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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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려던 것은 아니었다. 1주기에 맞춰 준비된 책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모양새인데 어차피 다 읽기는 힘들다 생각했다.

 

 

열쇠고리. 늘 가까이에 둘 테니 잊지 않을 것 같았다. 세월호 관련 책을 사면 보내준다는 말에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골랐다. 이 책은 알라디너이기도 한 진태원-balmas님의 글에서 알게 되었다. 여는 글이 홍세화의 것이라는 점도 믿음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책 몇 권으로 나불대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홍세화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남은 자가 염치 때문에 무슨 말이든 하기 버거워 차라리 침묵할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만이 마구 떠들어댐으로써 세상에 표현되는 언설들이 온통 그런 것들로 뒤덮인다면! p6”

 

이 책에 글을 실은 13명의 인문학자들을 대변한 마음이겠지만, 독자의 마음 역시 그러하다. 단지 읽고, 읽었다고 광고하고,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뿐이지만, 이것이 세상의 더러운 말을 뒤덮을 수만 있다면, 염치를 무릅쓰고 뻔뻔하고 싶다. 지하철을 탄 세상 사람들의 손마다 세월호 책 한권씩이 들려 있다면, 누구도 섣불리 세월호를 왜곡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글의 질은 고르지 않은 것 같다. 넘치는 감정만 쏟아 놓은 글도 있고, 인문학의 기록이라 하기에는 알맹이가 영글어 뵈지 않은 글도 있다. 어떻게 보면 세월호에 관해 지금 해야 할 물음은 거의 다 하지 않았나 싶다. 세월호는 왜? 에서 시작해서 왜? 로 끝난다고 한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아직도 그 답을 얻지 못했다. 법적, 정치적 책임을 위해 명확히 밝혀져야 할 것들은(공인되어야 할 것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인문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누가 책임을 져야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있다. 단지 책임져야 할 주체가 책임을 거부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주체가 그 힘을 갖고 있지 못할 뿐이다.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 스펙트럼이 넓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민영화, 공적 연대의 파괴 등 구조적 문제부터 무능과 부패, 이기주의 등 조직 구성원의 문제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맥락 안에 있다. 세월호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의 무한 질주가 낳은 최악의 참사다.

 

그럼에도 사건의 진실과 인문학적 해석은 반복되어야 한다. 침묵과 망각 속에 빠르게 퍼져가는 것은 오해와 거짓들뿐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밝히기도 벅찬 유족들이 오해를 해명하느라 진을 빼는 모습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수치다. 세세한 사실 하나에서부터 우리를 여기까지 몰아붙인 구조적 문제까지 남김없이 기록하고 바로 세워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력들’이 더 이상 떠들어대지 못할 때까지 반복해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특히 주의 깊게 읽은 글은 두 개다. 진태원의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 김동춘의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다.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을 통해 진태원은 국가와 주체에 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이 드러낸 것,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주체성이 부재한다는 것,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일종의 검은 구멍이라는 것이 아닐까? p144”

 

세월호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장 경악했던 것은 국가가 너무도 무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유가족들이 피울음을 쏟으며 구조작업을 안한다고 외칠 때도 나는 설마 설마 했다. 그 다급한 마음에야 못 미치겠지만, 설마 국가가 손을 놓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사건의 전개과정은 국가의 무능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단단한 고갱이를 상상했던 그곳은 커다란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은 전능한 것으로 믿었던 국가가 사실은 지극히 무능력한 어떤 것이라는 사실이다. p145”

 

게다가 국가는 구조할 생각이나 의지도 없어 보였고, 지금까지 사건에 대해 책임질 의지도 없다. 국가는 우리 편이 아닌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 단순한 연민이나 동정을 넘어 고통과 분노를 촉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한 우리를 위한 국가는 없다.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 분노의 원천이었을 터이다. p147”

 

국가가 구멍, 공백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성격이다. “민주주의 정체로서의 근대 국민국가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르케 없는 것이다. p150” 아르케는 만물의 근원, 혹은 토대, 그리고 지배나 통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민주주의가 아르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에는 지배나 통치를 정당화하는 자연적이거나 객관적인 원리 또는 토대가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랑시에르 자신은 이를 민주주의는 ‘아무나’의 정치이며, 정치적인 참여에는 아무런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p150”

 

근대 민주주의에 자연적 토대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론적 공백, 즉 검은 구멍 위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위 이외에는 어떤 기초도 지니지 않는다. 주체적 행위가 없을 때 국가는 다만 치안기계일 뿐이다. 국가의 유일한 관심사는 치안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세월호에 대한 정부 여당의 무관심은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는 포섭과 배제라는 이중 작용을 수행한다. 그들과 우리를 나눈다. 배제의 대상이 되는 우리를 랑시에르는 ‘몫 없는 이들’ (part of no part)이라 부른다. 그런데 몫 없는 이들의 대응방식도 이중적이다. 배제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포섭의 대상에 포함되기 위해 애쓴다. “국가가 그들의 편이라면, 그리고 우리는 국가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렵다면, 내가,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내가 그들에 속하는 길이다. 실제로, 즉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들에 속할 수 없다면, 상상적인 방식으로라도 그들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 p149” 몫 없는 이들은 저항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저항에 가장 소극적인 과소주체이기도 하다.

 

치안기계로서의 국가를 어떻게 주체적인 것으로서의 국가로 혹은 정치 공동체로 다시 구성할 것인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가족들이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주체화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주체화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세월호는 묻고 있다. 너희가 욕망하는 나라는 무엇인가?

 

  

 

 

 

<국가부재와 감정정치>는 <세월호라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의 연관성 아래 읽을 수 있다. 부재하는 것으로서의 국가는 곧 치안기계로서의 국가와 같다. 국가는 치안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즉 그들의 나라를 위해 전 국민적 동감을 허물고 유가족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왔다. 정작 세월호를 정치화한 것은 소위 불순세력이 아니라 국가 자체였다. <세월호, 새로운 민주주의 담론의 시금석>을 쓴 허경의 말처럼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나누는 행위 이상의 정치적 행위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와 무관한’ 이른바 ‘순수한’ 영역이란 현대 정치학과 철학에서 농담 또는 무지에 불과하다. p287”

 

불행히도 국가의 감정정치에 홍위병을 자처한 것은 고령층과 청년층, 우리 사회의 대표적 몫 없는 자들이다. 그들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불안감을 해소하는 과소주체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불행에 견주어 세월호 유족들이 과도한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동감을 분노와 혐오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p187”

 

저학력 고연령층이나 일베로 대표되는 청년 신세대들의 공통점은 권력에 집단적으로 맞서본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면서 모든 책임은 개인화되었고 사회적 연대는 해체되고 있다. 분노의 감정은 팽배하지만 동감을 기반으로 한 주체화 세력이 되지 못한다. 국가는 이들의 분노가 피해자를 향하도록 언론을 이용한 선동 정치를 감행하고 있다. 유가족이 요구한 적이 없는 특혜 루머를 퍼뜨려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무임승차자’ 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게 2014년 한국에서 가장 비극적인 존재가 ‘특권층’으로 둔갑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p187”

 

  

 

 

 

‘특권층’ 유족들은 어제도 찬 바닥을 기며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어느 유가족의 말처럼 이제는 잃을 자식도 없는 유족들이 아니라, 알토란같은 새끼들을 품고 있는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을 그들이 하고 있다. 주체화란 이들과의 공감과 연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Save our sou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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