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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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제목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책이다. 남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여자들은 대개 “아, 진짜!!” 라고 할 것 같다.

 

이 책은 레베카 솔닛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쓴 9편의 에세이(칼럼?)를 모아 놓은 책이다. 개개로 쓴 글들을 모아 엮은 책들이 대개 그렇듯 체계적이고 일관된 깊이를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랜 연구와 현장 활동을 바탕으로 그때그때의 이슈를 재빠르게 논제화하는 능력은 탁월해 보인다. 가장 흥미로웠던 글은 세 번째 글인 전 IMF 총재 스뜨로스깐의 성폭행을 분석한 것과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글인 여성발화와 여성 문제의 명명(命名)에 관한 것이었다.

 

 

IMF 총재가 뉴욕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여직원을 성폭행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2011년의 일이지만 욕실에서 벌거벗고 나온 어쩌고저쩌고 하던 말도 기억나고, 이후 같은 뉴욕에서 비슷한 차림으로 벌어졌던 전 청와대 대변인 윤창준 사건까지 겹쳐지면서 그 이미지는 더욱 오랫동안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이 다른 성폭행 사건보다 특히 문제시 되었던 것은(물론 성폭행은 모두 특별한 문제이다.) 당연히 스뜨로스깐이 IMF 총재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보다 더 성폭행이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솔닛은 이점을 분명히 포착하여 스뜨로스깐이 여성을 폭행한 방식이 IMF가 약소국을 유린한 방식에 다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척했다.p72”

 

“그러나 세계의 운명의 일부를 좌우하는 사람이 제 주변에 두려움과 괴로움과 불공정을 빚어내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구조에 관해서, 그리고 그는 물론이거니와 그와 비슷한 다른 남자들의 행동을 용인한 여러 나라들과 단체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p74”

 

IMF의 구제금융이 얼마나 악랄한 ‘사채’인지 우리는 겪어서 잘 알고 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라야 하는 줄 알고, 우리는 각자가 가진 돌 반지까지 팔아서 그에게 진 빚을 열심히 갚았고 그로부터 모범생이라는 칭찬도 들었다. 하지만 IMF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그때부터 명예퇴직과 성과급과 무한경쟁과 승자독식과 비정규직과 그리고 .... 등등이 우리를 흙수저와 금수저로 갈라놓았다.

 

IMF의 중심국인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10년에 이렇게 말했다.

 

“1981년부터 우리가 방향을 재고하기 시작한 작년 무렵까지 미국은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했습니다. 우리처럼 식량을 많이 생산하는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 그걸 팔아서 그들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맙게도 그들이 산업화 시대로 곧장 건너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런 정책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칸소 주에 있는 일부 농부들에게는 좋았을지 몰라도, 우리 예상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저도 그 실수에 관여했습니다. 저는 지금 다른 누구를 겨냥하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아이티가 자국민을 먹일 쌀 생산능력을 잃은 것에 대해서, 저는 남은 평생 책임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p79~80”

 

‘아이티가 자국민을 먹일 쌀 생산능력을 잃은 것’ 이란 대목에서는 미국과의 자유무역으로 몰락한 아이티 농민들의 빈곤과 함께 1년 가까이 뇌사상태에 있다가 돌아가신 고 백남기 농민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이 물대포를 살인무기처럼 쏘아댔던 그 시위는 반정부 시위가 아닌 농민들의 생존권 시위였다. 가해 종주국의 전 대통령마저 평생 자책하겠다고 나온 마당에(그것도 5년도 전에), 피해 당사자를 정부 전복세력마냥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우리나라이다. 그것도 모자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인’과 ‘부검’을 둘러싼 싸움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IMF총재는 약소국의 경제를 약탈하던 그 권력으로 약자 중의 약자인 이민자 출신 호텔 여직원을 마구 농락했다. 윤창중은 청와대란 권력으로 인턴 교포 여학생을 함부로 그러쥐었다.(그 유명한 'grab')

 

성차별이 논란이 될 때는 어김없이 권력관계가 개입된다. 최근 터져 나온 문단과 미술계 등 문화계의 성폭행과 성추행도 권력관계에 기반 해 있다. 스승과 제자, 심사위원과 신예 예술가들의 관계는 철저히 권력 구조아래 놓여 있다. 아무 권력도 없어 보이는 성 폭행범조차도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 우위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거절한 여성에게 분노를 폭발시키는 남성의 의식에는 자신은 여성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만 상대 여성에게는 오로지 받아들일 의무만 있다는 그릇된 성의식이 있다. 남편이 아내를 폭행하는 경우는 말 할 것도 없다.

 

 

일곱 번째 글의 제목은 <악질들 사이의 카산드라>이다. 카산드라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왕의 딸로, 진실을 말하지만 아무도 그 예언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에 걸렸다. 오랜 세월 남성에게 여성의 발화는 기본적으로 카산드라의 예언에 다름 아니었다. 여성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성에게는 공적으로 발언할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현대 사회는 더 이상 법적으로 여성의 공적 발언을 금지할 수 없다. 이슬람 극단주의 종파를 제외하고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성폭행과 관련해 볼 때 피해자 여성의 증언은 의심받고 폄훼되기 일쑤다.

