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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이제 『21세기 자본』제3부다. 2부가 국가 차원에서 자본과 소득의 분배에 대해 검토했다면, 3부는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불평등과 분배에 대한 연구이다. 사실 국가에서 개인적 차원으로 연구 대상이 달라졌을 뿐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국가 내에서의 빈부격차가 한 눈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좀 더 강한 분노와 상실을 느낄 수 있다.
『21세기 자본』을 읽으면 누구나 오스틴과 발자크의 소설이 궁금해 질 것이다. 오스틴은 원래 좋아해서 거의 다 읽었는데, 발자크는 아직 한 권도 읽지 않았다. 특히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은 『21세기 자본』3부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라, 이 소설을 먼저 읽어보고 싶은데 참고 있다. 두 작가는 19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 상류사회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면서, 계급별 경제수준과 자본수익률 등에 대한 상세한 수치까지 꼼꼼히 기술하고 있다. 이 수치들은 자본과 소득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한 시대에 데이터 대신 참고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피케티는 생각한다. 그 시대는 경제성장률이나 자본수익률이 거의 일정했고 물가상승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연 수입이 몇 프랑이면 어느 정도의 계층에서 어떤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실장님’ 하면 음...이 신데렐라가 어떤 삶을 누리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연 오만 프랑 상속자와 결혼하면 상위 1%의 삶을 누릴지, 상위 10%의 삶을 누릴지 계산이 딱 나왔다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같은 로맨스 소설에서 왜 그렇게 주요 등장인물들의 연수입이 세세히 나오는지, 물론 나 같은 독자들은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연수입이라는 몇 개의 숫자는 그 어떤 세밀한 묘사보다도 더 정확하게 다아시나 빙리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표현할 수 있었다.
《3부 불평등의 구조》는 『고리오 영감』 중 ‘보트랭의 설교’에서 그 핵심 질문을 뽑아낸다. 보트랭은 법률가가 되어 신분상승을 하려는 라스티냐크에게, 재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환상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법률가가 된다 하더라도 거액의 상속녀와 결혼하는 것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연봉과 지참금, 상속액의 수치를 들어서 역설한다.
피케티가 여기서 굳이 19세기 초의 보트랭을 들고 나온 이유는 21세기의 유럽에서도 ‘노동이냐, 유산이냐?’ 라는 질문은 여전히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현대의 성공은 유산이 아니라 노력과 능력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믿음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 믿음이 과연 옳을까? 3부에서 피케티는 이 믿음이 긴 역사의 어떤 특정시기에만 근거가 있을 뿐이며, 지금 우리는 그 운 좋았던 시기를 막 벗어나고 있고, 그러므로 이 믿음은 이제 오히려 환상에 가까움을 입증하고 있다. 물론 21세기는 19세기와는 달리 자본의 불평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불평등에 노동의 불평등이 가세되었는데, 21세기의 이 복합적 불평등의 구조는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제7장 불평등과 집중 : 기본적 지표
소득불평등은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자본소득의 불평등이 합해진 결과다. 자본과 관련된 불평등은 항상 노동과 관련된 불평등 보다 크다. 대략 노동소득 상위 10%가 전체 노동소득액의 25~30%를 받는 반면, 자본소득 상위 10%는 항상 전체 부의 50% 이상을 소유한다. ‘보트랭의 설교’가 아주 믿을만한 근거를 가졌던 것이다.
아주 불평등한 사회는 자본소득 상위 10%의 값이 90%까지 올라가는데, 지난 7일 국세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아주 불평등한 사회’ 라는 것이 딱 입증되고 말았다.
(출처 : 한겨레 신문)
물론 이 자본이 스스로 축적한 것인지 물려받은 것인지에 따라 ‘노동이냐, 유산이냐?’에 대한 올바른 답을 얻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뒷장에 상세히 이루어지는데, 예상하다시피 세습된 자본이 많다. 비록 노동소득으로 축적된 자본이라 해도 세습자본과 비슷한 경로로 ‘돈이 돈을 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세습자본주의는 끝났고, 현대는 노력과 능력의 시대라고 믿게 된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세습중산층의’ 의 탄생이다.
