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평점 :
숨 가쁘게 읽어온 3부까지가 표와 도표로 그려진 데이터로 가득했다면, 마지막 4부는 피케티의 사회과학적 주장이 유토피아적 꿈 위에 펼쳐져 있다. 4부를 통틀어 도표는 단 세 개뿐이다.
피케티가 방한할 무렵 여러 기사에 실린 내용 중 가장 이색적이던 것이 글로벌 자본세다. 자본세도 글로벌 자본세도 다 생소했는데, 15장을 보면 왜 이런 주장이 나왔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사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도,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누가 혹은 루이비통의 소유주 누가 세금이 적은 나라로 이민을 가네 마네 하는 소문도 익히 들어왔다. 금융세계화로 개별 국가가 부유세를 신설하거나 누진세를 강화하는 따위의 국가적 대책은 거대자본의 소유주에게는 아무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전 세계가 동시에 한꺼번에 자본의 고삐를 틀어쥐지 않는 한, 자본을 민주적으로 규제할 방법이 사실상 사라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피케티가 수많은 데이터로 보여준 19세기 식의 세습자본주의로 빠르게 회귀할 것이다.
피케티 방한 당시 JTBC 뉴스룸에 출현한 장하성 교수는 피케티의 경제이론이 한국의 현실에 맞지 않다며 비판했다. 그때 장하성은, 운 나쁘게도?, 『한국 자본주의』라는 책을 막 출판했는데, 피케티 때문에 시끌벅적하던 우리 사회는 그의 책에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여하튼 장하성은 피케티의 글로벌 자본세를 완전 비현실적인 것으로 일축했다. 그는 자기가 아니라 피케티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며, 자본세 논쟁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폄하했다.
“자본세 문제인데요. 피케티 교수가 자기 책에 자본세를 이야기한 첫 부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거는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도 이걸 채택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 그걸 논쟁을 하는지 저는 그게 오히려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건 피케티 교수 자신이 한 말입니다. 출처: 장하성 인터뷰”
그런데 장하성의 표현은 정확하지도 않고, 피케티의 의도에도 맞지 않다. 『21세기 자본』을 통틀어 피케티가 가장 힘들여 주장하는 것이 바로 글로벌 자본세의 도입이기 때문이다. 피케티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글로벌 자본세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이다. 이 세계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그와 같은 세금에 합의하는 나라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세계의 모든 자산에 적용할 수 있는 세율표를 만들고 세수를 어떻게 배분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유토피아적이기는 해도 몇 가지 점에서 유용하다. p618”
피케티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비현실성으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상으로서의 유토피아다. 그는 15장 전체에 걸쳐 이 이상에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검토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안한다.
사실 유토피아는 꿈이다. 그런데 꿈이 비현실적이라고 해서 혹은 당장에 실현할 수 없다고 해서, 꾸어서도 안 되고 논의할 가치도 없는 것인가? 유토피아에 대한 장하성의 사고는 너무나 평면적이다. 피케티가 프랑스 사람이니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혁명의 가치 역시 유토피아적이다. 인류는 한 번도 개념 그대로의 자유와 평등에 도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이상 개인의 절대적 자유는 불가능하다. 나의 무조건적 자유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 인간의 유전자가 모두 동일하지 않는 한, 평등 역시 마찬가지다. 똑 같은 조건과 똑 같은 환경이라도 인간은 저마다 다른 능력을 발휘하며, 차등적인 결과물을 가진다. 어떤 사람은 아인슈타인이 어떤 사람은 황우석이 된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고 해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어떠한 논쟁도 어떠한 노력도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근대인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이상은 여전히 충족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전 세계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 이후 약 100년 동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워왔고, 그 혁명의 이념은 아직도 멀기만 한 길을 힘겹게 걷고 있다. 그 길을 밝히고 있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적 이상,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불가능한 꿈이다. 이 꿈이 없었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피케티의 글로벌 자본세 또한 그렇다. 이 유토피아적 이상은 불평등의 해소라는 또 다른 유토피아적 꿈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등불이다. 사실 피케티는 내심 글로벌 자본세가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그렇게 실행하기 힘든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민주적인 합의만 된다면 실행 자체의 인프라는 거의 구축되어 있어 그다지 어렵지 않음을 되풀이 강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800쪽의 대작을 쓰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이 비현실적인 내용을 결론으로 제안하는 학자는 없을 것이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부연해 두자면, 그렇다고 장하성이 인터뷰에서 부유세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는 부유한 법인이든 개인이든 소득세를 철저하게 걷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유시민이 ‘노유정의 정치카페’에서 의혹(?)을 제기한 것처럼, 장하성이 『21세기 자본』을 안 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이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기본적으로 소득이 많이 발생한 개인이 됐든 법인이 됐든 거기에 대해서 과세를 하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현실성이 없다고 말한 자본세를 가지고 논쟁을 하는 게 저는 이해 안 되는 거죠.”
