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한국사나 중국사 연표는 아주 많다. 그래도 다시 그렸다. 내게 필요한 만큼만 간략하게, 기억하기 쉽도록 그렸다. 평생교육원 강좌를 듣고 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대략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함께 읽으려고 한다.

 

<상•주 - 춘추전국 - 진•한 - 위진남북조 - 수•당 - 송•원•명•청> 은 선생님이 처음부터 외우라고 한 것이다. 한국사는 중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무조건 외우는 것 보다 맥락을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나이에 막무가내 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도 없고.

 

 

 

한국사는 앞으로 하나씩 배우며 정리할 테니, 중국사 연표에 대해서 몇 가지만 짚어 보겠다. 다행히 재작년에 읽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도움이 된다.

 

역사를 배운다고 하면 일단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 뭐 이렇게 나누고 본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BC8000년) 에 시작되었고, 청동기는 언제부터일까?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4대 문명에는 모두 청동유물이 있으니 대략 BC 5000 ~ BC 2000 사이에 이들 지역에서는 청동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BC 2000, 우리나라는 BC 1500 ~ BC 1000 사이로 추정한다.

 

희랍과 중동지역에서는 철기가 이미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지역마다 편차가 매우 커서, 중국은 춘추 말에서 전국 초 (BC 5세기 경) 에 철기가 들어 왔고, 우리나라는 BC 300~ BC 400 사이로 본다.

 

새로운 유적이 발굴될 때마다 달라지는 이런 연대를 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하 ․ 은 ․ 주 와 우리나라 고조선은 대략 청동기 시대라는 것만 기억해야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혜린의 만화 《불의 검》은 우리 민족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불의 검이라는 말 자체가 불로 단단히 벼리어 낸 철검을 말한다.

 

 

왕조는 전설의 왕조 정도로 치부되다가 최근 궁전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제 왕조라는 의견이 우세해 지고 있다.

 나라는 갑골문으로 유명해서 기억하기 쉽다. (예전에는 은나라라고 했다.)

나라는 공자가 사랑한 나라다. 어릴 때 달달 외웠던(왜 이걸 외웠을까?) <요순우탕문무주공> 의 태평성대 중 주 나라를 통치한 인물이 문왕(무왕의 아버지), 무왕(주 건국), 주공(무왕의 동생)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전설적 인물이고, 우왕은 하나라, 탕왕은 은나라를 통치했다. 공자는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주나라의 정치제제가 봉건제이다. 우리가 서양 중세 시대를 봉건제로 알고 있지만, 봉건제란 말은 주나라의 통치 제도를 가리키던 것이다. 나중에 서양사를 번역하면서 봉건제란 말을 빌려 쓴 것이다. 형태는 비슷하다. 다만 주나라의 봉건제는 혈연적인 반면 서양의 봉건제는 쌍무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

주의 봉건제에는 천자가 있고, 각각의 영토는 제후들이 다스린다. 이 제후들이 형제, 사촌 기타 등등 천자의 혈연들이다. 결국 봉건제란 위로 천자를 모신 제후들이 아래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지향하는 체제이다.

 

춘추전국 시대는 주나라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100~200여개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춘추시대 (BC770~BC403)와 이 제후국들이 통합되어 7개의 군웅으로 경쟁하던 전국시대 (BC403~BC221)를 합친 기간이다. 이 시기에 도입된 철이 세상을 바꾸며, 전쟁의 규모를 키웠다. 자고로 신무기 개발은 살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춘추전국’의 대구로 보통 ‘제자백가’를 떠올린다. 춘추천국 시대는 제후들과 군웅들의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만큼 사상의 백가쟁명도 엄청났다. 춘추전국 시대의 사명은 극심한 혼란을 끝내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부국강병이며, '백가'들은 제각각 부국강병의 길을 놓고 다투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 사상가가 다름 아닌 공자이다. 공자뿐 아니라 맹자, 노자와 장자, 묵자, 한비자 등 기라성 같은 중국의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한꺼번에 출현했다. 공자는 BC 551 ~ BC 479 에 살았다. 이 무렵에는 신기하게도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의 최고의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시기다. 희랍의 소크라테스(BC 5세기)와 인도의 석가모니(BC6세기)도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이후 약 500년이 지나 예수가 탄생했고, 다시 예수 탄생  600여 년 후에 이슬람교가 창시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 체제는 주나라의 봉건제다. 공자의 仁은 곧 克己復禮 인데, 이 때 禮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절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제도 전반을 의미한다. 공자가 돌아가고자 한 제도가 곧 주나라의 주공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 체제이다. 춘추전국의 혼란 속에 공자는 옛 태평성대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나라는 진시황과 만리장성, 분서갱유로 대변된다. BC221년 진시황이 군웅할거를 끝장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진시황과 함께 승리한 사상은 한비자의 법가였다. 법가 이외의 제자백가 특히 유가의 것들은 사람이든 책이든 산채로 파묻고 불태워 버렸다. '법대로!'를 외치던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을 불러왔고,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의 통치는 비록 짧았으나,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쌓아 둔 성을 연결하여 완성한 만리장성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중국을 China라 부르는 것도 진 Chin에서 비롯되었다.

