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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 - 식민적 상처와 탈식민적 전환 트랜스라틴 총서 3
월터 D. 미뇰로 지음, 김은중 옮김 / 그린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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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수준의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라틴아메리카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492년 이후이다.‘ 1492년이라는 해’의 수천년 전부터 원주민이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원주민의 역사는 아메리카의 ‘발견’ 이후에나 의미를 갖는 것이다. 파괴되는 그 순간에서야 말이다. 세계사에서 모든 국가를 다룰 수는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하나의 대륙 자체를 수 천 년이나 무시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서구제국주의의 시작이다. 동양의 향신료를 권력의 상징으로 동경하던 서양이 라틴아메리카에 발을 디디면서 세계사를 뒤집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의 금은과 플랜테이션 사업을 바탕으로 과학혁명, 산업혁명, 시민혁명을 완수한 유럽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라틴아메리카 없이 서구의 근대는 존재할 수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해 라틴아메리카로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도 포함된다. 또다시 말한다면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아프리카의 노예 없이는 오늘날의 서양도 없었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15세기 유럽인들의 도착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파차쿠티’였다.

 

“파차의 여러 가지 의미 중 하나는 ‘어머니 대지’의 의미와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라는 개념이 ‘대지’를 모든 유기체와 연결하는 실마리가 ‘생명’이라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파차는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쿠티는 안정된 질서에 극적이고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변화를 가리키는데, 마치 달리던 자동차가 균형을 잃고 몇 바퀴를 구르다가 뒤집혀서 멈추는 경우와 같다. 그것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원주민들의 삶과 사회조직을 자기들 방식대로 바꾸어 버렸을 때 원주민들이 경험했고,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과정으로, 원주민들은 이 과정을 파차쿠티라고 부른다. p107~8”

 

소위 ‘발견’당한 원주민들에게 유럽과의 대면은 느닷없이 당한 자동차 사고와 같았다. 그리고 500년 전의 그 사고는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극과극의 관점이 존재한다. 서양 제국주의의 시작은 라틴아메리카 식민주의의 시작이었다. 서양의 제국주의는 서양 근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근대성과 제국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의 근대성과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근대성은 식민성을 극복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식민성을 필요로 하고 생산하는 것이 바로 근대성이기 때문이다. p50”

 

하지만 식민성이 아니라 근대성이라는 말이 보편적 용어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계가 서구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의미이다. 이름을 점유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아프리카계 라틴아메리카 출신의 사회철학자(?)인 프란츠 파농은 식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식민주의는 단순히 피지배 국가의 현재와 미래에 식민주의의 규율을 강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식민주의는 피지배 국가의 국민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고 그들 머릿속의 모든 형식과 내용을 박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식민주의는 일종의 도착적인 논리를 사용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과거를 비틀고, 왜곡하고, 파괴한다. p153”

 

서구제국주의 즉 식민주의는 항상 근대화로 포장된다. 근대의 패러다임 안에서 근대화는 곧 진보이므로 식민지의 피지배인들은 스스로를 미개인으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부정해야 한다. 자기부정 속에 피지배인들은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며 펼쳤던 논리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를 환영하며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이 합리화했던 논리도 이것이다.

 

 

근대성이 곧 식민성이라는 사실은 ‘라틴’아메리카라는 명명에서도 드러난다. 그 이전에 아메리카라는 명칭부터도 그렇다. 콜럼부스가 발견했다는 그 땅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유럽백인이었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가는 곧 누가 주인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아메리카는 독일인 지리학자가 1507년에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본 따 붙인 이름이다. 베스푸치는 콜럼부스가 발견한 땅이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첫 번째 인물이다. 이리하여 수 천 년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에 어느 날 도착하기 시작한 유럽백인들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금까지도 원주민들의 땅은 유럽적인 이름에 속박되어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하나였던 아메리카 개념은 당시 생겨나기 시작한 국민국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반구의 상이한 제국의 역사에 따라 두 개의 아메리카로 분리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북쪽에는 앵글로아메리카, 남쪽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의 라틴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남쪽에 남부-가톨릭-라틴 유럽의 문명을 복원하고, 동시에 식민지 초기의 원주민과 흑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 선택된 이름이었다. 독립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지역의 엘리트들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근대성과 하나가 되려고 시도하는 동안 원주민• 흑인• 메스티소는 더 가난해지고 더 주변화 된 역사다. p114”

 

라틴아메리카라는 명칭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도 수세기가 지난 19세기 중반에 붙여졌다. 그런데 왜 하필 라틴이었을까?