소득세가 아니라 자본세를 강조하는 것이 우습다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 자본』에서 가장 중요한 공식이 r > g 이다.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빠르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빈부격차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피케티가 수집한 수많은 자료들은 거의 이 공식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안정을 초래하는 주된 힘은, 민간자본의 수익률 r이 장기간에 걸쳐 소득과 생산의 성장률 g를 크게 웃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부등식은 근본적인 논리적 모순을 드러낸다. 기업가는 필연적으로 자본소득자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의 노동력밖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 대해 갈수록 더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은 한 번 형성되면 생산 증가보다 더 빠르게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우는 것이다. p690”
피케티는 노동소득의 불평등과 함께 자본소유의 불평등을 말한다. 총소득에는 노동소득과 자본소득이 포함된다. 그리고 자본수익률은 언제나 성장률 보다 높았다. 장하성이 말하는 ‘소득’이 노동소득인지 자본소득인지 혹은 이 둘을 합친 총소득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경제의 문외한이다, 또한 장하성이 이해하는 자본세가 자본소득세를 제외한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왜 소득세가 아니라 자본세를 논의하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주장을 나는 잘 모르겠다. 자본은 분명히 소득을 낳고 있는데, 그것도 어떤 노동보다 빠른 속도로 높은 소득을 낳고 있는데 말이다. ... 좀 더 공부를 하면 장하성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금으로서는 그렇다.
제 13장 21세기를 위한 사회적 국가
사회적 국가라는 말이 생소한데, 우리가 복지국가라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경찰국가처럼 정부가 치안유지, 재산권 집행 및 군대 유지 등의 기본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의료 및 교육과 연금, 실업급여, 최저소득 보장 등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이다. 국가가 사회적 지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것은 적절한 세수이다.
20세기 부유한 국가의 총 사회적 지출은 대체로 국민소득의 25~35%로 추산되는데, 19세기에 비해 증가한 세수의 대부분이 사회적 국가의 건설에 충당되었다.
특히 피케티가 중요시하는 사회적 지출은 교육과 연금이다.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은 사회적 이동성을 촉진하는데 있다.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균등한 교육 기회를 줌으로써, 타고난 계층의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복지국가의 모범으로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에서 계층 이동률이 가장 높고, 프랑스, 독일, 영국은 중간 정도이며, 미국은 계층 이동률이 가장 낮다. 우리나라도 소위 강남출신들의 SKY 입학율이 높아지고 있는데, 하버대의 경우 부모의 평균 소득이 약 45만 달러로 이 수치는 미국 상위 2%의 소득계층의 평균 소득에 해당한다. 21세기에 점차 심화되고 있는 고등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사회적 국가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연금에 대해서는 처음 알게 된 것이 있는데, 부과식 연금과 적립식 연금의 차이다. 부과식 연금은 현재의 노동자들이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연금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현재의 은퇴자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세대 간의 연대 원리에 기반 해 있다. 그런데 부과식 연금은 경제성장률이 순조로울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요즘처럼 극도로 성장률이 정체될 때는 현재의 노동자가 미래에 받게 될 실질 연금은 그들이 현재의 은퇴자에게 지급하고 있는 연금 보다 훨씬 낮아질 수 있다. 여기에 반해 적립식 연금제는 현재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연금을 적립해서 은퇴 시 받는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의 시행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한 세대의 은퇴자들이 모두 무일푼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 세대에 자신의 연금을 이미 지불했지만, 제도가 바뀌게 되면 다음 세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연금이라면 내가 부은 돈을 당연히 내가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의 연금은 부과식인지 적립식인지 궁금하다.