 

나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자, 한문, 한족 등의 漢이 BC202년에 세워진 한나라의 漢이기 때문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다면, 한은 문화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공자의 유가사상을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아 공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 것도 한나라다. 그러나 한나라 자체는 한무제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다. 한무제는 비단길을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무제의 명령으로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대월지를 찾아나선 장건이 대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으로 가는 사막길(비단길)을 개척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BC 2세기 무렵 고조선은(위만조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조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무제는 5만 대군을 보냈다. 고조선은 1년간의 치열한 항쟁 끝에,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군현을 설치했으나, 조선의 유민들은 고구려와 부여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한족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한사군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고구려의 미천왕 시기로, 313~314년 이다. 약 400여 년간 한반도의 중심부를 중국이 통치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는 우리가 잘 아는 위․ 촉․ 오 삼국시대의 그 위 나라다. AD220, 221, 222년에 나란히 위, 촉, 오가 세워졌다. 삼국지가 하도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보다 더 잘 알려졌으니 보탤 것은 없다. 그러나 조조의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조조 아래에 있던 사마 가문이 권력을 접수하여 나라를 세우고 280년에 삼국을 통일했다. 열매를 딴 것은 조씨가 아니라 사마씨 였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중국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나라의 불안한 정세를 틈타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온 것은 사막과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었다. 진시황의 진(사마씨의 진과는 달라유~)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북방 유목민족 때문이었다. 한나라 때에는 흉노족들이 부족을 통합하여 흉노제국을 건설하고 400년간 한나라와 충돌을 거듭했다.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훈족도 흉노족을 가리킨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중국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표이다. 우리 역사에도 심심찮게 출몰하는 이름들이 보인다. 몽골제국(원나라)과 여진족의 청나라는 북방 유목민이 아예 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북조로 돌아가 보자. 간단히 말하면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온 유목민족들이 중국의 화북 지방을 차지하여 다투어 나라를 세우고(북조), 한편으로 한족은 강남으로 쫓겨나서 여러 왕조를(남조) 갈아치운 시기다.  이 시기는 춘추전국 시대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혼란기이자, 중국 최초의 호·한 융합기이다. 북쪽은 오랑캐인 유목민이, 남쪽은 한족이 차지한 채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제갈공명이 이름을 휘날리던 삼국시대부터 수나라가 중국 땅을 다시 통일할 때까지 360여 년간의 혼란기를 퉁쳐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남북에서는 여러 왕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꼴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자기들 살기도 바빠 우리나라와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다. 물론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로서 이런저런 침략을 겪기는 했다. 그럼에도 남북조의 혼란기는 고구려가 재빠르게 동북아시아의 주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수와 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다가오는 7세기는 동아시아의 격동의 시대를 예고했다.

 

나라는 589년에 다시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에 의해 유목민인 호족과 농경민인 한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호•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되었다. 수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농민 봉기가 이어지자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단명한 왕조이지만 수나라가 중국 역사에 가지는 의의는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과거제 등을 확립하여 당나라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처음 실시된 과거제가 이미 수나라 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나라는 618년에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북방 유목민의 세계를 아우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위협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나라의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알다시피 신라의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어진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물리치고 676년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옛 고구려의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다행히 빼앗긴 고구려의 땅은 698년 대조영이 세운 발해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한반도는 발해와 신라라는 두 국가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8세기 후반에는 당 • 발해 • 신라가 상호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당나라는 문화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현종 말년부터 쇠퇴에 접어든다. 양귀비로 인해 시작되는 쇠락은 절도사라는 무인세력들에 의해 가속화된다.  당나라는 907년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약 70년간 절도사 세력들이 패권을 다투는 5대10국의 혼란기가 이어진다.

