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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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가쁘게 읽어온 3부까지가 표와 도표로 그려진 데이터로 가득했다면, 마지막 4부는 피케티의 사회과학적 주장이 유토피아적 꿈 위에 펼쳐져 있다. 4부를 통틀어 도표는 단 세 개뿐이다.

 

피케티가 방한할 무렵 여러 기사에 실린 내용 중 가장 이색적이던 것이 글로벌 자본세다. 자본세도 글로벌 자본세도 다 생소했는데, 15장을 보면 왜 이런 주장이 나왔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사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도,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누가 혹은 루이비통의 소유주 누가 세금이 적은 나라로 이민을 가네 마네 하는 소문도 익히 들어왔다. 금융세계화로 개별 국가가 부유세를 신설하거나 누진세를 강화하는 따위의 국가적 대책은 거대자본의 소유주에게는 아무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전 세계가 동시에 한꺼번에 자본의 고삐를 틀어쥐지 않는 한, 자본을 민주적으로 규제할 방법이 사실상 사라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케티가 수많은 데이터로 보여준 19세기 식의 세습자본주의로 빠르게 회귀할 것이다.

   

피케티 방한 당시 JTBC 뉴스룸에 출현한 장하성 교수는 피케티의 경제이론이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다며 비판했다. 그때 장하성은, 운 나쁘게도?, 『한국 자본주의』라는 책을 막 출판했는데, 피케티 때문에 시끌벅적하던 우리 사회는 그의 책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여하튼 장하성은 피케티의 글로벌 자본세를 완전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는 자기가 아니라 피케티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며, 자본세 논쟁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했다.

 

“자본세 문제인데요. 피케티 교수가 자기 책에 자본세를 이야기한 첫 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도 이걸 채택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그걸 논쟁을 하는지 저는 그게 오히려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건 피케티 교수 자신이 한 말입니다. 출처: 장하성 인터뷰”

 

그런데 장하성의 표현은 정확하지도 않고, 피케티의 의도에도 맞지 않다. 『21세기 자본』을 통틀어 피케티가 가장 힘들여 주장하는 것이 바로 글로벌 자본세의 도입이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글로벌 자본세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이다. 이 세계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그와 같은 세금에 합의하는 나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세계의 모든 자산에 적용할 수 있는 세율표를 만들고 세수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유토피아적이기는 해도 몇 가지 점에서 유용하다. p618”

 

피케티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비현실성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상으로서의 유토피아다. 그는 15장 전체에 걸쳐 이 이상에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검토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한다.

 

사실 유토피아는 꿈이다. 그런데 꿈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혹은 당장에 실현할 수 없다고 해서, 꾸어서도 안 되고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인가? 유토피아에 대한 장하성의 사고는 너무나 평면적이다. 피케티가 프랑스 사람이니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혁명의 가치 역시 유토피아적이다. 인류는 한 번도 개념 그대로의 자유와 평등에 도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이상 개인의 절대적 자유는 불가능하다. 나의 무조건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인간의 유전자가 모두 동일하지 않는 한, 평등 역시 마찬가지다. 똑 같은 조건과 똑 같은 환경이라도 인간은 저마다 다른 능력을 발휘하며, 차등적인 결과물을 가진다. 어떤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어떤 사람은 황우석이 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해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어떠한 논쟁도 어떠한 노력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근대인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은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 이후 약 100년 동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워왔고, 그 혁명의 이념은 아직도 멀기만 한 길을 힘겹게 걷고 있다. 그 길을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적 이상,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불가능한 꿈이다. 이 꿈이 없었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피케티의 글로벌 자본세 또한 그렇다. 이 유토피아적 이상은 불평등의 해소라는 또 다른 유토피아적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등불이다. 사실 피케티는 내심 글로벌 자본세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그렇게 실행하기 힘든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민주적인 합의만 된다면 실행 자체의 인프라는 거의 구축되어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음을 되풀이 강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800쪽의 대작을 쓰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이 비현실적인 내용을 결론으로 제안하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부연해 두자면, 그렇다고 장하성이 인터뷰에서 부유세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한 법인이든 개인이든 소득세를 철저하게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시민이 ‘노유정의 정치카페’에서 의혹(?)을 제기한 것처럼, 장하성이 『21세기 자본』을 안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기본적으로 소득이 많이 발생한 개인이 됐든 법인이 됐든 거기에 대해서 과세를 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현실성이 없다고 말한 자본세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게 저는 이해 안 되는 거죠.”

 

소득세가 아니라 자본세를 강조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자본』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이 r > g 이다.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빠르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빈부격차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피케티가 수집한 수많은 자료들은 거의 이 공식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안정을 초래하는 주된 힘은, 민간자본의 수익률 r이 장기간에 걸쳐 소득과 생산의 성장률 g를 크게 웃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부등식은 근본적인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자본소득자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 대해 갈수록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은 한 번 형성되면 생산 증가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p690”

 

피케티는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함께 자본소유의 불평등을 말한다. 총소득에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이 포함된다. 그리고 자본수익률은 언제나 성장률 보다 높았다. 장하성이 말하는 ‘소득’이 노동소득인지 자본소득인지 혹은 이 둘을 합친 총소득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경제의 문외한이다, 또한 장하성이 이해하는 자본세가 자본소득세를 제외한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왜 소득세가 아니라 자본세를 논의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주장을 나는 잘 모르겠다. 자본은 분명히 소득을 낳고 있는데, 그것도 어떤 노동보다 빠른 속도로 높은 소득을 낳고 있는데 말이다. ... 좀 더 공부를 하면 장하성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제 13장 21세기를 위한 사회적 국가

 

사회적 국가라는 말이 생소한데, 우리가 복지국가라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경찰국가처럼 정부가 치안유지, 재산권 집행 및 군대 유지 등의 기본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의료 및 교육과 연금, 실업급여, 최저소득 보장 등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이다. 국가가 사회적 지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것은 적절한 세수이다.

   

 

 

 

20세기 부유한 국가의 총 사회적 지출은 대체로 국민소득의 25~35%로 추산되는데, 19세기에 비해 증가한 세수의 대부분이 사회적 국가의 건설에 충당되었다.

 

특히 피케티가 중요시하는 사회적 지출은 교육과 연금이다.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은 사회적 이동성을 촉진하는데 있다.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줌으로써, 타고난 계층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복지국가의 모범으로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에서 계층 이동률이 가장 높고, 프랑스, 독일, 영국은 중간 정도이며, 미국은 계층 이동률이 가장 낮다. 우리나라도 소위 강남출신들의 SKY 입학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하버대의 경우 부모의 평균 소득이 약 45만 달러로 이 수치는 미국 상위 2%의 소득계층의 평균 소득에 해당한다. 21세기에 점차 심화되고 있는 고등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사회적 국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연금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부과식 연금과 적립식 연금의 차이다. 부과식 연금은 현재의 노동자들이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연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현재의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세대 간의 연대 원리에 기반 해 있다. 그런데 부과식 연금은 경제성장률이 순조로울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요즘처럼 극도로 성장률이 정체될 때는 현재의 노동자가 미래에 받게 될 실질 연금은 그들이 현재의 은퇴자에게 지급하고 있는 연금 보다 훨씬 낮아질 수 있다. 여기에 반해 적립식 연금제는 현재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연금을 적립해서 은퇴 시 받는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의 시행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한 세대의 은퇴자들이 모두 무일푼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 세대에 자신의 연금을 이미 지불했지만, 제도가 바뀌게 되면 다음 세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연금이라면 내가 부은 돈을 당연히 내가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의 연금은 부과식인지 적립식인지 궁금하다.

 

 

제 14장 누진적 소득세를 다시 생각한다

 

과세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문제이다. 어떤 과세 방식을 택하느냐가 모든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누진적 소득세의 도입과 발전이다. 이 제도는 지난 세기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누진세는 사유재산권과 시장 경쟁의 힘을 존중하면서도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을 억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누진적 소득세는 민주주의의 자연적 산물이 아니다. 도표 14.1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에 전격 시행된 것이다.

