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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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오래전에 한 번 갔던 유럽여행이 너무 피곤해서였을까.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강원도이건 강진이건 벚꽃이건 단풍이건 굳이 찾아다니고 싶지 않은 걸 보면 여행이나 구경이 전부 다 시들해 버렸다. 그래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은 있다. 이스탄불이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거기에 놓여 있다는 다리를 화면에서 본 순간부터 이스탄불이 머리에 새겨졌다. 다리를 건너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 수 있다는 신비함은, 물론 관념이다. 육지와 육지를 잇는 바다 위의 다리는 많다. 내가 사는 이곳에도 바다 위를 달릴 수 있는 아주 긴 다리가 있다. 유럽과 아시아라는 구분은 인간의 관념일 뿐이다. 이스탄불의 다리 위에 선다 해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다리를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다리 위를 달려보고 싶다. 관념은 인간만의 욕망을 부르니까.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술탄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그림을 그리던 화원들 중 한 명이 살해된다. 오스만제국이라니, 너무 낯설지만, 몇 년 전의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외국인이 본다고 생각하면 대충 감이 잡힐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은 생소해도 1952년생 오르한 파묵이 쓴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하다. 인문주의가 가져온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욕망이다.

 

원근법을 개발한 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은 세계를 인간의 눈이 보는 대로 그린다. 게다가 초상화는 개별적 인간, 인간 주체를 세계의 중심에 놓는다. 오스만제국은 전통에 따라 신의 말씀에 따라, 세계를 신이 보는 대로 그려야 한다. 초상화는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악한 그림이다. 그러나 술탄도 신을 두려워하는 화원도 자신의 초상화를 열렬히 욕망한다. 주체는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한다.

 

“ (․․․․) 마치 인간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우월한 피조물이라도 되는 듯, 인간을 그림의 정중앙에 그려 넣고 그것을 우상처럼 벽에 걸어 놓습니다. 인간이 그 그림자까지 낱낱이 그려져야 할 정도로 중요한 피조물입니까? 어느 골목길에 있는 집들이 인간의 눈이 가진 미천한 지각 능력 탓에 갈수록 작아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면 세상의 중심에 신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 아닙니까? p2권 155”

 

“ (․․․․) 죽은 엘레강스가 입힌 금박과 테두리는 우리가 책의 한 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창문을 통해 온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세상의 중심에, 술탄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그 순간 자랑스럽게 보았던 나의 초상화가 있었다. 며칠 동안 다시 수정하고, 거울을 보고 또 보고, 속수무책으로 안간힘을 썼지만 아주 조금만 나 자신과 닮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림은 모든 세상의 중심에 나를 그려 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사악한 이유, 즉 나 자신을 실제보다 더 심오하고, 복잡하고, 신비롭게 나타냈기 때문에 나에게 제어할 수 없는 어떤 흥분을 느끼게 했다. 나의 세밀화가 형제들이 나의 이 흥분을 보고, 이해하고 나와 공유해 주길 원했다. 나는 술탄이나 왕처럼 모든 것의 중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기도 했다. 이 상황은 내게 자랑스러움과 수치심을 동시에 주었다. 이 두 감정은 서로 균형을 유지하며 나를 편하게 했다. 나는 이 그림에 있는 나의 새로운 위치로 인해 현기증 나는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쾌감이 완벽하게 되기 위해서는 유럽 화가들의 기예로 나의 얼굴, 옷의 주름들, 그림자, 뾰루지, 그리고 반점, 턱수염에서 옷감의의 짜임새까지 모든 부분, 모든 색들을 정확하고 완벽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림을 보는 옛 친구들의 얼굴에서 일종의 두려움과 경이, 그리고 우리 모두를 괴롭혔던 그 어찌할 수 없는 질투를 보았다. 그들은 머리끝까지 죄를 뒤집어 쓴 사람에게 느끼는 분노에 가득 찬 역겨움과 함께, 두려움과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p2권 328~9“

 

원근법에 대해 화원들은 이런 논쟁을 벌인다. (2권 p284)

 

“세밀화가는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신이 본 것을 그리네.”

“그렇지. 하지만 숭고한 신께서도 우리가 보는 것을 보네.”

“신은 물론 우리가 보는 것을 보지. 하지만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지각하지 않는다네.”

 

그런데 신이 본 세계를,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계는 신에게 어떻게 표상할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내린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신이 만든 세계, 물자체를 결코 알 수 없다. 그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독단에 빠진다. 종교가 독단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신을 보았다고 하는 자들도, 신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 자들도 인간이다. 인간의 지각에 경험된 신은 인간의 방식으로 지각한 신이다. 우리는 인간이 지각한 신이 신 자체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믿을 뿐이다.

 

서구 근대의 시작은 신에 대한 믿음에서 신에 대한 앎으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성으로 신을 바라보는 것, 신을 요청하는 것, 혹은 신에게 이르는 것, 그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하는 것이 근대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신은 존재해도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차지한다. 르네상스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로 불리는 것은 르네상스 미술의 중심에 원근법과 초상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근본주의가 근대 문명과 충돌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신의 눈으로, 아니 신의 눈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서구가 거쳐 온 암흑기가 그들에게 눈부신 빛의 이미지로 부활한 것은 물론 서구 제국주의의 책임이 크지만, 신을 다시 중심에 세우는 것은 인간의 독단을 불러오는 퇴행이 되기 십상이다.

 

 

 

이스탄불은 그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상상을 할 수 있는 도시다. 벤치에 앉아 비잔티움제국 시대의 성소피아 성당과 오스만제국의 블루 모스크를 번갈아 바라볼 수도 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유럽과 아시아를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다. 유럽의 역사와 아시아의 역사를 함께 간직한 이스탄불에 르네상스 예술이 일찍이 도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16세기 말, 오스만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시대는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행하고 있었고, 터키의 세밀화는 그 전조를 재빨리 포착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 의하면.)  물론 좋은 소설이 그렇듯이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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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고전 연속 강의 3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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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의 책으로 가장 기다리던 『철학 고전 강의』가 나왔다.

아무 정보도 없었지만 언젠가는 나올거라 생각했다.

철학자인데 인문고전과 역사고전만 강의하고,

정작 철학고전은 빼놓는다면 

마침표가 없어 결코 끝날 수 없는 문장이 되버릴 테니까.

 

체계없이 배운바도 없이

내키는대로 이 책 저 책, 철학책을 뒤적거린지 10년이다.