제 14장 누진적 소득세를 다시 생각한다
과세는 정치적이며 철학적인 문제이다. 어떤 과세 방식을 택하느냐가 모든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누진적 소득세의 도입과 발전이다. 이 제도는 지난 세기 불평등을 감소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누진세는 사유재산권과 시장 경쟁의 힘을 존중하면서도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을 억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누진적 소득세는 민주주의의 자연적 산물이 아니다. 도표 14.1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에 전격 시행된 것이다.
특히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을 생각하면, 도표 14.1과 2에 나타난 미국의 최고세율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과다소득에 대한 미국의 몰수적 과세는 미국이 점점 불평등이 극심한 유럽과 비슷해져 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반영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정반대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현재 미국은 영국과 더불어 선진국가들 중 가장 불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오마바는 재임기간 내에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40%까지 인상할 계획이지만 그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미국의 정치과정은 상위 1%에 포획되었는가? 이런 생각이 점점 더 미국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
제 15장 글로벌 자본세
21세기의 세계화된 세습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위해 피케티가 제안하고 있는 이상적인 수단은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이다.
“글로벌 자본세는 세계 경제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고, 국가 간, 그리고 국가 내에서 그 이득을 공정하게 분배하면서 경제의 개방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 해법이다. 한 세기 남짓 전에 소득세가 거부되었던 것과 똑 같이 많은 사람이 글로벌 자본세를 위험한 환상이라고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이 해법은 다른 대안들보다는 훨씬 덜 위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p618”
자본세의 목적은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을 막고, 금융과 은행 시스템에 효과적인 규제를 가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서는 민주적인 금융 투명성, 즉 누가 전 세계에서 어떠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가 유토피아적인 이상임을 밝히면서도, 단계적으로 가령 유로존 내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글로벌 자본세나 이와 비슷한 정책 수단이 없으면 세계 전체의 부 가운데 최상위 1%의 몫은 끝없이 늘어날 것이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다.
세금은 항상 세금 이상이다. 세금은 경제활동의 규준과 범주를 정하고 그에 대한 법적인 틀을 부여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율을 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개인이 자유무역과 경제통합으로 더욱 부유해지고 단지 이웃을 희생시킨 대가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도둑질이다.
제 16장 공공부채의 문제
이 장에서 피케티는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유로화와 유럽통합의 문제 등이 아직 나에게는 좀 거리가 있다. 우리나라의 세금 체계나 사회적 지출의 형태도 잘 모르고, 특히 증세의 필요성 등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러니 유럽연합은 한참 멀다.
다만 16장에서 알게 된 것은 부채가 무엇인가 하는 정도다. 부채는 세금과 더불어 정부가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공정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 부채보다 과세가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부채는 정부가 부자에게 이자를 주고 돈을 빌리는 것이다. 물론 이자는 세금으로 충당되고 원금도 상환해야 한다. 즉 돈 많은 부자들의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대부사업이다. 그런데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을 무엇 하러 오히려 세금을 이자로 물어가면서 돈을 빌려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라는 많든 적든 공공부채를 지고 있다. 부채를 줄이는 방법은 자본세, 인플레이션, 긴축이 있다. 그런데 피케티는 자본세를 최선으로, 긴축을 최악으로, 인플레이션을 자본세 다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유럽은 공공부채가 많다. 그리스 위기니 이탈리아 위기니 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개인들의 순자산은 엄청나기 때문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순자산을 합치면 지난 한 세기 동안 총자산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니 후대의 자손들에게 수치스러운 빚더미를 남겨줄 상황이니 용서를 빌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은 우습다. 유럽의 국가들은 지금처럼 부자인 적이 없었다. 다만 이 막대한 국부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 수치스러운 현실이다. 민간의 부는 공공의 빈곤을 대가로 축적되고 있는데, 이것이 야기한 안타까운 결과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공공교육에 투자한 것 보다 공공부채의 이자를 지불하는 데 더 많은 공공지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이 있지만, 이 결론은 진짜 전체 내용의 요약이므로 나는 더 이상 요약할 것이 없다. 세 차례에 걸쳐 쓴 나의 리뷰가 어설프지만 『21세기 자본』의 나름대로의 요약이기 때문이다. 두껍고 어려워 보였던 이 책이 예상외로 쉽고 흥미로웠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었다. 읽는 데는 하루 네다섯 시간씩 5일 조금 더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