 

   

 

 

 

특히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하면, 도표 14.1과 2에 나타난 미국의 최고세율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과다소득에 대한 미국의 몰수적 과세는 미국이 점점 불평등이 극심한 유럽과 비슷해져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반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현재 미국은 영국과 더불어 선진국가들 중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오마바는 재임기간 내에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40%까지 인상할 계획이지만 그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미국의 정치과정은 상위 1%에 포획되었는가? 이런 생각이 점점 더 미국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제 15장 글로벌 자본세

 

21세기의 세계화된 세습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위해 피케티가 제안하고 있는 이상적인 수단은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이다.

 

“글로벌 자본세는 세계 경제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고,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에서 그 이득을 공정하게 분배하면서 경제의 개방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해법이다. 한 세기 남짓 전에 소득세가 거부되었던 것과 똑 같이 많은 사람이 글로벌 자본세를 위험한 환상이라고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해법은 다른 대안들보다는 훨씬 덜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618”

 

자본세의 목적은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고, 금융과 은행 시스템에 효과적인 규제를 가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민주적인 금융 투명성, 즉 누가 전 세계에서 어떠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가 유토피아적인 이상임을 밝히면서도, 단계적으로 가령 유로존 내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글로벌 자본세나 이와 비슷한 정책 수단이 없으면 세계 전체의 부 가운데 최상위 1%의 몫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세금은 항상 세금 이상이다. 세금은 경제활동의 규준과 범주를 정하고 그에 대한 법적인 틀을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율을 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개인이 자유무역과 경제통합으로 더욱 부유해지고 단지 이웃을 희생시킨 대가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도둑질이다.

 

 

제 16장 공공부채의 문제

 

이 장에서 피케티는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유로화와 유럽통합의 문제 등이 아직 나에게는 좀 거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세금 체계나 사회적 지출의 형태도 잘 모르고, 특히 증세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러니 유럽연합은 한참 멀다.

 

다만 16장에서 알게 된 것은 부채가 무엇인가 하는 정도다. 부채는 세금과 더불어 정부가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공정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부채보다 과세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부채는 정부가 부자에게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것이다. 물론 이자는 세금으로 충당되고 원금도 상환해야 한다. 즉 돈 많은 부자들의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대부사업이다. 그런데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을 무엇 하러 오히려 세금을 이자로 물어가면서 돈을 빌려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는 많든 적든 공공부채를 지고 있다. 부채를 줄이는 방법은 자본세, 인플레이션, 긴축이 있다. 그런데 피케티는 자본세를 최선으로, 긴축을 최악으로, 인플레이션을 자본세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유럽은 공공부채가 많다. 그리스 위기니 이탈리아 위기니 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개인들의 순자산은 엄청나기 때문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순자산을 합치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총자산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니 후대의 자손들에게 수치스러운 빚더미를 남겨줄 상황이니 용서를 빌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우습다. 유럽의 국가들은 지금처럼 부자인 적이 없었다. 다만 이 막대한 국부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수치스러운 현실이다. 민간의 부는 공공의 빈곤을 대가로 축적되고 있는데, 이것이 야기한 안타까운 결과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공공교육에 투자한 것 보다 공공부채의 이자를 지불하는 데 더 많은 공공지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이 있지만, 이 결론은 진짜 전체 내용의 요약이므로 나는 더 이상 요약할 것이 없다. 세 차례에 걸쳐 쓴 나의 리뷰가 어설프지만 『21세기 자본』의 나름대로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두껍고 어려워 보였던 이 책이 예상외로 쉽고 흥미로웠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었다. 읽는 데는 하루 네다섯 시간씩 5일 조금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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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4-10-14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격하게 공감하는 점도 많고, 일목요연하게 파악되는 점도 많습니다.
토마 피케티의 ‘마인드’는 대단한 것 같아요.

말리 2014-10-14 13:19   좋아요 0 | URL
학문적 평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피케티의 경제학을 대하는 태도나 문제 설정 방식은 굉장히 훌륭한 것 같습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gyness70 2014-10-20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당장사야겠습니다..정말대단하십니다분석이ㅠㅜ..경제에문외한이지만, 님의 글에 감동을 받은건글을넘잘쓰신탓이클듯..장하성교수님이대단하다고생각하면서도 책은 손에 안가서 한 권도없네요(지송)..장하준,장하석교수님의˝온도계의철학˝은샀습니다^^..똑똑한형제분들이시죠..피게티가냈던그때장하성교수님책이좀..밀려서좀이란말에빵터짐 ㅋㅋㅋㅋ(학자들끼리의질투는상상을초월한다고누가그러시던데 ㅎㅎ)

말리 2014-10-20 13:23   좋아요 0 | URL
핫;; 저도 경제 문외한입니다. 이 글은 걍 요약이며 분석한 내용은 없습니다. 피케티의 책 자체가 좋지요 ^^.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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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1세기 자본』제3부다. 2부가 국가 차원에서 자본과 소득의 분배에 대해 검토했다면, 3부는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불평등과 분배에 대한 연구이다. 사실 국가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연구 대상이 달라졌을 뿐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국가 내에서의 빈부격차가 한 눈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한 분노와 상실을 느낄 수 있다.

 

『21세기 자본』을 읽으면 누구나 오스틴과 발자크의 소설이 궁금해 질 것이다. 오스틴은 원래 좋아해서 거의 다 읽었는데, 발자크는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다. 특히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21세기 자본』3부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라, 이 소설을 먼저 읽어보고 싶은데 참고 있다. 두 작가는 19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 상류사회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계급별 경제수준과 자본수익률 등에 대한 상세한 수치까지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이 수치들은 자본과 소득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한 시대에 데이터 대신 참고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피케티는 생각한다. 그 시대는 경제성장률이나 자본수익률이 거의 일정했고 물가상승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연 수입이 몇 프랑이면 어느 정도의 계층에서 어떤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실장님’ 하면 음...이 신데렐라가 어떤 삶을 누리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연 오만 프랑 상속자와 결혼하면 상위 1%의 삶을 누릴지, 상위 10%의 삶을 누릴지 계산이 딱 나왔다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같은 로맨스 소설에서 왜 그렇게 주요 등장인물들의 연수입이 세세히 나오는지, 물론 나 같은 독자들은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연수입이라는 몇 개의 숫자는 그 어떤 세밀한 묘사보다도 더 정확하게 다아시나 빙리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표현할 수 있었다. 

 

 

《3부 불평등의 구조》는 『고리오 영감』 중 ‘보트랭의 설교’에서 그 핵심 질문을 뽑아낸다. 보트랭은 법률가가 되어 신분상승을 하려는 라스티냐크에게,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환상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법률가가 된다 하더라도 거액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연봉과 지참금, 상속액의 수치를 들어서 역설한다.

 

피케티가 여기서 굳이 19세기 초의 보트랭을 들고 나온 이유는 21세기의 유럽에서도 ‘노동이냐, 유산이냐?’ 라는 질문은 여전히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현대의 성공은 유산이 아니라 노력과 능력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믿음이 과연 옳을까? 3부에서 피케티는 이 믿음이 긴 역사의 어떤 특정시기에만 근거가 있을 뿐이며, 지금 우리는 그 운 좋았던 시기를 막 벗어나고 있고, 그러므로 이 믿음은 이제 오히려 환상에 가까움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21세기는 19세기와는 달리 자본의 불평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불평등에 노동의 불평등이 가세되었는데, 21세기의 이 복합적 불평등의 구조는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제7장 불평등과 집중 : 기본적 지표

 

 

 

 

 

 

 

소득불평등은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자본소득의 불평등이 합해진 결과다. 자본과 관련된 불평등은 항상 노동과 관련된 불평등 보다 크다. 대략 노동소득 상위 10%가 전체 노동소득액의 25~30%를 받는 반면, 자본소득 상위 10%는 항상 전체 부의 50% 이상을 소유한다. ‘보트랭의 설교’가 아주 믿을만한 근거를 가졌던 것이다.