 

나라는 960년에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실은 반쪽짜리에 가까왔다. 당나라가 무인세력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본 송나라는 처음부터 무인을 배격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이때 등장한 집권 세력이 바로 사대부이다. 어떤 강사의 표현에 의하면 돈많고 힘은 없는 글방 도령의 이미지. 힘깨나 쓰는 놈들한테 얻어 터지고 뺏기기 딱 좋은 상황인데, 실제로 송나라의 역사가 그랬다. 강성한 북방민족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공납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첫 상대는 거란족, 그리고 뒤이어 여진족, 마지막으로는 몽골족이다.

 

중국 땅의 일부를 차지한 거란족이 916년 거란국(요나라)을 세워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이 거란이 바로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빌미로 고려에 쳐들어왔다가 강감찬과 귀주에서 맞붙은 그 거란이다. 까불다가 못생긴 강감찬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이 어릴 때 읽은 책에 나왔더랬다.

 

거란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손을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적이 제거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동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 금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송나라는 강남으로 도망가 남송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가 송나라로 부르는 이 시기는 실제로는 송과 요, 이어서 송과 금이 중국의 남북에서 대립한 시기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바람처럼 등장한 몽골의 칭기즈 칸에 의해 한방에 날아갔다.

 

제국은 1271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세워졌다.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다. 1206년에 칸으로 추대된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싹 쓸어 대제국을 건설했다. 다만 서유럽 일부를 눈앞에 두고 오고타이 칸(2대 칸으로 징키즈 칸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서유럽은 가까스로 대재앙에서 벗어났다. 1231년 몽골이 고려에 1차 침입하여 우리나라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별초, 팔만대장경, 충자 돌림 고려국왕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많이도 보태줬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양아치의 '치'에는 다루가치의 '치'라는 역사가 새겨져 있다. 치는 몽골어로 사람을 뜻한다.

 

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되었다. 원 • 명 교체기는 여•말 선초와 겹치면서 우리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정도전> 에도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치열하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 세력은 친명파였는데, 조선 건국 후 주원장은 정도전을 엄청 미워한다. 정도전도 주원장이 죽은 어수선한 틈을 타 요동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우리민족은 요동회복의 꿈을 잃어버렸다.

 

중국 땅에 다시 한족 국가를 세운 주원장은 한 •당 • 송과 같은 이전 한족 왕조의 유교 전통을 되살렸다. 조선도 유교 이념에 따라 명나라와 조공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의 전제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사대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 실리 외교"라고 평가 받는다. 이와 달리 조선 중기의 사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적 의미의 그 사대이다.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중기의 사대는 "사대란 중화의 나라 명을 정성으로 받는 것." "효와 같고 어쩌면 무조건적인 신앙과도 같은 것" 이다.

 

중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금성!, 베이징에 자금성을 세운 것이 바로 명의 영락제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후 재정적 압박이 심해진데다 내분에 시달리다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나라는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후금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청은 1644년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다. 명 • 청 교체기는 조선 땅에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을 몰고 왔다. 명을 치기 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호란을 막기 위해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펴다가 쫓겨났고, 서인 반정세력의 배금친명 정책으로 조선의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치욕을 당했으며, 이후 북벌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노론의 강력한 집권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도 병자호란이다.

 

오랑캐라고 무시당했던 여진족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던 말갈족이다. 이들은 청대에 들어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강희제,옹정제,건륭제는 그 어느 왕조보다 훌륭한 통치를 이룩해냈다. 현재 중국 대륙의 지도를 완성한 것도 청대의 업적이다. 티베트, 신장, 몽골 등이 이때 중국에 편입되었다.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와 비슷하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는 서양 열강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신세... 그러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고... 물론 우리처럼 완전한 식민지를 겪지는 않았지만, 반식민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화민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수립되었다.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쑨원이 군벌인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을 물려주면서, 중국의 미래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배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위안스카이는 민중과 민족을 배반했고, 중국은 군벌 세력과 반군벌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에 더하여 반군벌 세력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민당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으로 쪼개져 대립하였다.