대개는 무슨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이 또 읽게하고 또 읽게하는

끌어당김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강유원의 철학 강의를 손꼽아 기다린 것은

내가 읽은 그 책들이 대체 무슨 말인지를

조금이나마 어떤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때문이었다. 

(물론 이 책의 바탕이 된 40주짜리 서대문 구립 이진아 기념 도서관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면 무엇보다 좋았겠지만)

 

40주짜리 강의를 시간나는대로 틈틈이 일 주일 정도 걸쳐 읽었다.

열일을 제쳐두고 읽었더라면 이틀쯤이면 읽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술술 읽히기도 했고,

다루고 있는 주요 철학자가 다섯 뿐이어서

예상보다 가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내용을, 전부는 언감생심이고,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우선 한 번 읽어 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식으로 쓰여졌는지 너무 궁금해서 먼저 후루룩 읽어 보았다. 

이제 정신을 모으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시 읽어야 한다.

정신을 바짝만 차리면

이제껏 내가 읽고도 맥을 짚지 못하고

단편 단편으로만 기억하고 고민하던 부분들을 조금은,

전체 그림 속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다.

 

 

『철학 고전 강의』의 부제는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이다.

철학 중에서도 무한자에 대한 사유 즉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이다. 

 

형이상학은 

"간단히 말하면 한정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탐구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한정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것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을 생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무한에 대한 호기심과 요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무한에 대한 사유는

유한한 인간 자신에게는 불행한 의식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서든 죽어서든 무한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희랍 철학자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

탐구했던 무한자에 대한 사유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다섯 명의 철학자들에 관해

가장 중요한 부분(내가 이것저것 읽은 것들에서 생각하는 수준이지만)

짚어주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형이상학과 존재론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들 다섯 명 각각이 이룬 성과와 남긴 과제를

각각 어떻게 이어받아

어떻게 무한자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켜 왔는지를 

대략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강의에서 강유원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만 항상 어버어버하면서 

상대는 알아듣지도 못하게 이야기하곤 했다.  

 

"형이상학은 역사의 도저한 흐름과는 아주 무관한 사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본다면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이 형이상학 속에 스며들어 있으며, 형이상학적 사유 원리의 전환이 시대의 큰 변화에 작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짐작을 확실한 앎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독서와 공부를 통해 이루어야 할 일일 것입니다."  

 

형이상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철학 일반에 대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형이상학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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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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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연을 쫓는 아이』를 읽은 적이 있다.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하지만, 읽으면서도 어느 나라의 이야기인지 잘 몰랐다. 그냥 낯설고 특이한 분위기 정도만 느낌으로 남아있다. 소설에서 역사적 배경이란 대개, 먼 산의 흐릿한 윤곽 같아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그 배경이 우리와 전혀 연관이 없다고 느껴지는 이슬람국가라면 더욱 그렇다.

 

같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어제, 오늘에 걸쳐 읽었다. 처음에는 좀 지루했는데 1/3정도가 지나면서 바싹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특히 역사적 사건에 눈을 부릅떴는데, 이번에는 여기가 어디인지 대충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소설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달 우리 독서회의 주제가 이슬람인데, 첫째 주와 두 번째 주는 이슬람의 역사와 IS, 세 번째와 네 번째 주는 소설이 선택되었다.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1965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서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는 틈틈이 소설을 써서, 2003년 『연을 쫓는 아이』, 2007년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을 발표했다. 이 소설이 번역된 2007년 현재(원작과 같은 해에 번역되다니!), 난민을 돕기 위한 NGO에서 활동하고 있다.

 

작가는 15살 무렵에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여 난민생활을 했던 것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명의 여자 주인공 역시 비슷한 나이에 아버지뻘 혹은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현대사의 질곡 속에 던져진다. 아프가니스탄 현대사는 아프가니스탄 민중 전체를 고통 속에 빠뜨렸지만 특히 여성이 겪은 수난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민의 반이 아무 활동도 할 수 없는 가택 감금 상태’에 놓이는데, 그 반이란 다름 아닌 여성들이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사회가 혼란에 빠질 때 가장 고통 받은 것은 여성이었지만, 이 소설을 보면 그 정도가 세계 어디에서도 유래가 없을 것이라 생각될 만큼 심각하다.

 

 

 

아프가니스탄은 대충 말해서, 페르시아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8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 결과 현재 인구의 99%가 무슬림이며, 그 중 90% 정도가 수니파로 알려져 있다.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이고, 최다 민족이 42% 정도의 파슈툰인, 다음이 27% 정도의 타지크인 이다. 그 외로 여러 소수민족이 있다. 동서남북으로 여러 국가와 국경을 접해있고, 역사적으로 교역의 요충지인 탓에, 이런 지정학적 위치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역사가 복잡해서 그것을 간추려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도 전근대사는 보는둥 마는둥 넘어가게 된다. 자세히 읽어도 사실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그런데 현대사는 조금 유념하여 보아두어야 소설을 따라 가기도 쉽고, 현재의 IS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이 독립한 것은 18C초이다. 19C부터는 영국의 침략에 점차 시달리게 되었다. 영국의 간섭을 받으며 반식민지 상태에 떨어졌으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완전 독립하여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국왕은 노예제 폐지, 부르카 착용 금지, 여성 교육 등의 개혁을 실행하였지만, 지방의 종교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복잡한 권력 투쟁이 진행되던 중에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된 것은 1978년 4월, 공산주의 정당이 일으킨 ‘샤우르 혁명’에 기인한다.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자 몇 달 만에 반군 봉기가 일어나 전국적인 내란에 돌입하였다. 반군 단체인 무자헤딘은 지하드에 참여하는 전사를 의미한다. 이 내전 때문에 소련이 정부군을 지원하게 되고, 1년 뒤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른바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1979년 12월에 침공하여 10년 만인 198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던 공산당 정권은 소련 붕괴 직후인 1992년에 무너졌다. 무자헤딘이 공산정권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냉전과 소련붕괴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등이 무자헤딘에 막대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부메랑이 되어 미국에 돌아간다. 세계 최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인 이슬람근본주의 무장단체들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태동되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통해 성장하였다. 이 반군들에게 전투기술과 무기와 경제적 지원을 한 것이 미국 등의 국가들이다.  오사마 빈 라덴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소설을 보면 많은 아프가니스탄인 젊은이들이 성전을 위해 무자헤딘에 지원하였다. 물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소설에는 공산주의 정책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1978년 4월 혁명이 일어난 날 밤에 태어난 라일라에게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비록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퇴직 당했지만, 이렇게 말한다. “라일라, 이 나라에서 여자들은 언제나 힘들게 살아왔다.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어쩌면 여자들은 더 자유로워졌는지 몰라. 전보다 더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아프간 여성으로서는 좋은 때다. 라일라, 너도 그걸 이용할 수 있어.”