 

아주 불평등한 사회는 자본소득 상위 10%의 값이 90%까지 올라가는데, 지난 7일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아주 불평등한 사회’ 라는 것이 딱 입증되고 말았다.

   

 

 

(출처 : 한겨레 신문)

 

물론 이 자본이 스스로 축적한 것인지 물려받은 것인지에 따라 ‘노동이냐, 유산이냐?’에 대한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뒷장에 상세히 이루어지는데, 예상하다시피 세습된 자본이 많다. 비록 노동소득으로 축적된 자본이라 해도 세습자본과 비슷한 경로로 ‘돈이 돈을 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세습자본주의는 끝났고, 현대는 노력과 능력의 시대라고 믿게 된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세습중산층의’ 의 탄생이다.

   

 

표에서 중간40퍼센트(중산층)로 구분된 계층은 1세기 전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가장 부유한 10%가 부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나머지 90%는 별 차이 없이 가난했다. 그런데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이 새로운 중산층이 등장했다.

 

“재산이 20만~30만 유로인 사람은 부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궁핍과도 거리가 멀며,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중간에 위치한 이 40퍼센트의 인구는 대규모 집단이다. 수천만 명이 개인적으로 수십만 유로 가치의 재산을 소유하고, 집단적으로는 국부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중요한 변화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지형과 정치적 구조를 심대하게 변화시키고 분배 갈등의 조건들을 재정의 하는 데 기여한 주요한 변화였다. 따라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p315”

 

그런데 이 평등한 시기는 불행히도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생인 나만해도 이 행운의 시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이런 믿음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제 8장 두 개의 세계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언제나 다른 영역들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의 역사에는 자연적 균형이나 규칙적인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란스럽고 정치적이며 급격한 사회 변동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불평등의 역사는 한 국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피케티가 “이 책은 경제학 못지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다” 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이다.

   

 

 

 

프랑스의 소득 불평등은 1914~1945년에 뚜렷하게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 대공황이 불러온 파산,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의 새로운 공공정책이 자본/소득 비율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축소시켰다. 소득 상위 10%, 특히 그 중 소득 상위 1%의 소득이 가히 ‘몰락’이란 말로 표현될 정도로 줄었다. 소득 상위 1%의 몰락 자산은 대부분 7장에서 소개한 ‘세습중산층’ 의 몫으로 돌아갔다. 세습중산층에 대한 내용은 3부 전체에 걸쳐 되풀이 논의되는데, 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약간 짜증스럽기도 하다. 하나의 주제를 주르륵 연결해서 한꺼번에 설명하면 좋은데, 피케티는 여기저기 찔끔찔끔 나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격렬한 경제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연구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하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지만, 불편은 하다. 열심히 앞뒤를 뒤적여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8장의 제목 ‘두 개의 세계’는 상위 10%가 나누어진 세계다. 상위 1%는 자본소득이, 나머지 9%는 노동소득이 우위를 차지하는 세계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주로 자본소득의 파괴를 가져왔다.

   

 

미국은 좀 더 복잡하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국이 유럽보다 더 평등했지만, 20세기를 관통하며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불평등해졌다. 1977년에서 2007년까지 미국은 상위 10%가 전체 성장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상위1%는 국민소득 증가분의 거의 60%를 가져갔다. 하위 90%의 소득증가율은 연 0.5% 이하의 수준이다. 경제 성장의 결실은 대부분 상위 10%에게 돌아간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불평등은 소위 ‘수퍼경영자’의 등장과 관련이 높다. 우리가 좋아하는 미국이 얼마나 불평등한 나라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제 9장 노동소득의 불평등

 

1980년 이후 미국에서 노동소득의 불평등이 폭발하고 수퍼경영자가 등장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교육과 기술, 한계생산성 이론 등이 제시된다. 교육과 기술에 투자하여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임금도 당연하게 증가한다. 이 생산성의 극대치를 아마도 한계생산성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식으로 하자면 능력에 따른 성과급이다. 그런데 1980년 이후 미국의 노동소득 불평등은 유럽에 비해 훨씬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만약 한계생산성 이론대로라면 이 시기 미국의 교육과 기술, 생산성이 유럽에 비해 훨씬 발전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다.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한계생산성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이다.

 

특히 수퍼경영자들에 관해서 그들의 고액연봉이 생산성에 대한 기여도 때문이라면, 영미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비슷한 선진국들에 공통된 현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 수퍼경영자들의 부상은 영미권 국가들의 현상이다. 게다가 상장기업들의 기업 성과 데이터에 의하면 실적과 고액연봉은 별 관련성이 없다. 최고경영자들의 연봉은 그들의 능력과 관계없는 외부적 요건에 의해 매출이익이 증가했을 때 가장 빠르게 상승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고액연봉을 받는 것일까? 피케티는 수퍼경영자들 자신이 자신들의 연봉을 정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이다. 1980년 이후 영국과 미국은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대폭 인하했다. 이전에는 높은 최고한계세율 때문에 욕먹으면서 연봉을 올려봤자 세금으로 다 떼이고 실질적인 수익의 증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세제의 변화가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의 인하는 최상위 소득의 폭발적인 소득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제의 변화로부터 혜택을 받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였다. 이들은 최고세율을 낮게 유지하고 심지어 더 내리는 데 관심이 있으며, 그렇게 얻은 횡재로 정당, 압력단체, 싱크탱크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p402”

 

그런데, 이 현상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자본과 기업에 부과되는 세제의 변화를 보면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이미 지표상으로도 우리나라는 극심한 소득 불평등을 보이고 있다.

 

 

   

제 10장 자본소유의 불평등

 

프랑스 부의 불평등에 관한 도표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유명한 프랑스혁명, 자유와 평등의 그 엄청난 혁명에도 불구하고 왜 프랑스 사회는 혁명 후 100년이 지날 때까지도 그토록 불평등했던 것일까? 도대체 프랑스혁명은 성공하기는 한 것인가?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환상을 경계한다. 권리와 기회의 평등이 곧바로 부의 평등한 분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회는 보편적인 세금을 확립했지만, 세율이 지나치게 낮아서 자본/소득 비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을 전후로 자본의 성격은 뚜렷이 변화했지만, 토지자본이 산업자본 및 금융자본과 부동산으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다, 자본의 영향력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여전히 상위 10%가 자본의 90%를 차지하는 세습사회였고, 유산과 결혼이 가장 중요했다. 거대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프랑스는 내내 기본적으로 동일한 불평등 구조를 가진 사회였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부르주아가 원했던 것은 1인1표가 아니라 1원1표의 평등이 구현되는 자유로운 사회였다.

  

 

 

그렇다면 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부의 불평등은 그토록 극심했을까? 한마디로 r>g 때문이다. 이 시기는 자본수익률r이 성장률g보다 지속적으로 현저하게 높은 저성장 사회였다. 1,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저성장사회에서는 과거에 축적된 부가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다시 자본으로 축적된다. 즉 돈이 돈을 버는 사회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서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멋진 남자 주인공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멀쩡한 그들이 하는 일은 사냥이나 파티, 만찬, 소풍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낯설지만, 그들이 그렇게 놀고만 있다고 해서 그들의 돈까지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그들의 부는 r>g의 공식에 따라 점점 더 큰 부와 빈부의 격차를 만든다.

 

다시 그렇다면 자본수익률이 언제나 성장률보다 더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피케티의 답은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r>g는 논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경향 상 앞으로도 세전 자본수익률은 항상 글로벌 성장률보다 높다. 도표 10.10에서 나타나는 역전은 자본수익률에서 세금을 뺀 뒤 추정한 값의 결과이다. 20세기 중반에 자본수익률은 세계 대전의 충격과 세제 정책에 의해 급속히 하락했다. 조세적, 비조세적 충격으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자본의 순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낮은 상황이 나타났다.