 

군벌세력과 제국주의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두 차례에 걸쳐 국공합작을 하였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1차 국공내전을, 2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2차 국공내전을  치루었고,  최종 승자는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이 되었다. 1949년 마침내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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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5-07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말리님~
[빨래하는 페미니즘] 리뷰 따라왔다가 방문해서 처음인줄 알았더니,
[금요일엔 돌아오렴]이랑 세월호 관련 책을 님의 방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네요.

이렇게 멋진 리뷰라니요~
저, 이거 출력해서 사용해도 되나요?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딸이랑 아들에게만 보여줄께요.

좋은 리뷰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말리 2015-05-07 11:10   좋아요 1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하고요.
도움이 되신다면 얼마든지 사용하셔도 됩니다.
격려해 주셔서 외려 고맙습니다. ^^

희맨 2019-01-02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리장성에 대한 역사를 궁금해 하던중 이곳까지 오게되어 님의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간략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어 좋았습니다. 사실 이것도 좀 길다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암튼 감사합니다.

빛나 2019-07-0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리은 2020-04-02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정말 정리 잘되서 쏙쏙들어왔어요:)
감사합니다~

강희맘 2020-04-0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멋진 자료입니다.
저도 우리 딸과 친구들이랑 세계사 책을 읽고 있는데 참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진우 2020-06-0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학생들과 수업하는데 이용해도 될까요?

말리 2020-06-07 16:04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쓴지 오래된 글이라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연표의 경우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연대가 다르기도 하고요. 기준을 건국으로 삼느냐 통일로 삼느냐에 따라 좀 갸우뚱 하시는 부분도 있으실 거예요. 연표는 제가 최근에 사용하는 것으로 수정해서 올려놓겠습니다. 참고가 되신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전북역사 2021-03-09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학생들에게 참고용으로 나눠줄 연표를 찾다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자료를 혹시 수업하는데에 사용해도 될까요?

말리 2021-03-1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도움이 되신다면 얼마든지요.
 

어제 저희 독서회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었습니다.

8명이 참석해서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자유 토론을 했습니다.

처음엔 이 책을 제안하기가 조금 부담스러웠는데,

티슈가 많이 필요했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지만,

참 잘한 것 같습니다.

 

 

 

온갖 이야기가 다 나왔습니다.

책뿐 아니라 추적 60분의 <세월호 실종자 가족, 멈춰버린 1년>,

뉴스타파의 <목격자들> 을 본 소감부터

국회에서 열려했던 <4월의 어느 멋진 날에> 콘서트까지

대한민국의 오늘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만큼 세월호 참사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4.16은 불의의 교통사고도, 불운한 사고도, 일탈적 사고도 아닙니다.

세월호를 이야기하다 보면 이 나라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무엇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는 이 비정상의 나라.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했던 '비정상의 정상화'란 구호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생각'하겠다는 선언은 아니었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반성도 많았습니다.

아침에 세월호 이야기하고 돌아서서 벚꽃놀이 다녀왔다는 고백,

하냥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미안함,

몇 년째 흔들어 보지도 않고 구석탱이에 감춰놓은 소화기,

어느새 경쟁을 부추기는 학부모로 되돌아 가 버렸다는 고백까지.

 

우리가 이렇게 제 앞가림만 하고 살지만

적어도 세월호 유족들이 당당히 투쟁할 수 있도록

온갖 왜곡과 조롱만은 막아주고 싶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기사들 많이 클릭해주고,

좋아요도 눌러주고,

댓글도 달아주고,

키보드 전사로 싸우기도 하고. 

책도 많이 사서 보고,

주위에 사보라고 권유도 하고. 

 

책들을 모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런 모임을 했다고

카톡과 트윗, 카스, 페이스북, 블로그 가리지 않고

자랑질 하기로 했습니다.

겨우 이런 걸로 생색내냐는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지만

철판깔고 소문내기로 했습니다.

한 친구라도, 한 이웃이라도 더,

책을 읽고, 이야기 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런 부끄러움 쯤은 참기로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유족 간담회도 준비해 보기로 했습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보면

유족들이 전국 곳곳으로 간담회를 하며 다니십니다.

자리만 마련되면 기꺼이 함께 하시는 듯 합니다.

유족들에게는 연대의 힘이되고

저희들에게는 반성과 다짐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립도서관에 요청해 보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안된다면 저희 독서회 차원에서라도 추진해 볼까 합니다.

 1주기가 지나 사람들의 관심이 잦아들지도 모를 하반기쯤

해보자고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물론 유족분들의 의사를 먼저 정중히 여쭈어보아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미리 광고를 합니다.