 

“유럽에서 라틴성은 자신들을 라틴어와 라틴어에서 파생된 로망스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 배태된 라틴 에토스를 공유하는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라고 여겼던 남유럽 국가들을 하나로 묶는 초국가적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남아메리카에서 라틴성은 흥미롭게도 로마 제국과는 틀림없이 거의 관계가 없는 지구적 종족-인종 오각형의 다섯 번째 변이 되었다. p134”

 

카리브 해와 중부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에 처음 도착한 것은 에스파냐였다. 에스파냐어는 로망스어에 속하며 로망스어는 라틴어에서 파생했다. 북아메리카와는 달리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대부분은 로망스어를 사용하는 에스파냐, 포르투갈(나중에는 프랑스)이 점령했다. 라틴아메리카란 라틴 즉 로마와 연계된 유럽인들이 지배하는 아메리카라는 의미가 된다. 이 명명에는 이 대륙의 원주민도,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잡혀왔던 아프리카인도 배제되어 있다. 라틴아메리카라는 이름은 누가 이 대륙의 주인인가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으며, 이 대륙이 서구제국주의에 의해 점령된 식민지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영국령' 인도라는 명칭에 대영제국의 상흔이 남아있듯이, ’라틴‘아메리카 라는 명칭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실려 있다. p242”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대결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의 대결과 같다. 영어를 주로 사용하는 북아메리카는 앵글로아메리카라고도 불린다. 라틴성이라고 표현되는 유럽남부의 정체성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포함한다. 유럽북부는 독일과 영국이 대표한다.

 

 

이름붙이기의 의미는 라틴아메리카의 유일한 예외 ‘아이티’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이티의 독립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탈선행위였고 이 때문에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 지도에서 언제나 신중한 태도로 배제되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최초의 ‘일탈’이었고, 독립을 통해 스스로의 행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이티’는 라틴도 아니고 앵글로도 아닌 개념이다. 아이티 섬의 본래 이름은 섬의 원주민 언어로 ‘산이 많은 땅’을 의미하는 ‘아이티’였다. 아프로-아이티(아프리카계-아이티) 주민의 혁명은 스페인식 이름과 프랑스식 이름 대신에 본래 이름을 ‘정복’ 초기의 대량 학살로 숨진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이티를 산토도밍고라고 불렀고, 프랑스의 점령 시기에는 생도맹그로 바뀌었다. 아이티에는 스페인 지배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아이티라는 이름은 혁명을 통한 역사적이고 인식적인 전환의 표시이고, 식민지 노예시기와 프랑스의 제국적 점령 시기로부터 벗어났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아이티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언어와 호명의 힘은 ‘인식의 혁명’을 위한 근본적인 잠재력이다. ‘라틴’은 아프리카계 혈통이 아니라 유럽계 혈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티는 역설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패턴에 들어맞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와 카리브에 백인 하위주체 정체성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보기에 아이티는 ‘라틴성’ 보다는 ‘아프리카성’에 의해 포착되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은 점차 증가하는 아프로-안데스의 영향으로 발생하고 있는 또 다른 커다란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p190~2”

 

아이티는 ‘아이티’라는 이름 자체가 혁명이다. 아이티라는 이름은 이 대륙의 주인이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볼리바르나 산마르틴과 같은 백인 크리올이 아니라 흑인노예들이 쟁취한 독립국가 아이티는 대서양 지역 경제 질서를 떠받히고 있던 인종적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위협적인 사건이었다. 흑인노예 없이는 유럽의 부도 없었고, 유럽의 부 없이는 유럽의 산업혁명도 시민혁명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아이티에 대한 유럽의 제재는 가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고답적인 말이지만 개명 천지에 이런 일이, 더구나 그 개명을 이끌었다던 프랑스가 이런 적반하장의 배상요구를 할 수 있었고 또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개명이란, 근대란, 그 맨 얼굴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철저히 서구 중심적이다. 유럽이니 아시아니 아프리카니 아메리카니 하는 명명자체가 서구의 발명품이다. 우리는 그 틀 안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평가한다.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은 이 틀을 벗어날 수 있어야만 서구 근대가 만들어 놓은 제국주의/식민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근대(modern)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인용문 대부분(페이지수가 명기된)은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이 그 출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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