 

“여러 사건 (전쟁으로 인한 파괴, 1914~1945년의 충격으로 인해 가능해진 누진세 정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의 이례적인 성장)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상황이 나타났고, 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징후는 이런 상황이 끝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세경쟁이 그 논리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면 21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r과 g의 차이가 19세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다. 적어도 중심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결코 확실하지 않지만 자본에 대한 세율이 평균 30퍼센트 정도에 머물 경우 자본의 순수익률이 성장률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p427”

 

r>g의 부등식이 다시 19세기의 수준으로 돌아갈지의 여부는 어떤 공공정책과 제도가 시행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가 21세기 초에 20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번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의 집중이 벨 에포크 시대 보다 훨씬 낮은 이유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20세기의 정부들이 자본과 자본소득에 상당한 세율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자본소득에 부과된 세금의 효과는 세간의 우려와는 달리 전체적인 부의 축적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것처럼 상위 1%가 차지하는 몫의 감소는 중산층의 부상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핵심이 r>g 라면, 그리고 이런 경향이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장률이 자본 축적률을 따라잡은 20세기 중반에 세계 각국은 자본 수익률을 억제하고 경제성장률을 촉진시켰다. 경제성장률은 어느 정도 정점에 다다르면 정체되는 경향을 띠게 되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주요 변수는 세율정책이다.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90%를 차지하는 벨 에포크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증세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제 11장 장기적으로 본 능력과 상속

 

11장의 문제도 역시 r>g 이다. 자본수익률이 현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상속이 저축을 압도한다. 이때 상속은 과거에 축적된 자산이고 저축은 현재 축적되는 자산이다. r>g를 또 다르게 표현하면,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물려받은 돈이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불평등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불평등의 격차는 점점 증가한다. r>g의 논리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데, 기업가는 언제나 자본소득자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삼성가의 일 세대 이병철은 경제 엘리트였지만, 삼 세대 이재용은 상속자산의 이윤과 배당으로 더 큰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

 

 

도표 11.1은 앞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었던 불평등의 역사를 상속액의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경향은 동일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상속액은 최저점을 찍었다가 다시 기세 좋게 올라가는 중이다. 그런데 상속은 그 특성상 평균값에는 별 의미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속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도표 11.10은 상위 1%의 자료이다. 이 결과는 다시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냐크가 처한 딜레마로 우리를 데려간다. 성공을 약속하는 것은 상속인가? 노동인가? 전통사회와 벨 에포크 시대까지 모든 사회는 언제나 상속자본이 우세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태어난 집단에게는 더 이상 상속자본이 우세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대 사건이었고, 낡은 질서의 종말과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불평등은 항상 존재했지만, 이 문제는 다만 임금 불평등에 따른 것으로 치부되었다. 임금불평등도 상당한 문제였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중요성을 공유하고 능력주의의 이상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비교적 수용할 만한 불평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집단에게는 상황이 또 다시 반전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상속이 노동보다 우세한 세계와, 노동이 상속보다 우세한 세계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라스티냐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보트랭의 설교는 여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부의 불평등에 있어서 “격차를 확대하는 근본적인 힘은 계속 강조되어 왔듯이 r>g 라는 부등식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은 시장의 불완전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시장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경쟁이 강화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제한적인 경쟁이 상속을 없애고 능력이 더욱 중시되는 사회를 향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다. 보통 선거권이 생기고 투표 시 재산에 대한 자격이 없어지면서 부자들의 합법적인 정치적 지배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소득자가 사회를 낳을 수 있는 경제적 힘을 없애지는 않았다. p506”

 

   

 

제 12장  21세기 글로벌 부의 불평등

 

r>g 가 불평등의 원인이지만, r 즉 자본수익률 또한 불평등하다. 자본이 클수록 자본수익률도 증가한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주식시장에서 큰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항상 거대자본 또는 기관 투자자이다. 그들은 심지어 작전이라는 것을 통해 수익률 자체를 만들어내기 까지 한다. 멋모르고 덤벼든 개미만 손해를 본다. 하다못해 고스톱이나 포카 판도 마찬가지다. 똑 같은 자본이라 해도 자본의 크기에 따라 수익률의 차이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불평등한 자본수익률은 다시 r>g의 효과를 증폭시켜 양극화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표 12.1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 세계의 평균 부가 연 2%씩 성장할 때 최상위 1억분위 부자의 자산 수익률이 6%라면, 30년 뒤에는 1억분위 부자가 세계 자본에서 차지하는 몫이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최상위 계층이 차지하는 부의 비율은 크게 늘어나는 반면, 이 늘어난 몫만큼 중산층의 빈곤화가 발생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최상위층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을 때, 이 감소분을 받아 성장한 것이 중산층이었다는 사실과 정확히 반대되는 현상이다. 최상위층의 쇠퇴는 중산층의 성장을, 반대로 최상위층의 증가는 중산층의 몰락을 낳는 것이다. 지난 금융위기에서 확인했다시피 중산층은 세계 곳곳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면 부자는 모두 부도덕한가라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빌 게이츠는 탁월한 능력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없이 훌륭한 자선사업가 이기도 하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럼에도 빌 게이츠가 운영체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이익을 낸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게다가 게이츠의 공헌은 전자공학과 컴퓨터 공학 등 그 분야의 기초연구에 공헌한 수천 명의 기술자와 과학자의 작업에 의존한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그 어떤 천재적 성과도 개인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든 성공의 바탕에는 수 천 년에 걸친 전 인류의 노력과 업적이 놓여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빌 게이츠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개인이 그 성과를 독점하는 사회를 용인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쟁은 어떤 면에서는 소모적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조세적 접근을 주장한다.

 

“조세적 접근 또한 부의 도덕적 위계에 대한 헛된 논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모든 재산은 부분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잠재적으로는 과도하다. 그 부가 완전히 도둑질의 결과인 경우는 드물며 절대적으로 능력에 의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자본에 대한 누진세의 이점은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고 일관되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방법인 동시에 대규모 재산을 민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p529”

 

자본의 수익률에는 진정한 기업가적 활동, 순수한 행운, 노골적인 도둑질의 요소가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요소들을 분리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으므로, 조세 정책을 통해 강력한 부유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의 분배를 민주화시키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3부는 가장 분량이 많지만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역사적으로 항상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서왔다. 다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약 30년 동안 노동수익률이 자본수익률을 앞지르면서 빈부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다시 상황이 역전되어 빈부격차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격차를 줄이는 자연적인 방법은 없다. 다만 부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율 등의 세제 개혁만이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결론은 부자에게 세금을 왕창 걷자! 그래도 절대로 경제가 망하지 않는다. 다만 부자의 돈이 중산층에게로 흘러갈 뿐이다.

 

피케티의 주장은 별로 새롭지는 않다. 피케티는 다만 방대한 통계자료를 들이밀면서 논거에 힘을 싣고 있을 뿐이다. 부자들은 감옥에 보내서도 안 되고, 세금을 올려서도 안 된다는 협박에 대해, 이래도 안 되냐고 800여 쪽의 책을 조용히(세계적으로 돌아다니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다소 소란스럽게) 내밀 뿐이다. 그래봤자 코웃음을 치거나 길길이 날뛰는 것이 고작인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암담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하니까, 열심히 정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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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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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분책했다. 애서가를 경악하게 하는 나의 분책 습관은 대학교 일학년 때 시작되었다. 내 대학생활의 첫 번째 좌절은 General Chemistry와 Biology라는 책 두 권이었다. 우리 얼뜨기 신입생들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천 페이지가 훌쩍 넘었던 이 책들을 가방에 넣지도 못하고 가슴에 안고 다녔다. 이 책 두 권은 분량의 압박에 영어 원서의 압박까지 보태며,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몸에 배었던 예·복습의 습관은 물론 수업 시간의 이해력까지 박살내며 내 머리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고, 들기만 해도 팔이 축 쳐지는 이 책들을 결국 나는 몇 개의 작고 만만한 책으로 나누어 버렸다. 그렇다고 학습능력이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외관상의 압박은 사라졌다. 제목과 두께만으로도 무서워 보이던 『21세기 자본』도 칼질(?) 몇 번으로 이렇게 자그만 세 권의 책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서장과 1,2부로 된 첫 번째 책을 다 읽었다.