조그만 도시 평범한 중년들도 세월호를 잊지 않았다고

그렇게 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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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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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다. 1주기에 맞춰 준비된 책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모양새인데 어차피 다 읽기는 힘들다 생각했다.

 

 

열쇠고리. 늘 가까이에 둘 테니 잊지 않을 것 같았다. 세월호 관련 책을 사면 보내준다는 말에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골랐다. 이 책은 알라디너이기도 한 진태원-balmas님의 글에서 알게 되었다. 여는 글이 홍세화의 것이라는 점도 믿음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 몇 권으로 나불대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홍세화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가 염치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기 버거워 차라리 침묵할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만이 마구 떠들어댐으로써 세상에 표현되는 언설들이 온통 그런 것들로 뒤덮인다면! p6”

 

이 책에 글을 실은 13명의 인문학자들을 대변한 마음이겠지만, 독자의 마음 역시 그러하다. 단지 읽고, 읽었다고 광고하고,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것이 세상의 더러운 말을 뒤덮을 수만 있다면, 염치를 무릅쓰고 뻔뻔하고 싶다. 지하철을 탄 세상 사람들의 손마다 세월호 책 한권씩이 들려 있다면, 누구도 섣불리 세월호를 왜곡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글의 질은 고르지 않은 것 같다. 넘치는 감정만 쏟아 놓은 글도 있고, 인문학의 기록이라 하기에는 알맹이가 영글어 뵈지 않은 글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세월호에 관해 지금 해야 할 물음은 거의 다 하지 않았나 싶다. 세월호는 왜? 에서 시작해서 왜? 로 끝난다고 한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했다. 법적, 정치적 책임을 위해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들은(공인되어야 할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누가 책임을 져야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다. 단지 책임져야 할 주체가 책임을 거부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주체가 그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뿐이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스펙트럼이 넓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민영화, 공적 연대의 파괴 등 구조적 문제부터 무능과 부패, 이기주의 등 조직 구성원의 문제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 안에 있다. 세월호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의 무한 질주가 낳은 최악의 참사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과 인문학적 해석은 반복되어야 한다. 침묵과 망각 속에 빠르게 퍼져가는 것은 오해와 거짓들뿐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기도 벅찬 유족들이 오해를 해명하느라 진을 빼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수치다. 세세한 사실 하나에서부터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구조적 문제까지 남김없이 기록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들’이 더 이상 떠들어대지 못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특히 주의 깊게 읽은 글은 두 개다. 진태원의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 김동춘의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을 통해 진태원은 국가와 주체에 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주체성이 부재한다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종의 검은 구멍이라는 것이 아닐까? p144”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장 경악했던 것은 국가가 너무도 무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유가족들이 피울음을 쏟으며 구조작업을 안한다고 외칠 때도 나는 설마 설마 했다. 그 다급한 마음에야 못 미치겠지만, 설마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과정은 국가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단단한 고갱이를 상상했던 그곳은 커다란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은 전능한 것으로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지극히 무능력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p145”

 

게다가 국가는 구조할 생각이나 의지도 없어 보였고, 지금까지 사건에 대해 책임질 의지도 없다. 국가는 우리 편이 아닌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 고통과 분노를 촉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 분노의 원천이었을 터이다. p147”

 

국가가 구멍, 공백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성격이다.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르케 없는 것이다. p150” 아르케는 만물의 근원, 혹은 토대, 그리고 지배나 통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p150”

 

근대 민주주의에 자연적 토대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론적 공백, 즉 검은 구멍 위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위 이외에는 어떤 기초도 지니지 않는다. 주체적 행위가 없을 때 국가는 다만 치안기계일 뿐이다. 국가의 유일한 관심사는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월호에 대한 정부 여당의 무관심은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는 포섭과 배제라는 이중 작용을 수행한다. 그들과 우리를 나눈다. 배제의 대상이 되는 우리를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 (part of no part)이라 부른다. 그런데 몫 없는 이들의 대응방식도 이중적이다. 배제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포섭의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애쓴다. “국가가 그들의 편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내가 그들에 속하는 길이다. 실제로, 즉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에 속할 수 없다면, 상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그들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 p149” 몫 없는 이들은 저항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저항에 가장 소극적인 과소주체이기도 하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를 어떻게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로 혹은 정치 공동체로 다시 구성할 것인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가족들이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체화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주체화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세월호는 묻고 있다. 너희가 욕망하는 나라는 무엇인가?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는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의 연관성 아래 읽을 수 있다.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국가는 곧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와 같다. 국가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즉 그들의 나라를 위해 전 국민적 동감을 허물고 유가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왔다. 정작 세월호를 정치화한 것은 소위 불순세력이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세월호,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의 시금석>을 쓴 허경의 말처럼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농담 또는 무지에 불과하다. p287”

