란색 블라인드가 달려 있고, 앞뜰은 있지만 뒤뜰은 없고, 개는 있지만 고양이는 없는, 커피는 마시지만 차는 마시지 않는 집이라고. 자네가 만약 이런 집을 찾지 못한다면 자네는 그 내용이 모조리 가짜로 꾸며낸 거라고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자네가 만약 파란 색 문에 녹색 블라인드가 달리고, 뒤뜰은 있지만 앞뜰은 없으며, 고양이들은 흔하지만 개는 보이는 즉시 총으로 쏴버리며, 차는 얼마든지 마실 수 있지만 커피는 금지된 집을 찾는다면, 자네는 바로 그 집을 찾았다는 걸 알게 될 걸세. p179"

 

 

이상하게도, 보르헤스가 이 단편집의 제목으로 뽑은 <아폴로의 눈>은 그다지 특징적이지 않았다.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전형적인 추리소설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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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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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 카버 작, 김연수 번역, 문학동네 출판은 맞는데 '리뷰상품'의 『대성당』은 2014년 출간본만 선택이 된다. 빌려온 『대성당』은 2007년 초판본이다. 미국에서는 1983년에 출간되었고, 그때 레이먼 카버 나이 45세, 5년 뒤 암으로 죽었다. 얼마전 알라딘 메인화면에서 신작으로 본 기억이 어슴푸레한데(아닌가? 제목이 인상에 남았는데..), 여하튼 30여 년 전의 작품이다. 30여년 전 미국 사회의 단면,단면들이 무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주로 하층민들의 이혼, 실업, 알콜 중독 등을 소재로 하는데, 엄청난 절망도 낙천적 희망도 없고 ,그저 삶의 물결을 따라 어둠 속으로 혹은 희미한 빛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밝지 않은 이 단편집이 그리 어둡지도 않은 것은 때로, 남루하지만 가만가만 귀기울여주는 이웃들의 뭉근한 온기 때문이다.

 

레이먼 카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을 읽으며, 4월에 이 단편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세월호 사건 직후, '이동진의 빨간 책방'은 4월 마지막 주에 이 단편을 낭독하는 것으로 본방을 대체했다. 사고로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와 빵집 주인의 이야기다. 이들 부부는 『대성당』의 인물들 중 가장 부유한, 중산층이다. 가장 우연적이고 가장 슬픈 사건이지만, 또한 가장 따뜻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해 고르고 고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이동진이 이 단편을 낭독했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기괴한 현실이 세월호를 둘러싸고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왜 위로도 공감도 하지 못하고 잊으라고만 할까. 그들의 애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이 비현실적인 현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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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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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다. 책을 읽고 이런 우울함을 느낀 건 또 처음이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이 책에 대한 평판때문이다.

 

영화 <명량>을 둘러싼 설전을 힐끗힐끗 보았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뭐라고 껴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대중적 취향이라 천만 넘는 영화는 나름대로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볼거리가 되었든, 웃기기 때문이든 혹은 싸구려 신파라 할지라도, 상업적 성공을 거둔 영화에는 분명히 우리를 움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을 찾는 작업이 평론가의 일일텐데, 간혹 어떤 비평들은 대중의 싸구려 취향을 비웃거나 훈계함으로써 SNS의 시비를 불러일으킨다. 명량에 대한 집단 열광은 병리적일 수 있다. 그러나 쏟아지는 관객의 발걸음은 치료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 비록 관객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지독한 증상이다. 증상을 두고 그걸로 치료가 되겠냐고 묻는 것은 분석가의 태도가 아니다. 증상에서 적절한 병명을 찾아내는 것, 그가 먼저 해야할 일은 그것일 테니까. 그러나 다행히 나는 평자도 분석가도 아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두 개의 대하소설이 있다. 토지와 태백산맥이다. 그때 토지는 완간되지도 않았고, 태백산맥도 막 출판이 되기 시작할 때였다. 서울에 갓 올라와 사투리는 부끄럽고, 서울말은 낯간지럽던 시절이었는데, 토지와 태백산맥은 사투리에 대한 나의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내가 쓰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그렇게 정감 넘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영 낯설던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찰방지고 멋드러진다는 것을, 그 때 나는 처음 알았다. 그런데 토지는 지금도 '나의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로 책꽂이에 남아있지만, 태백산맥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내가 좋아한 태백산맥은 딱 6권까지이다. 한권 한권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는데, 7권부터의 태백산맥은 나의 기대를 무참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똑 같은 작가의 손에서 나온 책일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7권부터는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구호와 선전만 남은 느낌이었다. 내 사춘기 시절을 달구었던 김영숙의 순정만화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뒤늦게 알았지만 김영숙의 만화들은 일본 만화를 베낀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정성들여 베껴내어 우리를 꼼짝없이 사로잡았지만, 권수가 늘어날수록 그림이 엉망이 되어갔다. 첫 권과 마지막 권을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태백산맥의,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에 대한 묘사가 딱 그랬다. 살아있는 캐릭터는 하나도 없고, 기계처럼 움직이는 인형들만이 남았다. 그래도 아리랑이 나왔을 때,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어권을 넘기지 못하고 덮었다. 이후로는 조정래의 책은 본 적이 없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조정래의 명성은 하늘 높이높이 올라, 한국 문학계의 큰별이 되었다. 내 하늘에는 뜨지 않았지만.