   

 

 

 

 

피케티는 “내 생각으로는, 이 책은 경제학 못지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다” 고 말했다. 그렇다고 교양과목처럼 경제사를 좌르륵~ 개괄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에는 구체적인 수치들이 가득하다. 20여 개국의 300년에 걸친 자료에서 뽑아낸 수치들은 공식에 대입되고, 다양한 도표와 표로 만들어진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역사를 현란한 말솜씨로 푸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가지고 차분히 입증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좋아하는 수학적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피케티는 사소한 수학적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세계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대신 경제학에 과학의 옷을 입히려는 오만한 태도라고 비판한다. 그는 경제학의 사회과학적 연구를 주장한다. 비록 사회과학적 연구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불완전하지만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작동 원리들을 차분하게 분석함으로써 민주적인 토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그 토론의 관심이 좋은 질문들에 집중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수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경제학은 언제나 정치경제학이라는 장하준의 주장과 닮아 보인다. 글을 쉽게 쓴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 느낌은 또 다른데, 장하준은 한여름 소나기처럼 시원시원한 반면 피케티는 일종의 ‘밥맛’과 같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 밥맛이 아니라 진짜 밥맛 말이다.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지만 그 어떤 자극적인 음식도 따라오지 못하는, 밥 고유의 맛이다. 그의 글은 실용적이어서 어떤 수사도 없이 건조한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술술 읽힌다. 그러다 가끔 오스틴이나 발자크의 소설을 언급할 때면 갓 지은 밥에 올린 구운 김 한 장처럼 감칠맛이 느껴진다. 그러니 경제학 교과서의 딱딱한 문장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 책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피케티는 자신의 책이 민주적인 토론에 정보를 제공하고 그 토론이 좋은 질문에 집중되기를 희망한다. 아마도 피케티가 말하는 좋은 질문이란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이 치열하게 제기했지만, 그 이후의 경제학자들은 오랫동안 외면해 온 문제, 바로 분배의 문제일 것이다. 『21세기 자본』이란 책 자체가 바로 분배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멜서스를 비롯한 영, 리카르도, 마르크스 등의 19세기 경제학자들은 각자 관점과 해법은 달랐지만 분배의 문제를 경제 분석의 중심에 놓고 장기적인 경향들을 연구하려 했다. 특히 마르크스는 “반세기 동안의 산업적 성장을 이룬 다음에도 대중의 상황이 여전히 그전처럼 비참하다면, 그리고 8세 미만 어린이들의 공장노동을 금지하는 것이 입법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면, 산업 발전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기술 혁신과 이 모든 노역과 인구 이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란 질문 위에 연구를 시작했다. 피케티 역시 『21세기 자본』을 통하여 이 질문을 경제 분석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지난달 피케티 방한에 앞서, 전경련을 비롯한 자본 측의 학자들이 그렇게 과민반응을 하며 피케티를 비판(난) 했던 것도, 분배의 문제 즉 불평등의 문제가 여론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제목 『21세기 자본』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상하게 한다. 영문제목 Capital in the 21th century는 마르크스의 Das Kapital에서 따온 것은 아닐까? 물론 피케티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빗나갔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시한 무한축적의 원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핵심적인 통찰을 담고 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그 예언적 성격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탁월한 분석으로 뛰어난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자본』이란 제목에는 마르크스에 못지않게 자본주의 체제를 훌륭히 분석해 내고 싶다는 피케티의 욕망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싶다.

 

 

 

 

 

 

피케티 주장의 핵심은 많은 기사들이 받아썼던 것처럼 부의 집중과 소득 불평등이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이다. 도표1.2는 1870년부터 2010년까지 유럽의 자본/소득 비율의 추이를 보여 주고 있다. 피케티는 자본/소득 비율을 β로 표현한다.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민간자본의 총액이 국민소득의 6~7배에 달했다. 피부에 와 닿게 예를 들자면 현재 내가 가진 전 재산 즉 자본이 집 한 채라면 이 집 값이 6~7년 연봉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우리 현실에서는 워낙 집값이 비싸서 30년 연봉을 합쳐도 수도권에서 집 장만하기 빠듯하다는 기사도 나오곤 하지만, 일단 유럽 평균이 그랬다는 말이다. 집은커녕 통장 잔고도 없는 사람에게는 턱도 없이 까마득한 수치이고, 임대료와 주식 배당금 등등으로 놀고먹는 사람에게는 우스운 수치이기도 한데, 6~7배는 자본주의 300년 역사상 아주 높은 수치에 해당한다. 당연히 이 수치가 높을수록 빈손으로 부지런히 일한 돈만 가지고는 처음부터 많은 자산을 물려받은 사람을 따라잡기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본/소득 비율은 급속하게 떨어졌다. 자본이 직접적으로 파괴되기도 했고, 정부 정책으로 임대료 등 자본의 이윤율을 억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그래프는 1950년대를 지나면서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21세기 초 영국과 프랑스는 거의 5~6배 수준을 회복했다. 1:99 이니,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진다느니 하는 말들이 괜한 선동이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 양극화는 입증해야 될 문제가 아니라 그냥 피부로 느껴지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자본/소득 비율이 증가하는 것일까? 피케티는 양극화의 근본원인을 r>g 라는 부등식으로 간단히 표현한다. r은 자본수익률이고 g는 경제성장률이다. 예를 들자면 건물 임대료 상승이 임금 상승보다 더 빠른 상태이다. 건물 한 채를 물려받아 받는 이자율이 일해서 버는 소득 증가율 보다 크면, 빈부격차가 빠르게 증가한다. 처음에는 건물 한 채의 격차가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 두 채, 세 채의 격차가 된다. 더 이상 근면과 능력으로 계층 격차를 줄일 수 없다. 부지런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 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21세기 자본』의 <서장>에는 피케티의 이런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신문 기사나 서평만으로는 미진한데 그렇다고 책을 읽기도 부담스럽다면 서장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제1부 소득과 자본》은 〈제1장 소득과 생산〉, 〈제2장 성장: 환상과 현실〉로 구성 되어 있다.

 

 

1장에서 피케티는 201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마리카나 백금광산 파업을 예로 들며, 생산 중 임금과 이윤으로 가야 할 몫이 각각 얼마인지, 생산을 통해 얻은 소득이 자본과 노동 사이에서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500유로 임금 인상을 요구한 파업에서 경찰이 실탄을 발사하여 34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다. 이 죽음 후 버티던 영국인 주주들은 매달 75유로의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다. 임금과 이윤 사이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배의 법칙이 존재할까? 역사적으로 총소득(국민소득)에서 자본이 가지는 자본소득과 노동자가 받는 노동소득은 어떻게 분배되어 온 것일까?

 

피케티는 자본소득 분배율 즉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몫에 관한 공식 을 제시한다. 그가 자본주의의 제1기본법칙이라 부르는 것이다. 1장에서는 이 공식과 변수들의 개념만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일단 알아두고 넘어가자.

 

α = r X β

 

α :자본소득 분배율 r :자본수익률 β :자본/소득 비율

 

 

 

 

2장에서 피케티는 경제 성장에 대한 우리의 환상을 직시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저성장은 일시적일 뿐이고 이 시련을 극복하고 나면 다시 연 7~8%의 고성장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 7~8%의 고성장이야말로 일시적 현상이고 자본주의 300년의 역사상 연평균 성장률은 3%를 넘지 못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앞으로 성장률은 더 낮아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성장률은 인구증가율과 1인당 GDP의 합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선진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1인당 생산성이나 인구증가가 소득의 불평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가령 생산성이 한 세대에 10배씩 증가하는 사회에서는 이전 세대의 소득은 현재의 소득에 비해 별로 큰 가치를 갖지 않는다. 아버지가 30년 일해 모은 돈을 내가 3년만 일해도 충분히 벌수 있다면 아버지의 유산은 그리 대단하지 않을 것이다.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가정을 예로 든다면, 자식이 많은 경우 부모의 재산이 골고루 나누어 분배되기 때문에 유산이 그리 크지 않다. 결국 빠른 경제성장은 소득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에는 이전 세대에 축적된 자본이 대단히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더욱이 저성장 체제에서는 자본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크게 웃돌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런 상황은 장기적으로는 부의 분배를 심각한 불평등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요인이다.