 

불행히도 국가의 감정정치에 홍위병을 자처한 것은 고령층과 청년층, 우리 사회의 대표적 몫 없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불안감을 해소하는 과소주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 견주어 세월호 유족들이 과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감을 분노와 혐오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p187”

 

저학력 고연령층이나 일베로 대표되는 청년 신세대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집단적으로 맞서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화되었고 사회적 연대는 해체되고 있다. 분노의 감정은 팽배하지만 동감을 기반으로 한 주체화 세력이 되지 못한다. 국가는 이들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도록 언론을 이용한 선동 정치를 감행하고 있다. 유가족이 요구한 적이 없는 특혜 루머를 퍼뜨려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무임승차자’ 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2014년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특권층’으로 둔갑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p187”

 

  

 

 

 

‘특권층’ 유족들은 어제도 찬 바닥을 기며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어느 유가족의 말처럼 이제는 잃을 자식도 없는 유족들이 아니라, 알토란같은 새끼들을 품고 있는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 주체화란 이들과의 공감과 연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Save our s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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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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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읽은 《강철은 어떻게 단련 되었는가》가 생각났다. 제목만 생각난다. 내용은 다 잊어버렸고, 진짜 읽기는 했나 싶을 만큼 기억도 희미하지만, 제목만은 뚜렷하게 남아있다. 고리키의 《어머니》와 더불어.

 

『금요일엔 돌아오렴』

그저 안타깝게 울며 읽어야 할 줄 알았다. 진짜 꺼이꺼이 울며 읽었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투사로, 단련 되는가를 읽을 수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왜 정부의 ‘보상’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가 절절히 느껴졌다.

 

 

사이가 좋지 않다가 헤어진 게 제일 가슴 아프고 안타깝다는 이창현 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부터 정부에서 우리를 정직하게 대해줬으면 안 그랬을 거야. 사고였는데 최선을 다해서 구했는데 못 구했다 그러면 우리도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하다못해 교통사고가 나더라도 그 원인을 밝히는데 이건 304명이 죽은 대형 사고잖아요. 처음부터 투사가 되어 이걸 밝히고 말거야 라는 생각으로 뛰어든 부모, 한 명도 없어요. 그렇게 정부가 우리를 끌고 온 거지요. 너무 얕본 거지, 우리를.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가족들을 몰아붙일지는 정말 몰랐어요. 우리는 국민도 아닌 것 같아요. 대통령이 국회에 연설하러 왔을 때는 거의 경악 수준이었어요. 엄마들이 새벽같이 올라가서 대통령 눈 길 한번 사로잡으려고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데 눈길 한번 안 주더라고. 그러면서 웃으면서 지나가더라고. 그게 사람인지요. 정말 그럴 줄은 몰랐는데 ..... 대통령이 그러니 그 밑에 사람들은 어떨까 싶고. p157」

 

4.16TV(세월호 유가족 방송)에서 활동하는 문지성 학생의 아버지 문종택씨의 이야기는 사고 당시의 대처 상황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진상규명을 위해 찾아다닌 주위 섬들의 어부들은 하나같이 격분했다.

 

「내가 섬에 내려갔을 때 선주들이 나를 보자마자 하는 첫마디가 “해경 개새끼, 죽일 놈의 새끼들. 저 새끼들이 안 구했어” 였어요. 나보다 성이 더 나갖고 ‘살릴 수 있었는데 안 살렸다’ 고 욕을 하는 거죠.