표에서 중간40퍼센트(중산층)로 구분된 계층은 1세기 전만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가장 부유한 10%가 부의 대다수를 차지했고, 나머지 90%는 별 차이 없이 가난했다. 그런데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이 새로운 중산층이 등장했다.
“재산이 20만~30만 유로인 사람은 부자가 아닐지 모르지만 궁핍과도 거리가 멀며,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중간에 위치한 이 40퍼센트의 인구는 대규모 집단이다. 수천만 명이 개인적으로 수십만 유로 가치의 재산을 소유하고, 집단적으로는 국부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중요한 변화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적 지형과 정치적 구조를 심대하게 변화시키고 분배 갈등의 조건들을 재정의 하는 데 기여한 주요한 변화였다. 따라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p315”
그런데 이 평등한 시기는 불행히도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생인 나만해도 이 행운의 시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이런 믿음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제 8장 두 개의 세계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언제나 다른 영역들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의 역사에는 자연적 균형이나 규칙적인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혼란스럽고 정치적이며 급격한 사회 변동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불평등의 역사는 한 국가의 역사를 해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피케티가 “이 책은 경제학 못지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다” 라고 말한 이유도 이것이다.
프랑스의 소득 불평등은 1914~1945년에 뚜렷하게 축소되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 대공황이 불러온 파산,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의 새로운 공공정책이 자본/소득 비율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국민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을 크게 축소시켰다. 소득 상위 10%, 특히 그 중 소득 상위 1%의 소득이 가히 ‘몰락’이란 말로 표현될 정도로 줄었다. 소득 상위 1%의 몰락 자산은 대부분 7장에서 소개한 ‘세습중산층’ 의 몫으로 돌아갔다. 세습중산층에 대한 내용은 3부 전체에 걸쳐 되풀이 논의되는데, 나 같은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는 약간 짜증스럽기도 하다. 하나의 주제를 주르륵 연결해서 한꺼번에 설명하면 좋은데, 피케티는 여기저기 찔끔찔끔 나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격렬한 경제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연구라 데이터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하다 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싶지만, 불편은 하다. 열심히 앞뒤를 뒤적여야 겨우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8장의 제목 ‘두 개의 세계’는 상위 10%가 나누어진 세계다. 상위 1%는 자본소득이, 나머지 9%는 노동소득이 우위를 차지하는 세계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주로 자본소득의 파괴를 가져왔다.
미국은 좀 더 복잡하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미국이 유럽보다 더 평등했지만, 20세기를 관통하며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불평등해졌다. 1977년에서 2007년까지 미국은 상위 10%가 전체 성장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상위1%는 국민소득 증가분의 거의 60%를 가져갔다. 하위 90%의 소득증가율은 연 0.5% 이하의 수준이다. 경제 성장의 결실은 대부분 상위 10%에게 돌아간 것이다. 미국의 새로운 불평등은 소위 ‘수퍼경영자’의 등장과 관련이 높다. 우리가 좋아하는 미국이 얼마나 불평등한 나라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제 9장 노동소득의 불평등
1980년 이후 미국에서 노동소득의 불평등이 폭발하고 수퍼경영자가 등장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교육과 기술, 한계생산성 이론 등이 제시된다. 교육과 기술에 투자하여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임금도 당연하게 증가한다. 이 생산성의 극대치를 아마도 한계생산성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식으로 하자면 능력에 따른 성과급이다. 그런데 1980년 이후 미국의 노동소득 불평등은 유럽에 비해 훨씬 가파르게 진행되었다. 만약 한계생산성 이론대로라면 이 시기 미국의 교육과 기술, 생산성이 유럽에 비해 훨씬 발전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별 차이가 없다.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한계생산성은 그다지 관련이 없는 것이다.