 

“대체로 상속된 부에 따라 결정되는 계층 구조를 지닌, 자본이 지배하는 과거와 같은 사회(전통적인 농촌사회와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다)는 낮은 성장 체제에서만 생겨나고 존속될 수 있다. 나는 만약 우리가 앞으로 저성장 체제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자본축적과 불평등 구조의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세습된 부의 시대가 귀환할 것이라는 점을 살펴야 한다. 이는 장기적인 현상으로 유럽에서는 이미 그 영향이 감지되고 있으며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 p107”

 

‘세습된 부의 시대’는 어쩌면 도래해 있을 지도 모른다. 결혼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할아버지의 재산이라는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유행하고 있다. 88만원 세대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는 이미 자식세대의 소득이 부모세대의 소득에 훨씬 못 미치는 저성장 시대를 예고 받았고 그 예언은 실현되었다. 인구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부모세대가 10년 일해 집을 샀다면 이제 자식 세대는 30년을 일해도 집을 사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건 할아버지건 간에 집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식과 그렇지 못한 자식의 격차는 엄청날 수밖에 없고, 그 격차는 아마도 점점 벌어질 것이다.

 

 

 

 

 

《제2부 자본/소득 비율 동학 》은 〈제3장 자본의 변신〉, 〈제4장 구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제5장 자본/소득 비율의 장기적 추이〉 , 〈제6장 21세기 자본-노동의 소득 분배〉로 구성되어 있다.

 

 

3장은 주로 영국과 프랑스 자본의 역사적 변화를 보여준다.

   

 

 

 

도표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본/소득의 비율은 ‘U자 곡선’을 그리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높은 자본/소득 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다가 1914~1945년 즉 양차대전 사이에 거의 3분의 2 가까이 떨어졌다가 1945~2012년 다시 2배 이상 상승했다. 자본주의 초기의 불평등이 해소되었다는 생각은 20세기의 전쟁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21세기의 자본은 다시 18,9세기의 수준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인다. 물론 자본의 성격은 변했다. 과거에는 주로 토지였던 자본이 이제 부동산, 산업 및 금융자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4장은 독일과 북미 자본의 상황이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는 조금 다른 곡선을 그리고 있는데, 전문가도 아닌 처지에 자세한 내용은 넘어간다. 다만 전후시기에 자본/소득 비율이 급감한 요인에 대한 피케티의 설명이 매우 흥미로워 옮겨 두겠다.

 

“전후 시기에는 주로 1920년대 초반 그리고 특히 1940년대의 높은 인플레이션 기간에 거의 모든 곳에서 채택되었던 임대료 통제 정책 때문에 주택 가격이 역사적으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임대료는 다른 물가보다 상승폭이 덜했다. 세입자의 주거비용이 덜 비싸진 반면 주택 임대인의 임대료 수입은 줄어들었으며,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이 하락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업의 가치, 즉 상장기업의 주식과 합자회사의 지분 가치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비교적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전후 시기의 국유화로 인해 주식시장에 대한 신뢰가 심하게 흔들렸을 뿐만 아니라 금융규제, 그리고 배당과 이윤에 대한 과세 등 새로운 정책들이 도입되어 주식 소유주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주식 가치를 떨어뜨렸다. P181"

 

물론 정책에 따른 가격 효과 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해외자산 손실 등의 물량효과가 더 크게 작용했지만, 자본/소득 비율은 경제 정책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고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미국은 유럽과 달리 낮은 자본/소득 비율을 보여 왔다. 광활한 땅에서 몇 년만 일하면 일찍 정착했던 사람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신대륙이었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미국에서는 토지가 싸고, 누구나 토지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지만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했던 것이 바로 낮은 자본/소득 비율의 효과였을 것이다.

   

 

 

 

5장은 자본/소득 비율의 장기적 추이다. 서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β로 표현되는 자본/소득 비율은 커다란 U자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세기 전쟁 기간 중에 급격히 줄어들었던 유럽의 β값은 왜 사상 최고치를 회복하고 있는가? 그리고 4장의 미국과 비교하여 왜 유럽의 β 값이 미국보다 더 높은가? 5장에서 피케티는 자본주의의 제2법칙을 제시하며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β = s / g

 

β :자본/소득 비율 s: 저축률 g: 성장률

 

직관적으로 이 공식은 매우 당연하다. 저축은 자본에, 성장은 소득에 직접 대입된다. 저축률이 높을수록 성장률이 낮을수록, 즉 이미 가진 돈이 많을수록 일해서 벌어야 할 소득이 적을수록, 자본/소득의 비율은 커진다.

 

“다시 말해 거의 정체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과거에 축적된 부가 필연적으로 엄청난 중요성을 띠게 될 것이다. 따라서 18세기와 19세기에 관찰된 수준에 근접할 정도로, 21세기에 자본/소득 비율이 구조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회귀한 것은 저성장 체제로의 회귀로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성장 둔화, 특히 인구 성장의 둔화는 자본이 귀환하는 원인이다. 기본적인 요점은 성장률에 작은 변화가 생겨도 장기적으로 자본/소득 비율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p202”

 

피케티가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단적으로 말하면 2부까지의 피케티 주장은 오직 이것 하나이다, 21세기에 예측되는 낮은 성장률은 새로운 세습자본주의를 출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습은 권력이든 자본이든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6장은 그렇다면, 자본수익률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총소득에서 자본과 노동의 몫을 나누는 타당한 기준이 있는가? 이것은 본문의 첫머리에서 제기된 남아프리카공화국 마리카나 광산이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조정하는 자연발생적인 힘은 없다.

 

 

 

 

피케티는 자기 연구의 독창성을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자본/소득 비율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자본-노동 소득분배율과 최근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의 증가라는 문제를 좀 더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에서 최초로 다루는 데 있다고 말한다. 피케티의 데이터를 보면 1970년~2010년에 가장 부유한 국가들에서 자본/소득 비율이 증가한 만큼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몫이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β 값이 증가한 만큼 α값 즉 자본소득 분배율도 증가했다. 이 두 값의 증가는 빈부격차의 심화, 분배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값을 막을 자기 조정 메커니즘은 없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제 『21세기 자본』의 1/3을 읽었다. 정리가 생각 보다 길어졌다. 읽을 때 보다 정리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도 같다. 독자도 이런데, 이 많은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해석한 저자는 정말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니까 학자잖아~ 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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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진의 정치카페 피케티편이 여기저기 보이길래 들어 보았다. 나꼼수 이후 중늙은 남자들이 독설하며 킬킬대는 방송은  질색이라 앞부분은 불편했지만 피케티 부분은 유익했다. 특히 일반인도 충분히 읽을 수 있고 재미있게 느낄 수도 있다는 유시민의 꾐이 솔깃해, 언감생심 포기했던  21세기 자본을 덜컥 주문했다. 그리고 은근히 욕심나던 책베개도 받았다. 


심히 부담스런 쪽수에 하드 커버의 압박까지 ... 그러나 다행히 상당한 분량의 그래프와 표가 숨구멍이 될 것 같다. 재미가  있을지 한숨만 나올지는 읽어 봐야 알겠지만 일단 배는 부르다.  

 


기대했던 책배게는 예쁘다. 혹시 배게에 책을 넣어 배는건 아닐까 궁금 했는데 진짜 솜이 들어 있다. 그런데 푸슬푸슬 한 솜이  바로 들어 있고 지퍼는 손가락 길이 만하게 작아서  솜을 빼고 세탁할 방법이 없다. 배고 자거나 껴안고 뒹굴려면 한번 빨아야 하는데. 