 

“비밀과 침묵은 범인의 첫 번째 방어선이다. 비밀을 지키는데 실패하면, 범인은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그녀를 철저히 침묵시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듣지 않게끔 만들려고 애쓴다. (․․․) 모든 잔혹행위에는 우리가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똑같은 사과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느니,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과장하는 것이라느니, 피해자가 자초한 일이라느니, 심지어 이제 그만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도 나온다. 범인이 유력한 인물일수록 현실을 호명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크기 마련이라, 그의 주장이 더 철저히 득세한다. P168~9”

 

어떤 남자 교수는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왜 한 여성의 말만 믿고서 조사에 나서야 합니까? P171”

 

성폭력 피해자가 신고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고 신상을 털리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많은 성폭행 피해 여성들이 입을 다무는 것은 가해자에게 정당한 처벌을 하기보다는 피해 당사자에게 오히려 더 큰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 때문이다.

 

8장 <#여자들은 다 겪는다.>는 여성혐오를 주제로 쓴 글이다. 2014년 한 남학생이 여러 학생들을 칼과 총으로 살해한 사건 이후 온라인에서 위 제목과 같은 해시태그 릴레이가 벌어졌다. 이른바 여성혐오 살인이었다. 직접적 살해의 대상은 아니라도 특히 온라인상에서 여성은 상시적으로 혐오대상이 된다.

 

여성혐오에 대해 과거와 달라진 점은 여성들이 직접 사건을 명명하고 집단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강남역 화장실에서의 여성 살해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명명의 싸움이기도 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라는 두루뭉술한 명명에 대해 여성들은 이 사건을 명백한 ‘여성혐오 살인‘으로 이름 붙였다. 범인은 범행 대상을 여성으로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을 여성 피해자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는 단순히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묻지마 살인 즉 여성혐오 살인이었다.

 

우리는 지금 사용하는 여성문제에 관한 호칭이 원래부터 있었거나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여성문제를 지칭할 수 있는 이름마저 없었다. 명명되지 못한 여성문제는 당연히 논의될 수도 없었고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인정되지 못했다. 단적으로 여성문제는 명명되기 이전에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다.

 

「 1963년에 베티 프리던은 기념비적 저서 『여성의 신비』를 출간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이름 없는 그 문제 -즉 미국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온전히 계발하지 못하도록 저지당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이 나라의 물리적, 정신적 건강에 훨씬 더 큰 해를 끼치고 있다.” 이후 그 문제에는 여러 이름이 붙었다. 처음에는 남성우월주의, 나중에는 성차별, 여성 혐오, 불평등, 억압이라는 이름이. 그 문제의 치료법은 ‘여성해방’ 혹은 ‘페미니즘’이었다. 지금은 이런 단어들이 닳고 닳은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신선한 단어들이었다.

   프리던의 선언 이래 페미니즘은 부분적으로나마 현상을 호명하는 전략을 통해서 진전했다. 가령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1970년대에 처음 고안되었고, 80년대에 사법체계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1986년에 대법원으로부터 법적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1991년에 대법관으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에 대한 상원 청문회에서 한때 그의 직원이었던 애니타 힐이 그의 성희롱을 증언함으로써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당시 남자들로만 구성된 질문자들은 힐을 가르치려 들면서 괴롭혔고, 상원뿐 아니라 온 세상의 많은 남자들은 상사가 음란한 말을 던지고 성적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P185~6」

 

가정폭력, 데이트 강간, 강간문화, 성적 권리의식 같은 이름들은 최근에 와서야 붙여졌다. 가정폭력이라는 명명이 있기 전까지 가족 내에서의 구타는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범주의 집안문제일 따름이었다. 동일한 행위에 가정폭력이라는 이름이 붙고 나서야 그 행위는 비정상이 되었고 범죄가 되었다.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이, 사랑한다고 비춰지는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형태의 성행위는 두 사람 사이의 일일 따름이었다. 지금도 부부 강간은 성립 여부를 놓고 논쟁이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더 주목해야 할 호칭은 강간문화이다. 강간은 이제껏 정신에 문제가 있는 개인의 특수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강간문화’란 말이 만들어지자, 강간을 사회 전반적, 문화적 배경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강간의 예방책도 단순히 전자 발찌 같은 것이 아니라 문화 전반의 측면에서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강간문화란 강간이 만연한 환경,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규범화하고 용인하는 환경을 말한다. 강간문화는 여성 혐오 언어의 사용,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는 시선, 성폭력을 미화하는 태도를 통해서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여성의 권리와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를 낳는다. 강간문화는 모든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P191”

 

강간문화란 우리도 손쉽게 볼 수 있다. 막말로 유명한 개그맨 장동민의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는 여자가 싫다’부터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 등등 인용하기도 싫은 말들이 버젓이 대중매체에서 우스갯거리로 방송되었다. 당시 SNS 상의 빗발치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과 몇 마디 외에 별다른 제제 없이 버젓이 여성혐오 발언과 사회적 약자 비하 발언을 이어갔다.

 

강간문화라는 명명은 이런 것들을 별 생각 없이 용인하는 우리 자신을 깜짝 놀라 뒤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나의 생각 없는 웃음이 강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끔찍하다. 여성의 뚱뚱한 몸매를 보면서 깔깔거리기 전에 강간문화란 말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 지나친 생각이라고?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명한 것으로 규정 되었다. 가정폭력이 그랬고, 데이트 강간이 그랬다.

 

레베카 솔닛은 말한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무기라고. 명명은 문제해결의 출발이다. 여성문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가 그렇다. 문제가 문제로 인식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부를 이름을 가질 때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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