 

공산주의 정부는 모든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했고 당시 카불 대학의 학생 중 2/3 정도가 여성이었다. 여자들이 법과 의학, 공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시기다. 이후 탈레반 정권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여성 권익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것이 무자헤딘에게 공산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봉기할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여자들이란 공부는 물론 나돌아 다녀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그곳에서는 거리에서 여자를 볼 수 없었다. 여자들은 부르카를 입고 남자가 동반해야만 거리에 나갈 수 있었다. 고대의 부족법에 따라 사는 그 지역 남자들은 여자들을 해방시키고 강제결혼을 폐지하고 여자의 결혼 최소연령을 열여섯 살로 높이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법령에 반기를 들었다. 그곳 남자들은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자신들의 딸들이 집을 떠나 학교에 다니고 남자들과 함께 일을 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수백 년이 된 자신들의 전통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란 파키스탄 인접 지역인 남쪽과 동쪽의 파쉬툰 지역을 의미하는데, 수도인 카불은 이에 비해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런데 얼만 후 등장하는 탈레반은 ‘그곳’과 파키스탄 난민촌에서 성장한 학생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하고 혼란했으며 소련군의 침공으로 수백만의 아프가니스탄인이 죽었고 또 그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여 난민이 되었다.

 

1992년 마침내 무자헤딘이 승리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무자헤딘은 분열되어 있었고 곧 내전이 일어났다. 소련이 물러났지만 이제 수도 카불로 군벌들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 내전을 종식한 것은 젊은 학생들, 즉 탈레반이었다.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탈레반 정권은 2001년 9.11이후 미국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미국이 탈레반을 공격한 것은 탈레반 정권이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 놓고 미국에 인도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은 축출되었던 무자헤딘 군벌들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엄청난 전력의 차이로 탈레반 정권은 금방 붕괴되었지만, 괴멸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2001년부터 201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2014년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고 2016년까지 완전 철군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9.11 이후 미국은 이라크뿐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지금도 소위 ‘테러와의 전쟁’ 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우려되는 것은 소련에 이어 미국과 10년이 넘도록 전쟁을 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또다시 탈레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구세력의 침략과 민주화의 실패는 민중들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 같다.

 

탈레반이 내전을 종식시킨 초기에 아프가니스탄인들은 탈레반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탈레반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이 드러났다. 탈레반은 전단지를 뿌리며 이렇게 선포했다. “다음은 우리가 집행하고 여러분이 복종해야 하는 법입니다.” 남자들은 수염을 길러야하고 노래와 춤, 카드놀이, 장기, 노름, 연날리기도 금지되었다. 책과 영화, 그림도 금지되고 잉꼬도 키울 수 없었다. 법을 어기면 곤장에서 시작해서 손목과 발목을 자르고,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그러나 더 큰 재앙은 여성이 지켜야 하는 법령이었다. 마리암이 주워 든 전단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여자들은 항상 집에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이 이유 없이 거리를 나다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마흐람(남자 친척)이 대동해야 합니다. 거리에서 혼자 다니다가 걸리면 곤장에 처해진 후 귀가시킬 것입니다.

여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을 보여선 안 됩니다. 밖으로 나갈 때는 부르카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하게 맞게 될 것입니다.

화장품은 금지합니다.

장신구는 금지합니다.

멋있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말을 걸지 않으면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남자들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됩니다.

공공장소에서 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적발되면 곤장에 처해질 것입니다.

손톱을 치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적발되면 손가락 하나를 자를 것입니다.

계집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습니다. 여학교는 즉시 폐쇄될 것입니다.

여자들은 밖에서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간통을 하다가 적발되면 돌로 쳐 죽일 것입니다.

이를 명심하고 복종하십시오. 알라-우-아크바르. “

 

탈레반은 “인구의 반을 집에 머물게 하고 아무것도 못하게” 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두 여자의 이야기다. 두 여자는 한 남자의 두 아내이고, 그 남자는 한 여자의 아버지뻘, 또 다른 여자의 할아버지뻘이 되는 노인이다. 두 여자의 삶은 아프가니스탄의 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한다. 늙은 남편에게 채찍으로 맞으며, 무자헤딘과 탈레반의 여성 억압에 짓밟히며, 험난한 시간을 함께 견뎌간다. 라이벌로 만나 친구로, 동지로, 혹은 모녀관계로 발전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각성을 일으키며 성장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 다른 의미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탈레반이 물러갔으나 사회는 여전히 혼란하고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은 말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주겠다던 원조는 오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더디고, 부정부패는 만연하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가니스탄을 잊을 것이라고.” 그러나 라일라는 이런 시 구절을 읽는다.

 

“요셉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헛간은 장미꽃밭으로 바뀔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살아 있는 모든 걸 집어삼키려고 홍수가 닥치면

노아가 태풍의 눈 속에서 너희들을 안내할 것이니 슬퍼하지 마라.“

 

라일라의 마음속에는 “천 개의 태양의 눈부신 광채”가 있기 때문이다. 소련도, 무자헤딘도, 탈레반도 빼앗지 못했던 것, 혹은 바로 그들이 라일라의 마음속에 키워 준 것. 천 개의 찬란한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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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사 -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로런트 듀보이스 지음, 박윤덕 옮김 / 삼천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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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혁명”이라고 말하면 주변사람들은 으레 “IT"로 알아듣는다. IT시대, 여기저기 남발되는 ‘혁명’ 이란 단어,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티공화국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2004년은 아이티혁명 200주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몇 년 사이의 책들에서 몇 번 아이티혁명을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고, 작년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읽으며 다시 아이티혁명에 대한 짧은 내용을 보았다.