섬에 있는 동생 옥령이가 그래요. “형님, 나 정말 힘듭니다.” 선원들 중에는 학생들이 유리창을 손톱으로 긁어대고 얼굴을 유리에 대고 숨을 거둬가는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섬에도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예요. “형님, 저희 선원들은 그 세월호 선원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선주는 배가 생명입니다, 우리는 4톤짜리 고깃배도 안 버립니다.” p179~80」

 

옥령이는 지성이를 건져 올린 동거차도의 어부다. 그 인연으로 문종택씨와 형님, 동생 사이가 되었다. 정부의 무능함에 신물이 난 문종택씨는 배에 대한 사고에 한해서는 세월호 유가족만큼 전문가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도 익히 보았듯이 사고 직후부터 시신수습과정까지 거의 대부분이 유가족의 제안과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지어 사고 원인 규명과 안전 대책까지도 유가족이 나서서 투쟁하고 있다. 누가 국민이고 누가 정부인가?

 

문종택씨는 세월호는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해서 ‘왜’라는 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그 무수한 ‘왜’ 에 대해 아직까지 아무런 해답이 없다.

 

「저희 유가족들은 지금 세월호를 두 번 타고 있습니다. 그런 유가족들에게 국민이고 정치인이고 언론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컨테이너를 얹고, 쇳덩어리를 얹고, 쌀가마니를 얹어요. 선원들보다 해경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어요.

.......

상황이 자꾸 안 좋아지니까 지성이한테 제일 미안합니다. 저는 수사권, 기소권 달라고 목매달지 않았어요. 전 생각이 좀 달라요. 저희에게 기소권까지 다 줘도 진상규명은 안 된다고 봐요. 이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는, 대통령이 ‘본인 스스로까지 조사해서 문제가 생기면 이 정권을 내놓겠다’ 는 이야기를 하면 진상규명이 되겠지만, 대통령이 이처럼 성역 없이 수사하라고 해도, 국회의원이 세월호 특별법 100퍼센트 인정해줘 갖고 제가 모든 것을 요구하는 자료를 싹 다 내놓고 묻는 말에 그대로 대답했다고 하더라도 안 밝혀집니다, 왜냐? 정권이, 이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는 순간 이 정권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밝힐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가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겁니다. 다음 세대들에게 자료를 남겨주려면 우리가 할 일은 최대한 밝혀야 하는 거죠. 알다시피 우리 부모들이 국정원이잖아요. 우리가 국정원이고 조사원이고, 우리처럼 열심히 일하는 국정원이 어디 있겠어요. p187~8 」

 

유가족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하고 단단하다. 강철처럼 단련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 세대에 밝힐 수 없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질 아니 밝혀야 할 진실을 위해 자료를 모으고 기록을 남긴다. 쉬 낙관하지도 않고 쉬 절망하지도 않는 단단함을 품기까지 쏟아낸 눈물은 얼마였을까.

 

김다영 학생의 아버지 김동현씨의 삶은 30년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87년 6월 항쟁의 그 거리에서 그는 세상이 완전히 바뀔 줄 알았다. 88년 졸업 후 안산의 철강회사에 들어가 결혼하고 아이 셋을 낳고 살았다. 세상의 모순은 잊고 애들 키우며 빠듯이 먹고 살았다. 1997년 IMF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고, 2009년 제2 금융위기 때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리고 딸이 희생당했다. 이 사회는 소신을 지키며 살기도, 먹고 살기도, 가족을 지키며 살기도 힘들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우리 현대사의 급류에 휩쓸려왔고, 그 끝에서 참사의 당사자가 되어 이렇게 길거리에 앉아 있어요. 87년 6월 항쟁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때하고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이렇게 변한 게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오히려 더 나빠진 것 같아요. 사회의 모순은 고착되고 견고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허울만 좋은 민주주의에 국민들이 완전히 속았어요. 참담하죠. 내 딸을 잃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우리가 꼭 진실을 밝힐 거예요. 이 문제를 지금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후에 나 같은 사람이 또 가족을 잃고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겠어요? p310~1」

 