특히 수퍼경영자들에 관해서 그들의 고액연봉이 생산성에 대한 기여도 때문이라면, 영미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유럽을 비롯한 비슷한 선진국들에 공통된 현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 수퍼경영자들의 부상은 영미권 국가들의 현상이다. 게다가 상장기업들의 기업 성과 데이터에 의하면 실적과 고액연봉은 별 관련성이 없다. 최고경영자들의 연봉은 그들의 능력과 관계없는 외부적 요건에 의해 매출이익이 증가했을 때 가장 빠르게 상승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고액연봉을 받는 것일까? 피케티는 수퍼경영자들 자신이 자신들의 연봉을 정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이다. 1980년 이후 영국과 미국은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대폭 인하했다. 이전에는 높은 최고한계세율 때문에 욕먹으면서 연봉을 올려봤자 세금으로 다 떼이고 실질적인 수익의 증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세제의 변화가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의 인하는 최상위 소득의 폭발적인 소득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제의 변화로부터 혜택을 받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였다. 이들은 최고세율을 낮게 유지하고 심지어 더 내리는 데 관심이 있으며, 그렇게 얻은 횡재로 정당, 압력단체, 싱크탱크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p402”
그런데, 이 현상은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특히 자본과 기업에 부과되는 세제의 변화를 보면 상황이 심상치가 않다. 이미 지표상으로도 우리나라는 극심한 소득 불평등을 보이고 있다.
제 10장 자본소유의 불평등
프랑스 부의 불평등에 관한 도표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그 유명한 프랑스혁명, 자유와 평등의 그 엄청난 혁명에도 불구하고 왜 프랑스 사회는 혁명 후 100년이 지날 때까지도 그토록 불평등했던 것일까? 도대체 프랑스혁명은 성공하기는 한 것인가? 피케티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환상을 경계한다. 권리와 기회의 평등이 곧바로 부의 평등한 분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회는 보편적인 세금을 확립했지만, 세율이 지나치게 낮아서 자본/소득 비율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을 전후로 자본의 성격은 뚜렷이 변화했지만, 토지자본이 산업자본 및 금융자본과 부동산으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다, 자본의 영향력은 전혀 감소하지 않았다. 여전히 상위 10%가 자본의 90%를 차지하는 세습사회였고, 유산과 결혼이 가장 중요했다. 거대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프랑스는 내내 기본적으로 동일한 불평등 구조를 가진 사회였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부르주아가 원했던 것은 1인1표가 아니라 1원1표의 평등이 구현되는 자유로운 사회였다.
그렇다면 왜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부의 불평등은 그토록 극심했을까? 한마디로 r>g 때문이다. 이 시기는 자본수익률r이 성장률g보다 지속적으로 현저하게 높은 저성장 사회였다. 1,2부에서 논의된 것처럼, 저성장사회에서는 과거에 축적된 부가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다시 자본으로 축적된다. 즉 돈이 돈을 버는 사회다. 『오만과 편견』을 비롯해서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멋진 남자 주인공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멀쩡한 그들이 하는 일은 사냥이나 파티, 만찬, 소풍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낯설지만, 그들이 그렇게 놀고만 있다고 해서 그들의 돈까지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 그들의 부는 r>g의 공식에 따라 점점 더 큰 부와 빈부의 격차를 만든다.
다시 그렇다면 자본수익률이 언제나 성장률보다 더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피케티의 답은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는 것이다. r>g는 논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경향 상 앞으로도 세전 자본수익률은 항상 글로벌 성장률보다 높다. 도표 10.10에서 나타나는 역전은 자본수익률에서 세금을 뺀 뒤 추정한 값의 결과이다. 20세기 중반에 자본수익률은 세계 대전의 충격과 세제 정책에 의해 급속히 하락했다. 조세적, 비조세적 충격으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자본의 순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낮은 상황이 나타났다.