 

사실 아이티혁명은 서구가 중심이 된 세계사에서 지워진 혁명이다. 아이티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일부일 뿐 아니라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과 함께 자기 완결적인 혁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3대 혁명만을 근대 혁명으로 가르치고 있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티는 처음부터, 즉 노예제에 맞서 1804년의 독립을 이끌어낸 혁명투쟁 자체에서부터 예외였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인간의 자유에 대한 선언은 보편적인 일관성을 지녔다. 오직 아이티에서만 이 선언은 당시의 사회질서와 경제논리에 직접 맞서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유지됐다.” 이런 이유로 “근대사 전체를 통틀어 지배적인 전지구적 사물의 질서에 대해 이보다 더 위협적인 함의를 지닌 단일 사건은 없다.” 아이티혁명은 진정으로 프랑스혁명의 반복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아이티혁명은 분명히 ‘자기 시대를 앞선’ 것으로서 ‘성급’하고 실패할 운명을 짊어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혁명 자체보다 한층 더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식민지의 반란자들은 최초로 식민지배 이전에 자신들이 지녔던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이라는 극히 근대적인 원칙을 위해 봉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티의 노예반란을 즉시 인정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코뱅 당원들의 진정성을 보여줬다. 아이티의 흑인 대표는 국민의회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리고 예측할 수 있듯이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상황은 변했고, 나폴레옹은 즉시 아이티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이유에서 일찍이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은 “아이티가 독립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담긴 위협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아이티의 독립은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p177~8」

 

아이티혁명은 서구 자본주의 탄생의 모태가 되었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절멸, 아프리카 노예무역,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17C 과학혁명과 18C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민사회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아이티혁명이 위대한 보편혁명으로 기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서구의 발전이 아메리카 식민지와 아프리카 노예들의 피눈물 위에 이루어졌다는 수치를 조용히 묻어두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단편적이지만 매혹적인 몇몇 글들을 통해 아이티혁명에 관해 알게 되었고, 이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2004년에 출판된 로런트 듀보이스의 『아이티혁명사』는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고 1783년에 독립을 승인 받았지만, 1863년에야 흑인 노예가 해방되었다. 미국의 독립과 노예해방에는 80년의 격차를 둔 두 번의 전쟁이 있었다. 아이티는 1791년 노예 봉기 이후 지속된 투쟁 끝에 1804년에 마침내 노예해방과 식민지 독립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어떻게 노예제를 폐지하고 독립 공화국을 이루어 낸 것일까? 그것도 백인 이주민이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그야말로 맨손으로 서구 열강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아이티혁명사』는 이 흥미진진하고도 슬픈 역사를 한 편의 다큐드라마처럼 풀어내고 있다. 혁명사를 머릿속에 도표처럼 그려 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다소 장황하고 복잡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혁명을 이끌어 낸 주체 세력들의 역학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고 혁명의 요체는 구질서를 파괴하는 것보다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히스파니올라는 서쪽으로는 아이티공화국, 동쪽으로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이 섬을 발견한 후 에스파뇰라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영어화 되어 히스파니올라가 된 것 같다고 한다. 섬 전체를 아이티라고도 부르는데 이 명칭은 섬의 원주민들이 식민지 시대 이전에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침내 프랑스를 물리치고 인종차별 없는 독립 공화국을 세운 아프리카계 해방노예들이 새로운 국가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의 명칭인 이 ‘아이티’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 『아이티혁명사』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라는 이름의 선택은 독립선언에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를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프랑스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사 전체에 대한 부정이었다. 새로운 나라는 공식적인 식민 활동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의 세기에서, 그 신성한 유권자들의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p462」

 

아이티 공화국이 세워지기 전에 이 섬에서 에스파냐가 차지한 지역은 산토도밍고, 프랑스가 차지한 지역은 생도맹그라고 불렸다. 같은 이름을 자기 나라 식으로 부른 것이다. 에스파냐가 먼저 식민지를 개척했으나 나중에 서쪽 지방은 프랑스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산토도밍고는 현재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런 까닭으로 이 책에는 계속 생도맹그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인종이 복잡하게 얽힌 라틴아메리카의 대부분이 그러했겠지만, 프랑스령 생도맹그의 정치적 대립은 한층 더 다층적이었다. 아이티혁명이 프랑스혁명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생도맹그에서 반란은 프랑스 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그리고 백인과 자유유색인 엘리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자치를 주장하던 백인 농장주들의 정치적 행동은 재산에 입각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유유색인 지주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뒤이어 흑인노예들에게 해방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한 하나의 돌파구를 제공했다. 그렇기에 제임스가 반란 노예들을 프랑스의 상퀼로트와 비견되는 ‘흑인 자코뱅’ 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p477」

 

아이티혁명의 주체는 아프리카계 노예였지만, 제일 먼저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 된 것은 식민지 농장주와 본국 사이에서였다. 본국은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식민지가 오로지 프랑스 본국을 위해서만 존재하기를 바랐지만, 식민지 농장주들은 주변 여러 나라와 밀무역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계몽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노예제 폐지론이 대두하면서 식민지 농장주들을 불안하게 했다.

 

여기에 자유유색인과 백인 식민지 농장주들의 대립도 가세했다. 자유유색인은 백인 식민지 농장주와 아프리카 흑인 여성 노예 사이의 혼혈들로서 백인 농장주는 혼혈 아들과 그 어머니를 해방하고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많았다. 자유유색인은 농장주가 되기도 했지만, 군인으로 복무하며 식민지를 보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외부의 적과 더불어 내부의 위험한 적인 노예들에 맞서 생도맹그를 지켰다. 자유유색인의 기여도가 커지면서 이들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도 높아져 백인 농장주들의 경계를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 농장주들은 본국에 대해, 자유유색인들은 백인 농장주들에 대해 더 많은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본국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은 각 세력의 요구에 불을 붙였고, 프랑스혁명이 진전됨에 따라 식민지의 상황도 시시각각 변화해 갔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은 마침내 식민지 노예들에게도 인간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본격적인 노예반란과 노예해방전쟁을 촉발하였다. 생도맹그의 중첩된 대립은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1790년 국민의회는 <인권선언>이 노예에게는 해당하지 않으며 노예제와 노예무역은 변함없다는 법령을 발표 했다. 자유유색인 문제는 모호함 속에 회피되었다가, 1791년에 양쪽 부모 모두가 자유인인 자유유색인들에게만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었다. 이 소극적인 권리부여마저 백인 농장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백인들은 “자유유색인들의 목을 따고, 프랑스를 버리고, 영국인들을 불러들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1791년에는 마침내 노예들이 봉기했다. 1791년 8월 생도맹그의 노예반란은 아이티혁명의 공식적인 시작이었다. 노예반란의 원인에 대해서는 계몽사상과 평등주의 이념 자체라는 주장도 있고, 그 배후가 반혁명적인 백인 농장주들이라는 상반된 보고도 있지만, 『아이티혁명사』의 저자는 반란노예들 자신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그러나 폭도에게는 그들만의 이데올로기, 그들만의 역사,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왕당파와 공화파 백인들의 활동이 반란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그 반란이 진행되는 데 기여했지만, 반란 노예들이야말로 반란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로마에서 스파르타쿠스를 따른 노예들처럼) 선동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족쇄를 깨라고 선동한 자유의 수호신”에 의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식민지에 퍼진 자유에 관한 소문과 몇몇 백인들의 “경솔한” 발언에 노예들이 고무되었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자유에 대한 사랑과 억압자에 대한 증오” 말고 다른 “선동가”는 없었다. “노예들은 그들의 주인과 노예제를 유지하는 정부에 맞서 항구적인 전쟁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그 어떤 수단, 심지어 폭력을 써서라도 자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가랑쿨롱은 썼다. 그들은 폭력적이긴 하지만 때로는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하는 혁명 과정에 뛰어들었고, 급변하는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면서 다양한 이념들에 의지했다. p169~170」