우리 또래는 다 그렇다. 87년 민주화로 다 된 줄 알았다. 민주가 그때는 자유인 줄 알았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민낯을 상상하지 못했다. 평등 없는 자유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걸 몰랐다. 계층의 고착화는 밀림의 서열과 같다. 날카로운 이빨 대신 돈이 그것을 가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세월호 증개축과 과적, 고박불량, 선원, 심지어는 해경과 언딘까지도 철저히 돈의 논리에 따랐다. 세월호 인양을 두고도 돈이 핵심으로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 다른 것처럼 유가족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참사와 마주하고 있다. 강철처럼 단단해진 투사도 있고, 아직 아이의 이름도 입 밖에 내기 힘든 부모도 있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안산을 떠난 분도 있고, 아이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보존하며 오래 기억하기 위해 100살까지 살 것을 다짐하는 분도 있다. 그러나 그 슬픔과 분노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문상을 가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는 너무 의례적이어서 아무 말도 아닌 것 같고, 가만히 두어도 울음이 터질 텐데 얼마나 슬프냐고 울음을 재촉할 수도 없고, 피붙이의 죽음을 눈앞에 둔 이에게 그깟 건강을 챙기라는 말도 터무니없어 보이고, 차라리 눈을 피하고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하물며 세월호 희생자의 가족을 대면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그런데 딸의 시신을 찾고도 다시 진도로 돌아가 실종자의 가족 곁을 지키던 임세희 학생의 아버지 임종호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냥 옆에 있는 거지.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등 두드려드리고 같이 밥 먹고 옆에서 자고 또 담배 같이 피우고 그렇게. p264”

 

뭔가를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들을 기억하고, 분노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나는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었다. 열세명의 아이들의 이야기는 304명 희생자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인 희생자들도 아이들과 같은 꿈과 삶과 가족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김건우’란 이름만은 잊지 않도록 되새기고 또 되새기기로 했다.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씨는 치매가 걸려 모든 것을 잊어도 건우만은 기억할 것이라 말한다.

 

「저는 앞으로 오래 살려구요. 오래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 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도 있을 텐데 나는 오래 버텨야 되겠는데 ....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그랬어요. “건우 아빠, 나는 아흔 살 백 살까지 살 거야. 내가 건우를 혼자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라 했더니 “아흔 살? 너무 많지 않아”라고 해요. 그래도 나는 그때까지 살 거라고 했어요. p42」

 

 

김건우.

건우 엄마처럼 나도 김건우란 이름을 오래 오래 기억하려 한다. 김건우는 세월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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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4-1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가 있을까 해서 들어왔다가 읽고 갑니다. 이렇게 읽으셨군요. 고맙게 리뷰 읽고 갑니다.

말리 2015-04-14 13:54   좋아요 0 | URL
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오늘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가졌습니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 - 명작을 모방한 명작들의 이야기
카롤린 라로슈 지음, 김성희 옮김, 김진희 감수 / 윌컴퍼니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주인을 잘못 찾았다. 아까운 책이다. 유명한 그림들이 가득한 두꺼운 책이 내게 와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다.

 

나는 음치다. 그건 도래미파솔라시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간다면 지독한 근시에 비유해볼까. 시각측정선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거기에 어떤 아름다운 도형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음악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미술에도 비슷한 감각저하 현상을 보인다. 색도 선도 뚜렷하게 보이지만, 그것들이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지에는 지극히 둔감하다. 우뇌에 문제가 있는 걸까? ‘스탕달 증후군’ 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은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 심하면 환각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한국어 위키백과)

 

그림을 보며 픽픽 쓰러질 만큼 감동을 받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다. 도대체 그림에서 무얼 보는걸까? 그에 비하면 나는 눈이 먼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다. 그러니 이 책에는 잘못이 없다. 보여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베꼈을까?』는 그림 이야기다. 보통 세 작품을 하나로 묶어 '혈연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아버지를 베끼고, 자식은 나를 베낀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아버지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이고 아들은 앤디 워홀의 <최후의 만찬>이다. 아들이 심하게 엇나간 것이 아닌가 싶지만, 500년 만의 아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 책은 500여년 서구미술사의 가족 찾기 프로젝트다. 이렇게 찾은 가족이... 헤아려 보니 마흔여섯 가족이다. 걔 중에는 대가족도 가끔 있다. 후손이 번창한데는 뭔가 이유가 있겠다만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을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배웠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 가족들은 그대로 미술사의 다양한 유파를 보여준다.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그 그림들에 이야기가 붙었다면 아무리 나 같은 미치(?)라도 조금 안목이 나아지지 않았을까? 아니라도 최소한 외우기는 쉬웠겠다. ;;

 

많은 그림들을 다루다 보니, 그렇게 깊이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모나리자 훔치기》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나 철학적 해석은 없다. 미술관에서 해설사로부터 해박한 설명을 듣는 느낌? .... 이런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야겠다. 다시 말하건대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번 달의 책은 두 권이 모두 그렇다. 짧은 리뷰가 게으름을 부린 것처럼 찜찜하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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