 

독서회를 하며『정글만리』에 관한 말을 간간이 들었다. TV 광고에서도 들었다. 오빠집에도 있었다. 군에 있는 중국어 전공의 조카에게 1권을 보내고 2,3권이 남아 있었다. 오빠의 일을 이어받아 무역업을 하기를 바라는 새언니가 발빠르게 사보냈다. 담배보다 끊긴 힘든 저 어찌할 수 없는 사교육열이라니, 나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렇게 소문만 듣던 『정글만리』를 이번 주에 읽었다. 9월 독서회 책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읽었다니까 우리도 서둘러 읽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자본주의'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진 결과이다. 사실 내가 읽자고 추천했다. 중국식 자본주의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미학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정보를 얻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망했다. 이런 책을 3권씩이나 읽어야 하는 우리 회원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솔직히 문학작품으로 치기에는 민망하다. 캐릭터도 문장도 조악하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너무 천박해 보인다. 작가가 보여주는 중국은 돈과 꽌시와 얼라이 외에는 없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 이라는 지젝의 말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그대로 작가의 인식을 드러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그럴듯하게 보이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하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들과 그것을 중국 인민들이 어떻게 내면화하면서 어떤 충돌들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들이 인물들 속에 훌륭히 형상화되면 말할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사실의 차원에서 깊이있게 탐구되고, 사유되었기를 바랬다. 현실적으로도, 돈밖에 모르는 중국놈들이라는 관념이 중국시장 개척에 나서는 한국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퇴직하는 전부장을 통해 작가가 마지막에 쏟아내는 사변들이 뒤늦게 무언가를 채우려는 듯해 보이지만, 소설은 이미 끝이 났고, 이 소설에 대해 남은 인상은 그저 천박한 자본주의 체제가 되어버린 중국과 그럼에도 2~30년은 뜯어 먹을 것이  어마어마한 시장이라는 것뿐이다.  

 

한 소설이, 명성 높은 작가의 한 소설이 내 기대를 배반했다고, 우울할 이유는 없다.  실망은 우울과 같지 않다. 그런데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적 반응이다. 리뷰를 쓰려고 '리뷰상품' 검색을 했더니, '알라딘 2013년 올해의 책' 파란 딱지가 눈에 뜨인다. 사람들은 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읽어낸 것일까? 혼자서만 답을 찾지 못한 것인가? 이것은 나의 증상인가?,  대중의 증상인가?   나는 늘 대중적 감성의 편에 있었는데, 왜 이 책에 유독 별 한개를 주면서, 이렇게 우울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가 평자거나 분석가라면..., 그러나 나는 그냥 독자이고, 다만 우울해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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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글만리는 선물은 했지만 읽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백산맥을 4권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의무감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10권을 한결같이 쓴다는건 굉장히 힘든가 봅니다.
이곳엔 비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말리 2014-08-21 14:07   좋아요 0 | URL
제가 있는곳도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올해는 더위도 없이 여름이 다 가고 있네요. 10권을 힘빠지지 않고 쓰기도 어렵겠지만 읽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정글만리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각선으로 읽었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ㅎ

icaru 2014-08-21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대출해서 1권까지 읽었구요. 김에 2권 읽겠다고 예약해 놓은 상태인데, 문학적인 것은 고사하더라도 정보나 얻을 수 있겠지 해서 봤는데, 읽긴 읽되 정체모를 거부감을 정말 거부할 수 없더라고요, 참 아쉽더라고요...