“여러 사건 (전쟁으로 인한 파괴, 1914~1945년의 충격으로 인해 가능해진 누진세 정책, 제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의 이례적인 성장)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상황이 나타났고, 이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징후는 이런 상황이 끝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세경쟁이 그 논리적인 결말을 향해 나아가면 21세기의 어느 시점에서 r과 g의 차이가 19세기와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갈 것이다. 적어도 중심 시나리오가 맞는다면, 결코 확실하지 않지만 자본에 대한 세율이 평균 30퍼센트 정도에 머물 경우 자본의 순수익률이 성장률보다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p427”
r>g의 부등식이 다시 19세기의 수준으로 돌아갈지의 여부는 어떤 공공정책과 제도가 시행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가 21세기 초에 20세기 초와 마찬가지로 번창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의 집중이 벨 에포크 시대 보다 훨씬 낮은 이유를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20세기의 정부들이 자본과 자본소득에 상당한 세율로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다. 자본소득에 부과된 세금의 효과는 세간의 우려와는 달리 전체적인 부의 축적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것처럼 상위 1%가 차지하는 몫의 감소는 중산층의 부상으로 상쇄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핵심이 r>g 라면, 그리고 이런 경향이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면,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장률이 자본 축적률을 따라잡은 20세기 중반에 세계 각국은 자본 수익률을 억제하고 경제성장률을 촉진시켰다. 경제성장률은 어느 정도 정점에 다다르면 정체되는 경향을 띠게 되므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주요 변수는 세율정책이다. 상위 10%가 국민소득의 90%를 차지하는 벨 에포크 시대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증세에 대한 바람직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제 11장 장기적으로 본 능력과 상속
11장의 문제도 역시 r>g 이다. 자본수익률이 현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상속이 저축을 압도한다. 이때 상속은 과거에 축적된 자산이고 저축은 현재 축적되는 자산이다. r>g를 또 다르게 표현하면,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물려받은 돈이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불평등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불평등의 격차는 점점 증가한다. r>g의 논리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데, 기업가는 언제나 자본소득자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삼성가의 일 세대 이병철은 경제 엘리트였지만, 삼 세대 이재용은 상속자산의 이윤과 배당으로 더 큰 자본을 축적하고 있다.
도표 11.1은 앞에서 여러 번 되풀이 되었던 불평등의 역사를 상속액의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경향은 동일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상속액은 최저점을 찍었다가 다시 기세 좋게 올라가는 중이다. 그런데 상속은 그 특성상 평균값에는 별 의미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속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도표 11.10은 상위 1%의 자료이다. 이 결과는 다시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냐크가 처한 딜레마로 우리를 데려간다. 성공을 약속하는 것은 상속인가? 노동인가? 전통사회와 벨 에포크 시대까지 모든 사회는 언제나 상속자본이 우세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태어난 집단에게는 더 이상 상속자본이 우세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대 사건이었고, 낡은 질서의 종말과 사회적 진보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로도 불평등은 항상 존재했지만, 이 문제는 다만 임금 불평등에 따른 것으로 치부되었다. 임금불평등도 상당한 문제였지만 적어도 모든 사람들이 노동의 중요성을 공유하고 능력주의의 이상을 존중한다는 면에서 비교적 수용할 만한 불평등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집단에게는 상황이 또 다시 반전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상속이 노동보다 우세한 세계와, 노동이 상속보다 우세한 세계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라스티냐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면 보트랭의 설교는 여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부의 불평등에 있어서 “격차를 확대하는 근본적인 힘은 계속 강조되어 왔듯이 r>g 라는 부등식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것은 시장의 불완전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시장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경쟁이 강화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무제한적인 경쟁이 상속을 없애고 능력이 더욱 중시되는 사회를 향해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한 착각이다. 보통 선거권이 생기고 투표 시 재산에 대한 자격이 없어지면서 부자들의 합법적인 정치적 지배는 끝났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소득자가 사회를 낳을 수 있는 경제적 힘을 없애지는 않았다. p506”