 

몇일 전 떡집에 떡국을 사러갔더니 마침 딱딱하게 말린 가래떡을 기계에 밀어 넣고 썰고 있었는데, 떡 조각들이 하나씩 튀어 바닥에 떨어졌다. 떡집 아저씨는 한번 호호 불지도 않고 떨어진 떡을 주어 담았다. 다 그렇지 하면서도 깨끗이 씻어 먹어야 겠단 생각을 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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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0-02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도 멋지네요.
전 파랑빛깔의 100세....주문하고 설렘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라딘 선물이 점점 진화하고 있어요^^

말리 2014-10-02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땅한 책이 없어 선물은 군침만 삼키고 한번도 못받았는데 이번에 받아 기쁩니다. 근데 실용적일진 모르겠어요 ㅎ. 책꽂이에 꽂아둘까 생각중입니다.

김지혜 2014-11-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떡 부분에서 한번 웃고 가요 ^^제도 깨끗이 씻어 먹어야 겠어요 ㅋㅋㅋ

말리 2014-11-19 11:29   좋아요 0 | URL
안보면 편한데 말이예요 ^^ .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도시 이야기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체스터튼의 책을 읽으며 영국 추리소설의 계보를 찾아 본 적이 있다. 에드거 앨런 포에서 코난 도일, 체스터튼, 아가사 크리스티로 이어지는데, 포와 코난 도일 사이에 뜻밖에도 찰스 디킨스가 있었다. 그 유명한,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정작 읽지는 않는, 디킨스가 추리소설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하는 대가’ 인 디킨스는 포와 함께 추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모양이다. 실제로 디킨스는 미완성 추리소설을 남기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을 때, 이 책이 내가 완역본으로 읽은 디킨스의 유일한 작품이었다, 받은 느낌은 아주 몽환적이지만, 추리소설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 독자가 가장 많이 읽은 책!’ 이라는 광고에 솔깃해서 선택한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니, 왜 디킨스를 빼고는 추리소설의 역사를 쓸 수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두 도시 이야기』는 거의 끝날 때까지, 사건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지막 퍼즐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비로소, 왜 그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그곳에 있는지, 무엇이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때까지 독자는 오백여 쪽의 흐릿한 어둠 속을 팽팽한 긴장 속에 내쳐 달릴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러 서야, 희끄무레하던 형상들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한 얼굴을 가졌는지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긴 이야기를 이렇게 숨 가쁘게 내달린 끝에 이렇게 놀라운 탄성을 질러냈던 추리소설을 내가 예전에도 본적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를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그렇다. 추리 이전에 이것은 역사이다. 더없이 숭고했고, 또 말할 수 없이 광기에 가득 찼던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859년 작 『두 도시 이야기』는 1862년에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한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1789년에 일어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하며 1871년 제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10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두 도시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1789년 대혁명의 시대는 혁명이 화산처럼 폭발하여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열정과 광기의 시대였다. 자유와 희망의 시대였지만 또한 파괴와 학살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왕의 목을 날려 버린 민중들은 희망에 들떠있었다. 한편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은 희망과 절망이, 혁명과 반동이 되풀이 되는 기나긴 과정에서 일어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혁명의 성과는 부르주아지가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혁명에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중은 혁명에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역사는 묵묵히 새로운 시대를 향해 굴러가고 있었다.

 

 

디킨스와 위고, 둘 중 누가 프랑스 혁명을 더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디킨스가 영국인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인인 위고에 비해 좀 불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디킨스 역시 위고 못지않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작품 속에 세밀하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작가 모두 열렬한 혁명주의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두 도시 이야기』와 『레미제라블』모두 혁명을 배경으로, 혁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혁명의 이념 보다는 인간의 사랑을 구원의 힘으로서 강조한다. 루시와 코제트라는 아름답고 순결한 여성(소녀)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지켜내어야 하는 숭고한 대상이 된다.

 

그런데 빅토르 위고는 ‘아베쎄의 벗들’ 이라는 이상주의적 학생들을 통해 혁명의 이념을 긍정하는데 비해, 디킨스는 ‘드파르주 부인’을 복수의 화신으로 묘사함으로써 혁명의 이상 보다는 혁명의 어두운 현실, 그 파괴와 광기에 우려를 나타낸다. 위고가 1832년 6월 봉기를 소설의 핵심 배경으로 삼은 것도 비록 서투른 이상주의자들의 실패한 봉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정과 이상만은 숭고하게 기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반면 디킨스가 유독 기요틴의 칼날 아래 하루에도 수 백 명 씩 죽어나가던 자코뱅의 공포정치에 집중한 것은 혁명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시각이 영향을 주었던 것은 아닐런지. 『두 도시 이야기』에 대한 어떤 해석이나 평문도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 첫 느낌은 그렇다.

 

 

 

그런데 혁명은 파괴와 공포 없이 가능한 것일까? 한 방울의 무고한 피에도 혁명은 불의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레미제라블』1부에는 공포정치시대에 국민공회 의원을 지낸 노인과 미리엘 주교의 긴 대화가 나온다. 예전 글에서 조금만 옮겨와 보겠다.

 

「국민공회 의원은 손을 뻗어 주교의 팔을 잡았다. "루이 17세!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는 거요? 죄 없는 아이에 대해서요? 그렇다면 좋소. 나도 함께 눈물을 흘리겠소. 하지만 왕자에 대해서라면,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소. 카르투슈(1693~1721년. 파리 부근에 출몰했던 도적단의 두목. 산 채로 수레바퀴 형에 처해졌음)의 동생은 단지 그의 동생이라는 죄만으로 그레브 광장에서 양쪽 겨드랑이를 묶인 채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매달려 있었소. 이 죄 없는 소년의 죽음은 루이 15세의 손자라는 죄만으로 탕플 성의 탑 속에서 죽어간 루이 17세 못지않게 가슴 아픈 일이오." ···· "거듭 말씀 드리오만," 하고 국민공회 의원은 말을 이었다. "당신은 루이 17세의 이름을 꺼냈소. 이 점에 관해서는 서로 이해하고 싶소. 우리들은 죄 없는 사람들, 순교자들, 어린아이들, 신분이 높고 낮은 것에 관계없이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자는 거지요? 그건 나도 동감이오. 그렇다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793년 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특히 루이 17세 이전 시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오. 나도 당신과 함께 국왕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겠소. 당신이 나와 함께 민중의 아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신다면."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하고 주교가 말했다. "평등하게 말이지요!" 하고 G가 외쳤다. "만약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만 한다면 당연히 민중 쪽이어야 할 것이오. 민중 쪽이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왔으니 말이오."」

 

루이 17세는 마리 앙뜨와네트와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이다. 프랑스 혁명으로 왕과 왕비가 기요틴 아래 목을 잃었고, 그들의 어린 아들 루이 17세도 죽었다. 단지 국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오랜 세월 민중의 아이들은 단지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이라는 이유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굶어죽고 맞아죽고 병들어 죽었다. 혁명이 없었다면 민중의 아이들은 수 백 년이 흘러도 또 수없이 죽어나갔을 것이다. 왕의 아들의 죄 없는 목숨 하나와 수 없이 많은 민중의 아이들의 죄 없는 목숨들을 바꿀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 것인가? 빅토르 위고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왕의 아들은 단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갖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왕의 아들이 왕의 죄와 관계없다면, 왕의 아들은 왕의 부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나 죄의 물림에는 부당함을 외치면서도 부의 물림에는 한마디의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다. 왕은 사라졌어도 부의 물림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왜 아무도 묻지 않을까?

 

『두 도시 이야기』의 디킨스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지만 그는 누구도 핍박하지 않았고, 누구도 구속하지 않았다. 응당 자신이 받아야 하니 내놓으라고 가혹하게 대하는 그런 사람과도 거리가 멀기에 스스로 그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고, 그런 혜택이 없는 세상으로 뛰어들어 자신만의 힘으로 밥벌이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가벨은 서면 지시를 받아 복잡하게 얽힌 재산을 관리하면서 사람들의 세금을 깎아주고 얼마 되지 않지만 줄 수 있는 것 - 겨울에는 연료를, 여름에는 여분의 곡식 따위를 -을 주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탄원서라든지 증거물에 이런 사실을 기록해 두었을 테니 필요하다면 보여 주면 될 것이다. p347」

 

잔악한 귀족처럼 수탈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특권을 내려놓고 살기에 이 착한 남자는 두려움 없이 파리의 혁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귀족의 아들은 진짜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그는 농민의 아들이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고 있을 때, 포동포동 살이 쪄서 자랐다. 겨우 살아남은 농민의 아들이 파리의 빈민가에서 도둑질을 할 때, 교육을 받은 이 남자는 부모의 특권을 거부하고 자신의 손으로 밥벌이를 했다. 그런데 그의 밥벌이가 진정 자신의 손으로만 이루어진 것일까? 그 손에 외국어와 교양을 쥐어준 것은 무엇일까? 도둑놈이 된 농민의 아들의 입 속으로 들어가야 했을 그 곡식은 아니었을까? 이 착한 귀족의 아들은 진정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일까?