 

1792년 4월, 노예반란에 대응하여 프랑스 국민의회(정확히는 입법의회)는 자유유색인들에게 백인들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했다. 이제 식민지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자유인과 노예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유인 사이에는 어떠한 인종차별도 없을 것임을 선언했다. 국민의회는 권리를 획득한 이 새로운 시민을 통해 식민지를 지키려 하였다.

 

「이는 대단한 진전이었다. 아메리카 노예제 사회의 한복판에서 인종에 의거한 법적인 차별이 금지된 것이다. 이 법령은 생도맹그의 수많은 자유유색인들과 함께 아프리카계 주민들이 의미 있는 정치권력을 가지게 될 것을 보장했다. 생도맹그의 노예 반란은 노예제를 구하기 위해서 인종 평등을 부여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역설적인 방식으로 정치의 지평을 확대했다. p208」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 자유유색인들은 선봉에 서서 노예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노예반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백인 농장주들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793년이 되자 노예반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생도맹그에서 제국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793년 1월, 급진 공화파가 주도한 국민공회가 루이16세를 처형하였다. 그러자 영국과 에스파냐가 포함된 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유럽에서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에스파냐는 생도맹그의 반란과 내부 분열을 이용해 생도맹그를 손쉽게 차지하려고 하였다. 에스파냐는 자유를 대가로 반란 노예를 모집했고, 영국은 먼저 백인 농장주들을 끌어들였다.

 

「농장주들에게는 적의 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노예제를 구하는 대신 노예제 철폐를 위한 상황을 낳았다. 그들은 공화국의 배신자가 됨으로써 노예들이 프랑스의 시민이자 수호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농장주들은 고립무원의 공화국 감독관들이 새로운 동맹자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도 에스파냐처럼 반란 노예들을 이용했다. 1793년 2월 식민지 담당 장관은 송토나에게 프랑스를 위해서 싸우는 반란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p246」

 

식민지 감독관은 공화국을 지키는 흑인전사들에게 자유와 함께 프랑스 시민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약속했다. 마침내 1794년 국민공회가 공화국의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공식 폐지하고 모든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피부색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은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 비록 곧바로 훼손되고 공격당하긴 했지만 새로운 질서는 원칙적으로 비타협적인 평등을 토대로 삼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자유가 실현된 것이다.

 

 

 

아이티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투생 루베르튀르는 처음 에스파냐를 위해서 싸우다, 1794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합류했다. 이때부터 루베르튀르는 생도맹그 노예들이 획득한 자유를 보호하고 확정하는 과업을 떠맡았다. 흑인 노예 출신인 그는 우리의 자연스런 추론과는 다르게 해방 노예들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적인 법질서를 수립하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혹은 왜 그래야만했을까? 투생 루베르튀르는 자유는 쟁취하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베르튀르는 반란의 핵심에 있었고,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 자유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1794년에 프랑스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원칙에 충실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프랑스 국민은 생도맹그가 지난 세기 동안 생산했던 상품들을 계속해서 대서양 건너로 보내 줄 때에만 노예해방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유는 달콤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여전히 달콤한 설탕이 필요했고, 설탕과 함께할 커피도 필요했다. 한 당대인의 설명에 따르면, 루베르튀르는 이런 금언을 남겼다. “흑인들의 자유는 농업의 번영을 통해서만 확고해질 수 있다.” p302~3」

 

프랑스에는 여전히 노예폐지 반대론자들이 많았고, 해방노예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면 식민지에 대한 프랑스의 정책이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해방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강제적으로 농장에 머물러야하고 똑같은 일을 해야 하는 해방노예들은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농장 노동자들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목표가 노예제를 부활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항거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의 역설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루베르튀르는 1800년 10월에도 노동규제를 강화하는 법령을 발표 했다. 이것이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그의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지만 그때까지 루베르튀르의 의지는 단호했다.

 

「1794년 이후 루베르튀르는 시종일관 해방노예들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강행하면서, 노예해방을 수호하고 확고히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798년에 그가 선언한바, 식민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생도맹그 인민’의 책임이었다. 1801년에 그는 “자유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식민지 경제의 재건이 “특히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식민지의 미래를 설계하고자 했던 그는 과거가 식민지를 꼼짝달싹 못하게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도맹그는 설탕과 커피 생산자로 성장해 왔고, 현행 대서양 경제에서 생도맹그가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생도맹그는 오랫동안 식량 수입에 의존해 왔는데, 1790년대 말에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질질 끌면서 대외 교역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외국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생도맹그는 식민지의 전통적인 상품을 생산하고 수출해야 했다. 이는 단지 경제적 필요뿐 아니라, 루베르튀르가 알아챘듯이 정치적 생존의 문제였다. 생도맹그 인민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가지려면, 오직 강력한 플랜테이션 경제에서만 가능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장 너머의 미래를 내다보는 해방노예들의 열망을 억눌러야 했다. 그러나 1800년 10월 엄중한 법령으로 노동 규제를 강화하면서 그가 명확히 했듯이, 이는 루베르튀르가 지불해야 할 값비싼 대가였다. p370~1」

 

그런데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루베르튀르가 제안한 체제는 그가 맞서 싸웠던 구질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너무나 흡사했다. 그래서 예전의 농장주와 지주들은 노예제가 부활할 것이라며 기뻐하기도 했다.

