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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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야 겨우 『자기만의 방』을 읽었다. 단숨에 읽고 나니 왜 이 책을 그토록 읽기 어려워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오래전부터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번번이 팽개쳤던 책이다.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어려움은 버지니아 울프 자체에 대한 어려움으로 작용해 나는 2년 전에야 처음으로 울프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댈러웨이 부인』은 처음에는 우려대로 힘들었지만 곧 빨려들 수 있었다. 내친김에 『항해』도 읽었지만, 『자기만의 방』은 그때도 비껴갔다.

 

이번 달 우리 독서회의 주제가 페미니즘이고, 『자기만의 방』이 선정 도서의 하나가 되었다. 두 주간 읽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와 『악어 프로젝트』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현란한 이론의 나열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독기가 더해져 지레 질리게 만들었다. 제목에서 보이듯이, ‘여성 혐오’에 대항한 주체의 행위가 ‘혐오’라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악어 프로젝트』는 프랑스 만화인데,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한 표현 방식이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모두 일어나는 일이지만 눈앞에 직접적으로 그려놓은 그 그림들은 남들 앞에서 펴놓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 뭔가 꺼림칙했다. 이런 느슨한 의식으로는 페미니즘의 ‘페’자도 꺼내서는 안 되는 걸까?

 

1929년에 출간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물론 같은 여성도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이고 날카로운 작품은 아니다. 약 90년 전의 작품이니 아무리 보수적인 여성이라 해도 이 책을 읽고 페미니즘 투사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1929년에는 어땠을까? 아쉽게도 당대에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울프의 ‘소설’들은 이미 당대에 “혁신적인 기법으로 내면 의식을 섬세하게 그려낸 독창적 작품들”로 평가되었지만, 『자기만의 방』은 ‘가벼운 문학적 한담’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자기만의 방』이 페미니즘 작품의 대표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페미니즘 비평이 등장하면서 부터다. 이후 페미니즘의 발전과 함께 『자기만의 방』은 찬사뿐만 아니라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 책의 위상은 굳건하다. 나처럼 페미니즘에 무지한 여성도 페미니즘하면 『제2의 성』과 더불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책이니 말이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에세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소설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은 사실 강연문이다. 울프가 대학 강연에서 읽은 두 개의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강연의 주제는 ‘여성과 픽션’ 이다. 언뜻 내용을 짐작하기 쉽지 않은 이 주제를 놓고 울프는 강연 첫머리에 먼저 결론을 던져 버린다.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p10”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사고의 궤적을 여러분 앞에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고 자유롭게 개진할 것입니다. p11"

 

실제 강연이 있었던 1928년은 세계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영국의 여성이 투표권을 획득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을 때였으며, 영국의 기혼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허용된 것도 약 50년 전의 일이었다. 이런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어떤 시련의 역사가 있었을 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울프는 16세기에 여성 셰익스피어는 완전 불가능했다고 단언한다. 울프는 가정을 통해 이 주장을 펼쳐나가는데 그 가정이 아주 흥미롭다. 울프가 셰익스피어의 누이로 가정한 ‘주디스’는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누이, 이를테면 주디스라 불리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p72"

 

오빠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주디스는 몰래 가출해 런던의 극장을 찾아가지만 배우 감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자살을 했을 것이라고, 울프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주디스의 이야기는 가정부터 틀렸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한 여성이 셰익스피어의 재능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는 교육받지 못하고 노동하며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재는 영국의 색슨족이나 브리튼족에서 태어난 적이 없으며 오늘날 노동 계층에서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천재가 어떻게 여성들 가운데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p75~6“

 

남성의 지배 아래,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면에 있어서 여성들은 노예보다 나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여성들은 셰익스피어가 받았을 라틴어와 문법원칙, 논리학 등을 배울 수 없었다.