 

드파르주 부인은 애원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 “저에게 동정을 베풀어주시고 당신의 영향력을 내 남편에게 불리하게 행사하지 않기를 바라요. 남편을 도와주세요. 같은 여자로, 언니 같은 마음으로 저를 생각해 주세요. 저는 아내이자 어머니예요!”

드파르주 부인은 이런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다 동료인 방장스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처럼 어렸을 때, 아니, 그 보다 훨씬 전에, 우리가 본 아내들과 어머니들이 한 번이라도 배려 받은 적이 있었나? 그 아버지와 남편들은 감옥에 갇혀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 않아? 우리가 평생 봐온 우리 언니들이나 그 아이들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병에 걸려 비참하게 살면서 온갖 핍박과 멸시를 받지 않았던가?”

“다른 모습은 못 봤지.” 방장스가 말했다.

“우린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 왔어.” 드파르주 부인이 말했다.(가능하면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상대의 이름은 생략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아내이자 어머니가 겪는 고통이 지금 우리한테 그렇게 대단해 보이겠어?” p385」 

 

디킨스가 그리는 드파르주 부인은 냉혹한 괴물이 되어버린 복수의 화신이다. 드파르주 부인을 충실히 따르는 방장스는 그 이름이 복수를 의미한다. 드파르주 부인에 대한 묘사는 프랑스 혁명속의 광기, 민중의 냉혹한 광기에 대한 디킨스의 비판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무시무시하고 흉측한 손이 닿지 않은 여자들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이 무자비한 여자보다 더 무서운 여자도 없었다. 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격에 예민한 감각과 준비성, 강한 결단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결의와 증오심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도 직감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운 시대가 그녀를 높이 끌어올려 주었으리라. 어린 시절 키운 악에 대한 감각과 어떤 계급에 대한 만성적인 증오심이 그녀를 암호랑이로 키웠다. 그녀는 동정이라고는 모르는 여자였다. 혹시 내면에 미덕이 있었다고 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다. p522」

 

그런데 분노와 증오심 없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최루탄 한방과 물대포 한줄기에도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 나약한 인간들이 ‘나를 불태우는 지옥의 복수’ 없이 대포와 총검 앞에 몸을 던질 수 있을까? 촛불과 노래만으로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이성적 호소가 권력자의 총칼을 내려놓게 할 수 있었을까? 혁명은 뼛속까지 박힌 증오와 분노, 그리고 유토피아를 그리는 순수한 정신의 광기어린 결합이 아닐까? 혁명이란 순교자적 정신이 이끄는 이상향을 향해 돌진하는, 가난한 민중의 분노와 증오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면 그 무엇일까? 누가 드파르주 부인을 비난할 수 있을까? 혁명이 멈추기를 바라는 자가 아니라면. 혹은 혁명의 방관자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혁명은 끝없이 무고한 피를 흘린다. 복수는 눈멀어 있게 마련이다. 기요틴이 만든 피의 강물은 디킨스를 절망에 이르게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죽음의 수레가 덜컹거리며 지나간다. 하루에 여섯 번씩 호송 마차는 기요틴에 포도주를 갖다 나른다. 상상을 기록할 수 있게 된 이래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온갖 괴물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 바로 기요틴이다. 그러나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도 다양한 프랑스에는 아직 잎사귀 하나, 이파리 하나, 뿌리 하나, 후추 열매 하나도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 이렇게 공포심을 자아내지 않는다면 예측한 대로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자랄 텐데. 똑같은 망치를 가지고 사람을 내리쳐 보라, 똑 같이 끔찍한 모습이 될 뿐. 똑같은 탐욕의 허기증과 압제의 씨앗을 뿌려보라, 틀림없이 똑같은 열매가 열릴 것이니. p535」

 

디킨스는 귀족들의 망치와 민중들의 망치를 똑 같은 것으로 본다. 똑 같이 사람을 내리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귀족들의 탐욕과 압제가 민중들의 탐욕과 압제와 같은 것일까? 맞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갖기를 원하고 민중들도 자신들이 갖기를 원한다. 그런데 전자는 1%가 99%를 가지기를 원하고, 후자는 99%가 99%를 가지기를 원한다. 그래도 똑 같은 것일까?

 

하지만 디킨스가 프랑스 혁명에서 절망만을 본 것은 아닌 것 같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은 죄 없이 기요틴 아래 끌려 온 어린 처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로 끝난다. 가난한 처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선생님의 강인하고 친절하신 얼굴을 보면 큰 위안을 얻지만, 만약 공화국이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좋은 일을 한다면, 덜 배고프게 해주고 덜 고통 받게 모든 노력을 기울여 준다면 그 애는 오래 살 수 있을 텐데요.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을 텐데요.” p540 」

 

그리고 한 남자가 마지막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라고 디킨스는 전한다.

 

「 “나는 알고 있다 ···· 옛 체제가 붕괴된 후 생겨난 기나긴 대열의 새 압제자들이 더는 지금처럼 사용하지 않아도 결국 이 보복적인 도구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 ” p542 」

 

디킨스는 혁명의 광기가 도달하려는 자유와 진정한 자유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광기 없이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을까. 김혜린의 만화 『테르미도르』의 혁명 시인 세자르 시락은 반혁명의 죄로 끌려온 기요틴 아래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혁명에 배반당한 시인은 그래도 혁명을 배반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 홀연한 정신은 이제 간다.

저 건너편의 나라로.

 

세모 속에 네모를 넣을 수도 있고,

네모 속에 세모를 넣을 수도 있는 나라.

 

천년의 세월을 1년에 밀어 넣으려던,

우리들은 찬란한 신의 이단자.

 

이후 혼돈의 세월이 얼마를 더 흐른 후에라도ㅡ

멋대로 떠들지 마라!

가볍고 무책임한 입술들이여!

 

어째서 우리는 일어설 수밖에 없고,

서로 싸울 수밖에 없고,

그러고도....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단 세 방울의 눈물 외엔

더 기도할 것도 남지 않았다.

 

웃지 마라, 폭양아.

 

바람 속에서도

제비꽃은 지고 또 피느니ㅡ.

 

친구여! 나는 저 열월의 길로틴 아래

한 송이 제비꽃으로 태어나고 싶다…

 

 

 

『두 도시 이야기』는 멋진 추리소설이자 훌륭한 역사소설이다. 이 책의 팽팽한 긴장을 제대로 느끼려면 가능한, 스포일러가 적어야 할 것 같아 줄거리는 생략했다. 디킨스가 서술한 프랑스 혁명의 공포와 광기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이었다. 자코뱅이 집권한 짧은 시기는 기요틴의 시대였고,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이 뒤섞여 무자비하게 숙청당했다.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혁명에 넌더리를 냈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갈 것 같다. 디킨스는 그 점을 정확하게 잡아내어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기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시대를 구원할 것이라고. 물론 디킨스는 민중들이 어떻게 증오와 복수심에 타오르게 되었는지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드파르주 부인은 우연하게 괴물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저지른 죄악과 민중의 증오가 새롭게 만들어낸 죄악을 동일한 차원에 놓음으로써 세자르 시락과 같은, 비록 허구의 인물이지만, 시인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디킨스가 제시한 사랑은 저 세계의 자유와 평등은 약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세계에서 어디 한번이라도 자유와 평등을 가져다 준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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