 

1801년 11월에 루베르튀르는 1800년 법령을 엄격히 실시하고 이를 감시하는 새로운 법령을 발표 했다. 이로써 루베르튀르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가 지배하는 식민지는 사회 계서제, 강제 노동, 폭력 진압에 기초한 사회가 되었다. 그 포고령은 진정한 자유가 플랜테이션 경제와 공존할 수 있는 중도 노선을 찾아내는 데 루베르튀르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가 되었다. 몇 달 뒤, 루베르튀르를 박살내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함대가 몰려왔을 때, 그는 생도맹그의 경작자와 도시 주민들은 물론이고 장병들 사이에서도 자기를 위해 기꺼이 싸울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루베르튀르의 체제를 노예제와 혼동한 프랑스 사람들은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가 자유에 가한 많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해방노예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거로 돌아가기보다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88 」

 

물론 진짜로 어려운 것은 어둔 밤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보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다. 당연하게도 해방노예들의 이상과 희망은 하늘높이 닿아있었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경제적 자립 없이는 정치적 자유가 유지될 수 없었고, 왜곡된 플랜테이션 산업 구조에서 경제적 자립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농장 노예에서 농장 노동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지 해방노예들은 그들을 예속했던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길은 진정 그것 뿐 이었을까? 모르겠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한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보면 대안을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루베르튀르는 1798년 영국을 몰아내고, 1800년 자유유색인이 일으킨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에스파냐령 산토도밍고까지 점령했다. 루베르튀르가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정복한 것이다. 루베르튀르의 눈부신 군사적 성공과 생도맹그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독재로의 회귀에도 불구하고, 생도맹그에는 최후의 결전이 다가왔다. 프랑스를 장악한 나폴레옹이 식민지에 다시 노예제를 부활하려 했기 때문이다.

 

 

1802년 프랑스 군대가 생도맹그에 상륙했다. 보나파르트 정부는 생도맹그 원정을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흑인 야만주의에 맞서는 서양 문명인들의 십자군”으로 규정했다. 생도맹그의 아프리카 흑인들은 이제까지 다양한 세력과 연대와 대립을 거듭하며 투쟁했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오직 노예제 폐지와 자유였다. 자치권을 획득하려 했지만 식민지로서의 생도맹그에 대한 저항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이외의 방법은 없었다.

 

낯선 땅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고전을 거듭했지만, 1802년에 투생 루베르튀르를 항복시켰다. 이 항복이 프랑스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할 전염병이 창궐할 시기까지의 위장 항복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프랑스군의 계략에 넘어간 루베르튀르는 항복 조건과는 달리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803년 59세의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의 어느 감옥에서 뇌졸중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아이티공화국 독립의 아버지로 길이 남은 투생 루베르튀르지만 정작 자신은 아이티의 독립을 보지 못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억압했던 이율배반적 통치로 해방노예들의 불신을 초래하기도 했다.

 

루베르튀르에게 승리한 프랑스는 생도맹그의 흑인들이 고대하던대로 더 무서운 적을 만났다. 열병의 계절이 시작되자 그 섬에 적응되지 않은 프랑스 병사들 대다수가 황열병으로 쓰러졌다. 예를 들어 1803년 중반에 도착한 폴란드 연대는 열흘 만에 절반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여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던 생도맹그 흑인들이 가세했다. 생도맹그 흑인노예들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노예제 부활 법령이었다. 나폴레옹은 노예제 부활의 의도를 숨기려 교묘히 작업하고 모호한 수사를 썼지만 해방노예들에게 그 의미는 명백했다. 전쟁은 점점 잔인해졌고 양쪽 모두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1803년 11월,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생도맹그 흑인들의 승리였다. 그해 12월에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독립전쟁을 최후의 승리로 이끈 데살린은 원주민의 명칭을 복원하여 이 땅을 아이티라고 이름 붙였다. ‘아이티’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끌려오기 전의 이름을 되찾음으로서, 이 땅에서의 아메리카 제국주의/식민주의 자체를 거부하는 상징이 되었다.

 

 

아이티 독립혁명은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티 공화국의 역사는 독립과 함께 막 시작되었을 뿐이고 이후 200년의 역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미 예견하고 고심했듯,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속에 아이티 경제는 무너졌다.

 

1825년에 아이티 정부는 외교․경제 관계 수립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노예해방과 독립에 의해 농장주들이 상실한 것을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세계 어느 역사에 혁명을 성공시킨 대가로 그들이 패배시킨 구세력에게 배상금을 지불한 사례가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이티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 은행에 돈을 빌려야 했고, 그것이 20세기까지 아이티 경제와 정치의 발목을 잡았다.

 

왜 프랑스는 이렇게 가혹하게 아이티를 짓밟았을까? 프랑스뿐 아니라 주변 열강들이 모두 그랬다. 아이티의 독립이 “모든 백인 국가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티는 다른 국가들이 동일한 경로를 택하지 않도록 단념시키기 위해서 경제 실패의 결정적인 사례가 되어야만 했다. ‘성급한’ 독립의 대가는 참혹했다. 과거 식민지배 권력이었던 프랑스는 20년간의 봉쇄 이후인 1825년에야 무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고 아이티는 총 1억 5천만 프랑을 노예 손실에 대한 ‘배상금’으로 지불하는데 합의해야 했다. 이 액수는 당시 프랑스의 1년 예산에 거의 맞먹는 것으로서 얼마 뒤 9천만 프랑으로 줄어들었지만, 아이티의 경제적 성장을 끊임없이 저해하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했다. 19세기 말 아이티가 프랑스에 지불한 액수는 국가 예산의 약 80%에 해당했고, 1947년에야 마지막 지불이 이루어졌다. 2004년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면서 라발라스의 대통령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는 이렇게 강탈한 배상금을 반환하라고 프랑스에게 요구했지만 그의 권리주장을 프랑스의 위원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노예제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숙고하는 동안,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엄청난 금액을 환불해달라는 아이티의 요구를 묵살했다. 처음에는 노예로서 착취당하고, 그 다음에는 힘들게 획득한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이중으로 강탈당한 아이티의 요구를 말이다. p178~9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아이티공화국의 현대사가 비록 빈곤과 독재와 혼란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제국주의 ‘백인국가’들이 바랐던 대로 아이티 혁명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이티혁명사』의 저자 듀보이스는 아이티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아이티혁명의 충격은 엄청났다. 역사상 성공한 흑인 혁명의 유일한 사례로서, 아이티혁명은 18~19세기의 정치적․철학적․문학적 흐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아이티혁명은 온갖 피부색을 띤 모든 사람이 자유와 시민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써 영원토록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폐지의 핵심적 부분이었고, 따라서 인권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초를 닦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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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불사조 - 이슬람국가IS의 정체와 중동의 재탄생 글항아리 이슬람 총서 2
로레타 나폴레오니 지음, 노만수.정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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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 중에 하나가 이슬람세계이다. 전혀 몰랐던 세계여서 그렇기도 했고, 지금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매우 관용적인 세계이기도 해서 그랬다. 또 아주 오랜 기간 아주 넓은 지역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했던 강대국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슬람은 극단적인 자살테러나 일삼는 찌질한 세계가 결코 아니었다.