제 12장 21세기 글로벌 부의 불평등
r>g 가 불평등의 원인이지만, r 즉 자본수익률 또한 불평등하다. 자본이 클수록 자본수익률도 증가한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주식시장에서 큰 수익률을 올리는 것은 항상 거대자본 또는 기관 투자자이다. 그들은 심지어 작전이라는 것을 통해 수익률 자체를 만들어내기 까지 한다. 멋모르고 덤벼든 개미만 손해를 본다. 하다못해 고스톱이나 포카 판도 마찬가지다. 똑 같은 자본이라 해도 자본의 크기에 따라 수익률의 차이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불평등한 자본수익률은 다시 r>g의 효과를 증폭시켜 양극화를 강화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표 12.1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 세계의 평균 부가 연 2%씩 성장할 때 최상위 1억분위 부자의 자산 수익률이 6%라면, 30년 뒤에는 1억분위 부자가 세계 자본에서 차지하는 몫이 3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최상위 계층이 차지하는 부의 비율은 크게 늘어나는 반면, 이 늘어난 몫만큼 중산층의 빈곤화가 발생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최상위층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을 때, 이 감소분을 받아 성장한 것이 중산층이었다는 사실과 정확히 반대되는 현상이다. 최상위층의 쇠퇴는 중산층의 성장을, 반대로 최상위층의 증가는 중산층의 몰락을 낳는 것이다. 지난 금융위기에서 확인했다시피 중산층은 세계 곳곳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면 부자는 모두 부도덕한가라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빌 게이츠는 탁월한 능력으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없이 훌륭한 자선사업가 이기도 하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럼에도 빌 게이츠가 운영체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이익을 낸 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게다가 게이츠의 공헌은 전자공학과 컴퓨터 공학 등 그 분야의 기초연구에 공헌한 수천 명의 기술자와 과학자의 작업에 의존한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그 어떤 천재적 성과도 개인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모든 성공의 바탕에는 수 천 년에 걸친 전 인류의 노력과 업적이 놓여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빌 게이츠 혼자서 그 모든 것을 이루어낸 것처럼 개인이 그 성과를 독점하는 사회를 용인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쟁은 어떤 면에서는 소모적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조세적 접근을 주장한다.
“조세적 접근 또한 부의 도덕적 위계에 대한 헛된 논쟁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모든 재산은 부분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잠재적으로는 과도하다. 그 부가 완전히 도둑질의 결과인 경우는 드물며 절대적으로 능력에 의한 경우도 마찬가지로 드물다. 자본에 대한 누진세의 이점은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고 일관되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대처하는 방법인 동시에 대규모 재산을 민주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점이다. p529”
자본의 수익률에는 진정한 기업가적 활동, 순수한 행운, 노골적인 도둑질의 요소가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요소들을 분리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는 없으므로, 조세 정책을 통해 강력한 부유세를 부과하는 것이 부의 분배를 민주화시키는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3부는 가장 분량이 많지만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역사적으로 항상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앞서왔다. 다만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약 30년 동안 노동수익률이 자본수익률을 앞지르면서 빈부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0년 이후 다시 상황이 역전되어 빈부격차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 격차를 줄이는 자연적인 방법은 없다. 다만 부에 대한 강력한 누진세율 등의 세제 개혁만이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결론은 부자에게 세금을 왕창 걷자! 그래도 절대로 경제가 망하지 않는다. 다만 부자의 돈이 중산층에게로 흘러갈 뿐이다.
피케티의 주장은 별로 새롭지는 않다. 피케티는 다만 방대한 통계자료를 들이밀면서 논거에 힘을 싣고 있을 뿐이다. 부자들은 감옥에 보내서도 안 되고, 세금을 올려서도 안 된다는 협박에 대해, 이래도 안 되냐고 800여 쪽의 책을 조용히(세계적으로 돌아다니며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 다소 소란스럽게) 내밀 뿐이다. 그래봤자 코웃음을 치거나 길길이 날뛰는 것이 고작인 우리의 현실이 여전히 암담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 하니까, 열심히 정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