말리 2014-08-21 16:34   좋아요 0 | URL
일본 상사원 두명을 <나홀로 집에> 어벙벙한 도둑들처럼 그려놓고 쾌감을 느끼는듯한 부분도 굉장했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사람을 중시하는 사업을 하는지를 익히 들어온 터라 더 놀랐지요.

책읽는여름 2014-08-22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대하소설은 토지와 태백산맥만 읽었습니다. 이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둘 다 다 가지고 있지만...그 뒤로 나온 다른 대하소설은 읽지 않았지요... 저는 토지도 중간부터 좀 그랬거든요 ㅜㅜ

말리 2014-08-22 10:32   좋아요 0 | URL
네^^ 토지도 3부부터는 굉장히 사변적이죠. 박경리의 역사관이 직접적으로 표출되어 지루하긴 했어요 저도.

책읽는여름 2014-08-22 15:14   좋아요 0 | URL
ㅎㅎ 3부라고 찍어 말하고 싶었는데 그건 그뒤로 주구장창 이어지는 토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봐 참았거든요. 말리님이 콕 집어 말씀하시다니 통했네요! ㅋㅋㅋㅋ찌찌뽕입니다~~`
 

곰곰발님의 <단서의 괴로움>에 댓글을 달다가 문득 든 생각. 아니 예전부터 가끔 그런 생각했다. 도서관에는 너무 쓸데없는 책들이 많다. 대충 골라온 책의 절반은 대개 실패다.  한줄한줄 꼼꼼이 읽기에는 차마 봐주기 힘든 문장,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저자의 관점, 너무 난해해 독해불능인 내용, 국어 자체가 장애물인 번역문, 말은 많은데 내용은 없는 빈문장 등등. 이럴때 나는 진짜 읽을만한 책들로 꽉 찬 도서관을 꿈꾼다.

 

가령 이런 것.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8월 들어 읽기 시작한 보르헤스가 의외로 재미있다. 처음에는 눈붙이기도 힘들었는데, 조금 익숙해지니 조금씩 맛이 느껴진다. 도서관을 뒤지다 오늘 찾은 『바벨의 도서관작품 해제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저'라고 되어 있는데, 사기다. 보르헤스가 29명의 저자를 선정해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이란 시리즈를 편집한 것 같은데, 각 작품의 서문같은 것을 모아서 만든 책처럼 보인다. 유령 책인지 자세한 내용은 없고 , 29명의 작품에 대해서, 작가소개 - 누가 썼는지 알수 없는 요약문 - 보르헤스가 직접 쓴 소개글의 순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는 요약문은 보르헤스가 직접 쓴 소개글을 반정도로 줄여 놓은 것이다. 이런 것도 책이라고 팔까 싶었는데, 알라딘에 검색해 보니 29권의 책에 걍 구색으로 한권을 끼어넣어 30권짜리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을 완성한 것 같다. 뭐 부록정도. 여하튼 목차를 보니 29명 중 내가 읽은 작가는 6명이다. 주로 19세기 작가들인데, 20% 정도밖에 모른다니, 내 독서편력도 참 일천하다 싶다. 틈틈이 한권씩 읽어볼 생각이다. 일단 보르헤스가 고르고 고른 책일테니, 나의 이해력이 딸려 못읽을 수는 있겠지만, 책이 엉망이라 내팽겨칠 위험은 없을 것 같다. 뭐 명성의 권위에 대한 이 무조건적 복종이 살짝 부끄럽지만, 기꺼이 감수한다.