 

이번에 처음 치룬 세계사능력검증시험에도 IS 관련 문제가 나왔다. 현재 당면한 세계정세에 관해 네 문제나 나와 함께 시험 본 사람들이 모두 당황했다. 작년 겨울부터 흥미삼아 세계사 공부를 시작했는데 세계사도 한국사처럼 능력검정시험이 생긴다는 소식에 어차피 시작한 공부, 시험까지 가보자는 의견이 많아 시험을 목표로 공부를 했고, 지난 주말에 시험을 쳤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어렵게 나오지는 않았고 EBSi 강의 수준에서 알뜰히 공부하면 크게 낭패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다만 예상보다 시사 문제가 많고 까다로웠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분쟁인 난사군도, 크림반도를 둘러싼 분쟁, 브렉시트, 시리아 내전과 IS에 관한 것이었는데, 크림반도가 가장 어려웠지만, 가장 복합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지역은 역시 IS가 활동하고 있는 시리아 등의 중동지역이다.

 

우리 스타디 모임은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을 계기로 지난해 봄에 만든 것인데, 한국사를 끝내고 세계사까지 마쳤다. 각자 목표는 다르겠지만 시험이 최종 목표는 아니고 다들 늦게 해보는 공부가 재미있어서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세계사를 끝내고 일단 합의한 다음 목표는 철학사에 도전하는 것이다. 역사, 문학, 철학, 이렇게 인문학의 세 분야를 겉이나마 조금 핥아보려는 것이 1차 목표인 셈이다. 목적은? 우리 삶을 조금 더 잘 이해해 보려고? ^^;; 목표가 무엇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매주 모여서 발표도 하고 토론도 하는 것이 재미있고 활력도 되기 때문에 다 늙어(?) 이 공부를 하고 있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도대체 무엇에 홀려 저러나 쳐다보고, 반찬에 소홀하다며 조금씩 짜증을 내는 것도 간단히 무시하고서 말이다.

 

철학이라는 난해한 학문에 도전하기 전에 일단은 세계지리를 훑어보기로 했다. 역사를 하다보면 지리가 필수적인데, EBSi의 세계지리 강좌를 찾아보니 지도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지리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세계 각지의 기후부터 인종, 종교, 문화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어 세계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도 유익할 것 같다. 여하튼 추석이 지나고부터는 세계지리를 두 세 달 하기로 했고, 그 사이 막간을 이용해서 시험에 나온 IS에 관해 조금 파 보기로 했다. 참 알뜰하기도 하다. ^^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오늘 <이슬람 불사조> 란 책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읽게 된 배경;;;

 

 

2014년 6월에 쓰기 시작했다는 <이슬람 불사조>는 로레타 나폴레오니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중동 전문가가 IS에 관해 상세히 분석한 책이다. 이슬람세계의 분쟁은 날로 잔혹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2014년과 2016년의 상황은 또 다르지만 IS라는 조직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다른 테러리즘 단체를 물리치고 이슬람세계의 최대 조직으로 떠올랐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으로도 충분히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S의 탄생은 멀게는 7C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화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하고, 비교적 가깝게는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이 몰락한 중동지역에 서구열강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국경선을 인위적으로 긋는 과정을 짚어 보야 할 뿐 아니라 그 이후 민족과 종파 간의 갈등, 그 분쟁 속에 자라난 지하드조직 등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어 여기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기억을 조금 더 붙잡아 두기 위해 두서없이 메모를 해 두는 수준에서 만족하려고 한다.

 

 

 

 

1. IS는 왜 이라크와 시리아에 둥지를 틀었는가?

 

시험문제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왜 IS는 시리아에서 이렇게 큰 문제가 되고 있는가?

IS에 관한 명칭은 계속 변화해 왔는데 한때는 ISI 혹은 ISIS로 불리었다. IS란 이슬람국가라는 뜻이고, ISI는 이라크 내의 이슬람국가, ISIS는 이라크와 시리아 내의 이슬람국가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두 국가는 모두 정권이 권력을 남용하고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다. 두 정권 모두 시아파 정권인데 수니파를 탄압하고 차별하여 수니파 민중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주변의 수니파 국가들이 시아파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군을 지원하면서 내전이 심화되었고, 이 혼란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세력을 확장한 것이 IS이다. 강대국들은 모두 다 IS 척결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은 수니파를, 러시아는 시아파를 지원하면서 IS를 제거한다는 명목 아래 각각 반대파의 공격에 더 열을 올리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해서, 이 지역의 IS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IS는 매우 영리하게도 이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2. IS는 어떻게 성장했나?

 

IS의 효시는 알 자르카위이다. 알 자르카위는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수장이었다. 알 자르카위는 슈퍼테러리스트로 알려졌는데, 알 자르카위에 대한 신화는 다분히 미국이 만들었던 측면이 크다.

 

미국은 알카에다의 9.11.테러 이후 이라크를 공격했다. 사실 이라크는 알카에다와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미국은 이라크 침공 구실을 만들기 위해 알 자르카위의 전설을 만들었다. 알 자르카위를 알카에다와 이라크를 연결하는 고리로 이용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면서 이라크는 권력의 진공상태가 되었다. 여하튼 알 자르카위는 2006년 미국의 공습에 의해 사망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IS를 만든 것은 누구인가?