 

17세기 일부 귀족부인들이 시를 쓰기 시작한 이후,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영국 최초의 여성 작가가 탄생했다. 에이프라 벤(1640~1689)은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이 단순히 어리석음이나 분열된 마음 때문도 아니고, 돈을 벌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18세기에는 수 백 명의 여성들이 번역이나 소설로 용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무렵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데, 내가 만일 역사를 다시 쓴다면 십자군이나 장미전쟁보다 그것을 더 충실하게 묘사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p100”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가 등장했다. 하지만 오스틴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은 여성으로서의 제약 때문에 작품 속에 자신의 분노를 드러냄으로써 작품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오스틴조차도 거실에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으며 작품을 몰래 썼고, 혼자서는 여행을 하지도 못했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있었다면, 온갖 잡다한 일과 노동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돈이 있었다면,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에 자신의 분노를 폭발하지 않고 작품을 훨씬 훌륭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울프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을 반복해서 읽어보고 그 안의 경련과 분노를 주목한다면, 그녀가 결코 그 자신의 재능을 흠 없이 온전하게 표현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고요히 써야 할 곳에서 분노에 싸여 쓸 것이고, 현명하게 써야 할 곳에서 어리석게 쓸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등장인물에 대해 써야 할 곳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쓸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과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비틀리고 꺾인 그녀가 젊은 나이에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p107”

 

울프는 ‘돈’에 대해 지나치게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예상되는 비판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위대한 시인들은 모두 부유했다고. 다른 이의 입을 빌려 “시적 재능이 내키는 대로 바람처럼 불어 가서 빈자에게나 부자에게 똑같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거의 진실성이 없다.p162” 고 했다.

 

“ ‘요즈음뿐만 아니라 과거 이백 년 동안에도 가난한 시인들은 아주 작은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 영국의 가난한 집 아이들은 위대한 작품을 산출하는 지적 자유로 해방될 희망이 아테네 노예의 아들만큼이나 없는 것이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p163“

 

21C인 지금도 여성의 경제적 비 자립은 여성의 가장 큰 굴레이다. 물론 경제적 자립을 한 여성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고, 여성의 재능에도 직접적 제한이 가해지는 일은 훨씬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태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솔직히 말해 이혼을 고려하는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경제적 어려움이다. 결혼과 함께 경제활동에서 물러난 여성들이 결혼 전의 일을 되찾는 것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단순히 먹고 살기도 두려운 판에 돈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떨까? 떠오르는 분이 있다. ‘밥과 김치’라는 메모로 세간을 가슴 아프게 했던 작가 최고은이다. 스승 김영하는 제자가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여하튼 젊은 여성 작가는 가난 속에서 고독하게 죽었다.

 

가난은 비단 여성에게만 굴레는 아니다. 가난은 남성에게도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만든다. 누구나 다 알고 누구다 다 이야기하듯 가난은 대학생들을 강의실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편의점과 마트, 건설현장에 붙들어 놓는다. 울프가 말하는 ‘여성’이란 비단 생물학적 여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을 쥐거나 그 돈과 권력을 상속받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의미에서 ‘여성’ 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분노가 직접 표출된 소설이 나쁜 소설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지적인 작가만이 훌륭한 작가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가 쌓아온 지식을 잘 흡수하고 그 위에 무언가를 쌓을 수 있는 사람이 타고난 천재보다 더 깊이 있고 더 광범위하게 사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수 천 년에 걸쳐 집적된 지식을 토대로 거인의 어깨에 올라앉은 난쟁이가 된 것이 아닌가?

 

남녀가 평등한 시대에 ‘돈과 자기만의 방’은 이제 여성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흑수저 논쟁이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면 노력과 능력 운운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다만 ‘돈과 자기만의 방’이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의 사회적 차별은 여전하고 그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가난한 여성은 중첩된 차별 아래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를 푸는 방법은 남성으로부터 무엇을 되찾아와 여성에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로부터 잉여를 되찾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먼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역시 페미니스트가 되기는 힘든가 보다. 기본 갈등은 성차별이 아니라 계급차별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남성과 여성의 갈등, 여성 혐오와 남성혐오 등은 계급갈등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위험이 다분하다.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남성이 가난한 물적 자산을 놓고 싸운다고 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 열쇠는 밝은 곳이 아니라 어두워 힘들더라도 잃어버린 곳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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