 

보르헤스의 이른바 '바벨의 도서관' 처럼, 이런 신뢰도 빵빵한 도서관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여기 소도시에도 작은 도서관이 생각보다 참 많다. 그런데 책들은 다 비슷비슷하다. 숫자만 늘리는 도서관도 주민접근성을 위해 물론 필요하겠지만, 믿을만한 사람들이 직접 '컬렉션'한 작은 도서관들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 가령 김현 도서관. 평론가 김현이 추천한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이 있으면 나는 아마 묻지마 대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명에 도서관 하나씩의 책을 채우기에는 아마도 벅찰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도서관에, 예를 들어 <소설가들의 도서관> 하나에 박경리 도서관, 이청준 도서관, 한강 도서관...식으로 각 작가들이 가려뽑은 책들로만 가득찬 미니 도서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면 진짜 멋지지 않을까. <철학자들의 도서관>, <예술가들의 도서관>, <정치가들의 도서관>, <과학자들의 도서관>....

 

물론 요즘에 이런식의 도서 소개들은 많다. 여기 알라딘에서도 자주 본다. 대표적 알라디너는 아마 로자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로자의 글이 아쉽다. 글솜씨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너무 기계적인 글들을, 너무 의무적으로 올리는 것처럼 보인다. 방문자수도 공감수도 엄청나지만, 그 기대에 값하는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책을 소개하며 그가 직접 완독하고 정성스럽게 쓴 글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책 제목과 책 소개글을  훑어보고, 앞으로 읽으려고 혹은 모아놓으려고 쓴 글들이 많다. 그래서 처음엔 올라올 때마다 보았는데, 요즘은 거의 읽지 않는다. 얻을 정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글이 업인 분이라, 시간들여 잘 쓴 글을 블로그에 노출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쉽기는 아쉽다.  <이동진의 빨간책방>도 그런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책에 대한 본격 토론에 앞서, 이동진의 내가 고른책인지 뭔가 하는 코너가 있다.  책 소개 코너인데, 이것도 읽은 책보다는 읽지 않은 신간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출판사 책 소개글 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는 내용이다. 결국 광고 아닌 광고다. 어떤 행위도 상업성이 배제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내가 '고른' 책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만 소개해 주면 안되는 걸까? 물리적으로 매주 그럴 수 없다면, 독자들의 글을 받아 누구누구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장서가 '藏'書 라는 것을 나도 처음 알았다. 숨길 장, 藏을 쓰는 장서는 '책을 간직해 둠 또는 그 책' 이란 뜻이다. 숨길 장을 쓰는 이유는 아마도 간직한다는 것이 사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꽂이가 휘어져 내릴 정도로 간직하는 책들은 아마도 그만큼 귀중하고 가치있는 책들일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이와 사유의 지도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알라딘 서재란 그 장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며, 한 사람의 깊이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리뷰란 자신만의 소중한 장서를 글쓰기를 통해 공공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나의 물리적 도서관을 가질수는 없다해도, 나의 도서관을 보여줄 수는 있기 때문이다. 나의 도서관이 부디 찾으시는 분들의 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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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야 책이 흔한 물건이 되었지 옛날만 해도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에 가까웠잖습니까. 또한 책은 기득권 세력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고요. 위험한 게 책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귀중하게 보관하다, 라는 뜻이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그나저나 차별화된 도서관.. 정말 매력있겠습니다.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바라지만,,,, 현재로서는 그냥 동네마다 도서관 하나씩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도서관 보급이 아마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다는 소리를 어디서 들었습니다. 동사무소가 동네마다 있듯이 도서관도 동사무소처럼 하나씩 있어야 한다고 보여집니다. 양질의 도서는 도서관이 구매함으로써 국가 지원 형태가 되어야 하고요... 이명박과 박근혜 보면서 절실히 깨달은 것은 그나마 책은 읽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퍼득 듭니다.