 

IS의 실질적 창시자는 알 자르카위 아래에서 성장한 알 바그다디이다. 2010년 알 바그다디가 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의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그 명칭을 이라크 이슬람국가 ISI라고 바꾸었다. (이전에도 이렇게 불린 적이 있었다.) 알 바그다디는 점차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알카에다와 거리를 두면서 동시에 이라크의 시아파 정권이 수니파 주민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시아파를 공격 표적으로 삼아 종파 간 갈등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아직까지 ISI는 미약했고 이라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2011년 알 바그다디는 시리아 내전에 눈을 돌렸다. 시리아는 시아파 정권과 수니파 반군이 내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시아파를 지원하는 중동국가들과 수니파를 지원하는 중동국가 그리고 시아파를 지원하는 러시아와 수니파를 지원하는 미국 사이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다. ISI는 이 대리전에 뛰어들어 주변국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전쟁 기술까지 연마했다.

 

3. IS는 다른 테러리즘 조직과 어떻게 다른가?

 

IS는 알카에다에서 시작되었지만 알카에다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알카에다는 머나먼 곳의 미국과 싸우느라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영토 자체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알 바그다디는 “중동 지역 안에 거대하고 강력한 영토라는 기반이 없으면 투쟁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알 자르카위의 신념에 공감했다.”

 

알 바그다디의 꿈은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배하는 부패한 소수의 엘리트들 곧 시아파들을 상대로 정복 전쟁을 벌여서 바그다드 칼리프 국가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수 십 년간 지속된 전쟁에 대한 영구적인 해법에 목말라했다. 기존의 테러리즘 조직들은 이런 무슬림 민중의 요구에 무관심했다. 단지 내전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고 이권을 챙기는 것에 급급했다. 겉으로는 이슬람국가를 외쳤지만 실제로는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어떠한 청사진도 노력도 없었다.

 

그런데 IS는 진짜 이슬람국가, 그것도 7C 정통 칼리프 국가와 같은 이슬람 칼리프 국가에 대한 비전과 계획 그리고 실행력을 가지고 있었다.

 

IS는 정유지대를 확보하고 재정적 자립을 구축했으며 획득한 자원을 수니파 부족사회와 더불어 관리했다. 재정자립은 IS 대원들의 부패를 막을 수 있었고 주변국들의 지원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수행해 나갈 수 있게 했다. IS는 정복지에 전기를 연결하고 학교를 만들고 예방접종까지 실시하며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잔인한 자살 테러를 일삼는 IS지만 정복지에서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정복지 주민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격한 살라피즘을 신봉하지만 누구나 살라피즘으로 개종하기만 하면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아랍 지배자들의 부패에 지친 무슬림들에게 IS가 약속하는 이슬람 국가는 하나의 이상향이 되고 있는 것이다.

 

4. 살라피즘이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가 창시한 이슬람 종파이다. 와하브? 그렇다면 와하비즘과 어떤 관계일까? 살라피즘과 와하비즘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어 보이는데, 대략 여러 글들을 종합해 보면 살라피즘이 좀 더 보편적인 의미인 것 같다. 살라피즘은 초기 이슬람 지도자들의 가르침인 코란과 순나를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따르는 것을 추구한다. 즉 초기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근본주의적 이슬람 개혁운동이다. 18C에 압둘 와하브가 주창한 이 운동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사우드 부족과 손을 잡으면서 와하브 운동으로 퍼져나갔다. 와하브의 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사우드 부족이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하면서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의 살라피즘이 사우드 부족과 만나면서 와하비즘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현대의 살라피주의자들은 와하비즘을 경멸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살라피즘은 더 순수한 의미를 지니면서 알 카에다와 같은 무장단체를 낳았다. IS가 신봉하는 것 역시 살라피즘이다.

 

5. IS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IS의 목표는 중동의 재탄생이다. 즉 IS는 중동을 사이크스-피코 협정 이전으로 되돌리려 한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1916년 서구 제국주의가 중동을 분할하기 위해 비밀리에 맺은 협정이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자국의 이익에 따라 분할하면서 중동에 자의적인 국경선을 그었다. 영국은 현재의 요르단과 이라크 지역을, 프랑스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을, 러시아는 터키 동부 지역을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이 협정은 영국의 벨푸어 선언과 함께 이후의 수많은 중동 문제를 야기한 화근이었다. 아랍은 무엇보다 종교적 종파와 부족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한 채 지도를 제멋대로 그려버린 서방은 어쩌면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IS는 유대인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 것처럼, 중동지역에 서구가 멋대로 그린 국경선을 없애고 과거 이슬람 칼리프 국가의 영토에 근거하여 이슬람 수니파를 위한 칼리프 국가를 세우려하고 있다.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에 획득한 영토가 자신들의 정당한 땅이라는 주장이다.

 

칼리프 칭호를 획득한 알 바그다디는 무함마드의 권위를 계승하여, 칼리프의 이름으로‘현대 중동의 재탄생’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이 무슬림들이 IS를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IS는 단순히 과격한 테러조직이 아닌 것이다.

 

6. 왜 IS에 가담하는가?

 

중동지역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태어난 무슬림들도 IS에 가담하고 있다. 서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 자생적인 테러리스트들이다. 서구에서 성장한 그들이 왜 전근대적인 테러집단에 열광하는 것일까?

 

IS에 가담하는 행위는 중동 지역에서 고통 받고 있는 무슬림 형제자매들을 돕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동기는 “중동에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세우고 (물론 어느 정도 인종청소를 벌인 뒤겠지만) 인종차별과 종파갈등이 없는 현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대업에 참여한다는 것을 더없이 귀한 기회”로 여기기 때문이다. “부패하지도 않고 부패할 수도 없는 국가, 진정한 형제애로 가득한 국가, 서구 또는 서구화한 무슬림 여성들이 남자를 유혹하지 않는 사회, 명예를 고귀하게 여기는 국가, 신의 명령에 철저히 부합하는 현대국가”를 기대하면서.

 

 

 

<이슬람 불사조> 의 저자는 이슬람국가가 무슬림에게 가지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유대인에게 가지는 의미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 없이 IS를 단순한 테러단체로 간주하는 한 서구세계는 결코 중동문제와 테러리즘을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고 우려한다. 그렇다면 중동문제의 해법은 IS뿐일까?

 

9.11.이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에 권력 공백이 생기고 중동 각지가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면서 중동의 민중들은 서구적 민주화 운동 즉 ‘아랍의 봄’과 극단적 테러리즘인 ‘IS'를 모두 경험했다. 그러나 아랍의 봄은 실패했고 IS는 승승장구 중이다. 하지만 테러리즘이 해법일 수도 없고 해법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중동에 제3의 길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간단히 ’교육, 지식, 그리고 정치에 대한 이해‘를 제안한다. 물론 글자 그대로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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