말리 2014-08-2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이 사대강에 퍼부은 돈을 도서관 짓는데 사용했으면 우리나라는 도서 천국이 되었겠죠 ㅎ. 유치원 짓는데 썻으면 온나라 아이들이 공립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고. 이명박은 토목을 해도 하필 강을 팠는지, 땅파고 지을 것이 엄청 있었는대 말이죠.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처음 읽는 철학
철학아카데미 지음 / 동녘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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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을 띄엄띄엄 읽다보니, 3주가 넘게 걸렸다. 예상대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 시리즈는 프랑스철학, 독일철학, 미국철학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서양 현대철학에서 더 나올 것이 없지 싶은데, 철학아카데미 측의 의중은 모르겠다. 각각의 책은 나라이름에서 느껴지는, 그런 일반적 특성을 갖고 있다. 프랑스철학은 화려하고, 독일철학은 깊이 있고, 영미철학은 건조하다. 프랑스철학의 현란한 언어 속에는 다양한 사유가 거침없이 뻗어있고, 독일철학의 묵직한 언어에는 근원에 대한 질문과 현실의 고뇌가 녹아있다. 영미철학의 또박또박한 언어는 곧장 공리와 실용을 향해 나간다.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의 11편 중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리처드 로티, 그리고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철학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 없이는 영미철학 자체를 말할 수 없고, 제임슨은 라캉주의 좌파(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로 지젝에 의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고, 로티는 그의 철학 자체 보다는 이유선의 로티 소개가 아주 훌륭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난번에 대략 요약했고, 오늘은 리처드 로티의 <문화정치로서의 철학>을 간단히 정리하려 한다.

 

 

 

바로 로티에 의해 박사후 과정을 지도받은 이유선은 로티의 핵심개념을 한마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라고 정의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선뜻 감이 잡히지 않는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이란 책에서 로티 자신이 사용한 어휘이다.

 

로티는 서양철학에 대한 분석을 플라톤에서 시작한다. 플라톤 이래 근대철학의 인식론, 현대의 언어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동일하다.

 

「그런데 로티가 볼 때는 이게 다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구철학사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는 말의 뜻을 로티식으로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의 이런 표상관계를 변형해온 역사라는 것이죠. 로티는 표상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플라톤이 썼던 하나의 은유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서 전혀 헤어나지 못하고 이 틀 안에서만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철학에서의 진리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된 것이죠.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 따지지 않으면 철학자가 아닌 게 돼버려요. p239~240」

 

플라톤은 현실을 이데아의 그림자 혹은 거울상 즉 표상이라고 보았다. 근대 인식론의 핵심 역시 인간이 어떻게 객관세계의 진리를 주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다. 즉 인식 주관과 객관 세계와의 거울상에 대한 탐구이다. 언어적 전회를 겪은 현대철학도 이 표상관계에 천착한다.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분석철학의 기본 테제이다. 로티가 보기에 근대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도 여전히 진리 찾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표상의 방식만이 변했다. 로티는 이에 반해 반표상주의를 주장한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 언어철학 등이 모두 표상주의가 맞는 것인지에 조금 의문이 든다. 원본 없는 다양한 복제품들, 진리가 아닌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진리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진리가 있다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 답은 ‘진리’라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진리문제’의 틀 속에 놓여있다. 로티가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계기는 철학이 이 진리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

 

로티는 처음에 분석철학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중심의 비엔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미국으로 오면서, 미국의 강단철학은 급속히 분석철학 중심으로 바뀐다. 그런데 교수가 되고나서 로티는 분석철학에 회의를 느낀다. 분석철학은 개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는 건데, 백날 해봐도 철학자가 아니라 마치 변호사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석철학은 법정의 논리싸움과 비슷했다. 로티가 어렸을 때 플라톤을 읽으며 꾸었던 꿈, 현자가 되어서 세상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삶의 의미를 찾겠다는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로티는 듀이, 헤겔, 니체, 프로이트, 데리다, 하버마스, 가다머 등 분석철학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 나간다.

 

이유선은 로티의 대표작으로『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를 꼽는데, 이 책은 소설 작품을 분석하면서 철학 얘기를 하는 파격적인 서술로 쓰인 책이다. 유럽에서는 아니겠지만,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글쓰기 방식이다. 이 책의 핵심 주제가 바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인데, 여기서 로티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뜨린다. 로티는 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욕망, 헤겔이 그 대표자로 『정신현상학』을 통해 헤겔은 철학의 종결을 꿈꾸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니체는 위버멘쉬를 통해 진리의 세계는 없다고 선언한다. 초인은 영원불멸의 진리를 깨달은 인간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긍정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상을 긍정하는, 절대 긍정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니체에게 이런 초인의 모델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바로 자율성을 획득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를 서술해 줄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씀으로써 자기 삶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얻는 자이다.

 

로티는 이런 시인을 아이러니스트라고 부른다. ‘시인의 불안’이 그를 아이러니스트로 만든다. 시인은 자신이 누군가의 시를 복제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 속에 산다. 시의 복제는 삶의 복제이다. ‘내가 혹시 누군가의 복제품이 아닐까?’ 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는 것이 아이러니스트이다. 그러니 인간은 모두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로티는 프루스트를 가장 뛰어난 아이러니스트로 평가하는데,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는 자기 자신의 어휘로, 자기 자신을 재 서술한 것이다. 프루스트는 이 소설 작업을 통해 비로소 프루스트가 된 것이다. 이 책이 없었다면, 프루스트는 프루스트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세계 밖의 어떤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재서술을 통해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은 사적인 욕망이다. 아이러니스트가 된다고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타쿠도 아이러니스트이다. 로티는 여기서 아이러니스트는 동시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의 의미는 굉장히 넓어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약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실천을 하는가, 이게 자유주의자의 골자입니다. 자유주의자를 판별하는 기준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아이러니스트의 핵심은 자기완성에 대한 욕망이에요. 근데 이 두 가지는 사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p252」

 

여기서 로티는 혹은 이유선은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잔인한 것인가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철학적 정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철학적 정초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실천과는 멀어진다고 주장한다. 로티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실천은 잘못된 제도와 관습에 의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도와 관습을 고쳐나감으로써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가?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을 중계방송으로 보았다. 신자가 아닌데도 교황의 인자하고 환한 얼굴에 가슴이 울컥거렸다. 아무것도 곧바로 해결되지 않겠지만, 유민이 아빠는, 승현이 아버지는, 그리고 세월호의 가족들은 교황과의 그 공감각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것 같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그 기준으로만 말하자면 교황은 훌륭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런데 이런 공감각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감성인가? 세월호 참사의 파국적 전개 과정을 보면,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학생들 그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해경 구조대 123정은 ‘당황해서 깜박 잊고’ 선내 진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내 진입을 하지 않은 것도 기가 막히지만, 변명보다 조롱처럼 들리는 ‘어머 깜박, sorry’ 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실종자를 바다에 두고도 경제를 위해 이제 그만하자던 대통령의 말은 벌써 언제였는지도 가뭇하다. 거기에 국민들은 ‘7.30 재보궐선거 새누리당 압승’ 으로 화답했다. 15곳의 재보궐 선거 지역민들이 별난 괴물이거나 냉혈한이 아닌 바에야, 그것이 기껏해야 수천에서 수만 정도의 여론조사보다는 훨씬 정확한 민심일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유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인간들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단순하고 직관적인 감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무엇이 우리 사회의 문제인가?’는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복잡한 것이 아닌가? 물론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을 초기에, 우리 국민들은 앞 다투어 분향소로 몰려갔다. 40일 만에 안산 합동분향소는 55만 명이 넘게 조문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유명 연예인들도 수억씩 쾌척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눈물은 흘려줄 수 있고, 돈도 던져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은 감각적인 눈물과 돈 몇 푼에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눈물과 감상적 동정이 끝난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나의 즉각적인 감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때서야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진상 규명이며, 돈이 아니라 재발방지 대책이다. 유민이 아빠가 목숨을 걸고 단식하는 것도, 승현이 아버지가 십자가를 지고 장정을 떠났던 것도, 그것들 없이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이 우리에게 벌써부터 사라져 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유선에 의하면 로티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자유주의자’를 역설했다. 그러나 이유선의 강의에는 어떻게 그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건 고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정작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의 진정한 고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조차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고통에의 공감이란 단순히 눈물과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을 위해서는 먼저 관점에 대한 공감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내가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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